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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에서 구로카와 온천에 가면서 예전에 먹은 나가사키의 흰 짬뽕을 떠올리다!
2023년 2월 22일 후쿠오카 공항 에서 렌트카를 타고 가라쓰성(唐津城) 을 구경하고 나가사키
하우스텐보스 외곽의 숙소를 찾아 1박을 한후 다음날 렌터카에 올라 온천과 녹차
로 유명한 우레시노 에 가서는....... 차 교류회관으로 들어가 직접 녹차를 내려서 맛을 봅니다.
다시 다케오 도서관 에 도착하니 도서관 안에 카페 가 있고 또 서가는 완전 개방식이라 한 해에
열람객이 백만명 에 이른다는데.... 그러고는 구마모토 로 가서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때
잡아온 울산 사람들을 동원해서 지은 난공불락의 요새인 구마모토성 을 구경하고 1박을 합니다.
다음날 구로카와 온천 에 가는중 차가 바닷가를 달리는데.... 예전에 나가사키 를 여행한 기억이 떠오르니
후쿠오카의 하카다역에서 하우스텐보스호 열차로 나가사키만에 자리잡은 하우스텐보스에
도착해 구경하고 다시 기차를 타고 나가사키 시내로 들어가서 데지마 비즈니스 호텔 에 도착해 1박 합니다.
나가사키에는 스페인 선교사 프란시스 자비에르 의 선교로 기독교도가 많고 다이묘들도 기리시탄(크리스천)이
되니 불안감을 느낀 도쿠가와 막부는 신부와 예수교도들을 처형한후, 데지마 라는 섬에 기독교 전도에는
관심이 없고 무역만 원하는 네델란드인 들을 상주시켜 무역을 하도록 했으니.... 그 앞에 호텔을 정한 것입니다.
데지마 박물관 을 보고는 오란다자카 에 올라 나비 부인의 모델이 된 글로버 가 든 과 오우라 천주당
을 보고는.... 전차를 타고 원폭 피해를 입은 우라카미 텐슈도 성당에 들른후, 국제문화회관을
거쳐 차이나타운에 들러서 공자묘를 구경한후 나가사키 짬뽕 을 한그릇 했던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스코틀랜드 출신 영국인 글로버 는 나가사키에서 서양 무기 를 사쓰마번과 조슈번에 히젠번과 도사번
등 여러지방에 중개해 막대한 돈을 벌어,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나가사카 미나미 야마테 언덕에
저택을 지으니.... 글로버 가든 이라 불리는 곳인데 훗날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 부인" 의 모델이 됩니다.
나가사키에 주둔한 미해군 대위 핀커턴 은 현지처 를 두기로 하고 열다섯 살의 꽃다운 게이샤 조초상
을 만나 동거만 하려는데.... 조초 상은 반드시 결혼식 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니 몰락한
화족(사무라이) 가문 여식으로 게이샤 노릇을 하고 있지만, 아버지 영전에 부끄럽지 않아야 하니까!
조초상 은 핀커튼과 결혼 을 위해 종교 까지도 기독교 로 바꾸었지만 남편은 미국
으로 떠난지 3년, 언젠가 핀커턴이 “나비(조초) 야!” 라고 부르며 나타날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이때 부르는 아리아 가 저 유명한 "어떤 갠 날" 입니다.
그분은 떠나기 전 말씀하셨어요
오 버터플라이 귀엽고 자그만한 아가씨
예쁜 저 새가 보금자리를 트는 계절에
돌아오겠오 라고 했어요 그분은 반드시
돌아오실거예요 울기는 왜 울어 의심하지 말아야지요
하지만 핀커턴은 미국에서 케이트와 결혼 했으니..... 하녀 스즈키는 차마 말하지 못합니다!
마침내 핀커튼이 돌아왔으나 새 부인 케이트 를 대동한 것은 아들을 찾으러 온 것이라!
