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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미술 Arte rinascimentale
15세기의 르네상스는 1401년에 있었던 피렌체의 세례당 제 2 청동문 경연대회에서 시작된다.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ㆍ필리포 브루넬레스키F.Brunelleschi 등의 많은 조각가가 성서의 ‘이삭의 희생Sacrificio di Isacco’이라는 장면을 놓고 겨루었다. 두 사람 모두 인문주의적 교양이 몸에 배어 있었으나 새로운 조형공간을 건축한 브루넬레스키의 작품이 너무도 혁신적이었기 때문에 고딕 냄새가 남아 있는 기베르티의 작품이 우승했다.
그는 이 청동문 제작에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고 나중에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 Porta del Preadiso’ 이라고 극찬을 한 걸작이 탄생했다.
한편 브루넬레스키는 건축에 전념하여 산타 마리아 델피오레 대성당 돔Cupola di S.Maria del Fiore을 비롯해 오스페달레 디리 인노첸티, 산 로렌초 성당San Lorenzo, 피티가 예배당 등을 건립해 르네상스 건축의 창시자가 되었다. 건축가ㆍ예술 이론가로서 알려진 레온바티스타 알베르티L.B.Alberti는 리미니의 말라테스티아노 사원Tempio Malatestiano, 만토바의 산탄드레아 Sant'Andrea를 설계했다.
도나토 브라만테(1444~1514)는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Santa Maria delle Grazie과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San Pietro in Montorio의 건축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메디치 궁을 설계한 미켈로초(1396~1472), 메디치가 별장을 지은 줄리아노 다 산갈로(1445~1516)가 있다. 15세기 조각의 선구자로는 ‘국제고딕양식Gotico internazionale'에 대항한 야코포 델라쿠에르치아 Jacopo della Quercia(1371~1438)가 있고 시에나의 <폰테가이아Fonte Gaia> 볼로냐의 산 페트로니오 성당San Petronio의 부조가 있다.
브루넬레스키와 함께 로마에서 고전을 연구한 도나텔로 Donatello (1386~1466)는 극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의 <다비드 상 Davide>,<성게오르기우스 상 San Giorgio(양자 모두 피렌체, 바르젤로 미술관)>, <성모자 상(파도바, 산타토니오성당)><가타멜라타 기마상 IlGattamelata(파도바)>등을 제작하여 르네상스 조각의 혁신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림 도나텔로 Donatello의 가타멜라타 기마상 그림 루카 델라 로비아 Luca della Robbia(1400~1482)
IlGattamelata(파도바) <성모자 상>
한편 루카 델라 로비아 Luca della Robbia(1400~1482)는 감상적인 <성모자 상>ㆍ<동자 상> 등을 제작했다. 도나텔로의 추종자로는 데시데리오 다 세티냐노 Desiderio da Settignano(1428~1464), 미노다 피에졸레 Mino da Fiesole(1492~1484), 안토니오 델 폴라이올로 Antonio del Pollaiolo(1431~1498)가 있다. 레오나르도의 스승 베로키오 Verrocchio(1435~1488)는 유명한 <돌고래를 안은 아이 Putto col delfino>에서 그의 세련된 예술을 보여주고 있으며 <콜레오니 기마상 Bartolomeo Colleoni(베네치아)>은 박력이 넘친다.
그림 돌고래를 안은 아이 Putto col delfino 그림 콜레오니 기마상 Bartolomeo Colleoni
15세기의 회화는 당초 국제고딕 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작품으로는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 Gentille da Fabriano(1370~1427)의 <동방 3박사의 예배 Adorazione dei Magi(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피사넬로 Pisanello(1395~1455)<성게오르기우스의 출발 Partenza di San Giorgio(벨로나, 카스테르베키 미술관)>, 프라 안젤리코Fra'Angelico(1400~1455)의<수태고지 Annunciazione(피렌체 산 마르코 미술관)>,마조리노 다 파니칼레 Masolino da Panocale(1383~1440)의 <헤로데 대왕의 향연 ∏ Banchetto di Erode(카스틸리오네 오롤라 세례당)> 등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르네상스 회화를 확힙한 사람은 마사치오 Masaccio(1401~1428)였다. 불과 27세로 요절한 마사치오는 브루넬레스키ㆍ도나텔로의 혁신적 기풍을 회화에 살려 엄격한 조형성을 지닌 인물을 구체적인 공간에 배치하여 사실주의를 추구했다. <성 삼위일체(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헌금∏ tributo(칼 미네성당, 브란카치 예배당)>등의 작품이 있다. 마사치오를 이은 15세기 전반의 화가는 원근법을 추구한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1396,1397~1475)와 아름다운 빛의 도메니코 베네치아노Domenico Veneziano, 사실적 파악에 뛰어난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Andrea del Castagno(1421~1506)가 있다.
그림 삼위일체 그림 헌금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기념적인 양식을 만들어낸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Piero della Francesca(1410,1420~1492)는 청랑ㆍ명석한 <성 십자가 전설 Leggenda della croce 벽화 연작(아레초, 산 프란체스코 성당)>을 제작하였고, 프라 안젤리코의 제자 베노초 고촐리 Benozzo Gozzoli(1420~1498)는 화려한 궁정취미를 필리포 리피 Fillippo Lippi(1406~1469)는 서정적인 것을그렸다.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1445~1510)는 메디치파의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프리마베라 La Prinavera(봄)>, <비너스의 탄생 La Nascita di Venere(피렌체, 우피치 미술관)>등을 그렸다.
그림 비너스
그림 봄
15세기 피렌체파의 사실주의를 이끌어간 작가로는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1449~1494)가 있다. 또 인간의 나체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강한 관심을 기울인 루카 시료렐리Luca Signorelli(1492~1502)는 오르비에토 대성당에 벽화 연작을 남겼다. 움브리아 지방에서는 페루지노Perugino(1450~1523)가, 베네토 지방의 파도바에서는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1431~1506)가 각각 북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회화를 본격적으로 추구했다. 또 베네치아파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안토넬로 다메시나Antonello da Messina(1430~1497)로 플랑드르파의 유채기법을 이 지역에 전파했다고 한다. 조반니 벨리니 Giovanni Bellini(1430~1516)는 격정적이고 사실적인 <피에타 Pieta(밀라노, 브레라 미술관)>에서 극도의 시적인 서정설을 표현하여 이후 베네치아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림 조반니 벨리니 Giovanni Bellini피에타 그림 피렌체 대성당 시계. 시계바늘이 시계반대
방향으로 돈다.
세례자 요한은 검은 낙타 털옷을 걸치고 세례를 주고 있다. 표정과 자세가 퍽 진지하다. 그러나 광야에서 설교하는 요한이 황금빛 겉옷을 화려하게 걸친 것은 어쩐지 어색하다. 예수도 독특한 줄무늬 허리 수건을 맸다. 그림을 통해서 피렌체 특산 직물을 자연스럽게 광고할 수 있었다. 예수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있다. 하얀 비둘기가 기쁜 날갯짓을 퍼덕이며 날아 내려온다. 레오나르도는 천사 둘을 더 그려 놓았다. 그래서 그런지 엄숙한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 보인다. 왼편에는 야자수가 있다. 베로키오<예수 세례>를 그리면서 동방의 분위기를 나타내려고 했나 보다. 이 작품에서 레오나르도가 손댄 부분은 어느 곳일까? 야자수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 두 명의 천사. 이 천사들이 바로 어린 레오나르도의 솜씨다. 예수의 발목을 적시면서 흐르는 투명한 물살과, 예수의 어깨 뒤로 아스라이 보이는 뒤쪽 배경 풍경도 레오나르도가 그렸다. 이 날 레오나르도의 솜씨를 본 베로키오는 몹시 놀랐다. 어린 제자가 자기보다 더 그림을 잘 그리니 그럴 수밖에. 그리고 그 날 이후 다시는 붓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림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와 레오나르도가 그린
<예수세례>1475~1478년.템페라와 유화. 177×151cm.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천재들의 시대
16세기의 르네상스는 각 분야에서 전성기였으며 미술에서는 레오나드로 다 빈치ㆍ미켈란젤로ㆍ라파엘로라는 천재가 나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14525~1519)는 보티첼리와 거의 같은 시대에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 양식을 확립했다. 만능으로 과학ㆍ예술 양쪽에 통달했으며 회화제작이 외에도 자연을 탐구한 방대한 소묘와 원고를 남기고 있다. 원근법을 집대성했고 수푸마토sfumato<안개처럼 사라지다>라는 새로운 명암법(안개와 같이 색을 미묘하게 변화시켜 색깔사이의 윤곽을 명확히 구분 짓지 않고 자연스럽게 옮아가도록 하는 명암법)을 구사해 형태와 정신을 통일적으로 표현한 <최후의 만찬 Ultima Cena밀라노,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모나리자 La Gioconda(파리, 루브르 미술관)>를 남겼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는 피렌체의 인문주의적 환경에서 자라 로마에서는 출세작 <피에타 Pieta(바티칸 산 피에트로 대성당)>, 피렌체에서는 <다비드 상 Davide(아카데미아 미술관)>을 제작해 호평 받았다. 그후 프레스코화인 <천지창조 Genesi>와 <최후의 심판 Giudizio Universale(바티칸,시스티나 예배당)>의 대작에서는 초인적인 기량을 과시했다. 이 두 사람에 이어 르네상스 거장의 한 사람으로 거론될 수 있는 작가가 라파엘로 산치오 Raffaello Sanzio(1483~1520)이다. 그는 이 시대의 거장들이 달성한 성과를 흡수하여 천성이 아름답고 우아한 심정에 의한 이상미를 구축한다. 바티칸 궁전의 여러 방을 장식하는 프레스코화 연작<아테네의 학당 Accademia di Atene>외에도 많은 성모자 상을 남겼다.
