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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삼경 원문독파과정 書經서경
제13강 물길을 열어 삶의 길을 열다.
夏書(하서)
禹貢 1장
禹敷土 隨山刊木 奠高山大川
우부토 수산간목 전고산대천
禹貢 2장~6장
冀州 旣載壺口 治梁及岐 旣修太原 至于岳陽 覃懷 底績 至于衡漳
기주 기재호구 치량급기 기수태원 지우악양 담회 저적 지우횡장
禹貢 7장~11장
厥土 惟白壤 厥賦 惟上 上 錯 厥田 惟中 中 恒衛旣從 大陸旣作
궐토 유백양 궐부 유상 상 착 궐전 유중 중 항위기종 대륙기작
島夷 皮服 夾右碣石 入于河
도이 피복 협우갈석 입우하
禹貢 97장
九州攸同 四隩旣宅 九山 刊旅 九川 滌源 九澤 旣陂 四海會同
구주유동 사오기택 구산 간려 구천 척원 구택 기피 사해회동
禹貢 98장~100장
六府孔修 庶土交正 底愼財賦 咸則三壤 成賦中邦 錫土姓 祗台德先 不距朕行
육부공수 서토교정 저신재부 함칙삼양 성부중방 석토성 지이덕선 불거짐행
禹貢 101장
五百里 甸服 百里 賦納緫 二百里 納銍 三百里 納秸服 四百里 粟 五百里 米
오백리 전복 백리 부납총 이백리 납질 삼백리 납갈복 사백리 속 오백리 미
禹貢 106장
東漸于海 西被于流沙 朔南 曁 聲敎訖于四海 禹錫玄圭 告厥成功
동점우해 서피우류사 삭남 기 성교흘우사해 우석현규 고궐성공
우공 1장
우가 토지를 분별하고 산을 따라 나무를 제거하여 높은 산과 내를 정하였다.
우공 2장~6장
기주이다. 이미 호구산에서 시작하여 양산과 기산을 다스렸고, 이미 태원을 닦아서 악양에 이르렀으며, 담회에서 공적을 이루어 형장에 이르렀다.
우공 7장~11장
그 토질은 희고 덩어리가 없는 부드러운 흙이며, 그 부세는 오직 상의 상이니 섞어서 상에 중을 내기도 하며, 그 논밭은 중의 중이다. 항수와 위수가 이미 물길을 따라 아래로 흐르며 대륙은 이미 농사를 지었으니 조이가 가죽으로 만든 피복을 입고 오른쪽으로 갈석산을 끼고 황하로 들어왔다.
우공 97장
구주가 하나 되니 사방의 네 굽이에 이미 집을 지어 살 수 있게 되었다. 구주의 산을 깍아 여제사를 지냈고, 구주의 하천을 정비하였으며, 구주의 하천에 원천을 정비하였으며, 구주의 못에 이미 제방을 쌓으니 사해의 물이 모여 함께 흘렀다.
우공 98장~100장
육부가 크게 다스려져서 모든 토지가 서로 (경계가) 바르게 되니, 재정과 조세를 신중하게 처리하되, 모두 세 등급의 토지로 분류하여 중앙에서 조세제도를 완성했다. (제후에게) 토지와 성을 하사하고는 "삼가 나의 덕으로 솔선하니 나의 행함을 벗어나지 않았다." 라고 하였다.
우공 101장
5백 리는 전복이니 백 리의 거리는 조세로 볏단 채로 납부케 하고 2백 리는 낫으로 벤 벼이삭을 납부케 하며, 3백 리는 벼를 납부하게 하고, 4백 리는 현미를 납부케 하며, 5백 리는 백미를 납부케 했다.
우공 106장
동쪽으로는 바다를 무젖고, 서쪽으로는 유사에 입히고, 북방과 남방에까지 이르러 명성과 교화가 사해에 다 미치자 우는 검은 홀을 바치며 성공을 아뢰었다.
[ 휴넷 인문학당 원문독파 과정 書經 교재 번역 참조 ]
卷三 夏書
夏는 禹有天下之號也니 書凡四篇이라 禹貢은 作於虞時로되 而繫之夏書者는 禹之王이 以是功也일새니라.
禹貢
上之所取를 謂之賦요 下之所供을 謂之貢이라 是篇은 有貢有賦로되 而獨以貢名篇者는 孟子曰 夏后氏는 五十而貢하니 貢者는 較數歲之中하여 以爲常이라하시니 則貢又夏后氏田賦之總名이라 今文古文皆有하니라
1. 禹敷土하시고 隨山刊木하사 奠高山大川하시다
敷는 分也니 分別土地하여 以爲九州也라 奠은 定也니 定高山大川하여 以別州境也니 若兗之濟河, 靑之海岱, 揚之淮海, 雍之黑水西河, 荊之荊衡, 徐之海岱淮, 豫之荊河, 梁之華陽黑水가 是也라 方洪水橫流하여 不辨區域일새 禹分九州之地하여 隨山之勢하여 相其便宜하여 斬木通道以治之하시고 又定其山之高者와 與其川之大者하여 以爲之紀綱하시니 此三者는 禹治水之要라 故作書者首述之하니라
○ 曾氏曰 禹別九州는 非用其私智요 天文地理에 區域各定이라 故星土之法은 則有九野하고 而在地者는 必有高山大川이 爲之限隔하여 風氣爲之不通하니 民生其間에 亦各異俗이라 故禹因高山大川之所限者하여 別爲九州하고 又定其山之高峻과 水之深大者하여 爲其州之鎭하고 秩其祭而使其國主之也시니라
2. 冀州라
冀州는 帝都之地라 三面距河하니 兗河之西요 雍河之東이요 豫河之北이니 周禮職方에 河內曰冀州 是也라 八州에 皆言疆界로되 而冀不言者는 以餘州所至로 可見일새라 鼂氏曰 亦所以尊京師니 示王者無外之意니라
3. 旣載壺口하사
經始治之를 謂之載라 壺口는 山名이니 漢地志에 在河東郡北屈縣東南이라하니 今隰州吉鄕縣也라
