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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比스님이 읽어주시는 화엄경(2021.5.26.PM2시)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보살 대중들이 모이다 –시방보살들의 찬탄
오늘도 화엄경 한 단락 공부하겠다. 천하에 제일가는 성인이 설하신 최고의 가르침, 인류가 남긴 유산 중에서 가장 값지고 훌륭한 가르침, 무엇인고 하니 화엄경이다.
우리가 화엄경을 공부하면서 화엄경에 대한 그와 같은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공부해야 된다. 또한 그와 같이 훌륭한 화엄경을 공부하는 분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미래에도 역시 훌륭한 인재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살행으로 큰 혜택을 입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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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화엄경 제16권이고, 품 수는 제14품, 39품 가운데 14품 수미정상게찬품을 공부할 차례다.
어제는 수미산에 올라가는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을 공부했고 오늘은 수미산에 올라가서 보살들이 게송으로 찬탄하는 품이다.
대방광불화엄경 강설
제16권
十四. 수미정상게찬품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제3회 설법의 서론으로서 부처님이 수미산 정상에 오르시고 나니, 다시 시방에서 각각 큰 보살이 불찰 미진수 보살들과 함께 모여 와서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품이다. 제3회 설법의 본론인 십주(十住)법문을 설하기 위한 서막에 이와 같이 수많은 보살들이 등장하고 엄청난 노래와 연주가 시방세계를 진동시킨다. 수미산정에 오르는 품과 수미정상게찬품은 십주법문의 설법을 위한 사전 의식이지만 그 의식의 내용 사이사이에 화엄경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진정한 이치가 녹아 있다.
제가 이렇게 간단히 이야기했다.
1. 보살 대중들이 모이다
처음에 ‘보살대중들이 모이다’ 왜 모이는가? 십주법문을 설하기 위해서 수미정상에 모이는 것이다.
이시(爾時)에 불신력고(佛神力故)로 시방각유일대보살(十方各有一大菩薩)이 일일각여불찰미진수보살(一一各與佛刹微塵數菩薩)로 구(俱)하사 종백불찰미진수국토외제세계중(從百佛刹微塵數國土外諸世界中)하야 이래집회(而來集會)하시니라
그때에 부처님의 신력으로 시방에 각각 한 큰 보살이 있었습니다. 낱낱이 각각 불찰 미진수(微塵數)의 보살과 함께하시어, 백 불찰 미진수의 국토 밖에 있는 모든 세계로부터 좇아와서 모였습니다.
요즘 유튜브에서 허블망원경이 우주, 다중우주, 은하, 은하계를 아주 가까이 가서 사진찍어 전송해서 보내온다.
우리가 육안으로 밤하늘에서 겨우 멀리 막연하게 ‘별들이다’ 라고 보던 것들이다.
이 우주가 얼마나 크고 우리 지구, 아니면 우리 태양계, 태양에 딸린 여덟 개의 별들, 그 별들마다 각각 지구에 달이 딸려 있듯이 금성이나 목성 토성 명왕성 혜왕성 등 이런 별들에 딸려 있는 행성들이 얼마나 많이 이 우주의 공간에는 펼쳐져 있는지 하는 것을 우리가 환하게 잘 보고 있다.
육안으로 보는 것과 거기에 엄청난 투자를 해서 허블망원경을 가지고 낱낱이 보는 것과 사실 우리 생활에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궁금증은 풀어졌을지 모른다.
태양보다도 수천 배, 또는 수만 배, 수억 배 크고 우리 태양계에 있는 별들보다도 수천억만 배 많고 많은 별들이 이 우주에는 펼쳐져 있다. 그것을 은하계, 안드로메다 은하, 또 무슨 은하 해서 너무나도 많고 많은 은하가 펼쳐져 있는 것을 허블망원경을 통해서 많이 보고는 있다.
그런데 그걸 볼 때나 안 볼 때나 우리 생활에 크게 보탬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그런 망원경이 없고, 밤하늘에 많고 많은 별들을 쳐다보던 우리 어릴 때 별들에 대한 노래를 하던 감정들이 오히려 더 가치 있고 우리 정서에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무튼 화엄경에서 이러한 것을 2600년 전에 설하셨는데, 오늘날 과학이 발달해서 허블망원경으로 그 많고 많은 별들의 세계를 환히 보고 있다. 여기 뭐라고 했는가?
