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화는 정당한가
화내는 교사들
얼마 전 내가 담임인 학생과 다른 선생님 사이에 말싸움이 있었다. 강사가 담당한 수업을 강사와 담임에게 말하고 빠진 학생이 교과 관련 사업을 주관하는 교사가 불렀을 때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화가 난 교사가 아이에게 먼저 언성을 높여 혼냈고, 아이는 교사가 화를 낸다며 역시 화가 나 언성을 높이며 상황이 벌어졌다. 교사는 자신이 몰랐으니 화났고, 아이는 미리 이야기했으므로 억울해 화가 났다.
복도의 소란에 나간 나는 아이와 교사가 진정한 상태에서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일단 오해 지점을 풀고자 교사에게 상황을 설명하려 했지만 화가 난 교사는 오해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화를 냈고, 다른 교사들이 모이자 위기감을 느낀 학생의 항변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교장이 개입하며 수그러들었다.
그 뒤 비난의 화살이 내게로 향했다. 교장은 아이와 교사 사이에 내가 개입은 했는지 따졌고, 다른 교사들과 소통 하지 않는 내 모습에 화가 나 참을 수 없다고 흥분하며 말했다. 다른 교사들도 화를 낸 교사를 두둔하며 자신도 같은 상황이었으면 역시 화를 냈을 거라고 위로하고, 버릇없는 학생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했다. 내 입장에서는 수업을 담당한 사람은 강사이고 강사가 알고 있는 상황에서 문제될 게 없었다. 더구나 강사와 함께 주관 교사도 수업에 참여하니 당연히 알 줄 알았다. 사소한 오해와 아쉬움은 있을지언정 크게 싸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되고 보니 나도 마음이 크게 상했다. 교장의 일방적인 화풀이를 듣고 화가 났다.
학교생활을 하며 몇 차례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교사에 대해 의문이 들곤 했다. 과연 교사의 화는 정당한가? 교사가 화를 내며 학생을 혼낼 때 권력의 자기합리화와 폭력의 용인이 너무도 자주 목격되었다. 그리고 소위 버릇없는 학생에 대한 뒷담화와 낙인이 지도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과연 교사들의 화내기는 정당한가?
나의 난처함은 여기서 비롯된다. 교사이긴 하지만 교사의 편을 들 수 없는 상황들이 많기 때문이다.
정당한 화?
한번은 한 학생이 지붕공사를 하려고 걸쳐둔 사다리를 타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평소 학교를 답답하게 생각했던 학생은 높은 곳에 올라 자유를 느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교사가 아이에게 빨리 내려오라고 호통을 쳤다. 아이는 당황했다. 자존심이 상해 버티며 딴청을 부렸다. 처음 아이를 발견한 나는 아이에게 왜 올라갔는지 묻고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옆의 교사가 그렇게 호통 치며 위험하다고 소리를 질러대자, 상반된 태도를 취하기가 어려웠다. 일단 아이에게 교사의 말을 듣고 빨리 내려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결국 아이는 내려왔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한 교사들에게 화가 났다. 교사와 학교의 책임에 대해 설명해주는 것도 무의미했다. 우선 마음이 상해 합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기중심성이 강한 학생의 특성을 알고 있었고, 또한 지붕을 올라간 의도를 알았던 나는 학생에게 호통을 친 것에 대해 사과를 했다. 그리고 학생의 의도와 달리 그런 행동이 학교에서는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설명을 했다.
하지만 이튿날 나는 교감으로부터 일종의 항의를 들었다. 부담임이 내가 학생에게 사과를 했다고 교감에게 말을 했기 때문이다. 교감은 내가 화낸 것에 대해 사과한 것이 부적당하다고 말했다. 교사가 화낼만한 상황이었고 또 지도의 상황에서 정당했다는 것이다. 내용이야 어쨌든 좋은 말로 할 수도 있는 것에 대해 불가피하게 화를 냈음에 대해 사과하고 유감을 표하는 게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과연 필요악처럼 화낼 정당한 이유라는 게 있는가? 정당한 이유가 있어도 화를 안낼 수 있다면 더 좋은 것이 아닌가?