○ 今按旣載云者는 冀州는 帝都之地니 禹受命治水所始에 在所當先이라 經始壺口等處하여 以殺(쇄)河勢라 故로 曰旣載라 然이나 禹治水施功之序는 則皆自下流始라 故로 次兗次靑次徐次揚次荊次豫次梁次雍이니 兗最下라 故로 所先이요 雍最高라 故로 獨後라 禹言予決九川하며 距四海하며 濬畎澮하여 距川이라하시니 卽其用工之本末이라 先決九川之水하여 以距海면 則水之大者有所歸요 又濬畎澮하여 以距川이면 則水之小者有所泄이니 皆自下流로 以疏殺其勢라 讀禹貢之書하고 求禹功之序인댄 當於此詳之니라
4. 治梁及岐하시며
梁岐는 皆冀州山이라 梁山은 呂梁山也니 在今石州離石縣東北하니라 爾雅云 梁山은 晉望이라하니 卽冀州呂梁也라 呂不韋曰 龍門未闢하고 呂梁未鑿에 河出孟門之上이라하고 又春秋에 梁山崩이라하여늘 左氏穀梁이 皆以爲晉山이라하니 則亦指呂梁矣라 酈道元謂 呂梁之石이 崇竦하여 河流激盪하여 震動天地라하니 此는 禹旣事壺口하고 乃卽治梁也라 岐山은 在今汾州介休縣하니 狐岐之山으로 勝水所出이니 東北流하여 注于汾이라 酈道元云 後魏於胡岐에 置六壁하고 防離石諸胡하여 因爲大鎭이라하니 今六壁城은 在勝水之側하니 實古河逕之險阨이라 二山은 河水所經이니 治之는 所以開河道也라 先儒以爲雍州梁岐者는 非是라
5. 旣修太原하사 至于岳陽하시며
修는 因鯀之功而修之也라 廣平曰原이니 今河東路太原府也라 岳은 太岳也라 周職方에 冀州其山鎭曰霍山이라하고 地志에 謂 霍太山은 卽太岳이니 在河東郡彘縣東이라하니 今晉州霍邑也라 山南曰陽이니 卽今岳陽縣地也니 堯之所都라 揚子雲冀州箴曰 岳陽是都라하니 是也라 蓋汾水는 出於太原하여 經於太岳하여 東入于河하니 此則導汾水也라
6. 覃懷에 底績하사 至于衡(횡)漳하시다
覃懷는 地名이니 地志에 河內郡에 有懷縣이라하니 今懷州也라 曾氏曰 覃懷는 平地也니 當在孟津之東, 太行之西하니 淶水出乎其西하고 淇水出乎其東이라 方洪水懷山襄陵之時하여 而平地致功爲難이라 故로 曰底績이라 衡漳은 水名이니 衡은 古橫字라 地志에 漳水二니 一은 出上黨沾縣大黽谷이라하니 今平定軍樂平縣少山也니 名爲淸漳이요 一은 出上黨長子縣鹿谷山이라하니 今潞州長子縣發鳩山也니 名爲濁漳이라 酈道元은 謂之衡水라하고 又謂之橫水라하니 東至鄴하여 合淸漳하고 東北至阜城하여 入北河라 鄴은 今潞州涉縣也요 阜城은 今定遠軍東光縣也라
○ 又按桑欽云 二漳異源而下流相合하여 同歸于海라하고 唐人亦言漳水能獨達于海하니 請以爲瀆이라하여 而不云入河者는 蓋禹之導河에 自洚(강)水大陸으로 至碣石入于海하여 本隨西山下東北去라 周定王五年에 河徙砱礫하니 則漸遷而東이로되 漢初에 漳猶入河러니 其後에 河徙日東하여 而取漳水益遠이라 至欽時하여 河自大伾而下가 已非故道하여 而漳自入海矣라 故로 欽與唐人所言者如此하니라
7. 厥土는 惟白壤이요
漢孔氏曰 無塊曰壤이라하고 顔氏曰 柔土曰壤이라 夏氏曰 周官大司徒辨十有二壤之物하여 而知其種하여 以敎稼穡樹藝하고 以土均之法으로 辨五物九等하여 制天下之地征이라하니 則夫敎民樹藝와 與因地制貢은 固不可不先於辨土也라 然이나 辨土之宜有二하니 白은 以辨其色이요 壤은 以辨其性也라 蓋草人糞壤之法에 騂剛用牛하고 赤緹用羊하고 墳壤用麋하고 渴澤用鹿하니 糞治田疇에 各因色性하여 而辨其所當用也라 曾氏曰 冀州之土 豈皆白壤이리오마는 云然者는 土會之法이 從其多者論也니라
8. 厥賦는 惟上에 上이니 錯하며 厥田은 惟中에 中이니라
賦는 田所出穀米兵車之類라 錯은 雜也니 賦第一等而錯出第二等也라 田第五等也니 賦高於田四等者는 地廣而人稠也라 林氏曰 冀州先賦後田者는 冀는 王畿之地니 天子所自治라 倂與場圃園田漆林之類而征之니 如周官載師所載賦非盡出於田也라 故로 以賦屬于厥土之下요 餘州는 皆田之賦也라 故로 先田而後賦하니라 又按 九州九等之賦는 皆每州歲入總數를 以九州多寡相較하여 而爲九等이요 非以是等田而責其出是等賦也라 冀獨不言貢篚者는 冀는 天子封內之地라 無所事於貢篚也일새니라
9. 恒衛旣從하며 大陸旣作하니라
恒衛는 二水名이라 恒水는 地志에 出常山郡上曲陽縣恒山北谷이라하니 在今定州曲陽縣西北恒山也니 東入滱水라 薛氏曰 東流合滱水하여 至瀛州高陽縣하여 入易水라하고 鼂氏曰 今之恒水는 西南流하여 至眞定府行唐縣하여 東流入于滋水하고 又南流入于衡水라하니 非古逕矣라 衛水는 地志에 出常山郡靈壽縣東北이라하니 卽今眞定府靈壽縣也니 東入滹沱河라 薛氏曰 東北合滹沱河하여 過信安軍하여 入易水라 從은 從其道也라 大陸은 孫炎曰 鉅鹿北廣阿澤이니 河所經也라하고 程氏曰 鉅鹿은 去古河絶遠하니 河未嘗逕邢以行하니 鉅鹿之廣阿는 非是라하니라 按爾雅컨대 高平曰陸이라하니 大陸云者는 四無山阜하여 曠然平地라 蓋禹河自澶相以北으로 皆行西山之麓이라 故로 班馬王橫이 皆謂載之高地하니 則古河之在貝冀以及枯洚之南히 率皆穿西山踵趾以行이라가 及其已過信洚之北하여는 則西山勢斷하여 曠然四平일새 蓋以此地로 謂之大陸하니 乃與下文北至大陸者合이라 故로 隋改趙之昭慶하여 以爲大陸縣하고 唐又割鹿城하여 置陸渾縣하니 皆疑鉅鹿之大陸이 不與河應하여 而亦求之向北之地하니 杜佑李吉甫以爲邢趙深三州爲大陸者得之라 作者는 言可耕治니 水患旣息에 而平地之廣衍者 亦可耕治也라 恒衛는 水小而地遠하고 大陸은 地平而近河라 故로 其成功於田賦之後라
