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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자기 인생을 요약해보니까 세 마디로 단축되더라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잘 먹다가 잘 죽었다”
이렇게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매일 생각하는 것이 무엇을 먹을 까? 무엇을 입을까? 고민하며 산 것이 전부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 시간은 정말 멋지게 살다 간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에녹입니다. 그는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비하면 아주 짧게 살았습니다. 소위 “굵고 짧게” 살았습니다. 그 인생은 정말 가치있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5). 나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고 합니다.
에녹의 삶을 한마디로 말하면 잘 살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으며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에녹의 생애를 보면서 우리도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1. 믿음으로 살면 됩니다.
5절에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었으니........”
6절에 “믿음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믿음의 사람이 되면 됩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믿는 구석’이 다 있습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믿음을 안 가진 사람이 있는지. 다 자기 나름대로 믿음의 대상이 있습니다.
2주 전에 말씀을 나누었듯이 사람은 믿음을 근거해서 모두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환자는 의사의 처방을 믿습니다. 운전할 때에 우리는 지도를 믿고, 교통법규를 신뢰하며 상대방 운전자가 법규대로 운전해 주리라 믿고 운전합니다. 이런 믿음과 신뢰가 없다면 우리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런 믿음과 신뢰 가운데 믿음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신을 섬기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돈과 지식을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건강이나 젊음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이 믿음은 부질없는 믿음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상황이 바뀌면 믿는 바가 한 순간에 사라져 가버립니다. 내가 진짜인줄 알고 하늘처럼 믿었는데 거짓이었습니다.
(1) 그렇다면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6).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된다고 합니까?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서울 남서울 교회를 다니는 어떤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큰딸이 어느 날 아버지에게 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그 유치원은 천주교가 운영하는 유치원이었습니다. “아빠 하나님은 정말 계시나요?” 안계신다고 말하자니 벌 받을 것 같고, 계시다고 말하자니 잘 모르겠고 해서 그냥 어물쭈물 넘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목사님을 알게 되었는데 딸 아이의 물음이 떠나지 않아서 물었습니다. “당신이 목사라면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겠네요?”라고 하면서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자녀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에녹도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365세에 하늘에 옮겨졌습니다. 그러니까? 에녹도 믿음의 길에 들어선 것을 보면 므두셀라를 놓고나서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분은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고서 아이의 눈망울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이의 순진한 눈망울을 쳐다보니 자신이 부끄러워지고,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못한 인생을 생각하게 되었고, 우리 주님 외에는 갈 데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녹도 자녀를 낳고서 믿음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자식이 도대체 뭔지’ 애물단지이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믿음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이요, 나아가 나와 함께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어오는데 다만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또 생각 속에서 하나님이 있을 뿐이지 우리의 삶 속에 함께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 임재해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나> 그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을 상주시는 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자기를 찾고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누가 자기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면 뱀을 주는 자가 있느냐 하물며 하늘의 아버지일까보냐?”고 해셨습니다.
그런데 미신을 믿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재앙이 두려워서 제사를 하고 굿을 하는 것을 봅니다. 굿을 하는 무당이 대를 잡고 무엇이라 합니까? 이 집안에 우환이 있는 것은 어떤 귀신이 노하여서 그렇다. 빨리 그 한을 풀도록 하라고 합니다. 또 많은 경우에 조상을 모시고 제사하지 않으면 화를 당할 줄 알고 제사를 해마다 꼬박꼬박 합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를 면하기 위해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자이심을 믿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으십시오. 구하십시오. 그리하시면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못 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잘못 믿을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됨을 좀 인정하며 믿어보십시다.
어떻게 믿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아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아멘.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아멘.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는 잘 사는 것이요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2.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함께 간다는 것, 동행 참 아름다운 말입니다. 동행해 보셨습니까? 누구와 함께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어떤 신부님이 열차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의 옆에는 못생기고 뚱뚱한 수다쟁이 아줌마가 앉았는데, 잠시 후 그 아줌마가 지쳤는지 코를 골며 자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는 신부님 어깨에 기대어 침까지 흘립니다. 그때 신부님의 입에서 탄식 같은 기도가 흘러나왔습니다.