시방에 각각 한 큰 보살이 있었습니다. 낱낱이 각각 불찰 미진수(微塵數)의 보살과 함께하시어, 백 불찰 미진수의 국토 밖에 있는 모든 세계로부터 좇아와서 모였습니다
이러한 것이 지금 과학으로 다 드러난다. 오고 가고 하는 사실들은 우리가 모른다손 치더라도 그러한 세계가 경전에 설한 것이나 지금 허블망원경으로 확인하고 얼마나 많고 많은 별들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는 또 얼마나 큰 지를 우리는 잘 안다.
요즘 별을 관찰해서 번호를 붙이고 은하계를 관찰해서 은하계에 번호를 붙여서 이름을 대신하고 간혹 이름을 붙여도 그 이름이 신통치가 않다.
그런데 이 화엄경에는 이름이 너무 너무 확실하게 이름을 붙이고 거기에 사는 부처님, 보살들 이런 것들을 기록하고 있다.
2. 열 명의 보살 이름
기명왈법혜보살(其名曰法慧菩薩)과 일체혜보살(一切慧菩薩)과 승혜보살(勝慧菩薩)과 공덕혜보살(功德慧菩薩)과 정진혜보살(精進慧菩薩)과 선혜보살(善慧菩薩)과 지혜보살(智慧菩薩)과 진실혜보살(眞實慧菩薩)과 무상혜보살(無上慧菩薩)과 견고혜보살(堅固慧菩薩)이요
그들의 이름은 법혜(法慧)보살과 일체혜(一切慧)보살과 승혜(勝慧)보살과 공덕혜(功德慧)보살과 정진혜(精進慧)보살과 선혜(善慧)보살과 지혜(智慧)보살과 진실혜(眞實慧)보살과 무상혜(無上慧)보살과 견고혜(堅固慧)보살이었습니다.
많고 많은 세계에 많고 많은 보살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또 많은 미진수의 보살들을 거느리고 있다. 대표 보살로서 지혜 혜(慧)자 돌림을 가진 보살들의 이름이 이렇게 등장한다.
시방에 각각 한 큰 보살이 있었으며, 그 낱낱 보살이 각각 불찰 미진수의 보살들과 함께하였는데 시방의 대표 보살들의 이름을 열거하였다. 시방의 대표보살들의 이름은 모두가 ‘지혜 혜(慧)자’ 라는 같은 글자로 이름이 지어졌다. 즉 법의 지혜, 일체의 지혜, 수승한 지혜, 공덕의 지혜, 정진의 지혜 등이다.
우리나라에 화엄경이 처음 들어온 것은 신라의 의상(義湘,625~702)스님으로부터다. 의상스님이 당나라로부터 화엄경을 배워 온 후로 전국에 화엄십찰(華嚴十刹)을 세워서 화엄사상을 크게 전파하였다. 그때는 60권본 화엄경이었다. 화엄경의 영향을 받아서 한 가족에게 형제가 있으면 반드시 같은 항렬의 이름을 짓는 관습이 생겨난 것이다. 이와 같이 화엄경이 들어온 이후로 우리나라 불교는 화엄불교로 자리매김하였으며, 민중들의 생활에까지 화엄경의 영향이 크게 미쳤던 것이다.
형제간에 그런 항렬을 딱 정하고, 저는 진자 돌림인데 돌림자를 써서 같은 항렬이면 같은 성과 두 번째 글자나 아니면 세 번째 글자에 같은 글자를 써서 호적에 등재를 했다. 이런 것들도 화엄경에 기인한 것으로 본다. 아니면 그 근거를 어디에서 찾겠는가? 당연히 신라 때 화엄경이 들어왔고 화엄경을 지식인들은 다 보았고, 그러다 보니 ‘화엄경에서 보살들의 돌림자가 같구나. 참 좋은 관습이다’ 해서 형제들 사이에 돌림자를 쓰게 된 것이다.