10. 島夷는 皮服이로다
海曲曰島니 海島之夷가 以皮服來貢也라
11. 夾右碣石하여 入于河하나니라
碣石은 地志에 在北平郡驪城縣西南河口之地라하니 今平州之南也라 冀州는 北方貢賦之來에 自北海入河하여 南向西轉而碣石在其右轉屈之間이라 故로 曰夾右也라 程氏曰 冀爲帝都하여 東西南三面距河하니 他州貢賦가 皆以達河爲至라 故로 此三方을 亦不必書요 而其北境則漢遼東西右北平漁陽上谷之地니 其水如遼濡滹易이 皆中高하여 不與河通이라 故로 必自北海然後에 能達河也라 又按 酈道元言驪城枕海에 有石如甬道數十里요 當山頂에 有大石하여 如柱形하니 韋昭以爲碣石이라 其山이 昔在河口海濱이라 故로 以誌其入貢河道러니 歷世旣久에 爲水所漸淪하여 入于海하니 已去岸五百餘里矣라 戰國策에 以碣石在常山郡九門縣者는 恐名偶同이요 而鄭氏以爲九門無此山也라하니라
12. 濟河에 惟兗州라
兗州之域은 東南據濟하고 西北距河하니라 濟河는 見導水라 蘇氏曰 河濟之間은 相去不遠이라 兗州之境은 東南跨濟하니 非止於濟也라 愚謂 河昔北流하여 兗州之境이 北盡碣石河右之地러니 後에 碣石之地는 淪入於海하고 河益徙而南하여 濟河之間이 始相去不遠하니 蘇氏之說이 未必然也라
○ 林氏曰 濟는 古文作泲하니 說文註云 此兗州之濟也라 其從水從齊者는 說文註云 出常山房子縣贊皇山이라하니 則此二字音同義異하니 當以古文爲正이니라
97. 九州攸同하니 四隩旣宅하도다 九山에 刊旅하며 九川에 滌源하며 九澤이 旣陂하니 四海會同이로다
隩는 隈也니 李氏曰 涯內近水爲隩라 陂는 障也라 會同은 與灉沮會同으로 同義라 四海之隩에 水涯之地 已可奠居요 九州之山이 槎木通道하여 已可祭告요 九州之川이 濬滌泉源하여 而無壅遏이요 九州之澤이 已有陂障하여 而無決潰요 四海之水가 無不會同하여 而各有所歸하니 此는 蓋總結上文하여 言九州四海水土 無不平治也라
98. 六府孔修하여 庶土交正이어늘 底(지)愼財賦하사되 咸則(칙)三壤하사 成賦中邦하시다
孔은 大也니 水火金木土穀이 皆大修治也라 土者는 財之自生이니 謂之庶土면 則非特穀土也라 庶土有等하니 當以肥瘠高下名物로 交相正焉하여 以任土事라 底는 致也니 因庶土所出之財하여 而致謹其財賦之入이니 如周大司徒以土宜之法으로 辨十有二土之名物하여 以任土事之類라 咸은 皆也요 則은 品節之也라 九州穀土를 又皆品節之以上中下三等이니 如周大司徒辨十有二壤之名物하여 以(致)[敎]稼穡之類라 中邦은 中國也니 蓋土賦는 或及於四夷호되 而田賦則止於中國而已라 故曰 成賦中邦이라
99. 錫土姓하시다
錫土姓者는 言錫之土하여 以立國하고 錫之姓하여 以立宗이니 左傳所謂天子建德하여 因生以賜姓하고 胙之土而命之氏者也라
100. 祗台(이)德先하신대 不距朕行하니라
台는 我요 距는 違也라 禹平水土하고 定土賦하고 建諸侯하여 治已定하고 功已成矣니 當此之時하여 惟敬德以先天下하면 則天下自不能違越我之所行也라
101. 五百里는 甸服이니 百里는 賦納總하고 二百里는 納銍하고 三百里는 納秸服하고 四百里는 粟하고 五百里는 米니라
甸服은 畿內之地也라 甸은 田이요 服은 事也니 以皆田賦之事라 故로 謂之甸服이라 五百里者는 王城之外에 四面이 皆五百里也라 禾本全曰總이요 刈禾曰銍이니 半藁也요 半藁去皮曰秸이라 謂之服者는 三百里內는 去王城爲近이니 非惟納總銍秸이라 而又使之服輸將之事也라 獨於秸言之者는 總前二者而言也라 粟은 穀也라 內百里爲最近이라 故로 幷禾本總賦之요 外百里次之니 只刈禾半藁納也요 外百里又次之니 去藁麤皮納也요 外百里爲遠하니 去其穗而納穀이요 外百里爲尤遠하니 去其穀而納米라 蓋量其地之遠近하여 而爲納賦之輕重精麤也라 此는 分甸服五百里而爲五等者也라
102. 五百里는 侯服이니 百里는 采요 二百里는 男邦이요 三百里는 諸侯니라
侯服者는 侯國之服이니 甸服外에 四面이 又各五百里也라 采者는 卿大夫邑地라 男邦은 男爵이니 小國也요 諸侯는 諸侯之爵이니 大國, 次國也라 先小國而後大國者는 大可以禦外侮요 小得以安內附也라 此는 分侯服五百里而爲三等也라
103. 五百里는 綏服이니 三百里는 揆文敎하고 二百里는 奮武衛하나니라
綏는 安也니 謂之綏者는 漸遠王畿而取撫安之義라 侯服外에 四面이 又各五百里也라 揆는 度也라 綏服은 內取王城千里하고 外取荒服千里하여 介於內外之間이라 故로 以內三百里로 揆文敎하고 外二百里로 奮武衛하여 文以治內하고 武以治外하니 聖人所以嚴華夏之辨者如此라 此는 分綏服五百里而爲二等也라
104. 五百里는 要服이니 三百里는 夷요 二百里는 蔡(살)이니라
要服은 去王畿已遠하여 皆夷狄之地니 其文法이 略於中國이라 謂之要者는 取要約之義니 特羈縻之而已라 綏服外에 四面이 又各五百里也라 蔡은 放也니 左傳云 蔡蔡叔이 是也니 流放罪人於此也라 此는 分要服五百里而爲二等也라
105. 五百里는 荒服이니 三百里는 蠻이요 二百里는 流니라
荒服은 去王畿益遠하여 而經略之者 視要服에 爲尤略也라 以其荒野라 故로 謂之荒服이라 要服外에 四面이 又各五百里也라 流는 流放罪人之地니 蔡與流皆所以處罪人이나 而罪有輕重이라 故로 地有遠近之別也라 此는 分荒服五百里而爲二等也라
