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람 간병기
지지난해 9월 9일 토요일이었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매일같이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하는 지정식당에서 칼국수를 맛있게 먹기 시작 하는데 주머니에 들어있는 휴대전화에서 이날따라 요란하게 벨소리가 울린다. 집사람의 전화다. 다급하게 우는 목소리로
“여보, 나, 다리 다쳤어,”
울지 말고 찬찬히 얘기하라고 하였더니, 안마산에서 내려오다가 미끄러져서 오른쪽 다리뼈가 부러진 것 같단다. 나는 점심 먹는 것을 중단하고 차를 몰고 안마산 쪽으로 달렸다. 안마산에서 내려오는 길이 여러 길이 있기에 어느 길인지 알 수 없어 전화로 확인하고 산 아래에 차를 세워두고 올라갔다.
집사람이 등산화를 신지 않고 운동화를 신고 친구와 함께 안마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데 비탈진 길에서 길바닥에 깔린 갈잎에 미끄러지면서 앞에 있는 굵은 나무그루에 발이 부딪히면서 딱 소리가 나면서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오른쪽 종아리뼈가 완전히 부러졌는지 다리를 들 수가 없고 내가 업을 수도 없었다.
119를 불렀다. 30분이 지나서 춘천소방서 119 구급대원들 6명이 와서 다친 다리를 고정시키는 응급조치를 하여 들것에 집사람을 싣고 급히 산을 내려와서 구급차로 강원대학교 병원 응급실에 왔다. 응급실에서는 다친 다리의 X-레이 사진을 찍고 다리가 움직이지 않게 임시처치를 하고서 입원실에 입원하였다. 응급실에서 찍은 X-레이 사진을 보니 오른쪽 종아리 다리뼈 2개 모두 부러졌다. 안쪽 큰 뼈는 대각선으로 완전히 부러졌고 바깥쪽 뼈도 아래쪽이 완전히 부셔져 조각이 난 큰 부상이었다.
사고 몇일후인 9월 22일(금)에 KBS TV 서울방송 저녁 9시 뉴스 시간 중간에 집사람의 사고 내용이 다른 산악 사고 소식과 함께 보도 되었다.
“가을철을 맞아 안전장비 없는 산행은 자칫하면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많은데···(다른 산의 여러 사고 보도는 생략)···지난 9일에는 75세 김모 할머니가 운동화를 신고 춘천 안마산에 등산을 하다가 비탈길에서 발이 미끄러져서 오른쪽 발목 절단사고가 있었고···.”
라는 기자의 보도와 함께 집사람이 운동화를 신은 모습과 119 구급대원들이 응급조치하고 들것과 구급차로 이동하는 영상이 약 20초간 보도 되었었다.
집사람이 강원대학교 병원에 이날 입원 후 작년 6월 까지 10개월 동안 네 번의 입원과 네 번의 수술을 받았고 모두 56일간 입원하였었다.
첫 수술은 강대병원 정형외과에서 성인 다리질환을 담당하는 정모 전문의의 집도로 오른쪽 다리 종아리 양쪽 피부를 째서 부러져 어긋난 안쪽 뼈는 뼈를 맞추고 뼈에 얇고 좁은 금속판(Plate)을 대어 나사못으로 고정 시키고, 바깥쪽 부셔져 조각난 뼈도 금속판을 대어 나사못으로 고정하면서 가는 철사 줄로 동여매기도하여 4시간 동안 수술을 하였다. 수술 결과는 잘 되었다고 하여 병실에서 꾸준히 치료를 받고 11일째 되는 9월 19일에 수술한 부위를 감싼 기브스의 상처부분에 긴 네모형 구멍을 내고 붕대를 감고서 퇴원하였다. 퇴원 후 의료기상회에서 빌린 휠체어에 태워서 강대병원과 집 부근 동네 정형외과 병원에 다니면서 수술부위에 소독 치료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2개월이 지난 11월 말부터 수술한 종아리 바깥쪽 뼈와 뼈에 고정시킨 금속판 사이에 고름염이 생겼는지 꿰맨 자리에서 농액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담당의사는 농액이 나오는 원인을 밝혀야 한다고 수술을 또 해야겠다고 하여 12월 17일에 두 번째 입원을 하고서 수술을 또 하였다. 이번에는 18일 만인 작년 1월 3일에 퇴원을 하였고 집에 와서는 먼저 번과 같이 병원에 다니면서 수술부위에 소독 치료를 계속 하였고 이번에는 약도 복용하였다.
그런데 작년 3월 초에 두 번이나 수술한 바깥 발목 쪽에 농액이 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정모 전문의가 수술과 치료를 잘못한 것 같아서 항의를 해 보았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이 상태로는 서울의 큰 대학병원에 갈 수가 없었다. 두 번씩이나 잘못한 수술을 집도한 정모 전문의는 강대병원 정형외과 의사 중에서 6번째인 젊은 의사여서 경험이 없어 생긴 것이라고 판단하고 다른 전문의를 선택하고자 강대병원 인터넷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정형외과에서 나이가 제일 많고 경험이 많은 1번 의사이고 강대병원 원장을 지낸 골수염 염증처리 전문의인 김모 교수를 선택하여 진료 예약을 하였다.