또 우리 불자들 보살님들은 무슨 화(華)자라든지 달 월(月)자라든지 성품 성(性)자라든지 등등 같은 글자를 이름 끝에 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것 또한 화엄경에 근거한 이름짓기의 관습이다. 우리가 그런 것들도 ‘아 그 뿌리가 화엄경에 있구나’하고 상식적으로 알아 둘 필요가 있다.
3. 보살들이 온 세계
보살들이 온 세계다. 오늘날 과학의 발달로 은하계 저 드넓은 우주 공간에 펼쳐진 많고 많은 별들의 세계를 아는데 그 세계 어디쯤인가를 정확히 짚어서는 말할 수가 없지만 이것도 딱딱 짚어낼 때가 올 것이다.
소종래토(所從來土)는 소위인다라화세계(所謂因陀羅華世界)와 파두마화세계(波頭摩華世界)와 보화세계(寶華世界)와 우발라화세계(優鉢羅華世界)와 금강화세계(金剛華世界)와 묘향화세계(妙香華世界)와 열의화세계(悅意華世界)와 아로나화세계(阿盧那華世界)와 나라타화세계(那羅陀華世界)와 허공화세계(虛空華世界)라
그들이 온 국토는 이른바 인다라화(因陀羅華)세계와 파두마화(波頭摩華)세계와 보화(寶華)세계와 우발라화(優鉢羅華)세계와 금강화(金剛華)세계와 묘향화(妙香華)세계와 열의화(悅意華)세계와 아로나화(阿盧那華)세계와 나라타화(那羅陀華)세계와 허공화(虛空華)세계였습니다.
이런 열 개의 세계에서 앞에서 소개한 혜(慧)자 돌림의 보살들이 왔다는 것이다. 그다음은 또 그 보살들이 섬긴 부처님을 소개한다.
4. 보살들이 섬긴 부처님
각어불소(各於佛所)에 정수범행(淨修梵行)하시니 소위수특월불(所謂殊特月佛)과 무진월불(無盡月佛)과 부동월불(不動月佛)과 풍월불(風月佛)과 수월불(水月佛)과 해탈월불(解脫月佛)과 무상월불(無上月佛)과 성수월불(星宿月佛)과 청정월불(淸淨月佛)과 명료월불(明了月佛)이라
각각 부처님 계신 곳에서 청정하게 범행(梵行)을 닦았으니, 이른바 수특월(殊特月) 부처님과 무진월(無盡月) 부처님과 부동월(不動月) 부처님과 풍월(風月) 부처님과 수월(水月) 부처님과 해탈월(解脫月) 부처님과 무상월(無上月) 부처님과 성수월(星宿月) 부처님과 청정월(淸淨月) 부처님과 명료월(明了月) 부처님이셨습니다.
이런 부처님을 섬기고 이러이러한 나라에서 온 보살들인 대표 보살들이 이 수미산에 동참을 했다.
5. 부처님께 예배하고 앉다
시제보살(是諸菩薩)이 지불소이(至佛所已)에 정례불족(頂禮佛足)하고 수소래방(隨所來方)하야 각화작비로자나장사자지좌(各化作毘盧遮那藏獅子之座)하사 어기좌상(於其座上)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시니라
이 모든 보살들이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러 부처님 발에 정례하고, 온 방위를 따라 각기 비로자나장 사자좌를 변화하여 만들고 그 사자좌 위에 가부좌를 맺고 앉으셨습니다.
많고 많은 보살들이 시방에서 몰려왔는데 한 보살에게 딸려 온 보살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많다.