○ 今按 每服五百里니 五服則二千五百里요 南北東西相距五千里라 故로 益稷篇에 言弼成五服호되 至于五千이라 然이나 堯都冀州하니 冀之北境은 幷雲中��易이라도 亦恐無二千五百里며 藉使有之라도 亦皆沙漠不毛之地요 而東南財賦所出은 則反棄於要荒이니 以地勢考之컨대 殊未可曉라 但意古今土地盛衰不同하니 當舜之時에 冀北之地 未必荒落如後世耳라 亦猶閩浙之間이 舊爲蠻夷淵藪러니 而今富庶繁衍하여 遂爲上國하니 土地興廢는 不可以一時槪也라 周制에 九畿曰侯甸男采衛蠻夷鎭藩이요 每畿亦五百里며 而王畿는 又不在其中하니 倂之則一方五千里라 四方相距爲萬里니 蓋倍禹服之數也라 漢地志에 亦言東西九千里요 南北一萬三千里라하니 先儒皆疑禹服之狹而周漢地廣이라 或以周服里數는 皆以方言이라하고 或以古今尺有長短이라하고 或以禹直方計어늘 而後世以人迹屈曲取之라하니 要之컨대 皆非的論이라 蓋禹聲敎所及則地盡四海나 而其疆理則止以五服爲制하고 至荒服之外하여는 又別爲區畫이니 如所謂咸建五長이 是已라 若周漢則盡其地之所至而疆畫之也니라
106. 東漸于海하며 西被于流沙하며 朔南에 曁하여 聲敎訖于四海어늘 禹錫玄圭하사 告厥成功하시다
漸은 漬요 被는 覆(부)요 曁는 及也라 地有遠近이라 故로 言有淺深也라 聲은 謂風聲이요 敎는 謂敎化라 林氏曰 振擧於此而遠者聞焉이라 故로 謂之聲이요 軌範於此而遠者效焉이라 故로 謂之敎라 上言五服之制하고 此言聲敎所及하니 蓋法制有限이요 而敎化無窮也라 錫은 與師錫之錫同하니 水土旣平에 禹以玄圭爲贄하여 而告成功于舜也라 水色黑이라 故로 圭以玄云이라
[ 사이버서원 전통문화연구회 書經集傳 강의 자료 참조 ]
"書經集傳" 주문한 책이 늦게 도착했습니다. 세주 번역는 읽어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될것 같습니다. 더위에 독수리타법으로 타자를 다시 친다는 것도 어려울것 같고해서, 세주 번역은 다음 새롭게 공부할때 공유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書經[서경]-84 하서(夏書) 제1편 우공(禹貢)(1)
< 서경(書經)>(31) 하서(夏書)(1)
하(夏)는 우(禹)를 비롯한 그의 자손들이 중국을 다스렸던 왕조를 가리킨다. 하서(夏書)는 하 왕조(夏王朝)의 사관(史官)이 기록하여 후세에 남긴 것이라고 한다. 중국민족을 화(華) 혹은 화하(華夏)라고 일컫게 된것은 하왕조(夏王朝)의 하(夏)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왕조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왕조로서, 중국의 민족과 정치와 문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개로 간주되고 있다. 14대에 걸쳐 17명의 임금이 다스렸으며, 약 400여 년 동안 왕업(王業)을 누렸는데, 서기(西紀)로는 대략 기원전 2183년 경에서 1752년으로 잡고있다. 하(夏)의 역사로는 곧 이 하서(夏書)에 수록된 우공(禹貢)과 감서(甘誓), 오자지가(五子之歌),윤정(胤征)등이며, 그밖에는 유실 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하(夏)의 역사를 한낱 전설로만 여겨 왔는데, 하남성(河南省) 평양현(平陽縣)에서 출토 된 갑골문(甲骨文)에 의해서 하나라 때의 문자가 있었음을 단정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서(夏書)는 본래 우서(虞書)와 함께 수록이 되어있었으며, 한대(漢代)의 여러 학자들은 모두 우하서(虞夏書)라 불렀다고 공영달(孔穎達)은 <상서정의(尙書正義)>에서 주장하고 있다. 내용면으로도 역시 <위고문상서>에서 나뉘어진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제1편 우공(禹貢)(1)
이 편은 우(禹)가 홍수를 다스리고 또 중국을 9주(九州)로 나눈 업적 등을 기록한 것이다. 우(禹)가 홍수를 다스림으로써 백성들은 안정된 생활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우는 백성들이 정착하게 되자, 조세제도를 재확립하여 실시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편을 우공(禹貢)이라고 하였는데, 공(貢)은 공물등을 바친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전세(田稅)를 부(賦)라 하고, 제후들이 바치는 지방의 토산물을 공(貢) 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공(貢)은 양자를 모두 일컫는 말이다.