명예를 잃고 사느니 죽는게 낫다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린 조초 상은 세살배기 아들 트러블
의 눈을 가린뒤 병풍 뒤로 들어가서 자결 하는데.... 사실을 모르는 아들은 마냥 즐거워 합니다!
오페라 "나비 부인" 은 오랫동안 미국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오페라 로 저 유명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미스 사이공" 의 원천이 바로 나비 부인 이니.... 나비 부인의
후속작으로 클로드는 베트남 여인 킴 과 미국 장교 크리스 의 비극적 사랑을 그립니다.
시간만 있으면 이번에도 예전에 여행했던 나가사키에 들러고 싶지만 여행은 딸이 계획을 세우고 주관하는
지라 차마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구마모토에 도착해 구마모토성을 보고 하룻밤을 잔후 여행 사흘째인
2월 24일 구로카와 온천 으로 가면서 나가사키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 문득 이즈미 지하루 씨를 떠올립니다.
어제 우리가 본 다케오가 고향인 이즈미 지하루 씨는 서경대학교 국제비즈니스어학부 교수로 십수년 동안
한국에서 살고있는데 동아일보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니, 그 중에 “짬뽕으로 이어지는 한중일의 먹거리
문화” 글이 떠오르는데, “짬뽕이 새빨갛고 맵다니! 처음 한국에서 짬뽕을 먹어봤을 때 색깔도 맛도
충격적이었다. 일본인인 나는 짬뽕이라 하면 ‘수프는 하얗고 부드러운 것’ 으로 인식해 왔기 때문이다.”
3년만에 양력 설날을 고향 사가(佐賀)현 다케오(武雄) 에서 보내면서, 지난주 금요일 본고장의 짬뽕을
먹기위해 혼자 나가사키(長崎) 로 향했다. 작년 9월에 개통한 니시큐슈신칸센을 타면.....
다케오온천역에서 나가사키역까지 불과 30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순식간에 도착하는 것이다.
나가사키역의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짬뽕 가이드북’ 을 참고로 우선 짬뽕의 뿌리 부터 찾아가기로 했다.
비가 내리는 나가사키역에서 노면전철로 ‘시카이로(四海)’ 에 갔다. 시카이로는 짬뽕의 창시자 천핑순
(陳平順·1873∼1939) 이 1899년 개업한 중국식당 이다. 5층 레스토랑에서 이나사야마(佐山)와 부두
를 바라보며 먹는 짬뽕은 하얀 수프로 깊은 맛 이 느껴졌다. 나는 ‘이 맛이 역시 짬뽕이야’ 라고 감탄했다.
시카이로 4대 사장인 진 마사쓰구(陳優)의 저서 ‘짬뽕과 나가사키 화교’ 에 따르면, 핑순은 19세 때
중국의 푸젠(福建) 성에서 나가사키 로 건너와 옷감 행상 으로 자금을 축적해 가게를 열었다.
자신이 고생했기 때문에 중국에서 건너온 화교와 유학생의 신원 보증인 이 되었고, 그들의 식생활을 걱정해
고향의 ‘돈니시몐(湯肉絲)’ 을 떠올리면서 싸고 영양가 높은 짬뽕 을 고안했다. 지혜를 짜내 중화요리의
베이스인 닭 국물에 돼지 뼈로 맛 을 내며 수제 면, 육해공과 사계절의 나가사키 식재료를 사용했다고 한다.
처음 ‘시나우동(支那)’ 이라는 명칭이었으나, 1910년 전후 부터 ‘짬뽕’ 이라고 불리게 됐고 단번에 나가사키
에서 사랑받는 대중 요리로 자리 잡았다. 즉, 짬뽕은 일본에서 중국인이 만든 식문화 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핑순이 ‘짬뽕’ 을 상표 등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 이유를 “화교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먹어주는 것이 기쁘다” 고 했는데 그런 열린 마음이 나가사키 특산품 짬뽕 을 태어나게 한 것이다.