그림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그림 천지창조 Genesi
그림 최후의 심판 Giudizio Universale 그림 라파엘로의 아테네의 학당 Accademia di Atene
결국 도시국가들의 공화정은 무너지고 독재정권이 도시를 장악하게 되는데 피렌체는 Medici 메디치 가문이 실권을 잡고 여러 대에 걸쳐 권력을 물려받으며 독재정치를 편다. 북부는 도시국가 중심으로 남부는 봉건왕국들이 세력을 갖다가 16세기 이후 점차 몰락하게 된다. 200여 년간의 십자군 전쟁은 동방의 문화가 유럽에 전파되었고 지중해와 접한 도시국가는 해군력을 바탕으로 엄청난 부를 얻어 세력을 펼쳤다. 그러나 오스만투르크의 등장으로 동방무역이 어렵게 되자 도시국가들이 쇠퇴한 반면 유렵의 다른 나라들이 동방과의 무역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에스파냐가 최대강국으로 부상하였으며 점차 프랑스 세력이 강해져서 이탈리아 반도에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16세기 이후 이탈리아는 도시국가들이 가난하고 황폐해 졌다. 이들 여러 나라 가운데 사보이SAVOIA왕국은 프랑스 부르봉 왕가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분쟁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하여 점차 영토를 확대한 후 북부 이탈리아의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 후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이 되었다. 이탈리아 통일운동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 즉 자유, 평등, 박해의 혁명 정신과 봉건 왕권에 도전하는 자유주의 정신은 이탈리아 반도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통일 민족국가를 이루겠다는 독립의지가 타오른 것이다.
세계를 지배했고 문명을 전파했으며 르네상스를 통해 문화의 종주국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 이탈리아 민족은 리 소르지멘토Ri Sorgimento 대로마시대 영화의 부활이라는 운동으로 통일을 주도했다. G.마치니 , C. 카보우르 , G. 가리발디 비토리오 에미누엘레 2세가 주축이었다. 이탈리아란 라틴계 민족으로 반도의 원주민의 하나였기 때문에 이민족의 이름을 따서 이탈리아ITALIA반도라고 불렀다. 그 주역이 피에몬테-샤르데냐 왕국이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손잡은 가리발리에 의해 이탈리아 반도는 통일된다. 르네상스와 연결하여 피렌체는 상공업이 발전하였는데 알프스 산맥의 지류인 알펜즈 산맥은 십자군들이 산맥을 넘기 전에 이곳에서 부대 정비를 하였던 것으로 병참과 관련하여 모든 군수물자를 보충해야 했으므로 이를 위한 공업이 발전했다. 왕권과 군주 간의 갈등은 군주세력의 약화를 가져왔고 당시 코즈모 1세와 메디츠 가문의 대립은 돈 많은 상공업을 배경으로 한 메리츠 가문의 권력 상승과 그들의 조합인 길드가 형성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위치 상승을 위해 대단위 성당을 건립하여 종교를 일반화 하였고 예술을 장려하였으며 당시의 최고의 예술가를 집결시켜 문화 우위를 내세웠다. 여기서 도시국가인 피렌체 공화국이 탄생하였으며 피사지방까지 확장하였다. 도시국가로서 유일하게 프랑스 국가와 조약을 체결하는 등 메디치가의 영향력은 막강하였다. 유명한 학자를 모아서 가문의 자녀들에 대한 교육을 전담케 하고 학문을 부흥시키는 등 신 앞에 만민은 평등하다는 평등박애 정신을 전체적인 분위기로 이끌어 유럽에 전파하였다. 이런 도시국가들의 영향 하에 14C 르네상스는 절정기에 이르고 15C와 16C를 거치면서 쇠락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메디치 가문도 멸망하게 되고 상업은 북상하여 북쪽에 위치한 국가들이 강국으로 부상하고 메디치 가문의 딸이 프랑스로 시집가면서 끝나게 되는데 그때 요리법을 갖고 가서 프랑스요리가 유명해졌고 그 당시의 도시국가의 사상은 프랑스 혁명의 기원이 되었다.
로마 공화정의 약자로서 SPQR
S 시나투스 (귀족)
P 포플루스 (서민)
Q and
R oma
을 사용하는데, 공화정은 귀족과 평민이 함께하는 로마라는 뜻이고 서민은 하원을 구성하고 서민에서 호민관을 선출하여 정치를 하게 하였다. 공화정을 상원과 하원이 함께 한다는 뜻이다. 로마의 국기에 보면 방패를 쓰기도 한다.
가이드는 로마공화정에서부터 포에니전쟁까지 역사를 설명하였다. 에트루리아의 지배를 받던 로마가 힘을 얻어 독립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면서 일화를 ‘가이드’는 말하였다.
로마는 교통의 중심지였고 중요한 무역 항구로 번창하게 되자 에트루리아로부터 독립을 요구하게 되고 이에 로마 관통을 통제하게 되니 로마는 수입원이 끊기고 심각한 경제난을 겪게 된다. 이를 계기로 로마인은 에트루리아에 대한 복수심이 쌓이는데 그 감정을 촉발시킨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로마의 ‘루크레티아’라 미인 때문이라 한다. 로마의 이름깨나 있는 사람들이 ‘루크레티아’를 아내로 맞으려 하는데 에트루리아의 왕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색스투스’가 ‘루크레티아’를 강제로 납치하자 ‘루크레티아’가 반항하여 자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로마의 ‘루키우스유니우스 브루투스’ 란 청년이 로마의 젊은이들을 선동하여 싸움이 일어나고 ‘에트루리아’를 몰아내고 독립을 하게 되었다는 (BC509년경)일화가 있다. 역사에서는 사실이 아닌 것이다. 이후 로마는 공화정을 이루고 로마 사람들을 세 계급으로 나누는데 귀족계급, 평민계급, 노예계급으로 분류하고 최고의 권력자를 귀족 중에서 2명의 ‘통령’을 뽑고 임기를 1년으로 했다. 그리고 귀족 중에서 300명을 뽑아 ‘원로원’을 구성하였으며 평민은 전시에는 군인으로 나가 싸우고 세금을 바치며 ‘평민회’를 구성하고 2명의 ‘’호민관‘을 뽑아 평민을 보호하고 대표하는 임무를 가졌다.
이 제도는 로마가 공화정을 시작하고 한참 후에 생겼다. 처음에는 집정관과 원로원 등 귀족만이 정치를 할 수 있었는데 로마가 독립 후 영토를 늘리기 위해 크고 작은 전쟁을 자주 하다 보니 귀족만으로는 군대가 부족하여 평민에게 전쟁에 나가도록 의무화 하면서 평민의 권익이 커졌다. 따라서 평민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치참여를 요구했고 귀족과 평민은 평등한 권리를 ‘성산사건’으로 인정되었다. 그래서 ‘호민관 TRIBUNES' 2명을 선출하여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후 귀족에서 뽑던 ‘집정관’도 귀족1명, 평민에서 1명으로 구성하면서 귀족과 평민은 완전 평등해졌다. 이로서 로마는 완전한 공화정으로 부를 축적하게 되고 정복지의 지배자로 등장하게 되자 절대 권력자인 ‘황제’가 필요한 제국주의로 바뀐다. 이 시대에 그리스세력의 중심인 ‘알렉산더’ 대왕이 죽자 제국은 분열되었고 북아프리카 북쪽의 ‘카르타고’와 맞서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해군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기회를 노리던 로마에게 때가 왔다. 그것은 이탈리아 반도 코앞에서 ‘시칠리아’ 섬을 두고 일어났다. 지중해 항로상 시칠리아 섬은 중요하였다. 이 섬은 독립된 나라로 ‘메시나’가 이 섬의 중심도시 였는데 이곳의 왕은 ‘히에른’ 이란 젊은 왕으로서 왕은 이웃의 침략을 막기 위해 싸움 잘하는 ‘마메르티니’족의 청년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용병들이 폭동을 일으켜 왕을 쫒아내고 ‘메시나’를 다시 공격하자 숫자적으로 열세인 ‘마메르티니족’은 카르타고와 로마로 동시에 도움을 청하게 되는데 두 국가 모두 승낙을 하게 된다. 로마는 즉각 군사를 보내서 ‘메시나’를 점령하고 도움을 요청한 ‘마메르티니’ 반란군마저 처치하고 로마 령으로 선포한다. 로마를 얏 보고 한발 늦게 도착한 카르타고는 분노하였고 원 주인인 ‘메시나’의 왕 ‘히에론’은 로마의 처사에 공분하여 양국은 동맹을 맺고 로마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니 100여년이 넘는 ‘포에니’ 전쟁의 시작이었다. 육지에서는 로마가 이겼으나 바다에서도 카르타고가 이겼다. 각국은 취약한 육군과 해군력 보강에 노력하였고 준비했다. 처음 전쟁은 ‘시칠리아’섬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으나 로마가 ‘카르타고’본국을 공격함으로써 직접 대결로 들어갔고 이때 카르타고는 그리스 용병의 도움으로 ‘로마’군을 물리친다. 이 전쟁에서 10만의 병력을 잃고 패배한 로마군은 이후 꾸준히 군사력을 다시 건설하여 이번에는 다시 지중해에서 카르타고와 아이가테스 해전을 벌여 승리하여 23년간의 전쟁을 끝내고 시칠리아 섬을 완전히 점령하고 거액의 전쟁 보상금까지 받아 지중해의 실력자로 굳히게 된다. 전쟁에 진 카르타고는 용병들이 이탈리아 반도 인근의 카르타고 령 사르테냐 섬으로 도망을 가게 되고 로마가 이를 구실로 사르테냐 섬 마저도 로마 령으로 선포하고 위자료까지 징수하게 된다. 