올림픽이 열렸을 때, 세계적으로 제일 큰 행사가 올림픽인데, 그때 올림픽 경기장에 각 나라에서 선수단들이 등장하는데, 우리 능력으로는 그것밖에 안 되지만, 한쪽 입구에서 쭈욱 같이 들어와서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알파벳 순서대로 들어와서 저쪽 한쪽에서부터 차츰차츰 운동장을 가득히 채워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화엄경에서는 그야말로 올림픽 행사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규모가 크다. 올림픽이 열리는 것을 보지도 못했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화엄경에서 시방세계에서 각 방향의 많고 많은 보살들이 오고, 거기에 혜(慧)자 돌림의 보살은 그 세계에서 온 선수단 단장쯤 되고, 그 단원들은 무수히 많다고 하는 이런 식으로 써놓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눈에 선하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보살들이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러 부처님 발에 정례하고, 온 방위를 따라 각기 비로자나장 사자좌를 변화하여 만들고 그 사자좌 위에 가부좌를 맺고 앉으셨다
온 방향 방위를 따라서, 예를 들어서 동쪽에서 왔으면, 동쪽 방향으로 딱 온다. 질서정연하다. 서쪽 방향에서 왔으면 서쪽 방향으로 딱 와서 모이고, 남쪽에서 왔으면 남쪽 방향에서 딱 오고, 북쪽에서 왔으면 북쪽 방향에 또 동남쪽에서 왔으면 동남쪽 방향에 탁 이렇게 모인다.
그다음에 상방에서 왔으면 상방에 이렇게 착 오고, 하방에서 왔으면 하방에 오고, 그 많고 많은 대중들이 모여도 전혀 혼돈하거나 어수선하거나 전혀 그런 모습이 없다.
중앙에 부처님을 두고 시방으로 각각 대중들이 착 모이는 모습, 이런 것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잘 그려서 나타내면 참 근사할 텐데 저는 아직 그 능력이 없어서 아쉽다.
누가 그런 것을 잘하는 사람들이 그림을 그려서 이런 이야기를 할 때 그림으로 띄우면 참 근사할 것 같다.
부처님이 딱 계시고 각 방향마다 큰 보살들이 인솔자가 있고, 거기에 또 무수한 보살들이 대중이 착 딸려오고 하는 그림 말이다.
저는 눈에 아주 선하다.
화엄경은 이렇다. 내용의 진리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 형식만 하더라도 이렇게 어마어마한 규모를 가지고 또 질서 정연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6. 일체 세계도 그와 같다
이 사바세계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일체세계도 그와 같다.
여차세계중수미정상(如此世界中須彌頂上)에 보살래집(菩薩來集)하야 일체세계(一切世界)도 실역여시(悉亦如是)하야 피제보살(彼諸菩薩)의 소유명자(所有名字)와 세계불호(世界佛號)가 실등무별(悉等無別)하니라
이 세계의 수미산 꼭대기에 보살들이 와서 모인 것처럼 일체 세계에서도 다 또한 그와 같았습니다. 저 모든 보살들의 이름과 세계와 부처님 명호도 다 같아서 차별이 없었습니다.
일체세계에서 다 여기에서 행해지는 대중들 모임의 모습과 똑같았다는 것이다.
많고 많은 별들에서 여기 지구에서 벌어지는 모습하고 똑같이 대중들이 모인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 제가 상상하고 보니 참 기가 막힌 내용이다.
지구라고 하는 별 속에서 이런 법회가 벌어지는데 그것하고 똑같은 형식이 다른 별들에서도 다 똑같이 이루어진다. 그런 모습들이 어느 한 별도 가만히 멈추고 쉬는 일 없이 다 같이 그렇게 행해지고 있다 하는 사실이다.
7. 부처님이 광명을 놓다
이시(爾時)에 세존(世尊)이 종양족지(從兩足指)하야 방백천억묘색광명(放百千億妙色光明)하사 보조시방일체세계수미정상제석궁중불급대중(普照十方一切世界須彌頂上帝釋宮中佛及大衆)하야 미불개현(靡不皆現)이시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두 발의 발가락으로부터 백천억의 미묘한 빛의 광명을 놓으시어 시방의 일체 세계 수미산 꼭대기의 제석궁전 가운데 계시는 부처님과 대중들을 널리 비추시니, 모두 다 환하게 나타났습니다.
부처님의 두 발의 발가락으로부터 광명을 놓았다고 하였다. 뭐니뭐니 해도 사람, 사람하면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 마음도 중요하지만 몸이다. 몸에서 또 발가락을 지칭하였다. 왜 하필이면 발가락에서 백천억의 광명을 놓았는가?
