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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가 구이(九夷) 의 간악한 오랑캐를 다 정벌함 - [삼국사기 내용 중복]
동사강목 제3상 |
갑신년 신라 지증왕 5년, 고구려 문자왕 13년, 백제 무령왕 4년(북위 선무제 정시(正始) 원년, 504) |
하4월 고구려가 위(魏)에 사신을 보냈다.
○ 신라가 처음으로 상복(喪服)의 제도를 반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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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구절을 보면 저수량(褚遂良) 개소문(연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였는데 구이(九夷)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개탄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는 일은 매우 부도덕하고 천륜에 반하는 사건인데 그런 무모한 짓은 오랑캐인 구이(九夷)에서조차도 용납되지않는 대역죄라고 해석됩니다
동사강목 제3하 |
갑진년 신라 선덕여주 13년, 고구려 왕장 3년, 백제 왕 의자 4년(당 태종 정관 18, 644) |
춘정월신라ㆍ고구려ㆍ백제가 아울러 사신을 보내어 당(唐)에 조빙하였다.
(중략)
추9월고구려 개소문이 당에 백금(白金 은(銀))을 바쳤으나 조명으로 물리치고 그 사신을 가두었다.
○ 신라 장수 김유신(金庾信)이 백제를 공격하여 가혜(加兮) 등 7성(城)을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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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문장을 보게되면, 선조때 왜적들이 조선의 왕자들을 돌려보내지않아 왜적을 토벌해야
한다고 성토하고 있는데, 그 왜적이 구이(九夷)와 팔만(八蠻)이라고 분명히 명시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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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좌도 관찰사 성영(成泳)이 치계하기를,
“선릉과 정릉을 봉심하니 선릉은 광중(壙中)이 이미 비어 있고 정릉은 염습(斂龒)한 옷은 없어지고 옥체(玉體)는 광중에 가로 놓여져 있었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궐정(闕庭)에 나아가 백관을 거느리고 거애(擧哀)하였다. 이어 대신들에게 하교하기를,
“경략은 매번 왜적이 왕자를 돌려보내기를 기다린다는 핑계로 적을 치지 않고 놓아 주었다. 당당한 황제의 위엄으로 도리어 왜적에게 강화를 구하여 끝내는 왜적들로 하여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가게 하였으니, 우리 나라 군신들은 산들 무엇하겠으며 황제의 위엄을 손상시킴도 심하지 않은가. 이제 자문을 하나 작성하여 급히 관원을 보내어 경략에게 치사(致辭)하기를 ‘전일 여러번 존교(尊敎)를 받았었는데 「기필코 왕자를 돌려보내게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왕 통판(王通判)이 왔을 때에도 반복해서 글로 보여주기를 「왕자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반드시 진병으로 적들을 초멸시킬 것이다.」 하였다. 우리 나라의 군신들은 오로지 이 약속만을 믿고 있었는데 지금 왜적은 왕자는 돌려보내지 않고 자기들의 소원을 이루고 돌아갔으니 우리가 전일 바라던 것은 틀려지고 말았다. 원하건대 전일의 말대로 급히 진병하여 적을 초멸함으로써 위는 황조(皇朝)의 위엄을 펴고 아래로는 우리 나라의 원수를 갚아달라. 그리고 이번의 일거(一擧)는 사방에 있는 이민족들이 바라보는 바이다. 만일 악한 짓을 한 자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가 다시는 징계를 받지 않게 된다면 권선 징악(勸善懲惡)의 도리에 위배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구이(九夷)와 팔만(八蠻)들이 장차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과거 영락(永樂) 연간에 안남(安南)의 적신(賊臣)이었던 여계리(黎季犛) 등은 자기들끼리 난리를 일으켰는데도 성조 황제(成祖皇帝)가 장수들에게 명하여 세 차례나 정벌하게 해서 군현(郡縣)을 설치하기까지 하였는데 하물며 무도한 왜적들에 있어서이겠는가.’라고 하라. 대개 이러한 뜻으로 글을 잘 지어 자문을 보내라. 그리고 우리의 말이 옳으면 잘못은 저쪽에 있는 것이니 저들은 반드시 부끄러워하는 생각을 가질 것이다. 속히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대신이 회계하기를,
“성 상의 분부를 받들고 신들은 매우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슴니다. 가령 왜적이 중국 장수의 약속대로 왕자와 배신들을 돌려보낸다 하더라도 그들이 황제의 위엄을 손상키기고 우리 나라에 애통을 끼친 것이 심합니다. 하물며 왕자를 돌려보내지 않고 포로로 잡혀 있는 자녀들을 풀어 보내지 않는 데이겠습니까. 그들이 거만 패역하여 황제의 조정을 모욕하고도 조금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으니, 죄를 성토함에 어찌 할 말이 없겠습니까. 이러한 내용으로 자문을 작성하여 경략과 제독에게 보내는 것이 옳겠습니다. 그러나 사례하는 자문도 그만둘 수 없습니다. 먼저 사례하는 자문을 올리고 난 뒤에 이 자문을 올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례하는 자문과 토벌을 청하는 자문을 동시에 작성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21 집 693 면
【분류】 *왕실-궁관(宮官) / *왕실-종친(宗親)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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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東夷)의 풍속은 머리를 자르고 문신(文身)하며, 이마에 무늬를 새기고 발이 교차한다[雕題交趾]고 했다. 그런데 고려는 기자(箕子)를 봉했을 때부터 이미 농사와 누에치기의 이로움을 가르쳤으므로 마땅히 의관(衣冠)의 제도가 있었을 것이다.