카르타고는 로마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었고 원한과 분노의 감정이 길어졌다. 그것을 대표한 인물이 라밀카르 바르카 Hamilcar Barca 란 장군이었고 그는 로마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있었다. 그의 아들을 데리고 카르타고의 신인 ‘타니트’ 신전에서 로마에 복수할 것을 맹세했는데 그 아들이 ‘한니발’이다. 이윽고 ‘한니발’이 카르타고의 총사령관이 되자 국력을 회복하고 신장시켰다. 그 때 ‘에스파냐’지방의 분쟁을 계기로 카르타고가 개입하며 영토와 세력을 뻗게 되었고 이를 로마에서 불안하게 여겨 개입하게 되니 두 세력은 ‘’사군틈‘에서 맞붙게 되었다. BC 219년 제 2 차포에니 전쟁의 발발이었다. ‘사군툼’성을 함락한 ‘한니발’은 로마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수성에 돌입하였다. 초조한 로마군이 ‘카르타고’본국을 공격하자 한니발은 BC 218년 여름 4만의 정예군으로 세계 역사상 유명한 ‘한니발의 대행군’을 시작하는데 이는 로마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로마군의 진영을 우회 기동하였고 로마군이 당황하여 다시 마실리아Massilia 지금의 ‘마르세이유’ 항구에 집결하여 ‘한니발’ 군대를 맞아 진군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한니발’이 4만 대군과 코끼리부대를 앞세워 넘어가 로마군을 기습하게 된다. 당황한 로마군을 ‘한니발’이 ‘트레비아’ 강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로마로 진격한다. 이제 ‘한니발’이란 이름은 로마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어서 우는 아이도 ‘한니발’이란 이름에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이때 한니발은 병을 앓던 한쪽 눈을 잃고 외눈이 되었지만 그의 의지는 병으로 막지 못했다고 한다. 한니발이 계속 로마를 향해 진군하고 계속되는 로마군의 패전으로 위기에 몰렸다. 로마는 ‘파비우스 막시무스’장군을 사령관으로 하여 각 지역으로 흩어진 로마군을 집결시키고 그때까지 수성의 지공작전을 폈다. 각 지역에 흩어진 로마군의 집결로 전투력이 우세해지자 로마와 카르타고는 칸나이 cannae 벌판에서 BC 216년 대전을 벌렸다. 그러나 코끼리를 앞세운 한니발 기병에 의해 로마군이 8만 명의 군사를 잃고 처참하게 패배한다. 이후 이탈리아 남부 여러 도시도 한니발에 항복했고 로마는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때 로마는 에스파냐 지방 로마사령관이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장군이 있었는데 ‘스키피오’ 부자지간으로 불리는 그는 로마의 위기소식을 듣고 카르타고 본국의 방어가 허술할 것이라 여겨 시칠리아를 거쳐 카르타고 본국을 침공하였다. 카르타고는 한니발에게 돌아와 나라를 구할 것을 명령했고 조국을 구하기 위해 돌아온 한니발은 본국의 자마레기아ZamaRegia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던 스키피오 대군과 맞닥뜨렸다. 그러나 15년간의 원정에 지친 한니발군대는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 ‘한니발’도 외국으로 도망을 갔다. 결국 ‘카르타고’는 BC 201년 로마에 항복하고 18년의 제2차 포에니전쟁은 끝나게 된다. 로마는 ‘스키피오’에게 아프리카의 대장군이란 뜻의 ‘아프리카누스’란 명칭을 부여했고 카르타고와 평화조약과 막대한 보상금을 물리게 했다. 그래서 영원히 군대를 갖지 못하도록 묶었는데 그 동맹이 제3차 포에니 전쟁의 빌미가 되었다. 카르타고의 옛 영역을 모두 뺏은 로마는 50년간 지배하면서 차츰 관심을 그리스 세력의 추출에 두고 있었다. 그 사이 다시 부강해진 카르타고를 로마는 불안하여 그 이웃나라인 누미디아를 부추겨서 카르타고로 하여금 평화조약을 위해하게 만든다. 즉 누미디아의 계속된 침공은 군사력을 사용하는데 로마의 승인이 필요한 카르타고로서는 통제 받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이에 다시 분노한 카르타고가 군대를 결성하여 ‘누미디아’를 무찌르니 로마가 전쟁을 선포하자 두 번에 걸친 전쟁에서 참패를 당한 카르타고가 화평사절을 보내서 무마하려 하였으나 로마는 거절하고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또는 작은(小) 스키피오라는 2차전쟁 시 스키피오장군의 수양아들인 장군을 보내서 화평의 조건으로 무장해제를 시킨 다음, 자진 무장해제한 카르타고를 공격하였다. 로마에 속은 카르타고 인들은 맨손으로 성을 3년 동안이나 지켜내었다. BC 146년 카르타고가 함락되자 성에 입성한 스키피오 장군은 카르타고 인들의 저력을 탄복하며 살아남은 사람들을 성밖으로 끌어내고 모두 불태워 버림으로써 카르타고는 이 지구상에서 한줄기 연기 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땅을 로마의 영토로 귀속시키고 지중해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팍스 로마’ 로 발돋음하여 서양세계의 중심으로 등장하였다.
피렌체로 향하는 길의 좌우에는 목초지가 끝없이 펼쳐 있었고 산들이 높지 않았다. 주로 산악지형은 동쪽에 형성되어 서쪽으로 형성된 도로의 열에는 밭이 많고 그중에 유채밭은 아주 넓고 노랗게 핀 꽃으로 아름다움을 더했다. 얼마를 가다가 우리는 피렌체에 들어갔고 잠시 쉬었는데 그것은 도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도심 진입 비용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다. 도시에 들어서는 입구에 사람분수가 있었고 아레나강을 끼고 시내 도로를 따라 미킬란젤로 언덕을 행하여 갔다. 그들은 큰 강이라고 말하면서 자랑한다는데 폭이 50m도 되지 않아 보였고 다리라지만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가이드’가 음악도 라서 우리 일행 중에서 자꾸 노래를 한곡 부르라고 성화하여 재촉했으나 끝내 그는 부르지 않았다. 오히려 못 들은 척 딴소리하기를 우리 한국 사람은 남을 인정하는 습관만 있다면 참~ 좋은 나라가 될 것입니다. 봉이 김선달만 하더라도 그 당시에 벌써 물을 팔 생각을 했으니 지금 유럽에서 모두가 물을 사먹어야 하는 것을 보면 이미 그는 선각자였던 셈입니다. 갑자기 왠 김선달? 그러니 화두를 빗겨가고 싶은 거지, 피렌체 역시 3~4층의 건물로 이루어진 잘 정리된 도시였고 거리를 갖고 있었다. 주 메인Main 도로는 아스팔트로 되어 있지만 도심지와 건물들 간의 사이도로는 과거의 돌들을 깔아 만든 옛 도로였다. ‘가이드’는 오 미오 밥비노 까로, "O mio babbino caro"(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노래인 <쟌니스키(푸치니의 코믹오페라)> 의 테마곡의 배경이 이곳 피렌체라고 하였다. 순간 뒷좌석의 일행 중에서 ‘좀마세끼?’ 라고 하자 일행이 폭소했다. 내용은 여자와 결혼을 승낙해주지 않으면 아르노강에서 투신하여 죽겠다고 아버지를 협박하는 곳이란다. 뒷좌석에서 단 엇박자 웃기는 소리로 ‘도랑’에 어떻게 투신하노? 다시 웃음이 쏟아졌지만 우리가 보기에도 하천 수준이었고 물살도 없이 그냥 소량의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별 폼 없었다. 지금은 50만의 인구가 상주하고 있는 소도시이며 외국인에 대한 혜택이 많고 특히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없다고 한다. 한국의 음악가 정명훈이 이곳에서 유학했으며 피렌체 극장 부지휘자를 했었다고 했다. 피렌체는 꽃의 도시이며 flower라고 하는 어원이 되기도 하다. 우리는 미켈란젤로 언덕에 올라서 시내를 내려다보며 사진도 찍고 전경을 보았다. 분지형태의 도시인데 시내의 건물은 높지 않게 잘 정돈되어 있었고 지붕은 주로 붉은색 기와였다. 군데군데 성당의 종탑과 돔들이 솟아있었고 아르노강이 길게 가로로 뻗어 흐르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를 기념하여 공원을 잘 조성하였고 중앙에 동상을 세워놓았다. 차에 올라 시내 관광을 위하여 내려갔다. 강변도로에 차를 세우고 모두는 내려서 관광에 들어갔는데 날씨가 좋아서 우산을 놓고 갔다. 이탈리아 날씨가 몹시도 변덕스러워서 우리 부부는 각자의 우산을 준비했다. 점심시간이어서 식당에 들러 스파게티를 시켜 먹었다. 제법 맛있었다. 역시 한국 관광객으로 무척 붐비는 것이 이곳 ‘가이드’들이 식당과 ‘커넥션’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너무 붐비고 복잡하고 기계적으로 음식을 내오는 바람에 그 나라의 음식문화를 맛보고 느끼기에는 부족했다. 식사를 하고 나오니 비가 쏟아졌다. 나는 우산이 있어서 피할 수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비를 맞기도 하고 별 수 없이 나타난 우산 장수에게 5€를 주고 다시 샀다. 우리 일행은 곧바로 두오모 성당으로 갔다. 성당의 규모는 웅장했고 지금 보수중이라 가림판이 있었다.