3월 12일에 다시 세 번째 입원하여 김모 교수의 집도로 농액이 나오는 바깥쪽 뼈에 고정시킨 금속판을 떼어내는 수술을 하고서 15일 만인 3월 26일에 퇴원을 하였다. 퇴원 후에도 계속해서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를 하였더니 이번에는 수술이 잘되었는지 농액이 나오지 않았다.
수술부위 치료차 병원에 갈 때마다 X-레이 사진을 수 없이 찍으면서 뼈의 상태를 관찰한 결과 10개월이 지나니 뼈가 거의 붙었다고 해서 6월 18일에 네 번째 입원하여 다리 안쪽의 뼈에 고정시킨 금속판을 마저 떼 내는 수술을 받고서 12일 만인 작년 6월 29일에 마지막으로 퇴원을 하였다. 퇴원 후에도 목발을 양쪽에 짚고 병원에 자주 다니면서 치료를 받았다.
가느다랗고 허약한 종아리 양쪽의 같은 자리 피부를 20㎝ 길이로 째는 수술을 네 번이나 하기위해 남들은 평생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병원 본관 3층 수술실에 네 번씩이나 드나들었으니 수술실 단골환자가 된 샘이다. 매번 수술실에 들어 간 다음에 보호자 대기실에서 TV 스크린에 나오는「수술대기중」,「수술중」,「수술완료」,「회복중」이라는 자막이 나올 때 마다 마음 졸이며 혹시 수술이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 수술이 잘 되기를 기원하며 초조하게 기다리었다. 집사람이 수술이 끝나고 병실에 와서는 마취가 풀릴 때 아픈 통증을 참느라고 애쓰는 모습이 애처롭기만 하였다.
집사람이 사고가 난 그러께 9월부터 작년 6월까지 네 번이나 수술을 받기 위해 네 번 입원하여 총 56일간 병실에 있는 동안 내가 직접 간병을 하였다. 아들 딸들은 여든 넘으신 노인이 어떻게 간병을 하느냐고 하였지만 아직까지는 내 건강이 등산을 할 정도로 튼튼하고 내가 아픈 데가 없으니 할 수 있다며 고집을 부렸다. 집사람과 결혼 후 50년 넘는 세월동안 직장에 다니는 남편 뒷바라지를 하고 아들 딸 키우느라 고생만 한 사람인데 집사람을 위해 나 자신이 해준 것이 아무도 없으므로 이 기회에 처음으로 입원한 집사람에게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간병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병원에서의 간병일이란 힘들고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불편한 것은 많았다. 그러나 내 몸 건강이 아직 젊은이 못지않기 때문에 할 만 하였다. 간병인이 하여야 할 일은 침대에 누워있는 집사람을 일으켜 주는 일, 식사시간이 되면 식탁을 펴고서 식사할 수 있게 해주고 빈 그릇 쟁반을 지정장소에 갖다 두는 일, 환자복을 갈아입히는 일, 화장실에 갈 수 없을 때 소변 통에 소변을 누면 오물처리실에 가서 버리는 일, 수술부위가 붓지 않게 얼음주머니에 얼음을 넣어 찜질을 해주는 일, 물과 간식을 챙겨 주는 일, 휠체어에 태워서 화장실에 가는 일, 물수건을 만들어 와서 얼굴과 몸을 닦게 해주는 일 등 여러 가지를 도와주어야 한다.
여성 환자들만 있는 병실에서 간병을 하니 불편한 점이 많았다. 병실 안에 있는 화장실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집사람을 휠체어에 태우고 여자 화장실에 데려가는 것이 제일 난처하였다. 간병인 잠자리는 원래 그런 것이니 견디어 내야했다. 다섯 환자가 있는 여자 병실은 간병인 까지 여자이고 남자라고는 나 혼자여서 꽃밭(?)에 있는 꼴이었다(ㅎㅎ). 집사람이 입원해 있는 동안 계속 병실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금요일 토요일은 아들 딸 며느리가 와서 간병을 해주었고 목발을 집고 화장실에 다닐 수 있을 때에는 집에 와서 자고 가는 요령을 부렸다. 정형외과 병실에 네 번이나 입원하게 되니 고참 환자가 되어 낯익은 간병인들은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에는 식사 후 빈 그릇쟁반을 치워주는 등 여러 가지를 도와주기도 하였다.
병원에 있을 때에는 병원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기도 하였고 집에 와서는 며느리가 해 온 여러 가지 반찬과 딸이 해 놓고 간 반찬으로 내가 직접 전기밥솥에 밥을 지어 먹었지만 국 없이는 밥을 먹을 수 없는 식성 때문에 국 대신 라면을 끓여 먹었고 그동안 등산 같은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았더니 몸무게가 6㎏나 늘어났었고 얼굴과 눈두덩이 퉁퉁 붓기도 하였다. 네 번째 입원할 때에는 며느리가 국을 끓여 와서 먹었고 집사람이 조금 좋아졌을 때 짬짬이 운동을 하였더니 몸 상태가 원래대로 회복 되었다.