한국의 짬뽕 에 관해서는 문화 인류학자 주영하 교수의 저서 ‘차폰 잔폰 짬뽕’ 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는 나가사키와 한국의 짬뽕을 만드는 방법을 살펴보면 기본적인
과정이 거의 같기 때문에 화교를 통해 나가사키의 짬뽕이 한국에 건너온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럼, 언제부터 ‘한국의 짬뽕’ 은 붉어졌을까? 주 교수의 책을 살펴보면 1964년부터 충청남도
금산에서 중화요리점을 운영했던 쉬(徐) 씨 가 ‘짬뽕이 매워진 것은 1970년대 이후
한국인 종업원 들이 식당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였을 것’ 이라는 의견을 내비쳤다고 한다.
한편 1960년대까지 서울에 거주했던 지인 이타가키(板垣) 씨는 1962년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붉고 매운
짬뽕 을 먹었다는 추억을 내게 들려줬다. 당시 매운 짬뽕이 진수성찬 이었다고 한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빼갈(배갈·白干)’ 이라는 중국술과 함께 먹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 이었다고 했다. 즉 원래는
하얗지만 후에 붉어졌고, 단정할순 없지만 짬뽕이 붉어지는 것은 서울 보다 지방이 늦어진 것으로 보인다.
짬뽕이란 정말 이상한 음식 이다. 바다의 것, 산의 것이 섞여 토지의 맛 을 이룬다. 중국인에 의해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일본 국내에 퍼졌고, 그리고 한국에 건너와 얼큰한 한국의 맛 이 되어, 우리 서민의 주린 배를 채워 왔다.
그리고 지난해 5월 2일자 니시닛폰( 西日本)신문에 따르면 최근에 중국 상하이에서 나가사키 짬뽕 이 인기
라고 한다. 가게 주인 가쓰야마(勝山) 씨에 따르면 인기의 비결로 “라면은 쉽게 질리지만, 건강 지향
이 높아짐에 따라 짬뽕은 여러 다양한 식재료 가 들어가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 이라고 했는데,
2022년 3월 하순 상하이가 봉쇄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한 달에 700그릇 정도의 매출을 올렸다고 한다.
일본 나가사키 중국 화교가 만든게 짬뽕이라면 한국 인천의 중국 화교들이 만든게 짜장면 이니 1882년
임오군란 을 진압하러 파견된 청나라 군대의 보급을 위해 들어온 쿨리들은 산동성 에서 왔는데,
인천항 인근 현재의 차이나타운에 화교 공동체 를 만들었으니 산동성의 가정식 작장면 을 판매하기
시작했고 그후 산동의 복사라는 곳에서 수타 기술자들을 불러오니 이들이 산동의 춘장 을 사용해
만든게 짜장면 인데..... 짜장면이란 이름을 처음 붙인게 인천 차이나타운의 식당 공화춘 이라고 합니다.
조선 조정은 군사들의 월급을 13달째 주지 못하다가 호남에서 실어온 쌀로 일부를 지급하면서 민씨들이
절반을 가로챈후 부족한 양을 모래와 썩은 쌀겨 를 넣어 주자 일어난 폭동이 임오군란 이니, 스스로
진압하지 못하고 청나라 군대가 와서 진압 했고... 1884년 갑신정변도 원세개의 청나라 군대 가 진압해
주자 재미를 붙였으니 1894년 동학농민군이 전주를 점령하자 이번에도 청군을 불렀다가 청일전쟁 으로...
왕실과 대신 중에는 자주 독립파 가 없었다는 얘기인데 이완용 은 다른 대신들 처럼 친청파였다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하늘 처럼 믿었던 청나라가 완패하자 친미파로 돌아섰는데, 러시아가 3국 간섭으로
일본이 요동반도를 토해놓자 민왕비 처럼 친러파 가 되었으니.... 영은문을 허물고 독립문을 세우면서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이 생길 때 외부대신이자 독립협회 회장 으로 많은 돈을 독립문 건설비로 내놓고
"독립문" 이라는 현판 글씨를 썼으며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파로 변신해 송병준과 다툽니다.