‘정당한 화’에 대해 의심하는 나로서는 어이없는 경험이었다. ‘정당한 화’라는 말은 내게 필요악이라는 말처럼 폭력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사로 들린다. 설득력이 없다. 화내는 말과 행동이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 얼마나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지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정당한 화’를 통해 교사들이 소위 지도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화를 합리화시키는 태도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면화되었음을 발견한다. 물론 그러한 지도 안에서 불합리한 화내기도 합리화 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권력의 폭력이며 폭력의 교육인데도 교권으로 위장되기도 한다.
정당화할 수 없는 화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3학년 담임을 할 때 일이 생각난다. 수업 시간에 맨 앞에 앉아 내 말을 무시하고 여러 번 주의를 주었음에도 쉼 없이 떠드는 학생에게 나는 ‘입 닥쳐’ 라는 심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이가 내 말을 너무 무시한다고 생각해 나는 화가 났다. 아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매우 미안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이에게 사과를 하고 다시는 나쁜 말로 상처를 주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후 나 자신의 반성문을 써서 게시하고 금식과 더불어 아이에게 사과의 편지와 함께 책을 선물하였다. 고맙게도 아이는 나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교사도 화를 낼 수 있고, 화내는 약점 투성이의 교사가 오히려 인간적인 교사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위선으로 가장한 근엄한 교사 대신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인간적 교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기꺼이 불완전함을 드러내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의 눈물을 보았을 때 내가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말을 통해 나 자신의 실수를 합리화하고 있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럴 수 있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내가 나 자신의 화를 합리화할 때 나는 권력의 폭력을 학생들에게 강요하고 합리화하는 교사가 되고 만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火)
우리말에 ‘화나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부아나다’는 말이 쓰인다. ‘부아가 끓는다’ ‘부아가 치민다’ 등의 말이 비슷한 뜻으로 사용된다. ‘부아’라는 말은 허파를 뜻하기도 하지만 ‘불’을 뜻하기도 한다. 무엇인가 외부의 공격과 억압 혹은 내적 좌절에 대한 반응으로 불같은 감각과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현상을 ‘부아나다’, ‘화나다’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화는 불이다.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오행론은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 다섯 가지 자연의 힘이 만물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해왔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인 엠페도클레스는 물, 불, 흙, 공기를 우주를 이루는 사원소라고 설명하여 서구적 자연관의 기저를 마련하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불이란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간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우주적 차원에서 보면 화(火)는 응축하는 금(金)과 반대적인 성격을 가진 발산의 힘이다. 우주에 산재한 은하와 별의 생로병사 과정은 응축과 발산의 순환적 과정으로 보인다. 지구적 차원에서 보면 화(火)는 수(水)와 대립하면서 대류와 순환을 일으킨다. 이 때문에 지구의 자연생태계는 일정한 조건 안에서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자연계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체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의 허파는 공기를 마시고 내며, 신장은 물을 저장했다 발산한다. 심장은 피를 순환시키는 펌프질을 쉼 없이 계속한다. 응축만 있어서도 안 되고 발산만 있어서도 안 된다. 응축과 발산, 그리고 순환에 의해 생명과 존재는 항상성을 유지한다. 이 때 화(火)의 특성은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생명의 차원에서 화(火)는 생명의 자기방위수단으로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동물의 포효와 거친 행동을 떠올려 보라.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처럼 자기를 지키기 위한 위협 행동들이다. 동물에게 화(火)는 자기방어를 위해 꼭 필요하다.
사람도 일정 부분 자기보호를 위해 화가 필요하다. 지나친 억압과 스트레스에 의해 위축된 심신은 회복탄력성을 잃게 된다. 작용에 대해 반작용으로 탄력을 회복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은 문화적 존재다. 화의 문화적 적절성을 요구받지 않을 수 없다. 문화가 문명으로 심화되면서 스트레스도 많아지고 화낼 일도 많아졌다. 우리는 화를 순화하고 승화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예술, 스포츠, 대화, 정치도 화를 문화적으로 해소하는 방법들이다.