옆의 종탑과 앞의 세례당의 ‘천국의 문’해설을 들었다. 성당 내부를 구경하고 내부의 장엄한 분위기와 수많은 성화와 조각품에 감탄했다. 소규모의 미사격실을 둘러 묵상하고 시간이 제한되어 밖으로 나와서 기념 촬영하고 ‘천국의 문’을 들여 다 보았다. 수많은 작품의 역사를 짧은 순간에 이해 할 수도 없고 오묘함에 감탄할 따름이다. 다시 집결하니 일행 중에 가죽제품 가방을 싸게 샀다고 하니 아내가 위치를 물어서 뛰어가 바삐 사서 일행에 합류했다. 어두운 골목을 들어서니 ‘단테’생가가 있어서 구경하고 기념사진 촬영 했는데 조그만 공터를 만들어서 관광객을 맞고 있었다. ‘연극 공간’도 있었으나 내부가 좁고 어두워서 바로 지나왔다. 일행은 ‘페루지나’면세점에 들었다. 가죽제품을 판매했는데 이곳에서 나는 ‘혁대’ 하나를 구입했는데 나중에 보니 싸고 좋았다. 아내는 하나 더 구입 했으면 좋았다고 아쉬워했다. 나와서 우리는 ‘메디츠광장’에 도착하여 ‘메디치’가의 영광을 알 수 있었다. 각각의 조각품과 당시 상대했던 국가와 가문들의 문장, 그리고 동상, 미술품 등은 당시의 권력의 힘이 막강했고 그 중심에 있었다고 생각했다.
롬바르디아 주 요리
북 알프스 산들을 끼고 스위스와 접해 있는 롬바르디아는 이탈리아에서도 손꼽히는 축산ㆍ농업지이다. 북이탈리아가 그렇듯이 이곳도 건조한 파스타보다 손으로 친 파스타나 폴렌타ㆍ쌀요리를 좋아한다. 호박을 이용한 파스타 요리에 토르텔리 디 추카Tortelli di Zucca와 체에 걸른 호박과 소맥분으로 만든 경단 모양의 Gnocchi di Zucca가 있다. 꽃향기를 가진 백포도주 Lugana를 권한다. 베르가모의 명물 요리는 Polenta eosei alla bergamasca이며 와인 Colle del Calvario rosso를 권한다.
그림 코톨레타 알라 밀라네제(Cotoletta alla Milanese)는
쇠고기를 얇게 저며 튀긴 커틀릿으로 밀라노의 대표적 요리이다.
같은 리듬으로 우리는 다음 관광을 위해 도시를 빠져 나왔다. 강변에서 차를 기다리니 조금 늦게 합류하여 모두 탑승하여 다음 베니스 관광을 위해 출발했다. ‘로마’에서부터 우리를 안내했던 성악 유학생 ‘가이드’는 거기까지 끝내고 도시 입구에서 내렸다. 다시 로마로 복귀하기 위해서이다. 그의 얘기는 연계 관광버스나 팀이 있으면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데 없으니 열차를 이용할 것이라 한다. 열차표가 없어서 대기표라도 구해야 하는데 어렵다며 우리와 인사하고 내렸다. 걸쭉하고 그의 개그맨 친구(유재석) 이상의 유머를 지닌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박수로서 격려해주었다. 로마의 유학이 그의 앞날에 행복을 주었으면 하고 외국에서 한국인으로서 모두 힘을 합하여 잘 생활하고 있으니 보기도 좋았다. 오후 16시 20분 우리는 베니스로 향했다. 피렌체는 꽃의 도시이며 피혁의 특산지입니다. 우리 ‘가이드’는 계속 설명했다. ‘구찌’도 명품인데 나폴레옹의 말안장을 만들게 된데서 유명해졌습니다. 전쟁터를 누비고 장거리는 말을 타는데 나폴레옹이 너무 편하여 물으니 ‘구찌’라는 수공장이라 만들었다하니 그 이후 ‘구찌’ 말안장만 사용했데서 유명해졌다는 것이다. ‘루이비똥’도 마찬가지라 한다. 그러면서 몇 가지 이태리어를 알려주었다.
‘벨라피구자 = 멋지다’
‘챠오벨라 =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인사’
‘챠오벨로 = 여자가 남자에게 하는 인사’
뜻은 ‘안녕하세요 아름다운 아가씨’
‘챠오챠오’ 같은 뜻이니 어떤말을 쓰든지 좋다고 한다.
Ciao Buon giorno = “좋은하루!”
챠오 본 조르노
Signore 시뇨레 Mr
Signora 시뇨라 Mrs
Signorina 시뇨리와 Miss
볼로냐 Bologna
■역사
로마의 길 중 하나인 아에밀리아 가도Via Aemilia가 건설되면서 그 연변의 중심 도시로서 5세기까지 번영하였다. 그 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볼로냐 대학은 11세기에 문화ㆍ학문의 일대 중심지가 되었다. 전 유럽에서 학생이 모여들어 인구가 증가하고 경제도 발달했다.
지리적으로 북부와 중부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북유럽으로부터는 고딕문화, 동방으로부터는 비잔틴, 교황이 있는 로마에서는 교회의 힘을 받아들여 다양한 사상과 예술이 볼로냐에 유입되었고 이에 따라 사람들은 이것들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며 동화해 갔다.
그림 아에밀리아 가도Via Aemilia 그림 볼로냐 시내
●구볼로냐 대학 Palazzo dell' Archiginnasio
아르키진나시오 궁전은 1803년까지 볼로냐 대학으로 쓰였으며, 11세기에 창립된 이래 유럽 최고의 대학으로 각지에서 학구파들이 모였다. 자유도시 볼로냐의 대학에서는 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초로 인체 해부가 이루어져 화제가 되었다.
그림 아르키진나시오 궁전(구볼로냐 대학 Palazzo dell' Archiginnasio)
"Alma Mater Studiorum - Università di Bologna"모든 학문이 퍼져나간 곳이라는 의미
"세상의 학문을 하나로 모았다."는 의미로 라틴어로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라고 했다. 영어로 대학University이다.
고속도로를 다시 가면서 북부지역의 주요도시 특성에 대하여 소개했다. ‘밀라노’는 의류패션의 도시이며 웨딩산업을 선도하고 있다. 그리고 ‘피렌체’는 이들 제품의 판매도시이며 깜빠니아는 남중부 평야인 반면 롬바르디아는 중부평야입니다. 볼로냐는 유럽 최초의 대학이 들어섰으며 ‘유니버스’어원인 ‘유니베로 스타’가 탄생한 곳이기도 합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레드릭 대왕을 신 중심의 사상을 인간중심 사상으로 변화시켰고 그 역할을 대학들이 하였습니다. ‘책 박람회’ 로는 유명합니다. 북쪽 지역에 위치하여 ‘에틱’가구를 수집 판매하는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가는 곳마다 ‘오르테’,‘오르비테’라 하여 산정상의 도시, 언덕의 도시라고 하여 도시들이 산 정상에서부터 발달하여 있었다. 전 지역이 오면서 보니 그렇게 형성되어 있어서 이제는 당연시 보였다. 우리는 20시에 호텔에 도착하여 식사를 하였다. 방에 들어가니 앞선 투숙객이 담배를 피워서 인지 담배 냄새로 무척 힘들고 샤워시설도 엉망이어서 불편했다.
그림 레오나르도 다빈치<수태고지>,1470~1473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꽃향기가 달콤한 안뜰에서 천사와 마리아가 만났습니다. 천사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심부름꾼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스물을 갓 넘긴 나이에 큼직한 그림을 한 점 그립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찾아왔습니다. 약혼한 요셉은 마침 베들레헴으로 떠나고 없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는 장면이지요. 천사의 말씀에 마리아는 반항하지 않고 순종했다고 합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면서 겸손하게 따랐다고 하지요. 손바닥이 바깥으로 보이도록 쳐든 마리아의 왼손은 ‘기꺼운 영접’을 의미합니다. 레오나드로 다빈치는 천사 뒤쪽에 하느님이 내신 울창한 자연을, 마리아의 뒤쪽에 인간의 손으로 지은 건축을 배치했습니다.
그림 보티첼리 ‘수태고지’ 그림 시모네마르티니 ‘수태고지’
그림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그림 프라 안젤리코 <수태고지>
1440년께. 프레스코. 187×157cm. 프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프라 안젤리코는 수사입니다. 낮에는 그림을 그리고 밤에는 기도를 하면서 경건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텅 빈 수도원 회랑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을 낮춘 마리아는 시골 처녀처럼 순박해 보인다. 레오나르도보다 먼저 안젤리코도 천사와 마리아의 만남을 그렸다. 이번에는 마리아가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엇접어 가슴에 포갠 자세는 ‘복종’을 의미 한다. 스스로 결박하고 상대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이처럼 마리아는 천사 앞에서 자신을 낮춥니다. 순수한 겸손의 꾸밈없는 덕목이다. 수사였던 프라 안젤리코는 수도원 회랑을 신성한 만남의 장소로 정했다. 십자가 형태로 교차하는 여유 있는 천장 구조는 그림 공간을 뒤로 멀찌감치 밀어낸다. 레오나르도의 그림이 풍경 속에서 신비롭게 숨 쉬고 있다면, 안젤리코의 그림은 천사와 마리아의 만남을 수학적 공간 속에 늘어놓은 느낌이다.어머니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어르는 사랑스러운 장면이다. 그림의 어두운 뒷벽에 밝은 회랑이 뚫려 있어서 꼭 빛의 존재가 함께 있는 것 같다. 마리아는 회랑이 보이는 실내에 앉아 있다. 아기 예수는 마리아의 품에 안겨 있다. 회랑 바깥으로 멀리 산이 보인다. 레오나르도는 성 처녀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하신 일이 사람의 손길이 닿은 적이 없는 처녀지의 풍경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나 보다. 이 그림은 오른쪽의 물병 때문에 <물병의 성모>라는 제목으로도 불린다. 투명한 물병은 마리아의 순결하고 정결한 성품을 말한다. 또 카네이션은 라틴어로 ‘디안투스’, 곧 ‘신의 꽃’으로 불렸다. 레오나르도의 그림을 풀어 보면, 마리아는 아기 예수에게 수난의 상징을 보여 주고, 아기 예수는 자신의 무거운 운명을 기꺼이 제 것으로 삼는다는 줄거리가 된다.