화엄경에서 52위 지위점차를 이야기할 때 십신은 정식 지위에 들어가지 않고, 십주부터라고 했다.
십주법문, 십주라고 하는 것은 뭔가? 수행의 첫 단계다. 인체에서 발가락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우리 인체를 지탱하는 부분이다. 발가락이 전부 균형을 잡는다. 발가락이 균형을 잡고 선다. 사람이 서면 80퍼센트의 힘이 발가락에 가 있다. 발가락이 전부 균형을 다 잡고 방향도 잡는다.
그러니까 그와 같이 지위점차 52위 지위점차를 닦아나가는 법문을 앞으로 할 것인데 그것의 방향을 말하자면 십주법문에서 잡는다. 십주법문에서 그 방향을 잡고, 기본의 역할, 기초적인 역할을 한다.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옛날에 화엄경을 연구하신 조사스님들이 다 한결같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그 상징성이 그렇게 뛰어나다.
그런 의미를 뜻하고 있는 것이 ‘발가락에서 광명을 놓다’라고 하는 것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8. 시방 보살들의 찬탄
1) 동방 법혜(法慧)보살의 찬탄
이시 (爾時)에 법혜보살 (法慧菩薩)이 승불위신 (承佛威神)하사 보관시방 (普觀十方)하고 이설송왈 (而說頌曰)하사대
그때에 법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찬탄은 으레 시(詩)형식의 게송으로서 곡조를 붙여서 찬탄을 한다.
(1) 부처님이 광명을 놓다
불방정광명(佛放淨光明)하시니 보견세도사(普見世導師)가
수미산왕정(須彌山王頂)의 묘승전중주(妙勝殿中住)로다
부처님께서 놓으시는 청정한 광명으로
널리 보니 세간의 도사가
수미산 정상의
묘승전 가운데 머물도다.
부처님이 놓으신 광명을 통해서, 말하자면 광명을 알게 되고, 부처님을 알게 된다. 광명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화엄경을 이해하는 마음의 빛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제가 ‘화엄경, 화엄경’ 떠들더라도 화엄경에 대해서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참 많다.
우리가 화엄경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데는 화엄경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된다. 그것이 곧 광명이다.
화엄경에 대한 이해가 광명이고, 그 화엄경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화엄경을 접하게 되고, 화엄경의 깊이가 어떠하고 ‘아 화엄경의 가르침이 위대하다’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부처님께서 놓으시는 청정한 광명으로
널리 보니 세간의 도사가
수미산 정상의
묘승전 가운데 머물도다
부처님의 광명으로 부처님을 보았다는 것이다. 참 묘한 이치다. 이것이 평범한 하나의 게송이지만 그 속에 아주 묘한 이치가 들어있다.
부처님의 광명으로 부처님을 보았다, 부처님은 어디 계신다? 수미산 정상 묘승전에 계신다.
일체석천왕(一切釋天王)이 청불입궁전(請佛入宮殿)하야
실이십묘송(悉以十妙頌)으로 칭찬제여래(稱讚諸如來)로다
일체든 제석천왕들이
부처님께서 궁전에 들어오시기를 청하여
모두 열 가지 아름다운 게송으로
모든 여래를 칭찬하도다.
일체 제석천왕들이
부처님께서 궁전에 들어오시기를 청하여
모두 열 가지 아름다운 게송으로
모든 여래를 칭찬하도다
피제대회중(彼諸大會中)에 소유보살중(所有菩薩衆)이
개종시방지(皆從十方至)하야 화좌이안좌(化座而安坐)로다
저 모든 큰 법회 가운데의
보살 대중들이
모두 시방으로부터 와서
변화하여 만든 사자좌에 편안히 앉으셨네.
변화하여 만든 사자좌다.