이즈미 지하루 씨의 글은 동아일본에 정기 연재를 하는지라 셀수도 없이 많지만 그 중에 하나를
더 소개하자면.... ‘나를 한국으로 이끌어준 이어령 선생님’ 이니....“이어령 선생님의
‘축소지향의 일본인’ 을 읽어본 사람? 아니면 이어령 선생님의 다른 책을 읽어본 학생 있나요?”
지난 월요일, 개강 후 일본 문화 첫 강의 시간 에 학생들에게 물었더니 잠시 묘한 침묵이
흘렀다. 일본인 유학생 두 명을 포함한 18명의 학생들의 표정에서는 내 질문에
대해 아무런 공감 을 읽어낼 수 없었다.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일본 가쿠세이샤(學生社) 에서 발간되자 두 달 만에 10쇄 까지 증쇄할 정도로 크게 화제가
됐다. 그리고 2007년에는 고단샤(講談社) 에서 문고본 으로 다시 출간돼 2021년 2월까지
21쇄를 찍어낸 스테디 셀러로 수많은 ‘일본론’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이며, 고전이라 여겨진다.
1982년 당시 일본의 언론에서 쓴 기사의 제목들을 보면 ‘이어령의 화려한 등장’ (일본경제신문), ‘서양에
치우친 문화론에 대한 반성’(아사히신문), ‘학문적으로 깊이있는 일본인론’(선데이), ‘기존 일본인론의
범위를 초월할 만큼의 기폭력이 있다’ (도쿄신문) 등 일본 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번에 다시 일본어로 읽어봐도 40년 이라는 세월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울림이 컸다. 그러면서 처음 접했을 당시 느꼈던 감동이 새록새록 다시 되살아나니
일본 문화의 특징을 ‘축소(縮み)’ 를 키워드로 ‘밖에서 안으로 향한 방향성’ 으로 요약했다.
당시 인정받아 오던 일본론들, 예를 들어 ‘국화와 칼’, ‘아마에(甘え) 의 구조’, ‘종적(縱的)인 사회’
등의 오류를 지적한다. 예를 들어 ‘아마에의 구조’ 에서 저자 도이 다케오 (土居健郞)
가 일본인의 특징으로 삼은 ‘아마에’ 라는 키워드가 한국에서도 ‘어리광’ 이나 ‘응석’ 등
으로 자주, 다양하게 사용되는 개념인 것을 제시하며 일본만의 고유한 특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축소지향의 일본인’ 그 속에 펼쳐지는 일본론은 당시 결여됐던 아시아, 특히 이웃 한국의 시선
에서 전개했다는 면에서 어느 일본론과도 차별되는 중요한 저술이었다. 당시 서구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눈에 씌웠던 비늘이 떨어지는 (目から鱗が
落ちる)’ 것 처럼 깨달음 을 얻었다. 그리고 아시아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더구나 번역서가 아닌, "외국인이 일본어로 썼다는" 점도 놀라웠다. 일본인 보다 더 풍부한 어휘력
을 구사하며 유창하게 저술됐기에 책에 압도당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끝 무렵 여덟 살
이었던 선생님이 직접 일본식 교육을 받았고, 그 당시 느꼈던 위화감에서 이 책이 출발
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있었다. 시종 선생님의 박식하고 논리적인 전개에 설득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알게 된 또 하나는 책에 있는 많은 내용이 나 자신 속에 녹아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읽은 지
오래되었으나 어느새 책의 여러 부분들이 나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어쩌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한국에 관광하러 오기는 했겠지만 유학을 위해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1985년 내가 한국에 유학 가려고 했을 때 주변의 사람들이, “왜 미국이 아니라 한국 인가”
라며 반대했다. 이런 반대들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이웃 나라 한국에서 일본에
대한 시각을 배우겠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이 아닌 이어령 선생님의
지성에 대한 믿음 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선생님 덕분에 선택한 길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최근 많은 일본 젊은이들이 한국의 음악이나 드라마 에 관심을 갖고 한국어를 배운다. 또 일본에
관심을 갖는 한국 젊은이들도 많다. 40년 전에 한국의 석학이 쓴 이 명저 를 지금도 양국
사람들이 더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나는 살아계셨던 선생님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나를 한국으로 이끌어 준 이어령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2월 26일 이어령 선생님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40년전, 1982년에 일본에서 출판된 일본어
로 쓴 그의 저서 ‘축소지향의 일본인’ 을 읽었을 때의 충격 이 떠올랐다. 그 책을 다시
읽고 싶어 집과 학교의 서가를 열심히 뒤졌지만 찾지 못했고, 서둘러 서점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종로의 대형 서점 한 곳에 두 권 남아 있는 책 을 찾아 얼른 구입했다.