그림 미켈란젤로 톤도도니
레오나르도보다 스물세 살 아래인 미켈란젤로도 마리아와 아기예수를 그린 적이 있다. 마리아가 들판에 앉아서 아기예수를 아버지 요셉에게 넘겨주는 장면이다. 도니가문의 주문으로 그렸다고 해서 톤도(둥근메달) 도니라고 부른다. 레오나르도의 성 모자그림에는 트인 공간이 있다. 가까운 곳과 먼 곳이 잘 어울리면서도 분명히 구분된다. 레오나르도의 그림이 붓으로 그린 회화작품이라면 미켈란젤로의 것은 끌로 새긴 조형에 색깔만 입힌 것 같다.
그림 레오나르도 다빈치 <물병의 성모>. 그림 조르조네 <책 읽어주는 성모>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어르는 성모는 손에 흰 꽃을 쥐었습니다. 겨자 꽃입니다. 꽃잎이 십자가처럼 갈라졌다고 해서 수난을 상징하는 꽃말을 가지고 있지요. 레오나르도가 그린 이 그림처럼 성 모자나 초상화를 그릴 때 그림 뒤 배경을 어둡게 처리하고 쪽창을 내는 구성은 그 당시 베네치아 미술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베네치아의 화가 조르조네가 그린 <책 읽어 주는 성모>도 그런 구성이다. 창문 너머 산 마르코 광장의 높은 종탑이 보인다. 마리아와 예수가 지금 다시 살아나서 오늘의 베네치아 역사와 더불어 숨 쉬고 있는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교회 미술이 요구하는 딱딱한 격식이나 종교적 엄숙함은 잠시 밀어두고, 사랑과 웃음이 넘치는 정겨운 모습을 그렸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인체의 생김새와 움직임을 연구하는 데 뜨거운 관심을 쏟았습니다.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 장면. 아주 흔하게 그려졌던 그림이다.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한테 미움을 단단히 받아서 들판에 말뚝을 박고 매인 채로 화살을 맞았다고 한다. 황제는 잔인하게도 세바스티아누스의 부하들을 시켜서 상관을 쏘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자기가 모시던 상관을 제 손으로 죽여야 하는 궁수들의 마음이 예사로울 수 있을까? 황제의 지엄한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따르기는 하지만, 궁수들이 감추고 싶어 하는 괴로운 표정과 내키지 않는 동작을 붓으로 그려 내야 합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자니 자연히 어깨와 근육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가고 경직돼 있다. 보이지 않는 속마음과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줄거리에 어울리게 표현하는 일은 화가나 조각가에게 가장 중요한 학습이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사람의 몸, 곧 인체를 관찰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림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와 〈헤라클레스와 안타이오스>1470~1475년 제작
그림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가 만든 그림 페루지노가 그린<아폴론과 마르시아스>,
<헤라클레스와 안테오스>1473년. 청동 45cm. 1500년 이후. 유화 39×29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피렌체 바르젤로 미술관
피렌체 대학의 의학부에서는 실제로 죽은 이의 시신을 1년에 두세 구씩 열어서 해부를 했다고 한다. 물론 의과생도를 가르치기 위한 교육용 해부였다. 쉬이 부패할까 봐 겨울철에만 하는 일이었다. 해부를 하면 들여다 만 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림을 그리게 했다. 뼈와 근육뿐 아니라 피부와 장기에 이르기까지 모양과 위치를 정확하게 기록하게 했다. 마르시아스가 피리를 분다. 못생긴 괴물이었지만 그의 음악은 비길 데 없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마르시아스 발치 아래에서 풀꽃들이 앞 다투어 피어나고, 멀리서 새들이 귀를 쫑긋대며 날아온다.
중세 후기에는 독립. 교회가 예술의 가장 큰 후원자였다. 교회를 지으려면 건축 기술뿐 아니라 안팎을 장식할 청동과 석조 조각이 필요했다. 색유리창과 벽걸이 양탄자를 완성할 화가도 고용해야 했다. 피뢰침이 아직 발명되기 전이라서 하늘 높이 치솟은 교회는 걸핏하면 벼락을 맞고 무너져 내렸다. 교회는 건축, 조각, 회화, 공예에 이르기까지 중세의 문화와 정신이 녹아 있는 종합예술 전시장 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13세기 초 유럽 곳곳에 대학이 설립되고 인쇄술이 활발하게 보급되면서 한순간에 급변한다. 교회가 아직도 예술가를 많이 고용하기는 했지만, 상업과 교역으로 큰돈을 번 신흥 상인 계층이 예술의 새로운 후원자로 등장한다.
그림 카라바조가 그린<나르시스>. 그림 에코와 나르시스<존윌리엄워터하우스>
1597년.유화. 110×92cm. 로마
어두운 샘터에서 아름다운 소년이 제 얼굴을 들여다본다. 나르시스는 사랑의 위력을 무시하고 연인에게 모욕을 주었기 때문에 제 얼굴을 사랑하게 되는 저주를 받았다. 나르시스가 죽은 샘터 자리에서 한 떨기 수선화가 피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수선화는 아주 오랫동안 무덤 꽃으로 불렀다고 한다.
예술의 순교자나르시스. 사냥에 지켜서 샘을 찾았다가, 샘물 속에 비친 제 모습에 반해서 죽었다는 아름다운 청년이다. 샘을 들여다보는 나르시스는 화기와 같고, 샘물에 비친 그의 얼굴은 캔버스에 그린 그림과 같다는 논리이다. 샘물 속의 그림을 너무나 사랑해서 목숨까지 버렸으니, 회화예술의 순교자라 불릴 만하다고 말한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신화의 주인공인 이카로스를 존경했다. 하늘높이 날아올랐다가 태양의 열기에 날개가 녹아내리는 바람에 바다에 빠져 죽은 비운의 인물이다.
또 르네상스 시대에는 아폴론 신과 연주 솜씨를 겨루어서 죽음을 당한 마르시아스도 예술의 순교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마르시아스가 벼랑에 앉아서 피리를 불고 있다. 옆에 선 아폴론이 못마땅하게 지켜본다. 마르시아스는 신과 겨뤄 승리를 거두었으나, 결국 신의 질투를 받고 살 껍질이 벗겨지는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림 허버트 드레퍼 ‘이카루스’ 그림 루벤스의 이카루스의 추락
그림 마르시아스의 연주, 살 껍질 벗겨지는 죽음
그림 암굴의 성모 ‘루브르’ 그림 암굴의 성모 ‘런던’
레오나르도가 첫 번째로 그린<어두운 동굴의 성모>1483~1486년.유화. 199×122cm. 파리 부르르 박물관, 어두운 동굴에서 숨죽여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들려온다. 인적 없이 호젓한 곳에서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천사의 시중을 받고 있다. 왼쪽에서 다가오는 아기는 훗날 예수에게 세례를 베푸는 어린 세례자 요한이다.
레오나르도가 두 번째로 그린 <어두운 동굴의 성모>1495~1508년. 유화.189.5×120cm 런던 국립 박물관, 어두운 동굴 안에 성 모자가 앉아 있다. 어두운 동굴 속에 숨어 있는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시중한다. 천사는 손을 들어서 또 한 아기를 가리켜 보인다. 아기 요한. 예수보다 반년 먼저 태어난 요한은 훗날 요단강에서 예수에게 세례를 주게 된다. <어두운 동굴의 성모>는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서 처음 그린 작품이다. 1483년에 작성된 계약서를 보면, 성 모자와 천사, 그리고 예언자 둘을 그려 넣기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레오나르도는 예언자를 빼고 그렸다. 그 대신 아기 요한이 새로 들어간다. <어두운 동굴의 성모>는 뒤에 보이는 배경이 너무 어둡고 기괴하다. 깎아지른 벼랑하며 태고적 풍경을 연상시키는 기암이 빽빽이 들어차 있어서 이곳이 어디쯤인지 가늠하기조차 쉽지 않다. 마리아는 손을 내밀어 아기 요한의 어깨를 감싸고 있다. 검지와 중지 구 손가락을 들고 다른 손가락을 접어서 들어 올리는 자세는 ‘축복’을 의미한다. 아기 예수가 축복을 하고, 아기 요한은 두 손을 마주 대고 무릎을 꿇고 있다.
레오나르도의 그림을 보면 등장인물들의 자세와 시선을 통해서 서로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서로 나누는 시선은 마치 가운데가 묶여 있는 네 가닥의 실과 같아서 어느 한쪽도 긴장을 늦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리피는 마리아와 아기 예수만 앞으로 내세웠습니다. 리피가 아무리 어려운 내용도 동화 속 이야기처럼 쉽고 편안하게 설명하는 재주를 보여 준다면 레오나르도의 그림은 종교화를 통해서 인간 심리의 깊숙한 심연을 건드립니다.
그림 필리포리피의 숲속의 성모 그림 필리포리피의 성모자 그림 리피의 성모자와 두 천사
아기 예수가 마른 땅에 누워 있고 마리아는 두 손을 모읍니다. 이런 그림을 ‘경배화’라고 부른다. 방에 따로 모셔 두고 경건한 신앙을 여미는 그림이다.