사자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필요할 때, 딱 한 생각하면 바로 그 순간에 각자가 앉을 사자좌, 의자, 아주 편안하고 근사한 의자가 딱 그 순간 만들어지고 거기에 앉는다. 그것이 변화하여 만든 사자좌다. 관리하기도 힘들텐데 블필요한 데 사전에 만들어 놓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그 자리에 있어서 처리하기가 힘들게 되거나 하는 일은 없다. 착 와서 필요하면 의자가 되고, 음식이 필요하면 바로 음식도 그 자리에서 변화하여 만든다. 모든 것이 그렇게 되어 있다. 전부 마음의 원리로 이 세상이 돌아간다. 한 생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그 사물, 그러한 물질은 저절로 이루어지고 또 일이 끝나면 사라진다. 이런 현상들이다.
우리가 지혜가 출중해서 화엄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것을 넉넉하게 해석할 수 있다면 정말 더 멋진 해석이 나올 것 같다.
피회제보살(彼會諸菩薩)이 개동아등명(皆同我等名)이며
소종제세계(所從諸世界)도 명자역여시(名字亦如是)로
저 모임의 모든 보살들이
모두 함께 나와 같은 이름이며
온 곳의 모든 세계도
이름 또한 이와 같네.
앞에 그랬었다.
본국제세존(本國諸世尊)도 명호실역동(名號悉亦同)하시니
각어기불소(各於其佛所)에 정수무상행(淨修無上行)이로다
본 국토의 모든 세존께서도
명호가 다 또한 같으시니
각각 그 부처님 처소에서
가장 높은 행을 깨끗이 닦으셨네.
모두가 과거에 각각 부처님 처소에서 가장 훌륭한 수행을 하셨다는 것이다.
(2) 여래의 자재한 힘
불자여응관(佛子汝應觀) 여래자재력(如來自在力)하라
일체염부제(一切閻浮提)에 개언불재중(皆言佛在中)이로다
불자들이여 , 그대들은 마땅히 볼지니라
여래의 자재하신 힘으로
일체의 염부제에
부처님이 계신다 말하네.
일체의 염부제에
부처님이 계신다 말한다
아등금견불(我等今見佛)이 주어수미정(住於須彌頂)하시며
시방실역연(十方悉亦然)하니 여래자재력(如來自在力)이로다
우리들이 지금 보니
부처님께서 수미산 정상에 계시는데
시방에서도 다 또한 그러하니
여래의 자재하신 힘이셔라.
우리들이 지금 보니
부처님께서 수미산 정상에 계시는데
시방에서도 다 또한 그러하니
지금 부처님이 수미산 정상에 계시는데 시방세계에도 다 또한 그렇게 계신다. 별들 별들마다 똑같이 그렇게 계신다.
여래의 자재하신 힘이셔라
여기에 제가 화엄경을 푸는 열쇠 하나를 또 제공하였다.
수미산 정상에 부처님이 계시는 것처럼 시방세계에서도 다 같이 부처님이 계시는 것을 우리들은 또한 본다. 사람 사람이 본래 갖춘 여래의 자재한 힘의 능력으로 보는 것이다.
소동파(蘇東坡)거사가 우렁차게 흘러가는 개울물 소리를 듣고 무정설법(無情說法)의 이치를 깨닫고 지은 시가 있다.
“시냇물 흘러가는 소리는 부처님의 광장설법이요,
산천초목들은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이어라.
밤에 되니 8만 4천 게송이나 되는 것을
다른 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깨우쳐 주랴.”
계성변시광장설 (溪聲便是廣長舌)
산색기비청정신 (山色豈非淸淨身)
야래팔만사천게 (夜來八萬四千偈)
타일여하거사인 (他日如何擧似人)
이것이 또 화엄경을 푸는 열쇠다.
(3) 원인을 들어서 결과를 말하다
일일세계중(一一世界中)에 발심구불도(發心求佛道)하시니
의어여시원(依於如是願)하야 수습보리행(修習菩提行)이로다
낱낱의 세계 가운데서
발심하여 불도를 구하시니
이러한 서원을 의지하여
보리행(菩提行)을 닦으셨도다.
낱낱의 세계 가운데서
발심하여 불도를 구하시니
이러한 서원을 의지하여
보리행(菩提行)을 닦으셨도다
불이종종신(佛以種種身)으로 유행변세간(遊行遍世間)하사대
법계무소애(法界無所碍)하시니 무능측량자(無能測量者)로다
부처님께서 가지가지 몸으로
세간에 두루 노니시되
법계에 걸림이 없으시니
능히 측량할 이가 없도다.