한(漢) 나라 역사에, 그 공회(公會)할 때의 의복은 다 비단에 수놓고 금과 은으로 이를 장식하되, 대가(大加)ㆍ주부(主簿)는 책(幘)을 쓰는데 관(冠)과 같고, 소가(小加)는 절풍(折風)을 쓰는데 고깔[弁]과 같다고 하였으나, 이것이 어찌 상(商 중국 고대 은 나라)이나 주(周)의 관(冠)과 고깔의 제도를 모방해서 그렇겠는가? 당(唐) 나라 초에 차츰 오색 옷을 입고, 백라관(白羅冠)을 쓰고, 혁대(革帶)에는 다 금이나 옥으로 장식하였더니, 그러니 다만 변발(辮髮)을 풀고 좌임(左袵)을 없앴을 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관직명이 일정하지 않고 조정에서 입는 옷과 집에서 입는 옷이 혹, 우리 송의 제도와 다른 것이 있으므로, 이를 들어 관복도(冠服圖)를 그린다.
[주석] 이마에 무늬를 새기고 발이 교차한다[雕題交趾]: 오랑캐의 풍속을 말한다.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동이(東夷)는 단발문신(斷髮文身)이라 했고, 남만(南蠻)은 조제교지(雕題交趾)
라 하였다.
<예기 왕제>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東方曰夷, 被髮文身, 有不火食者矣. 南方曰蠻, 雕題交趾, 有不火食者矣. 西方曰戎, 被髮衣皮,有不粒食者矣. 北方曰狄, 衣羽毛穴居, 有不粒食者矣.
[ 동방은 이(夷)라 한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문신을 하며, 불로 음식을 지어먹지 않는 자가 있다. 남방은 만(蠻)이라 한다. 이마에 문신을 새기고 다리를 엇갈리게 하고 다니며, 불로 음식을 지어먹지 않는 자가 있다. 서방은 융(戎)이라 한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가죽으로 옷을 지으며, 쌀밥을 먹지 않는 자가 있다. 북방은 적(狄)이라 한다. 짐승의 깃과 털로 옷을 짓고 동굴에서 실며, 쌀밥을 먹지 않는 자가 있다.]
1. 동이(東夷)의 풍속은 머리를 자르고 문신(文身)하며, 이마에 무늬를 새기고 발이 교차한다[雕題交趾]고 했다.
2. 우리 송 나라에 이르러 해마다 신사(信使)를 보내므로 자주 왕이 옷을 내려 점차 우리 중국풍에 젖게 되고, 천자의 총애를 입어 의복의 제도가 크게 갖추어지고 우리 송의 제도를 따르게 되었다. 그러니 다만 변발(辮髮)을 풀고 좌임(左袵)을 없앴을 뿐만이 아니다.
발이 교차한다는 말은 다리를 엇갈리게 히고 다닌다는 뜻이다. 몸에 문신과 이마에 무늬를 새기고 머리를 짧게 자르거나 변발을 했으나, 후에 중국풍을 따르면서 의복 제도가 갖추어지고 변발(辮髮)을 풀었다고 했다. 자임( 左袵 ) 이란 옷깃을 왼쪽으로 여밈. 중국 변방 민족들의 옷입는 풍습을 비하(卑下)하는 말로 쓰였다고 한다.
이런 모습이 과연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하고 모든 것은 땅에 뿌리박고 있으므로 천성이 유순하고 도로써 다스리기 쉬워서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라고 알려진 동이(東夷)족의 모습일까?
신체발부수지부모 [身體髮膚受之父母] 사상 즉,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다'라는 뜻으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여기는 조선인의 모습과는 천양지차의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몸과 이마에 문신을 하고 의복제도가 없던 전형적인 왜(倭)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동이(東夷)는 동왜(東倭)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문장이다
- 만이(蠻夷)는 미개한 만족(蠻族)인 일본과 동이족(東夷族)이다 -
간이집 제4권>> 사행문록(四行文錄)>> 재차 병부(兵部)에 올린
대사마(大司馬 병부 상서(兵部尙書)) 합하(閤下)에게 삼가 아룁니다.