그림 베로키오<성 모자와 세례자 요한과 도나투스>
양 옆에서 성자들이 마치 임금님을 모시듯 시립해 있다. 이런 그림은 교회의 제단화로 세워 두면 잘 어울릴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초상화를 한 점 완성한다. 젊음의 향기가 물씬 피어나는 여인이지요. 하얀 털의 이 동물은 어민족제비입니다. 체칠리아는 어깨가 참 아름답다. 그림 속의 어민족제비는 무슨 뜻일까? 원래 어민 족제비는 귀족 가문의 문장에 그려진 동물로, 주인공 처녀가 자기네 가족의 혈통을 알리려고 안고 있는 것 같다. 또 어민족제비가 사람 손을 타지 않는 동물이라서 처녀의 순결을 상징한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니까 어민 족제비를 소중하게 안고 있는 체칠리아는 곧 순결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레오나르도는 체칠리아의 초상을 그리면서 뒤 배경에 아무것도 넣지 않고 어둡게 처리했다. 만약<모나리자>에서처럼 근사한 산악 풍경과 배경 풍경을 지운 덕에 체칠리아의 아름다운 용모와 얼굴의 윤곽선이 한결 두드러집니다. 초상화가 아니라, 마치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보석처럼 보인다.
그림 체칠리아 갈레리니의 초상 그림 아름다운 페로니에르
체칠리아와 닮은 여인의 초상이 한 점 더 있다. <아름다운 페로니에르>라고 불리는 초상이다. 이번에도 배경을 없애고 부조 효과를 실험했다. 이런 초상 기법은 인물을 돋보이도록 하는 데 아주 그만이다. 레오나르도가 그린 다른 초상 얼굴과 비교하면 비슷한 점이 유독 눈에 띈다. 바로 표정의 의미를 읽기 어렵다는 점이다.
사람의 표정은 자연의 표정 못지않게 깊고도 무궁무진하다. 한순간 스쳐 지나는 섬세한 표정의 변화를 레오나르도의 밝은 눈은 놓치는 법이 없다. 그리고 능숙한 붓으로 옮겨 낸다. 레오나르도는 다른 화가들에게 밝은 햇빛 아래서 그림을 그리지 말고 짙은 안개가 낀 날이나 어둠이 깔리는 해거름 무렵에 사람들 얼굴을 관찰하라고 권한다. 빛과 그림자가 칼날의 양면처럼 맞서지 않고, 서로 부드럽게 어루만져야 살아 있는 표정이 나온다고 설명한다.
레오나르도는 약으로 쓰려 해도 찾기 힘든 혹부리, 주걱턱, 벌렁코, 가자미 눈, 절벽 이마처럼 해괴한 용모를 유난히 찾아다녔다. 그는 아름다움과 추함을 같은 무게로 보았다.
고대 화가 제욱시스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얼굴을 그리라는 주문을 받았다고 한다. 다시없는 아름다움을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고심 끝에 화가는 우선 아름다운 처녀 다섯 명을 골라낸다. 그리고 그 처녀들로부터 제각기 가장 아름다운 부분들을 모아서 한 사람의 얼굴을 지어 낸다. 여러 아름다움을 모아서 누구도 능가할 수 없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지어 낸 것이다. 지상에 존재할 수 없는 지극한 아름다움이 이런 방법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제욱시스의 이야기는 르네상스 화가들 사이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고 따랐다. 그러자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그림 속 등장인물들의 생김새가 모두 비슷해진 것이다. 성서나 신화 속의 등장인물들이 다들 한 핏줄을 타고난 형제자매처럼 얼굴이 똑같아졌다. “서로 다른 용모를 가까이 두면 훌륭한 대비를 이룰 수 있다. 못난 얼굴과 아름다운 얼굴, 키다리와 땅딸보, 노인과 젊은이, 힘센 사람과 허약한 사람을 될 수 있으면 가까이 배치시켜야 한다.”
그림 비례연구,1487 그림 다섯 명의 그로테스크한 머리
레오나르도가 밤색 잉크를 사용해서 한 뼘 반 가량 되는 작은 종이에다 정교하게 그린 인체의 모습이다. 그림 속의 남자는 한 서른이나 마흔쯤 되었을까? 옷을 하나도 입지 않은 알몸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똑바로 정면을 바라보고 서 있다. 남자의 자세를 읽어 보자. 두 발을 모았다가 벌리고, 두 팔을 수평으로 들어 올렸다가 다시 머리 정수리 높이까지 쳐든다. 정면을 응시하는 눈길이 마치 쏘아보는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같은 사람의 모습을 두 차례 겹쳐 그렸다. 어떻게 보면 꼭 잘라 붙인 꼭두각시 같다. 인체 소묘 바깥에는 도형이 두 개 보인다. 정사각형과 원이다. 두 도형은 제각기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의 윤곽선과 정확히 어울린다. 먼저 정사각형을 관찰한다. 정사각형 도형은 십자가 형태로 두 발을 모으고, 두 팔을 수평으로 벌린 남자의 자세를 설명한다. 정사각형의 윗변과 아랫변이 머리와 발끝에 닿았다. 좌우로 내 뻗은 두 팔의 손가락 끝은 정사각형의 왼쪽과 오른쪽 변을 스친다. 그러니까 두 팔을 옆으로 뻗었을 때의 길이는 그 사람의 키와 같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원이다. 원에 달라붙은 남자를 관찰해 볼까? 남자는 두 팔을 머리 높이까지 쳐들고, 두 다리를 벌렸다. 두 다리 사이에 정삼각형이 들어가는 자세다. 이런 자세에서 배꼽을 중심으로 큰 원을 돌리면, 바깥으로 뻗은 남자의 손가락과 발가락 끝이 모두 원주에 닿는다고 한다. 정말 그렇게 보인다. 그렇다면 인체는 원과 정사각형의 원리와 통한다는 뜻이 된다. 사실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의 순수한 창작은 아니다. 그 때부터 1천 5백 년 전에 로마 군대의 공병대장이었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가 쓴 <건축 10서>의 한 대목을 읽고, 소묘로 베껴 그린 것이다. 그 책에는 이렇게 써져 있다. “이와 같이 자연이 정한 인체의중심은 배꼽이다. 그래서 사람이 등을 대고 누워서 팔과 다리를 뻗은 다음에 컴퍼스의 뾰족한 끝에 맞추고 원을 돌리면, 두 팔의 손가락 끝과 다리의 발가락 끝에 컴퍼스로 그린 원이 모두 닿는다. 컴퍼스로 원을 인체에 닿게 그릴 수 있는 것처럼, 정방형의 사각형으로도 같은 결과를 낼 수 있다. 사람의 신장을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측정한 길이를 양 팔이 뻗은 길이에 대 보면, 정사각형의 가로와 세로가 일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꼭 맞아 떨어진다.”
그런데 레오나르도의 인체 소묘에는 재미나는 구석이 있다. 소묘그림 아래쪽에 수평선이 하나 그어져 있는데, 거기에 눈금자를 새겨 놓은 것이다. 눈금자에는 작은 눈금과 큰 눈금이 보인다. 작은 눈금 네 칸에 큰 눈금 한 칸도 같다. 작은 손금에는 ‘손가락’. 큰 눈금에는 ‘손바닥’이라고 써져 있다.
그림 동판화 작품 <아담과 이브>
그림 뒤러의 인체비례 (22×17grid, 사각형, 원 삼각형)
그림 뒤러가 그린<아담과 하와>. 1570년. 유화. 203×81/209×80cm.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뒤러는 아담과 하와를 한 점씩 따로 그렸습니다. 남성 인체 비례와 여성 인체 비례를 똑같은 무게로 다루었습니다. "뉘른 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 1504년 그림","ALBERTUS DURER NORICUS FACIEBAT 1504" 라고 서명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자세와 표정은 무궁무진하다. 사람마다 몸의 크기와 골격이 다르고, 자세와 움직임에 따라 모양새가 바뀐다. 그러니 제대로 된 화가하면, 어린 아기 천사부터 씩씩한 젊은이와 꼬부랑 노인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나이와 신분과 기분 상태에 맞추어서 온갖 자세와 표정을 샅샅이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창조주의 비밀 곳간에 숨어 들어가 신비한 생명의 원리를 알아내고 싶었다. 레오나르도는 제우스의 보물 창고에 숨어 들어가 몰래 불씨를 훔쳐 낸 프로메테우스를 흉내 내고 싶었나 보다.
그림 <최후의 만찬> 1494~1498년. 벽화.460×880cm.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
탁자 중앙에 앉은 예수는 입을 다물고 있다.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는 제자들 가운데 혼자서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다. <최후의 만찬>은 <모나리자> 못지않은 레오나르도의 걸작이다. 예수가 로마 병사들에게 붙들려서 처형당하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식사를 나누는 만찬 장면은 오랫동안 미술의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을 구상하면서 예수를 한복판에 앉혀둔다. 제자들은 양쪽에 나누어 앉았다. 식탁에 자리 잡은 예수는 표정이 무겁다. 입술도 굳게 닫혀 있다. 조금 전, 예수는 제자들에게 충격적인 말을 한 마디 뱉었다. “너희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터인데, 그 사람도 지금 나와 함께 먹고 있다.” 이 말은 곧 세찬 폭풍우의 씨앗이 되었다.
제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혼돈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린다. 제 가슴에 손을 얹고 결백을 외치는 사람도 있다. 의심에 찬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사람도 보인다.