[1]
禹敷土 隨山刊木
(우부토 수산간목)
우는 땅을 다스렸으며, 산에 이르면 나무를 베어내고,
奠高山大川
(전고산대천)
높은 산과 큰 강에 임해서는 제사를 지내었다.
書經[서경]-85 하서(夏書)제1편 우공(禹貢)(1)
冀州 旣載壺□ 治梁及岐
(기주 기재호구 치량급기)
기주(冀州)의, 호구산(壺□山)에서 시작하여, 양산(梁山)과 기산(岐山)까지 다스렸고,
旣修太原 至于岳陽
(기수태원 지우악양)
태원(太原)으로부터, 악산(岳山)의 남쪽 기슭에 이르렀으며,
覃懷底績 至于衡漳
(담회저적 지우형장)
담회(覃懷)에서의 일을 이룩하여, 장수(漳水)가 가로지르는 곳까지 이르렀다.
厥土惟白壤
(궐토유백양)
그곳의 흙은 희고 부드러웠다.
厥賦惟上上錯 厥田 惟中中
(궐부유상상착 궐전 유중중)
이곳의 부세(賦稅)는 상상(上上)급에 속하나 상중(上中)도 섞였으며, 이곳의 밭은, 중중(中中)급에 속했다.
恒衛旣從 大陸旣作
(항위기종 대륙기작)
항수(恒水)와 위수(衛水)가 잘 흐르게 되어, 대륙(大陸)이란 호숫가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島夷皮服 夾右碣石 入于河
(도이피복 협우갈석 입우하)
이(島夷)의 백성들은 갖옷을 바쳐 왔는데, 들은 갈석산(碣石山)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黃河)로 들어 왔다.
해설:우(禹)는 홍수를 다스린 후 중국 전체를 9주(九州)로 나누었다. 그는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중국 전역을 돌아 다녔으며, 지형을 샅샅이 조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그때까지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있 던 전 국토를 크게분할하여 9주라고 일컫는 지역이 정해진 것인데, 이후에도 중국을 9주(九州)라 부르게 되었다. 물론 그 후에 더욱 세분되고 확대가 되었으나, 우(禹)가 정한 것이 기초가 된 것이다. 이 편에서는 우가 정해 놓은 9주의 내용이 차례로 기록이 되어 있으며, 기주(冀州)가 그당시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으므로, 먼저 정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이족(夷族)은 하왕조 이전의 한족과 가장 빈번한 접촉을 가졌던 묘족(苗族)과 마찬가지로, 하왕조때부터 중국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는 이민족이다. 고사(古史)에서 말하는 동이(東夷), 방이(方夷),구이(九夷)는 모두 이족(夷族)이며, 이들의 주거지는 주로 동쪽 바닷가였다.
書經[서경]-86 하서(夏書)(1)제1편 우공(禹貢)(2)
濟河惟兗州
(제하유연주)
제수(濟水)와 황하(黃河) 사이에 연주(兗州)가 있다.
九河旣道 雷夏旣澤 灉沮會同
(구하기도 뇌하기택 옹저회동)
아홉 곳의 냇물을 흐르게 하여, 뇌하(雷河)를 택지(澤地)로 만들고, 옹수(灉水)와 저수(沮水)를 합류하게 하였다.
桑土旣蠶 是降丘宅土
(상토기잠 시강구댁토)
뽕나무가 자 자라는 토지에 양잠을 하게 하니, 언덕의의 사람들도 내려와 평지에 살게 되었다.
厥土黑墳 厥草惟繇 厥木惟條
(궐토흑분 궐초유요 궐목유조)
그곳의 흙은 검고 기름져서, 풀은 우거지고, 나무는 길게 자랐다.
厥田惟中下 厥賦貞
(궐전유중하 궐부정)
그곳의 밭은 중하(中下)인데, 부세(賦稅)는 구(九)등급 이었다.
作十有三載 乃同
(작십유삼재 내동)
십삼 년 동안을 노력한 뒤에야, 다른 주(州)와 같게 되었다.
厥貢漆絲 厥篚織文
(궐공칠사 궐비직문)
그곳의 공물은 옷칠과 명주실이었고, 그곳의 공물 바구니에는 무늬를 넣어 짠 비단이 들어 있었다.
浮于濟漯 達于河
(부우제탑 달우하)
이곳 사람들은 제수(濟水)와 탑수(漯水)에 배를 띄워서 황하에 도달하였다.
해설: 이 절에서는 우(禹)가 연주(兗州)를 다스렸던 업적을 기록하고 있다. 연주(兗州)는 산동성(山東省) 서부지역을 가리키다.
書經[서경]-87 하서(夏書)(1)제1편 우공(禹貢)
海岱惟靑州
(해대유청주)
바다와 태산(泰山) 사이에 청주(靑州)가 있다.
嵎夷旣略 濰淄其道
(우이기략 유치기도)
우이(嵎夷)를 다스리자, 유수(濰水)와 치수(淄水)가 소통되었다.
厥土白墳 海濱廣斥
(궐토백분 해빈광척)
그곳의 흙은 희고 비옥했으며, 해변은 넓은 갯벌이었다.
厥田惟上下 厥賦中上
(궐전유상하 궐부중상)
그곳의 밭은 상하(上下) 급이고, 부세(賦稅)는 중상(中上) 급이었다.
厥貢鹽絺 海物惟錯
(궐공염치 해물유착)
공물은 소금과 고운 칡베와, 해물이 섞여 있었다.
岱畎絲枲鉛松怪石
(대견사시연송괴석)
태산 골짜기에서는 명주실·모시·납·소나무·수석과 괴석이 났다.