“주여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시나이까?”
돌아오는 길에 그는 다시 열차를 탔습니다. 이번에는 젊고 예쁜 아가씨가 옆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아가씨 역시 신부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을 잡니다. 이때에 신부님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여 당신의 뜻이라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독신으로 살기를 맹세한 신부조차도 기왕이면 못생긴 할머니보다 젊고 예쁜 아가씨와 동행하기를 더 좋아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지상정입니다.
창세기 5:21-24에 보면 에녹은 하나님과 300년을 동행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뜻으로 매순 간 하나님을 의식하고 날마다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간혹 우리는 길을 걸어가다가 혼자서 중얼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신이 이상해서 그런 사람도 있지만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어디로 가야 합니까?”
순간순간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결정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속에 계신 살아계신 하나님과 속삭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속에 계신 그리스도가 주장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과의 동행을 생각해 보십시다.
(1) 하나님과의 동행은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한다는 말입니다.
해외여행을 할 때에 함께 하는 일행들이 서로 다투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피곤하니까 자자고 하는 사람들과 계속 쇼핑하자는 사람들, 다른 곳으로 구경가자는 사람들 서로 자기 뜻만 내세우다가 결국 돌아올 때는 대부분 원수가 되어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동행하는데 있어서 뜻이 맞아야 합니다. 아모스 3;3에 “뜻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한 집안에서 같이 산다고 할지라도 그 뜻이 서로 다르면 그것은 동행이 아닙니다. 부부가 함께 살아도 뜻이 맞지 않으면 동행이 아닙니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뜻을 맞추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부부는 서로 마주보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보며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서로를 바라보며 살면 좋을 것 같은데, 서로 생각이 다르고, 관심이 다르다 보니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실망합니다.
동행은 같은 곳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며 함께 걷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추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물리쳐주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인생의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에 자신을 맞추어 사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뜻이 무엇일까를 물으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에 귀를 기울려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시었습니까? 언제나 자기를 낮추어 겸손하게 기도하고 회개하는 자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는 복음을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자에게 전하는 자를 하나님은 사용하셨습니다.
(2)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붙들고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무슨 큰 능력을 받아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칠 때에 양들이 목자의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푸른 초장 맑은 물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보호를 받고, 또 살이 찌고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목자되시는 하나님을 따라갈 때에 하나님께 매여 있을 때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되고, 성화되어 가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3)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끝까지 지속되어야 합니다.
에녹은 무려 300년 동안 한결같이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한 순간의 동행이 아니라 한평생 동행했습니다.
한 순간 따라가고, 한 순간 순종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계시록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제자들이 여러 명이 있었습니다. 그가 잘 나갈 때에는 많았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혀있게 될 때에 뿔뿔이 도망가셨습니다. 그 중에 데마라는 제자는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4:10)라고 합니다. 데마는 변절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의 사람 갈렙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를 설명하기를 “하나님을 온전히 좇은 사람”이라고 하고합니다. 그가 모세 밑에서 섬길 때에도, 여호수아 밑에서 섬길 때에도 그렇게 했습니다. 땅을 분배할 때에 남들이 다 꺼리는 난공불락의 땅 헤브론을 공격함에 있어서도 한결같이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습니다. 젊을 때에도 늙었을 때에도 한결 같았습니다.. 그런 그를 두고 후세의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을 온전히 좇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끝까지 붙드는 것입니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 37: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겠습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데려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에녹에게 주셨던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을 예비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일어납니다.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김을 받습니다. 천국을 얻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남은 생애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상주심을 믿고, 그의 뜻을 따르고, 그를 붙잡고, 끝까지 따라가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