집사람이 누워있는 침대 옆에서 집사람 머리 위에 있는 링거 병에서 조금씩 떨어지는 주사액을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매일 같이 등산을 할 정도로 건강하였던 집사람이 이렇게 병상에 누워있으니 이것이 태어나서부터 평생 살아가는 사주팔자 운명의 스케줄에 있는 순서라면 참고 견디어 내야하지 않는가?’ 라고.
어느 날 저녁 무렵에 휠체어에 태워서 답답한 병실을 잠시 벗어나 보려고 병동 건물 밖 정원에 나왔다. 가을 밤 날씨는 다소 차가웠으나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은 밤하늘엔 별들이 빛나고 있어서 가슴이 탁 트인 기분이었다. 살며시 집사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여보 생각해 보니 너무 미안한 게 많아. 직장에 다니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당신한테 해 준 것도 없고 도와 준 것도 없어.”
“무슨 얘기예요. 당신 같은 분이 없어요.. 여보, 고마워요. 내가 부주의한 탓에 당신 고생시키고 아이들한테 걱정되게 해서···”
하면서 눈가엔 이슬이 맺힌다.
여러 가지 노인성 병인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관절‘ 통풍 병 때문에 약을 지어 오기 위해 병의원을 자주 찾는 고령인 우리 부부가 앞으로 사는 동안 또 다른 병을 얻어 다시 병실에 있게 되면 내가 또 간병을 할 수 있을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옛 전설 속의 눈과 날개가 하나씩 밖에 없는 상상의 새인 '비익조‘가 혼자는 날 수가 없지만 암컷과 수컷이 둘이 서로 딱 붙어서 의지하면서 두 날개로 날아가는 것과 같이 우리 부부도 저 먼 세상에 갈 때까지 서로 의지하고 봉사하면서 살아 갈 것이라고 다짐해 보았다.
두 번째 수술 후 아픔의 고통을 받고 있는 병중에 서울대학교와 독일 유학에서 음악 작곡을 전공한 막내아들이 국립 예술대학교의 교수로 임명 되었다는 기쁜 소식에 아픔이 싹 사라졌었다고 한다. 또한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퇴원한지 2개월이 지난 작년 8월 초에는 아직까지 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상태인대도 무리하게 고등학교 3학년인 둘째 손자의 대학 입학을 위하여 목발 두개를 짚고 절에 다니면서 손자가 수능시험을 잘 치르고 좋은 대학에 합격하기를 기원하는 100일 기도를 100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11월 수능시험일 까지 다녔다. 절 앞 주차장 까지 차로 태워다 주면 목발을 짚고 법당에 들어가서 손자를 위하여 할머니가 지극정성으로 기도한 득인지 수능시험에서 점수가 고득점 나왔고 논술도 잘 보아서 서울 명문대학에 합격을 하는 감격스러운 일도 있었다. 3년 전에도 대학 입시를 보는 큰 손자를 위하여서도 100일 기도를 하였으며 큰 손자가 서울 일류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네 번의 입원, 네 번의 수술, 네 번의 퇴원을 할 때마다 집에 돌아 와서는 휠체어를 빌려와서 집사람을 태워 병원에 다녔고 좀 나아지면 양쪽 목발을 짚고 다녔었다. 사고 후 1년이 훨씬 지난 작년 11월 중순이 되어서야 수술부위에 감아 놓은 붕대를 풀었다. 붕대를 푼 후 부터 금년 3월 까지는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지금은 지팡이 없이 다니지만 먼 거리는 걸을 수가 없고 오래 동안 서 있을 수가 없다.
그동안 대중목욕탕에는 갈 수 없어 집 욕실에서 수술한 다리에 비닐봉지를 씌워 물이 들어가지 않게 하여 목욕을 하였다. 목욕 후에는 약국에서 사 온 소독약과 붕대로 수술 자리에 소독을 하고 붕대를 감아 주는 간호사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집안 청소와 쓰레기 버리는 일은 원래 내 담당이었지만 집사람이 오래 서 있지 못하므로 설거지가 많을 때에는 설거지 까지 내 몫이 되어 버렸다. 두 노부부만 사는 집이니 누가 하겠는가. 억울하지만 별수 없지 않는가? 나 참. ㅎㅎ.
집사람이 많이 좋아진 후 어느 날, 흰 봉투 하나를 나에게 주었다. 봉투를 열어 보니 쪽지 한 장과 그 동안 아들 딸 며느리들이 준 용돈을 쓰지 않고 모아둔 빠닥빠닥한 5 만 원짜리 새 돈 200만원이 들어 있었다. 쪽지에는
「여보 연감, 수고하셨어요. 감사해요. 당신 필요한데 쓰세요.」라고 쓰 있다.
“여보, 고마워요. 이제는 아프지 말아요.”
하면서 집사람의 어께를 꼭 안아주었다.✙
*집사람이 병원에 입원하여 있는 동안에 문병을 와 주신 분들과 집사람 병이 어떠냐고 걱정하여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집사람이 장애인이 되지 않고 정상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즘도 수술 부위의 통증은 가끔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