부처님께서 가지가지 몸으로
세간에 두루 노니시되
법계에 걸림이 없으시니
능히 측량할 이가 없도다
혜광항보조(慧光恒普照)하사 세암실제멸(世暗悉除滅)하시니 일체무등륜(一切無等倫)이라 운하가측지(云何可測知)리오
지혜의 빛이 항상 널리 비치어
세간의 어두움 다 소멸하시니
아무도 짝할 이가 없어라.
어떻게 가히 헤아려 알리오.
지혜의 빛이 항상 널리 비치어
세간의 어두움 다 소멸하시니
아무도 짝할 이가 없어라.
어떻게 가히 헤아려 알리오
지혜의 빛이 항상 널리 비추고 있어서 세간의 어둠을 다 소멸한다. 화엄경에서 제일 많이 언급되는 것이 지혜다. 물론 자비도 그에 못지않게 이야기를 하지만 지혜하고는 비교가 안될 정도다. 지혜에 대한 이야기가 자비보다 훨씬 많은 것은 지혜가 온전하고서야 올바른 자비를 실천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지혜가 없는 자비는 오히려 애착과 집착과 편견에 떨어질 수가 있다. 지혜를 갖춘 뒤에 자비를 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가 완벽한 지혜를 다 갖추고 살지는 못하더라도 그러나 자비행을 실천하고 싶을 때가 많다. 우리 불자들은 자비행을 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지혜를 갖추고자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지혜를 갖추는 것도 궁극에는 자비를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지혜가 있어야 자비를 제대로 실천할 수가 있다.
우리가 지혜가 원만하지 못할 때 자비를 행한다면 경전의 가르침에 의지하면 된다. 특히 화엄경 가르침에 의지해서 자비를 실천하면 그것은 허물이 없고 잘못된 까닭도 없다. 왜냐하면 지혜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지혜를 깨달으셨고, 그 지혜를 화엄경에서 다 펼쳐내셨기 때문에 화엄경에 근거해서 자비를 실천하면, 개개인이 지혜를 갖추지 못했다손 치더라도, 지혜의 경전, 화엄경에 근거해서 자비를 실천하면 허물이 없다.
2) 남방 일체례(一切慧)보살의 찬탄
이시(爾時)에 일체혜보살(一切慧菩薩)이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보관시방(普觀十方)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일체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1) 부처님을 보아도 보지 못함
가사백천겁(假使百千劫)에 상견어여래(常見於如來)라도
불의진실의(不依眞實義)하야 이관구세자(而觀救世者)인댄
설사 백천 겁 동안에
항상 여래를 보더라도
진실한 뜻에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구원하는 자를 본다면
시인취제상(是人取諸相)하야 증장치혹망(增長癡惑網)하며
계박생사옥(繫縛生死獄)하야 맹명불견불(盲冥不見佛)이로다
이 사람은 모든 모양에 집착하여
어리석고 미혹한 그물만 증장하며
생사의 지옥에 얽매여서
눈이 멀어 부처님을 보지 못하리라.
설사 백천 겁 동안에
항상 여래를 보더라도
진실한 뜻에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구원하는 자를 본다면
이 사람은 모든 모양에 집착하여
어리석고 미혹한 그물만 증장하며
생사의 지옥에 얽매여서
눈이 멀어 부처님을 보지 못하리라
진실한 이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진실한 뜻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지혜에 의한 안목이 아니고, 자기의 편견에 의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거기에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受持)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意)
우리가 경전을 펼칠 때마다 늘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게송 개경게(開經偈)다.
가장 높고 깊고 깊은 미묘한 법이여,
백천만겁에도 만나기 어려워라.
지금 내가 보고 듣고 받아가지니
여래의 진실한 뜻 알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불법을 신행하고 기도를 하든지, 참선을 하든지, 경을 보든지, 어떤 보살행을 하든지 늘 이러한 자세가 근본이 되고서 해야 된다.
가장 높고 깊고 깊은 미묘한 법이여,
백천만겁에도 만나기 어려워라.
