정치(政治)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박(切迫)하게 피부로 느끼는 시기입니다.
본인의 장점보다는 상대방의 약점만을 부각시키는 네거티브(nagative)가 판치고,
국민에 패악(悖惡)질을 한 자들을 옹호하며,
비난(非難)과 비하(卑下)를 업으로 사는 자들은 현명한 국민들의 변별력(辨別力)이 있기에
스스로 나락(奈落)에 빠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정치를 한다면... 왜? 해? 라는 의문을 갖게되기도 하지만,
나름의 영향력을 성장시키다보면 政治(정치)로 향하고 싶어지는가 봅니다.
하지만 자신의 엄청난 흠은 보지 못하고 남의 티끌을 나쁘다 외치는 자들을 볼작시면
인간적인 측은(惻隱)함을 넘어 그들에 대한 환멸(幻滅)을 느끼게 됩니다.
근대사를 보면 닫힌 권력(權力)을 탐하느라 기울어진 국력(國力)으로 인하여
외세(外勢)에 의한, 왜세치하(倭勢治下)의 통탄(痛歎)까지 선량한 선조들의 몫이 되었고,
진정한 애국(愛國)을 행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은 한없이 천대(賤待)하면서도
일제강점기 민족반역행위들은 포장된 반공(反共)으로 무고한 국민들까지 학살(虐殺)하며,
부정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눈가림을 획책(劃策)했습니다.
왜(倭) 놈의 충직한 개 역할을 했던 자들이 득세(得勢)했던 독재(獨裁)에 이르러,
우상화(偶像化)된 땡 뉴스로 '민주(民主)를 외치는 양민(良民)의 핍박(逼迫)'을 덮으며 행해진
지속된 세뇌(洗腦)에서 아직도 덜 깨어난, 너무도 암울한 근대사를 살고 있습니다.
주(主)된 민족반역자들이 행한 “독재(獨裁)”에의 저항(抵抗)에 안일(安逸)했던
다수(多數)로 인하여 반세기 이상을 그 여파(餘波)의 잔재(殘滓)들이
너무도 큰 고통(苦痛)이 되고, 갈등(葛藤)이 되고 있다는 것이 이 시대의 뼈저린 슬픔입니다.
더구나, 거기에 뿌리를 둔 무리들이 사리사욕(私利私慾)을 탐(貪)하느라 국고(國庫)를 거덜내고,
악의(惡意)적인 기업에 휩쓸리고, 일부 법(法)을 집행하는 자들까지 하수인 격으로 거들며,
이 나라의 정의로움을 그 뿌리까지 더럽혀 왔습니다.
헌데 오늘날까지 국민의 뜻을 저버리는 법(法)들이 보여진다는 것에 분노를 느낍니다.
아직도 그런 흐름을 옹호하거나 동조했던 자들이 반성을 모르는 철면피(鐵面皮)로
그 계보(系譜)를 이으며, 오늘도 출사표를 던지고 있다는 현실에 통탄(痛嘆)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똑똑한 사람, 일 잘하는 사람을 뽑아야한다는 정치적 신념이 오늘 날,
이 나라의 현실에서는 그 기준이 바뀌어야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삐툴어진 역사를 법(法)으로 바로 세우는 것이 우선입니다.
진정한 평화와 정의(正義)를 바로 세우는 것이 우선입니다.
역적(逆賊)들과 그들을 옹호하는 후손들이 정치에 앞장 설 수 없도록 깨어나야 합니다.
철학자 플라톤(Platon)은 “정치에 무관심하면 가장 저급한 인간의 지배를 받는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뼈아픈 과거를 경험했기에 이젠 선량한 국민들이 엄격한 기준으로
정치(政治)에 적극 참여해야할 때 인듯 합니다.
정치는 이해관계를 조정/통제하며 목적한 바를 실현하는 것이랍니다.
한 곳을 바라보는 듯 하지만 삼각대처럼 서로 대립하는 鼎峙(정치, 솥의 세발처럼 대립)요.
휩쓸리지 않게 일정한 거리를 두어 定置(정치, 일정한 장소에 놓아둠)하는 것이 좋고,
때로 몰염치하여 색정에 빠져 이성을 잃은 상태로
情痴(정치, 색정으로 이성을 잃음)하는 자도 있지만,
바른 자는 그 과정에서 여러 감정을 자아내는 흥과 품위를 갖춘 멋을 살려
情致(정치, 여러 가지 감정의 흥겨움)합니다.
이에 국민은 정교함과 촘촘함으로 지켜보며, 精緻(정치, 정교 촘촘함)해야 할 것입니다.
위의 동영상은 강원도 선거관리위원회 주최 <미래 유권자 한마당 페스티벌2018>에서
아름다운 선거의 가치를 전파하고, 선거의 중요성과 의미를 되새기고자 참여한
청소년들의 댄스실력입니다.
소프라노 민은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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