萊夷作牧 厥篚檿絲
(내이작목 궐비염사)
내산(萊山)의 이족(夷族)에게 목축을 하게 되자, 그들은 공물 바구니에 산누에 고치에서 뽑은 실을 바쳤다.
浮于汶 達于濟
(부우문 달우제)
그곳 백성들은 문수(汶水)에 배를 띄워, 제수(濟水)로 공물을 바쳤다.
해설:청주(靑州)는 곧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동부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우(禹)가 청주지방을 다스리고 또 이 지방의 이족(夷族)들에게 양잠과 목축업을 가르친 것을 기록하고 있다.
書經[서경]-88 하서(夏書)(1)제1편 우공(禹貢)
海岱及淮惟徐州
(해대급회유서주)
바다와 태산(泰山)과 회수(淮水) 사이에 서주(徐州)가 있다.
淮沂其乂 蒙羽其藝
(회기기예 몽우기예)
회수(淮水)와 기수(沂水)를 다스리니, 몽산(蒙山)과 우산(羽山) 지역에도 곡식을 심을 수 있게 되었다.
大野旣豬 東原底平
(대야기저 동원저평)
대야호(大野湖)의 둑을 쌓자, 동원(東原) 땅이 평평해졌다.
厥土赤埴墳 草木漸包
(궐토적식분 초목점포)
그곳의 흙은 붉고 찰지고 기름져서, 풀과 나무가 무성하게 잘 자랐다.
厥田惟上中 厥賦中中
(궐전유상중 궐부중중)
그곳의 밭은 상중(上中)이고, 부세(賦稅)는 중중(中中)의 등급 이었다.
厥貢惟土五色 羽畎夏翟
(궐공유토오색 우견하적)
그곳의 공물은 오색(五色)의 흙이며, 우산(羽山)의 골짜기에서는 다섯 빛깔의 꿩 털과,
嶧陽孤桐 泗濱浮磬
(역양고동 사빈부경)
역산(嶧山)의 양지쪽에서는 홀로 선 오동나무와, 사수(泗水)가의 흙속에 떠 있는 부경(浮磬)이 있었다.
淮夷 蠙珠曁魚
(회이 빈주기어)
회수(淮水)가의 이족(夷族)은, 진주와 물고기를 바쳤다.
厥篚衣纖縞
(궐비의섬호)
그들의 공물 바구니에는 검은무늬를 넣어 짠 흰빛의 비단이 담겨 있었다.
浮于淮泗 達于河
(부우회사 달우하)
회수(淮水)와 사수(泗水)에 배를 띄워, 황하(黃河)에 이르렀다.
해설:이 절에서는 우(禹)가 서주를 다스린 사실과 그 서주의 풍물을 설명하고 있다. 서주도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남부(南部)와 회하(淮河) 이북을 가리킨다.
書經[서경]-89 하서(夏書)(1)제1편 우공(禹貢)
淮海惟揚州
(회해유양주)
회수(淮水)와 바다 사이가 양주(揚州)이다.
彭蠡旣豬 陽鳥攸居
(팽려기저 양조유거)
팽려(彭蠡)라는 호수에 방죽을 쌓게 되자, 철새들이 그곳에 살게 되었다.
三江旣入
(삼강기입)
세 갈래의 강물을 바다로 흘러 들어가게 하자,
震澤底定 篠簜旣敷
(진택저정 소탕기부)
진택(震澤)이란 못물이 일정해져, 호숫가에는 가는 대와 굵은 대가 자랐다.
厥草惟夭 厥木惟喬
(궐초유요 궐목유교)
그곳의 숲은 우거지고, 나무들은 높게 자랐다.
厥土惟塗泥
(궐토유도니)
그곳의 흙은 진흙이었다.
厥田惟下下 厥賦下上 上錯
(궐전유하하 궐부하상 상착)
그 밭은 하하(下下)의 9등급이고, 부세(賦稅)는 하상(下上)의 7등급이지만 상등인 6등급도 섞여 있었다.
厥貢惟金三品 瑤琨篠簜
(궐공유금삼품 요곤소탕)
그곳의 공물은 금·은·동과, 곤(琨)이라는 구슬과 가늘고 굵은 대나무와,
齒革羽毛 惟木
(치혁움보 유목)
상아·짐승가죽·새깃털·소꼬리털과, 그리고 목재(木材)였다.
島夷卉服
(도이훼복)
도이족(島夷族)들은 풀로 만든 옷을 입었는데,
厥篚織貝 厥包橘柚 錫貢
(궐비직패 궐포귤유 석공)
그들은 공물 바구니에 조개 무늬의 비단을 담고,그들의 보자기에는 귤과 유자를 싸서, 공물로 바쳤다.
沿于江海 達于淮泗
(연우강해 달우회사)
그들은 강과 바다를 따라, 회수(淮水)와 사수(泗水)에 이르렀다.
해설:양주(揚州)는 회하(淮河)의 이남을 가리키는 데, 지금의 절강성(折江省)과 강서성(江西省)이 모두 이에 포함이 된다.
書經[서경]-90 하서(夏書)(1)제1편 우공(禹貢
荊及衡陽惟荊州
(형급형양유형주)
형산(荊山)과 형산(衡山) 남쪽 기슭 사이에 형주(荊州)가 있다.
江漢 朝宗于海
(강한 조종우해)
강수(江水)와 한수(漢水)를, 합류시켜 바다로 흘러들게 하자,
九江孔殷
(구강공은)
아홉 가닥의 강수(江水)가 크게 바로 잡혔다.
沱潛旣道 雲土 夢作乂
(터점가도 운토 몽작예)
타수(沱水와 잠수(潛水)가 소통이 되자, 운택(雲澤)의 바닥이 드러나고, 몽택(夢澤)의 물이 다스려 졌다.
厥土惟塗泥
(궐토유도니)
그 곳의 흙은 진흙이 많았다.
厥田惟下中 賦上下
(궐전유하중 부상하)
그곳의 밭은 하중(下中)이지만, 부세(賦稅)는 상하(上下)등급 이었다.