지금 내가 보고 듣고 받아가지니
여래의 진실한 뜻 알기를 원합니다.
진정 여래의 진정한 뜻이 어디에 있는가? 여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이것을 늘 숙제로 남겨 놓아야 한다.
‘이런 경우 부처님이라면 어떻게 판단하실까? 이런 경우 내 생각은 이런데 만약에 부처님이라면 어떤 판단, 어떤 말씀을 하실까?’ 이것을 늘 우리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중요한 내용이다.
(2) 법을 보아야 부처님을 본다
관찰어제법(觀察於諸法)컨댄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니
여기생멸상(如其生滅相)하야 단시가명설(但是假名說)이로다
모든 법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기의 성품이 있는 것이 없으니
그 생멸하는 모양과 같이
단지 거짓 이름만 말할 뿐이네.
이것은 중요한 말이다. 모든 법을 자세히 살펴보니 자기의 성품이 있는 것이 없다. 자성이 없다는 것이다. 무아라고 한다. 제법무아(諸法無我) 고정불변하는 실체는 없다. 늘 변화무상하고 연기하는 것이다. 또 인과의 이치에 따라서 잠깐 그 인과의 힘이 있을 때 그런 모습을 나타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94분이나 이렇게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도 어떤가? 이런 데서 우리가 바로바로 이러한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이렇게 인연이 어떤 생명력을 가지고 제가 방송을 하고 여러분들은 방송에 접속해서 핸드폰이나 컴퓨터나 이러한 기계를 통해서 듣고 있는 이러한 조건이 이루어졌을 때 존재하는 것이다. 어디에도 실체는 없다.
실체가 있으면 어디에든지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잖은가?
곧 끝날 시간이 되었는데 끝나서 제가 문을 닫으면 그 순간 사라진다. 또 이러한 관계도 없어진다.
물론 저장이 되어 있어서 얼마든지 듣고 듣고 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이 순간에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현상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우리 육신을 위시해서 우리 마음을 위시해서 일체 가족관계, 사회와의 관계, 일체 도반과의 관계, 모든 전부 그러한 원리로 임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불자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깜빡 깜빡 잊어버리고 집착하고 분노를 일으키고 또 실수를 저지른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자꾸 이런 법문을 되새기고 듣고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할 때, 그때 우리 가슴에 영혼에 차츰차츰 깊이 스며드는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해야 된다.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주 정말 확연하게 가슴에 와 닿을 때도 있고 어떨 때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때도 있고, 그런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렇더라도 열심히 정진하는 수밖에 없다.
모든 법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기의 성품이 있는 것이 없다
그 생멸하는 모양과 같이
단지 거짓 이름만 말할 뿐이다
거짓 이름만 말할 뿐이다. 물질이 그렇고 정신이 그렇고 재색신명수 모든 관계들이 전부 그런 이치를 하나도 벗어나 있지 않다. 그러한 사실은 참 안타깝다. 안타깝고 아깝다. 왜 그렇게 허망한가? 왜 그렇게 변화무상한가? 안타깝고 아쉽다. 그렇지만 그렇게 구성되어 있는 것을 어쩌겠는가.
모든 존재는 이미 첫출발부터 그렇게 되어 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일체법이라고 하는 것은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 아침이슬과 같고 번갯불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잠깐이라도 누리고 있으니 그것이라도 다행 아니겠는가. 잠깐 누리다가 헤어질 인연이지만 그나마 현재 함께 하고 있으니까, 잠깐이면 헤어지지만 그나마 현재 함께 하고 있다는 이 사실, 현재에 우리는 감사해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 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 수미산에 모여서 보살들이 각각 자기의 소견으로 부처님을 찬탄하고 부처님 법을 펼치는 내용을 공부했다.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공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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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신 분들 한 번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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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성불하십시다.
첫댓글 지혜에 대한 이야기가 자비보다 훨씬 많은 것은 지혜가 온전하고서야 올바른 자비를 실천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고맙습니다 _()()()_
🙏🙏🙏
보살님 덕분에 읽고 보고 듣고 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_()()()_
_()()()_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