하지만 아직 화의 사용 내지 적절성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 예전에는 그저 화를 ‘참는’ 것으로 알았다. ‘참다’라는 말은 ‘차다’ ‘차갑게 하다’에서 온 말이다. 불이 났으니 물을 부어 꺼야 한다. 이것이 일차원적으로 화를 대하는 방식이다.
한 때 출판계에서는 달라이 라마나 틱 낫한 스님에 의해 ‘화를 다스리는 법’에 대한 책들이 소개된 적이 있다. 불교에서는 정말 화내는 것은 가장 큰 악의 하나로 바라본다. 불교는 탐진치(貪瞋痴; 탐욕, 성냄, 무지)를 삼악(三惡)이라고 한다. 그 중 성냄(瞋)은 모든 수행의 공을 무너뜨리는 악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화를 다루는 다양한 방법을 발전시켜왔다. 호흡, 명상, 요가, 성찰이 그렇다. 하지만 운동, 영화 관람, 게임처럼 주의를 화에서 다른 것으로 돌리는 방법도 널리 쓰이곤 한다. 그렇게 보면 화를 다스리는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정당한 화
앞에서 나는 동물의 경우 화(火)는 자기방위를 위해 자연스럽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보다 복잡한 문화를 지닌 인간의 경우 더구나 현대사회처럼 인간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한 개인주의가 보편화된 민주주의 시대에 화의 문화적 적절성은 과거보다 더 엄격하게 물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교사의 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사회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화가 있는지 우선 생각해보고자 한다.
아기는 운다. 배가 고파서, 똥을 싸서, 무서워서, 놀라서 운다. 아기의 울음은 화났다는 표현이다. 아기가 좀 더 성장을 하면 손발을 버둥대며 울고, 더 성장하면 욕을 하고 손으로 때리고 발로 찬다. 이렇게 화는 폭력으로 변한다. 하지만 아이가 성장을 하며 어른이 되면 화를 폭력 대신 다른 방법으로 풀어내는 법을 배운다. 우선 대화를 통해 자신이 화난 이유를 알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답을 찾는다. 대화야말로 화를 사회적으로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권력에 의해 대화의 상호성이 사라지고 명령과 복종의 일방성으로 전화되면 화는 대화를 위한 행동으로 전환된다. 우리가 흔히 아는 스트라이크와 데모다. 스트라이크와 데모는 노동자, 청소년, 장애인, 외국인 등 사회적 약자가 권력에 대하여 결집해 주장을 펴는 방식이다. 임금 협상, 복지 요구처럼 뚜렷한 목적과 구호가 있다. 가장 명료화되고 절제된 사회적 화의 형태다. 그 외 미술이나 음악, 그리고 컴퓨터 게임을 통해 사회적 화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거나 해소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렇게나마 문화적으로 해소되지 못하는 사회적 화는 무력한 자들의 폭력이나 소요가 되어버린다.
나는 데모와 스트라이크와 같이 민주주의의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가 소통하기 위해 사회적 화를 표현할 때 정당한 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자의 입장에서 행해지는 정당한 화란 어떠한 경우든 허용해서는 안 된다. 권력을 가진 자의 화는 무력한 자들을 향한 폭력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동등한 사람들끼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동물과 같이 위협을 느껴 자기방위로 행하는 화의 경우는 정당성을 초월한다고 생각한다.
이즈음에서 교사의 화에 대한 답변을 찾고자 한다. 교사와 학생 관계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권력관계다. 교사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고 학생은 권력이 없는 사람이다. 한국 같은 학력사회에서는 더욱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구분이 권력의 위계를 파생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히려 학생의 화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결핍이 그들을 불안하게 했고, 어떤 억압이 스트레스가 그들을 화나게 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