厥貢羽毛齒革
(궐공우모치혁)
그곳의 공물은 새깃·소꼬리 털·상아·가죽과,
惟金三品 杶榦栝柏
(유금삼품 춘간괄백)
금·은·동 세 가지 쇠붙이와, 참나무·산뽕나무·향나무·잣나무와,
礪砥砮丹
(여지노단)
그리고 거친 숫돌·고운 숫돌·살촉 돌·단사(丹砂)와,
惟箘簵楛 三邦 底貢厥名
(유균로고 삼방 저공궐명)
조릿대와 화살대 및 싸리나무인 호(楛)였는데, 세 지방에서, 공물로 바치어 이름을 날렸다.
書經[서경]-91 하서(夏書)(1)제1편 우공(禹貢)
包匭菁茅 厥篚玄纁璣組
(포궤청모 궐비현훈기조)
제사 술 거를 때 쓰는 청모(菁茅)를 싸서 상자에 넣었으며,그 바구니에는 검붉은 비단과 둥글지 않은 구슬에 수실이 달린 끈이 있었고,
九江納錫大龜
(구강납석대구)
구강(九江)에서는 큰 거북을 바쳤다.
浮于江沱潛漢
(부우강타잠한)
그들은 강수(江水)와 타수(沱水)와 잠수(潛水)와 한수(漢水)에 배를 띄워,
逾于洛 至于南河
(유우락 지우남하)
낙수(洛水)를 거쳐, 남쪽 황하(黃河)에 이를 수 있었다.
해설:이 절에서는 형주(荊州), 곧 지금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 일대를 우(禹)가 다스렸던 일과 그 지방의 풍물을 기록한 것이다. 사실 옛날 형부지방과 양주지방은 오늘날의 중국 곡창지대로 손꼽혀왔으며, 호남성의 쌀은 맛좋고 윤기가 있다고 전해져 왔다.
書經[서경]-92 하서(夏書)(1)제1편 우공(禹貢)
荊河惟豫州
(형하유예주)
형산(荊山)과 황하(黃河) 사이가 곧 예주(豫州)이다.
伊洛瀍澗
(이낙전간)
이수(伊水)·낙수(洛水)·전수(瀍水)·간수(澗水)의 물을,
旣入于河 滎波旣豬
(기이우하 형파기저)
황하(黃河)로 돌아 흐르게 하자, 형파(滎波)의 못물이 잘 막혔다.
導菏澤 被孟豬
(도하택 피맹저)
가택(菏澤)의 물을 끌어, 맹저(孟豬)의 못에 이르게 하였다.
厥土惟壤 下土墳壚
(궐토유양 하토분로)
그 곳의 흙은 부드러웠으나, 낮은 쪽의 흙은 기름지며 검고 굳었다.
厥田惟中上 厥賦錯上中
(궐전유중상 궐부착상중)
그 밭은 중상(中上)의 4등이지만, 부세(賦稅)는 상중(上中)의 2등에 1등이 섞여 있었다.
厥貢漆枲絺紵
(궐공칠시치저)
그곳의 공물은 옷칠·삼모시·칡베·모시옷감이었고,
厥篚纖纊 錫貢磬錯
(궐비섬광 석공경착)
그곳의 공물 바구니에는 가는 무명실이 들어 있었고, 명(命)에 따라 경(磬)을 가는 숫돌을 바치기도 하였다.
浮于洛 達于河
(부우락 달우하)
그들은 낙수(洛水)에서 배를 띄워, 황하(黃河)에 이르렀다.
해설: 예주는지금의 하남성(河南省)을 가리키는 곳인데, 도읍지와는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예주의 백성들은 대체로 황하(黃河)를 이용하여 도읍지에 왕래할 수 있었는데, 다만 서쪽에서는 낙수(洛水)에 배를 띄워 황하로 들어 갔다가 다시 황하를 거슬러 도읍지로 향하였던 것이다.
書經[서경]-93 하서(夏書)(1)제1편 우공(禹貢)
華陽黑水惟梁州
(화양흑수유량주)
화산(華山) 남쪽 기슭에서 흑수(黑水) 사이가 양주(梁州)이다.
岷嶓旣藝 沱潛旣道
(민파기예 타잠기도)
민산(岷山)과 파산(嶓山) 일대에 곡식을 가꾸게 하고, 타수(沱水)와 잠수(潛水)를 터서 흐르게 하였다.
蔡蒙旅平 和夷底績
(채몽려평 화이저적)
채몽산(蔡蒙山) 일대에도 잘 정리하여 경작을 할 수 있게 하였으며, 화수(和水)의 이족(夷族)들도 잘 다스려 졌다.
厥土靑黎 厥田惟下上
(궐토청려 궐전유하상)
그곳의 흙은 푸른 빛에 검은 빛이 감돌았고, 그곳의 밭은 하상(下上)으로 7등 인데,
厥賦下中三錯
(궐부하중삼착)
부세(賦稅)는 하중(下中)의 8등에 7등과 6등이 섞여 있었다.
厥貢璆鐵銀鏤砮磬
(궐공구철은루노경)
그곳의 공물은 질좋은 황금·철·은·강철·살촉돌·경구등과,
熊羆狐狸織皮
(웅비호리직피)
곰·말곰·여우·너구리 등의 가죽과 짐승털 가죽으로 짠 융단이었다.
西傾因桓是來
(서경인환시래)
서경산(西傾山)의 산물은 환수(桓水)를 거쳐 왔는데,
浮于潛 逾于沔
(부우잠 유우면)
그들은 잠수(潛水)에 배를 띄워, 면수(沔水)를 지나,
入于渭 亂于河
(입우위 난우하)
위수(渭水)로 들어온 다음에, 황하를 가로질러 들어왔다.
해설:양주(梁州)는 지금의 사천성(四川省)과 섬서성(陝西省) 남부를 가리킨다. 우(禹)는 이 고장의 산과 물을 다스려 지금과 같이 발전할 수 있도록 그 기틀을 닦아 놓았던 것이다.
書經[서경]-94 하서(夏書)(1)제1편 우공(禹貢)
黑水西河惟雍州
(흑수서하유옹주)
흑수(黑水)와 서하(西河) 사이가 옹주(雍州)이다.