과 군(寡君)이 모등(某等)을 보낸 것은, 천조(天朝)에서 혹시라도 왜적의 기세가 아직도 꺾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리(將吏)들이 최근에 보내온 보고를 모두 검토한 다음에 사유를 갖춰 주문(奏文)을 올리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하부(下部)에 내려져 배당(配當)되었을 때에는 모등 역시 하집사(下執事)에게 삼가 글을 올려 자세한 내용을 알려 드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물러나 삼가 생각해 보건대, 천조에서 소방(小邦)의 사태를 알게 된 뒤로부터, 자비로운 마음으로 멸망 직전의 나라를 보존시켜 주려고 하고, 의리에 입각하여 난폭한 왜적을 정벌하려 했던 그 거조야말로 보통 이상의 것으로서 털끝만큼도 미진한 점이 없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과 관련하여 집사(執事)께서 전일하게 관심을 기울여 주시며 강력하게 품달하고 복주(覆奏)해 주셨는데, 이에 대해서는 소방의 군신(君臣)들만 감격스럽게 여길 뿐만이 아니라 천하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니 왜적의 기세가 아직도 꺾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상세히 알게 되셨다면, 어찌 오늘이라고 해서 예전처럼 조처해 주지 않으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칠이 지나도록 이에 대한 확답을 받지 못하고 보니, 나름대로 안타까운 가운데 두려운 마음이 들면서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 번째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왜적의 형세가 이미 쇠퇴했다는 보고가 최근에 조정에 들어왔는데, 모등이 나라를 떠나온 것은 바로 그 전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모등의 발언이 그 보고와 상응하지 않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모등이 지극히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 것은 다시 군대와 양식을 청하는 것이다. 그런데 혹시라도 의심을 받을까 해서 왜적의 기세가 성대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왜적이 강화(講和)를 요청하는 그 뜻을 보면 봉호(封號)와 관련된 일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들이 장수를 보내 표문(表文)을 바치게 하는 것도 다른 속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모등이 이런 발언을 하다니,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네 번째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만이(蠻夷)들 자신이 서로 공격해서 멸망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중국의 근심거리가 되기에는 원래 부족하다고 하겠다. 그러니 그런 일과 관련해서 모등의 발언에 대해 일일이 대답해 줄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등은 이에 대해서 차례로 해명하는 말씀을 드려 볼까 합니다.
[주D-001]만이(蠻夷) : 미개한 만족(蠻族)인 일본과 동이족(東夷族)인 조선이라는 뜻이다.
조례(皁隷) |
여러 만이(蠻夷)의 나라들은 이마에 무늬를 새기고 다리를 꼬아 앉고 머리를 풀고 몸에 문신을 하고, 승냥이와 이리와 같이 살고 사슴과 더불어 논다 하니, 어찌 또 관원과 서리를 두는 법을 알겠는가? 오직 고려는 그렇지 않아, 의관(衣冠)과 예의(禮儀)며 군신 상하에 찬연히 법도가 있어서 그렇게 서로 접(接)한다.
안으로 대(臺)ㆍ성(省)ㆍ원(院)ㆍ감(監)을 두고 밖으로 주(州)ㆍ부(府)ㆍ군(郡)ㆍ읍(邑)을 두어 직(職)을 나누고 관리를 뽑아 일을 맡기고, 위에서 그 강목(綱目)만을 들 뿐이고, 아래에 있는 자는 번다스럽고 어려운 일을 맡으니, 비록 나라의 일이라도 간략하고 이치에 닿아, 적을 치고 도적을 잡으려 백성을 부르면, 다만 편지(片紙) 몇 자면 백성이 모이는 기한을 어기지 않는다. 고로 중서 급사(中書給事)중추 당관(中樞堂官)으로부터 그 민장(民長)에 이르기까지 감히 태만할 수 없다. 그 나라의 관리(官吏)를 길에서 만나면 반드시 허리를 구부려 무릎 꿇고 절하고 공경을 한다. 언사(言事)가 있으면 무릎걸음으로 구부리고 나아가서 손을 위로 하고 얼굴을 낮추어 듣고 이를 받드니, 오랫동안의 중국의 영향이 없으면 능히 이렇게 될 수 있겠는가? 이제 이직(吏職)으로부터 구사(驅使)에 이르기까지 아울러 아래에 그림을 벌여 그린다.