웅성거림은 곧 걷잡을 수 없는 파도가 되어 거세게 출렁거린다. 벌떡 일어나는 사람, 굳은 표정으로 탄식하는 사람, 옆 사람을 밀치는 사람, 소리치며 남을 설득하려는 사람도 보인다. 흥분과 소란의 와중에서 예수는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림이 없다. 제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스승의 속마음을 따라잡지 못 했나 보다. 성스러운 분위기는 온 데 간 데 없다. 이것이 위기에 처한 인간의 참모습일까? 그렇다면 레오나르도는 제자들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그려 낸 셈 이다. 레오나르도는 한없이 쓸쓸하고 황폐한 영혼의 표정을 예수의 초상을 통해서 완성한다.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의 식당 벽면에 그린 <최후의 만찬>은 그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유명한 걸작이다. 레오나르도는 단숨에 완성하는 프레스코 기법을 사용하지 않고, 안료에 달걀을 섞어서 쓰는 템페라 기법으로 그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말썽이었다. 프레스코로 그렸더라면 물감이 벽면 깊숙이 스며들어 천 년쯤은 거뜬히 보존되었을 텐데, 재료를 잘못 고른 게 탈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을 조금 색다르게 그렸다. 다른 화가들은 지금껏 최후의 만찬을 그리면서 항상 예수와 제자들의 표정과 자세를 성스럽게 만 그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레오나르도의 그림에서는 제자들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른다. 배신자가 누굴까 자문하면서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하는 혼란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요한은 슬픔에 겨워 고개를 숙이고, 베드로는 부릅뜬 눈으로 배신자를 찾는다. 유다는 돈 주머니를 품에 끌어당기면서 예수의 눈치를 살핀다.
그림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최후의 만찬>, 그림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Andrea del Castagno)
1480, 프레스코 최후의 만찬 1447~1449년. 920×980cm. 피렌체
산타폴로니아 수도원 식당
그림 안젤리코의 최후의 만찬 그림 카라바조의 엠마오의 만찬
기를란다요가 그린<최후의 만찬>, 1480년.400×800cm.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식당, 레오나르도 이전의 화가들은 최후의 만찬 장면을 제사 의식처럼 경건하게 그렸다. 그러나 레오나르도의 그림이 완성된 다음부터 르네상스 미술은 식탁 자리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레오나르도는 혼자만의 길을 걸었다. 늘 혼자서 독서하고, 들판과 해안을 쏘다니고,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았다. 평생 예술의 길을 걸으면서 한 차례도 후회하지 않았다. 이 세상은 그에게 끝없이 떠도는 나그네의 운명만을 허용했다. 레오나르도는 쪽지 글에 남들이 듣지 못하는 혼잣말을 써놓았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화가는 모름지기 외로워야 한다.……… 화가는 혼자여야 한다. 화가는 저 홀로 있을 때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된다.”
이사벨라 데스테는 레오나르도에게 초상화를 그려 주면 큰돈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손만 겨우 대다 만 그림을 팽개쳐 두고 완성할 생각을 안 한다. 수학 문제를 풀거나 새의 날갯짓을 관찰하는 일이 더 급했나 보다. 호주머니에 아무리 찬바람이 불어도 레오나르도는 내키지 않는 일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림 <이사벨라 데스테>. 1500년.소묘.63×46cm. 그림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
파리 루브르 박물관
피렌체로 돌아오자 마친 초상화 주문이 하나 들어왔다. 직물상인 조콘도가 찾아와서 자기 아내의 얼굴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레오나르도는 기쁜 마음으로 승낙한다. 모나리자는 참 아름답다. 결혼을 해서 아기까지 낳았는데도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답다. 리자에게는 검정 옷이 유난히 잘 어울린다. 가만히 앉아서 두 손을 모은 자세에 우아한 기품이 넘쳐난다. 팔걸이 의자도 아주 제격이다. 만약 서 있거나 누워 있었더라면? 또 턱을 올리고 눈을 갈면서 내려보거나 등을 돌리고 있었더라면? 이런 모나리자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왜 그토록 유명해진 걸까? 단순히 검은 옷이나 팔걸이 의자 때문은 아니다. <모나리자>는 미소가 일품이라고 한다. 레오나르도가 그린 미소는 처음 만난 사람한테 예의로 짓는 미소가 아니다. 웃는 듯 마는 듯 살포시한 미소다. 그러나 입 꼬리에 표정이 상큼 묻어나는 미소는 볼수록 신비롭고 포근하다. 말없는 미소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고운 마음씨가 물씬 전해진다. 붓을 쥐고 리자를 바라보던 레오나르도의 부드러운 눈빛도 잡힐 듯 느껴진다. <모나리자>의 미소가 이렇게 유명해진 데는 조금 엉뚱한 오해가 있었다. 전기 작가 바사리가 레오나르도의 전기를 쓰면서 이 작품을 설명했는데, 미소 이야기가 그 책에서 처음 나온다. 문제는 바사리가 그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글 솜씨가 워낙 그럴듯해서 책을 읽는 사람마다 리자의 미소가 정말 아름답겠구나, 하고 철석같이 믿었다는 것이다. <모나리자>의 초상에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정면을 똑바로 내다보는 시선이다. 마치 그림 바깥에 서 있는 우리와 눈을 마주치는 것 같다. 우리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오르기를 기다리는 것일까? 그림을 앞에 두고 우리는 수백 년 시간을 거슬러서 리자의 미소와 만난다. 따지고 보면 레오나르도는 조그마한 초상화를 한 점 그렸을 뿐이다. 초상화 모델을 섰던 리자도 왕족도 아니다. 숙녀도 귀부인도 아니다. 별날 것도 없는 집안의 살림살이를 꾸려 가는 평범한 아낙네이다. 아마 이 초상화가 아니었다면, 리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오나르도의 초상화 덕분에 리자는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이름 없는 여인의 맑은 눈빛과 입가의 미소를, 그 때부터 지금까지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레오나르도는 리자의 맑은 눈과 따뜻한 미소를 통해서, 모든 이의 영혼을 흔드는 내면의 지극한 표정을 그렸다.
1506년에 레오나르도는 다시 피렌체를 뒤로 하고, 밀라노로 향한다. 성 안나와 성 모자를 그린 유화 한 점이 전할 뿐이다. 아기 예수는 어린 양을 붙들고 올라타려고 한다. 한창 개구쟁이 노릇을 할 나이이다. 양은 한족 발을 내밀고 버티려고 애쓰지만 몸을 세우기에는 힘이 모자라다. 아기 예수는 왜 이런 짓궂은 장난을 벌이는 것일까? 마리아가 아기 예수의 허리를 끌어당긴다. 아기 예수를 어린 양으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하나 보다.
그림 성안나와 성모자 그림 궁정화가 만테냐(Andrea Mantegna,1431~1506)천장우물,
1465-1474년, 천장 프레스코,Camera degli Sposi,
만토바 후작궁전 신혼의 방
이 그림은 예수의 어머니 쪽 집안 계보를 나타낸다. 성 안나가 마리아를 나타낸다. 성 안나가 마리아를 낳고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기 때문에, 이처럼 한 뿌리에서 솟아 나온 나무처럼 인물 구성도 한 덩어리로 뭉치게 되었다. 마리아의 아버지는 요아킴이다. 베들레헴 출신의 안나를 만나서 결혼한다. 그런데 둘 사이에는 스무 해 동안이나 아기가 없었다. 요아킴과 안나는 외롭고 성실해서 하느님 앞에 하나도 흠이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일에도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도 성전에 가서 제사를 올리려고 하면, 자식 없는 사람이 끼어서는 안 된다고 사제로부터 내침을 당해야 했다. 그랬으니 안나의 마음 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그러던 어느 날 쓸쓸한 부부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기쁜 소식을 전한다. 그리고 늦은 나이에 가진 아기가 마리아였다고 한다. 마리아의 탄생에는 이처럼 신성한 비밀이 숨어 있다. 또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할 때도 천사가 나타났으니, 한 집안에 기적의 은총이 두 차례나 찾아온 셈이다. 어린 양은 수난과 희생의 운명을 의미한다. 한 마리 어린 양의 피를 흘려서 나머지 양 떼의 죄를 씻어 준다는 믿음이 참혹한 희생제의 근거이다.
만테냐가 그린<천장 우물>1465~1474년. 천장 프레스코. 만토바 후작궁. 신혼의 방, 신혼의 방에 들어서서 천장을 올려다보면 하늘이 뻥 뚫려 보인다. 우리는 단번에 우물 안 개구리가 된다. 그림 속 인물들이 우리를 내려다보면서 귓속말을 한다. 무슨 말들을 재미나게 나누고 있는 걸까?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인정한 황제다. 로마의 수도를 이스탄불로 옮기고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른 것도 그의 치적이다. 황제는 숙적 막센티우스와 결전을 벌이기 전에 신기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꿈에 천사가 타나타서 그에게 승리를 약속했다한다. 이 그림은 숙영지 천막에 누워서 깊은 잠에 빠진 황제에게 하느님의 천사가 그림자처럼 스며드는 장면이다. 델라 프란체스카는 원근법을 깊이 연구한 화가이다.
그림 콘스탄티누스의 꿈'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그림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 1429년. 프레스코.
1452~1466년, 329x190㎝, 프레스코 피렌체 산타마리아 노벨라 교회
한편 만테냐도 원근법 그림을 그려서 세상을 놀라게 한다. 만테냐는 레오나르도와 우정을 다졌던 화가다. 만토바 후작궁 천장에다 1465년부터 10년이나 걸려서 그림을 그렀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 벽화보다 40년 앞섰다. 파란 하늘이 뻥 뚫려 보인다. 우물 밑 개구리가 위를 올려다보는 것 같다. 만테냐는 먼저 커다란 컴퍼스로 동심원을 치고, 그 위에다 정교한 솜씨로 벽돌을 쌓아 올린다. 화가가 수학과 기하학을 모르면 이런 우물을 지을 수 없다. 우물 안팎의 난간에서 날개 달린 어린아이들이 장난을 친다. 자칫 발이 미끄러지지 않을까, 보는 사람이 다 조마조마하다. 공작새 한 마리가 맞은편 오렌지 나무를 쳐다본다. 화분 옆에선 젊은 처녀 셋이 머리를 맞대고 자기들끼리 재미난 이야기를 소곤댄다. 화려하게 성장을 한 귀부인과 눈동자가 까만 흑인 하녀는 무슨 말을 주고받는 것일까? 혹시 우물 아래에서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보는 우리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우물 그림은 너무나 사실적이다. 만테냐는 천장 벽화에다 진짜처럼 보이는 하늘을 창조했다. 그림은 또 하나의 현실이 되었다. 원근법의 마술을 부려서 시각적 환영과 현실의 관계를 뒤집어 놓았다. 그렇다면 첫 원근법 그림은 누구 솜씨일까? 지금 남아 있는 그림 가운데는 마사초가 제일 처음이다. 피렌체 산타마리아 노벨라 교회에 그린 <성 삼위일체> 벽화가 가장 이른 보기이다. 개선문처럼 생긴 건축 구조 안에 골고다 언덕이 보인다. 그림 복판부와 성자 사이에 성령의 흰 비둘기가 날아 내려온다. 그래서 <성 삼위일체>라는 제목이 붙었다. 마사초의 벽화가 완성되었을 때. 사람들은 교회 벽면에 큰 구멍이 뚫린 줄 알고 대경실색했다고 한다. 벽화의 높이는 구양성서에 나오는 솔로몬 성전과 같고. 또 노아가 지은 방주하고도 키가 같다.