弱水旣西 涇屬渭汭
(약수기서 경속위예)
약수(弱水)를 서쪽으로 흐르게 하고, 경수(涇水)를 모아 위수(渭水)가 굽이치는 곳으로 흘러 들게 하였다.
漆沮旣從 灃水攸同
(칠저기종 풍수유동)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유통시키고, 풍수(灃水)도 위수로 합쳤다.
荊岐旣旅 終南惇物 至于鳥鼠
(형기기려 종남돈물 지우조서)
형산(荊山)과 기산(岐山)을 정리하고, 종남산(終南山)과 돈물산(惇物山)을 거쳐, 조서산(鳥鼠山)까지 이르게 되었다.
原隰底績 至于豬野
(원습저적 지우저야)
평원과 진펄에서 공을 이루고, 저야호(豬野湖)까지 다스렸다.
三危旣宅 三苗丕叙
(삼위기댁 삼묘비서)
삼위산(三危山) 지방도 사람들이 살 수 있게 되어, 삼묘족(三苗族)도 크게 질서가 잡혔다.
厥土惟黃壤
(궐토유황양)
그곳의 흙은 누렇고 부드러웠으며,
厥田惟上上 厥賦中下
(궐전유상상 궐부중하)
그 밭은 상상(上上)의 1등인데, 부세(賦稅)는 중하(中下)의 6등이었다.
厥貢惟球琳琅玕
(궐공유구림랑간)
공물은 옥경(玉磬)의 옥(玉) 구슬과 푸른 옥과 옥돌이었다.
浮于積石 至于龍門西河
(부우적석 지우룡문서하)
그들은 적석산(積石山) 기슭에서 배를 띄우면, 용문산(龍門山) 서하(西河)에 이를 수 있었고,
會于渭汭
(회우위예)
위수(渭水)가 굽이치는 북쪽에 이를 수 있었다.
織皮 崑崙析支渠搜
(직피 곤륜석지거수)
짐승의 털가죽으로 짠 융단은, 곤륜(崑崙)과 석지(析支)와 거수(渠搜) 지방에서 났으며,
西戎卽叙
(서융즉서)
이들 서융(西戎)도 잘 다스려져 질서가 잡혔다.
해설:옹주(雍州)는 지금의 섬서성(陝西省)과 감숙성(甘肅省)에 해당하며, 지금도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곳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곳을 수천 년 전에 우(禹)가 개발하였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로써 우(禹)는 9주(九州)의 물을 다스리고 백성들을 안주 시킨 사실을 차례로 더듬어 보았다. 이미 서술한바 있거니와, 옛날 중국의 홍수는 매우 극심하여 백성들의 가장 무서운 적이었다. 거의 해마다 황하가 범람하였고 물길을 바꾸면서 천하를 휩쓸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물길을 우(禹)가 천신만고 끝에 다스려 백성들을 안주시키니,자연 민심은 우(禹)에게로 쏠리게 되었고, 순임금이 재위를 물려 주려고 할 때 고요(皐陶)를 천거하였으나, 순임금은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우리는 이 아홉 절에서 치산치수의 공적은 물론 이려니와, 여러 옥구슬에서 그 당시의 조각술(彫刻術)을 엿볼 수가 있고, 여러금속으로 제련술(製鍊術)이 발전했음을 알수가 있다. 당시의 문명의 척도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오늘날에 와서 그 정교함을 자랑하는 수많은 공예품들이 이미 수천년 전에 시작되었던 것이다.
書經[서경]-95 하서(夏書)(1)제1편 우공(禹貢)
導岍及岐 至于荊山
(도견급기 지우형산)
견산(岍山)과 기산(岐山)으로부터 시작하여, 형산(荊山)에 이르렀다.
逾于河 壺□雷首 至于太岳
(유우하 호구뇌수 지우태악)
황하(黃河)를 건너, 호구산(壺□山)과 뇌수산(雷首山)을 거쳐, 태악(太岳)에 이르렀다.
底柱析城 至于王屋
(저주석성 지우왕옥)
저주산(底柱山)과 석성산(析城山)을 거쳐,왕옥산(王屋山)에 이르렀다.
太行恒山 至于碣石 入于海
(태행항산 지우갈석 입우해)
태행산(太行山)과 항산(恒山)을 거쳐,갈석산(碣石山)에 이르러, 바다에 다다랐다.
西傾朱圉鳥鼠 至于太華
(서경주어조서 지우태화)
서경산(西傾山)·주어산(朱圉山)·조서산(鳥鼠山)에서 시작하여,태화산(太華山)까지 이르렀다.
熊耳外方桐栢 至于陪尾
(웅이외방동백 지우백미)
웅이산(熊耳山)·외방산(外方山)·동백산(桐栢山)을 거쳐,배미산(陪尾山)에 이르렀다.
導嶓冢 至于荊山
(도파총 지우형산)
파총산(嶓冢山)으로 부터 시작하여, 형산(荊山)까지 이르렀다.
內方 至于大別
(내방 지우대별)
내방산(內方山)을 거쳐, 대별산(大別山)에 이르렀고,
岷山之陽 至于衡山
(민산지양 지우형산)
민산(岷山) 남족 기슭을 거쳐, 형산(衡山)에 이르렀으며,
過九江 至于敷淺原
(과구강 지우부천원)
아홉 줄기 강을 지나, 부천산(敷淺山)·원산(原山)까지 다다랐다.
해설;이 절에서는 중국의 산을 중심으로 하여 우(禹)의 업적을 기록해나간 것이다. 앞에서 차례로 주(州)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전후가 제대로 연결되지못한 부분을 여기세서 다시 산을 중심으로 보충설명한 것이다. 옛사람들은 우(禹)의 업적을 세부분으로 나누어 말하였다. 견산(岍山)과 기산(岐山)에서부터 바다에 도달했다고하는 첫부분은 북조(北條)로 일컬었고, 서경산(西傾山)부터 배미산(陪尾山)까지의 둘째 부분을 중조(中條)라 했으며, 파총산(嶓冢山)으로 시작된 마지막 부분을 남조(南條)라고 일컬었다.
[ 다음까페 전주향교 번역자료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