다른 문장을 보게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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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통사(平壤通事) 주양선(朱揚善)이 요동으로부터 조서를 등사하여 가지고 와서 계하니, 그 조서에 이르기를, “짐 은 생각하건대, 하늘이 덮고, 땅이 실어서 만물을 생육하는 것으로서 덕을 삼고, 제왕이 통솔하고 제어하여 〈백성을〉 편안히 기르는 것으로서 마음을 삼으니, 순종하는 자를 무애(撫愛)하고, 거역하는 자를 억제하는 것은, 내외가 없는 한 천하임을 보이는 것이다. 또 이적(夷狄)이 환난을 일삼는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서경[書]》에 이르기를, ‘만이(蠻夷)가 화하(華夏)를 어지럽게 한다.’하였고, 《시경[詩]》에는 ‘융적(戎狄)을 정벌하였다.’하였으며, 한나라와 당나라로 내려오면서도 누차 침범과 모욕을 당하였고, 송나라에 이르러서는 그 화가 더욱 심하였던 것이다. |
흠차 내사(欽差內史) 황영기(黃永奇)·최연(崔淵) 등이 황제의 수조(手詔)를 받들고 오니, 임금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선의문(宣義門) 밖에서 맞이하여 앞을 인도해서 수창궁(壽昌宮)에 이르러 조서(詔書)를 듣고 예(禮)를 거행하였다.
“1. 지난번에 절동(浙東)·절서(浙西)의 백성 중에서 불량한 무리들이 그대를 위하여 소식을 보고하기에, 이미 수십 집을 죽였소. 그 고려의 산천 귀신이 어찌 그대가 화단(禍端)을 만들어 재앙이 백성에까지 미치게 될 줄을 알지 못하겠는가? 이것이 흔단(釁端)을 일으킨 것의 한 가지요,
1. 사람을 보내어 요동(遼東)에 이르러 포백(布帛)과 금은(金銀)의 종류를 가지고 거짓으로 행례(行禮)함으로써 사유(事由)로 삼았으나, 마음은 우리 변장(邊將)을 꾀는 데 있었으니, 이것이 흔단(釁端)을 일으킨 것의 두 가지요,
1. 요사이 몰래 사람을 보내어 여진(女眞)을 꾀여 가권(家眷) 5백여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몰래 건넜으니,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없었소. 이것이 흔단(釁端)을 일으킨 것의 세 가지요,
1. 입으로는 신하라 일컫고 들어와 조공(朝貢)한다 하면서도, 매양 말을 가져올 때마다 말 기르는 사람[豢馬]으로 하여금 길들여 보게 하니, 말은 모두 느리고, 또한 모두 타서 피로한 것들이니, 업신여김의 한 가지요,
1. 국호(國號)를 고치는 일절(一節)은 사람을 보내어 조지(詔旨)를 청하므로, 그대의 마음대로 하도록 허용했는데, 조선(朝鮮)을 계승하여 그대가 후손이 되게 하였소. 사자(使者)가 이미 돌아간 후에는 오래도록 소식이 없으며, 도리어 흔단(釁端)을 만드니 업신여김의 두 가지이다.
아아! 원(元)나라 말기로부터 중원(中原)이 난리가 나서, 백성들이 병화(兵禍)를 입게 되었소. 영웅이 여러 곳에 웅거하여 전전(轉戰)하면서 살상(殺傷)한 지가 거의 24년이 되었는데, 짐(朕)이 이미 이를 평정하였소. 그러나 중국이 이미 평정되매, 사방의 오랑캐가 변흔(邊釁)을 일으키고 조공(朝貢)하지 않는 것은 장수에게 명하여 정토(征討)하게 한 지가 또한 2년이나 되었소. 만이(蠻夷) 가 복종[率服]하고 해외(海外)의 여러 섬나라도 와서 조공(朝貢)하는데, 근래에 나라 안에서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발생했으므로, 금년 봄에 사로잡아 멸족(滅族)하여 간악한 무리들이 이미 근절되었소. 짐(朕)은 장차 칼날을 변화시켜 농구(農具)를 만들고, 전사(戰士)들을 어루만져 옛날의 노고를 잊게 하며, 칼날에 부상한 사람을 후하게 부양하여 제 집에서 평생을 마치게끔 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가벼운 갖옷을 입고 살진 말을 타도록 하여 사시(四時)의 경치를 구경하면서 태평을 누리게 하려고 하는데, 어찌 그대의 고려에서 속히 병화(兵禍)를 일으키는가? 짐은 또 장차 상제(上帝)에게 밝게 고(告)하고, 장수에게 명해서 동방을 정벌하여 업신여기고 흔단을 일으킨 두 가지 일을 설욕(雪辱)할 것이오. 만약 군사가 삼한(三韓)에 이르지 않더라도 장차 여진의 사람들을 꾀어 전가(全家)를 떠나오게 할 것이니, 이미 간 여진의 모든 사람을 돌려보낸다면 짐의 군사는 국경(國境)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오.”
임금이 예(禮)를 마치고 난 후에 내사(內史)에게 전상(殿上)에서 잔치를 베풀었으니, 두 사람은 모두 우리 나라 사람이다.
【원전】 1 집 43 면
【분류】 *외교-명(明) / *무역(貿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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