이즈미 지하루 씨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새에 우리 우리 렌터카는 험한 산을 넘어가는데.... 우리 부부가
예전에 하루 숙박을 했던 구로카와 온천 은 구마모토현 동부 미나미오구니마치 산속에 자리한 온천마을 입니다.
아소산 자락 북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일본 전국에서도 2009년 미쉐린 그린 가이드 재팬에서 온천 관광지
로는 이례적으로 투스타 를 받았고 그 외 일본 온천 랭킹에서도 1위 를 몇번 할 만큼 인기있는 온천
마을이며 야마가타현의 긴잔온천과 함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 이 된 곳 중 한 곳이라고 합니다.
규슈의 유후인, 벳푸 등 다른 유명 온천마을과 비교하면 더 깊은 산자락에, 대규모의 현대적
시설이 없이 전통적 온천 료칸 으로 가득한 작은 마을이니 온천 그 자체로 유명한 곳이라
다른 관광지에 흔한 기념품샵도 많지 않고..... 심지어 일본에 그렇게 흔한 편의점도 없습니다.
대중교통으로 구로카와로 가자면 기차는 없고 후쿠오카에서 직행 버스 를 타거나 아니면
구마모토에서 구로카와를 경유해 유후인과 벳푸 로 가는 규슈횡단버스를 티야 하는데
반대로 벳푸에서 유후인을 거쳐 구로카와 를 경유해 구마모토로 가는 버스를 타도 됩니다.
후쿠오카에서는 하카다역 에서 08시 51분에 출발해 09시 10분 텐진, 09시 32분 후쿠오카공항을 거쳐 11시
47분에 구로카와 에 도착하는데 다음 버스는 09시 51분, 13시 54분 그리고 14시 54분에 후쿠오카역 버스
센타를 출발해 저 정류소를 거치며 구로카와에서 16시 버스 를 타면 후쿠오카역에 18시 46분에 도착합니다.
다음 규슈횡단버스는 구마모토역 에서 08시 04분 버스는 10시 44분에 구로카와 에 도착하며 12시 19분에
종점 유후인에 도착하고, 구마모토역에서 다음 버스는 구로카와 직행으로 09시 04분 에 출발해
12시 28분에 도착하며 그 다음은 유후인행 버스는 12시 15분에 출발해 15시 39분에 구로카와에 섭니다.
반대로 벳푸에서 라면 08시 09분 버스는 09시에 유후인을 거쳐 10시 35분에 구로카와 에 도착하며 종점
구마모토에는 13시 28분에 도착하고, 다음 버스는 유후인에서 14시 50분에 출발 버스가 16시 25분에
구로카와에 도착하며 그외에 구로카와에서 16시 에 출발하는 버스는 18시 40분에 구마모토에 도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