그림(좌) <밀로의 비너스>. 기원전 2세기 말. 대리석. 높이 204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그림(우) <아폭시오메네스:닦아내는 사람이라는 의미.>,기원전 3330~320년경 리시포스가 제작한
청동 원작을 로마 시대에 대리석으로 복제한 것. 높이 205.7cm,로마, 바티칸 미술관
그림 폴리클레이토스 , <창을 멘 사람> BC 450년 경
인체미를 수학적으로 비례로 정리한 것은 그리스 미술의 획기적인 성과로서 그리그 시대에 나온 인체조각상은 모두 이 비례를 엄수했다. 앞서 말한 조각상 <창을 멘 남자>와는 좀 다른 예인데,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이 자랑하는 <밀로의 비너스>도 5라는 여인상도 아름다운 비례를 보여주는 그리스시대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1820년 4월에 그리스의 에게 해에 있는 키클라데스 제도의 밀로스 섬<Milos, Melos, 프랑스식 발음으로 밀로>에서 급수를 위하여 잠시 머물렀던 프랑스 해군이 고대극장 근처에서 발견하여 프랑스가 매입한 것이다. 이 비너스 여상의 전신 높이는 204cm 이고 머리 부분은 26.7cm여서 대략 8등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알렉산드로스와 아펠레스
레오나르도는 배움의 과정에 있는 어린 화가들을 불러 모은다. 그리고 눈을 훈련하는 재미나는 놀이를 몇 가지 고안해서 가르쳐 준다. 웃고 놀면서 훈련하는 재미나는 효과를 점으로 얻는 놀이. 이 훈련 방식을 따라서 열심히 하면, 그림을 그리는 데도 퍽 도움이 된다고 한다.
고대 화가 아펠레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그렸는데, 불쑥 뻗은 대왕의 팔이 그림 바깥으로 튀어나와 보였다고 한다. 또 손에는 벼락을 들었는데, 마치 벼락이 정면으로 날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한다. 화가들은 이런 기법을 단축법이라고 불렀다. 미술의 단축법은 자세를 자유롭게 취하게 할 뿐 아니라. 줄거리의 긴장감을 부추기는 효과도 있다. 그림 속 줄거리가 그림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보이니 그럴 수밖에. 그리스 시대에 인체비례의 규범이 모든 것의 척도가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신전 건축을 보면 확실히 드러난다. 기원전 1세기 로마 시대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Vitruvius)는 자신의 저서 <건축론십서(建築論十書, De arcbitectura)>에서 그리스 신전에 적용된 비례에 관해 다음과 밝혀주고 있다. 신전 건축의 기본은 시메트리아(symmetria)로 확립된다. 그것은 비례에서 나오는 것이다. 비례란 모든 건축에서 부분과 전체의 대비가 기본적인 척도에 적합하다는 것을 뜻한다. 즉 잘생긴 인체에 맞추어 그 부분 부분을 정확히 분할하여 적용한다는 것으로, 그것을 무시하면 신전 건축은 불가능하다. 비트루비우스는 이렇게 그리스 신전의 비례가 인체의 각 부분들이 전체에 주는 비례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믿었다.
그림 루벤스의 앙기리아 전투 그림 레오나르도의 앙기리아 전투
그림 체리코
8세기부터 11세기 말까지의 로마네스크 양식과 12세기부터 16세기 초에 이르는 고딕 양식의 종교미술은 사상적인 배경을 이와 같은 사고에 두고 있었다. 14.도 인간의 존재. 사고. 행동. 이 모든 것은 신에 대한 사랑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고, 또한 신의 은총에 감사하고 찬미함으로써 인간은 삶의 보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이상은 신의 은총을 받는 데 있다.
초기 기독교 미술은 신의 은총을 누릴 수 있도록 신앙심을 굳건히 해달라는 신자들의 간절한 애원의 상징이었다. 신앙심은 어떤 박해라도 이길 수 있게 해주고 순교까지도 감내할 수 있게 하므로, 성인도 나오게 되고 그에 관한 성인전도 나오게 되었다. 중세인들의 신앙의 실천지는 교회였으며, 교회는 이들의 생활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쳤다. 학문과 예술도 신앙에 봉사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성서의 권위에 어긋나는 자유로운 사고는 허용되지 않았다. 또한 사회적인 측면에서 지식층은 오직 성직자뿐이었고, 교회와 수도원은 신앙의 장소인 동시에 학문과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영광’ ‘그리스도의 승천’ ‘최후의 심판’ ‘성모 승천’ ‘성모의 영광’과 같은 기독교의 큰 주제가 조각(팀파눔(tympanum)으로 형상화되어 전개되고 있어 사람들은 자연스레 옷깃을 여미게 되고 경견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어서 ‘악과 덕의 싸움’ ‘부자와 빈자’ ‘성인 행적’등을 묘사한 조각을 보면서 인간의 도리를 깨달았다. 또한 성당 안에 들어가서는 신비스러운 광채를 뿜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보고서 신심을 굳히고 신을 찬미하였다.
그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팀파눔(tympanum)
그림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그림(좌)레오나르도의 제자(프란체스코 멜치)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초상>, 1510년 이후, 27.4-19cm.
그림(우) 산타 피에트로 마르첼리노 카타콤바의 천장화, 4세기 로마
프란체스코 멜치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레오나르도 초상>,1510년 이후, 소묘. 27.5×19cm.윈저 성 왕립도서관, 1519년 레오나르도가 숨을 거둘 때, 프랑수아 1세가 그의 침대를 지켰다고 한다. 프랑스의 국왕은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는 레오나르도의 손을 꼭 붙잡고 위로했다고 한다. 세상을 다스리는 군주가 예술의 거장에게 경의와 존경을 표시한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입술에도 언뜻 미소가 번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미소는 오래 전 피렌체의 작업실에서 레오나르도의 초상화 모델을 섰던 모나리자가 지었던 미소와 닮아 보이지 않았을까?
무엇보다도 ‘카메라’ 배터리 충전을 하려니 ‘소켓’이 3구짜리라 맞지 않았다. 프런트에 갔더니 다시 사야 한다고 하여 5₤로 주고 별도로 구매하였다. 객실에 와서 끼우니 ‘램프’가 깜빡거려서 충전이 되는지가 의심이 되어 다시 가서 현상을 설명하니 안내원이 기능까지는 잘 모르겠다고 하는데 여종업원이 다시 확인하면서 정상 충전되는 상태라며 사용가능하다고 말해주었다. 객실에 와서 충전시키고 샤워 후 잠자리에 들다. 냄새는 여전하여서 창문을 열어놓고 자니 조금 개선되었다. 다기능 고성능 카메라를 빌려 왔더니 충전문제나 사용문제로 무척 불편하고 신경 쓰였다. 모든 물건이 손아귀에 맞아야 하는데 생활에서 익숙하지 못하다보니 어렵다. 알렉산더 호텔로써 시설은 새것 같은데 관리가 잘 안 되는 것 같고 식당의 천장 그림이 멋있었다. 이곳 또한 한국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고 거기다 필리핀 사람들까지 합쳐지니 시끄럽고 분주했다. 동양 사람들은 대체로 소란스러운가 보다. 말의 억양이 영어권보다 높기 때문이리라.
캄파니아 주 요리
풍부한 태양의 혜택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지방 캄파니아. 여행 중 종종 물소의 방목 풍경을 볼 수 있듯이 물소의 우유로 만든 모차렐라 치즈는 이곳의 특산물로서 나폴리가 낳은 피자의 필수 재료이다. 또 캄파니아를 비롯해 건조 파스타가 생겨났다. 파스타를 토마토 소스로 버무린 스파게티 알 뽀모도로 Spaghetti al pomodoro는 특히 맛이 있으며 바지락 등의 조개를 사용한 어패류 파스타도 좋다. 토마토ㆍ후추ㆍ케파ㆍ올리브로 맛을 낸 스파게티에는 이스키아 섬의 백포도주 Biancolella가 어울린다. 바다를 건너면 베네치아풍의 푸실리 Fusili alla Vesuviana가 있다. 푸실리란 비틀린 모양의 파스타를 말하며 이것을 토마토 소스ㆍ모차렐라치즈ㆍ페코리노 치즈를 버무려 오븐에서 살짝 구운 것이다. 여기에는 베수비오 화상 주변에서 나오는 ‘그리스의 눈물 Lacrima Christi' 이란 이름의 로제rosato가 잘 어울린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치즈이다. 특히 모차렐라 mozzarella는 본래 물소의 젖으로 만든 매우 신선한 치즈로 단단해서 먹기에 적당하다.
그림 스파게티 알 뽀모도로 Spaghetti al pomodoro 그림 베네치아풍의 푸실리 Fusili alla Vesuviana
출처: 이미지;구글, 글 일부; 해외여행 유럽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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