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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의 음악은
스키플에 뿌리를 둔 1950년대 로큰롤에서 출발하였으나,
여러 장르들의 탄생과 발전에 영향을 미쳤고,
각 장르의 다양한 음악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단순히 음악뿐 아니라
1960년대의 사회와 문화 전반에 혁명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비틀즈는
초기에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스튜어트 섯클리프, 피트 베스트로 구성되어
1960년부터 3년 동안 리버풀과 함부르크의 클럽을 다니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나 1961년에
피트 베스트가 밴드를 탈퇴해
새로운 멤버 링고 스타로 대체되었다.
비틀즈의 매니저로 활동했는데,
밴드에 대한 큰 활약으로
다섯 번째 비틀즈 멤버로 종종 표현되기도 한다.
그리고 조지 마틴이
작곡과 프로듀서를 맡은 1962년의 첫 싱글《Love Me Do은 영국 차트를 휩쓸었고
1963년 정규 1집《Please Please Me》로 정식 데뷔하였다.
그 후로 조지 마틴은
《Let It Be》를 제외한 대부분 앨범의 프로듀서를 맡았다.
첫 싱글을 발매한 이듬 해에는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1966년부터 해체되는 1970년까지 세계를 휩쓸었다.
특히 1964년부터
북미 활동을 시작한 비틀즈는
미국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누려
소위 브리티시 인베이전(영국의 침략)이라 일컫어졌다.
비틀즈는 1970년 공식 해산되었고,
멤버들은 각자 솔로 활동을 펼쳤다.
멤버 중 존 레논은
1980년 뉴욕 집 근처에서 암살을 당했고,
2001년 조지 해리슨은 암으로 사망하였다.
비틀즈는
1970년까지 총 12장의 정규 음반을 발표했고,
세계적으로 16억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올려
가수 중엔 최고의 기록이다.
또한 미국 내에서만 1억 7천만 장 이상을 팔아치워
RIAA에 따르면
그 어떤 가수보다 높은 음반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비틀즈는
빌보드 핫 100 차트 50년 역사상
1위 싱글이 20곡으로 가장 많이 1위를 차지한 가수로 기록되었고,
50여 곡 넘는 톱 40위권 싱글들을 만들어냈다.
비틀즈의 음반은
현재도 수요가 이루어지고있다.
비틀즈는 기록적인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으며,
비평가들에게도 인정을 받은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밴드"로 불리고 있다.
또한 비틀즈는
그래미상 7회 수상을 비롯해
아이버 노벨로 어워즈 15회,
아카데미 음악상 1회 등의 수상경력을 갖고 있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비틀즈를 선정했다.
이후 35년 후인 2005년
미국의 연예산업잡지 《버라이어티》는
비틀즈를 20세기 연예인의 대표 우상(icon)이라 표현하였다.
비틀즈의 멤버는
단 한명도 악보를 볼 수 없어서,
새로운 악상이 떠오르면
데모 테이프에 기타로 주 선율이나 리프를 일단 녹음 한 뒤에
그걸 바탕으로 멤버들이 연주해가며 다듬어서 완성,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곡을 만들었고 악보에는 전혀 의지하지 않았다.
빌보드 핫 100 차트 50주년을 기념하여
50년간 성공적인 차트 기록을 올린 아티스트들의 기록을 분석해 순위를 발표했고,
비틀즈는 1위에 올랐다.
쿼리 뱅크 그래머 스쿨을 다니던 레논은
레논과 쿼리맨은
기타리스트 매카트니를 울튼이라는 교회 축제에서 만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매카트니는 쿼리맨에 합류하게 된다.
매카트니와 해리슨은
리버풀 인스티튜트의 학교 버스에서 만나 친해졌고,
리버풀의 윌슨 홀에서 열린 쿼리맨의 공연에 해리슨을 초대하게 되었다.
이후 계속된 매카트니의 설득 끝에,
다른 멤버들 앞에서 리허설을 마친 후
쿼리맨의 리드 기타리스트로 가입했다.
당시 레논은
해리슨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가입을 거절했다고 한다.
쿼리맨의 구성원은 계속적으로 변했으나,
레논과 그의 친구 스튜어트 섯클리프와 매카트니, 해리슨을 주축으로 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당시 이들이 부른 노래들의 녹음 자료 몇 개는 아직도 남아 있다.
쿼리맨이란 밴드의 이름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Johnny and The Moondogs",
"Long John and The Beatles",
"The Silver Beetles" 등으로 바뀌어갔다.
마침내 "The Beatles"라는 이름으로 결정을 내리게 된다.
비틀즈라는 이름과 그 흔치 않은 표기(Beatles)의 기원에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대체로 이 이름은 레논이 지었다고 여겨지는데,
'귀뚜라미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밴드 크리캣츠(The Crickets)의 이름과
"beat"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말장난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또한 레논은 후에 "Beat-less"를 변형해서 만든 것이라 얘기하기도 했다.
존 레논이 "비틀즈"(Beatles)라는 이름을
"랜쇼 홀 바에서 술에 취한 상태에서 한 브레인스토밍의 결과"로서 정했다고 주장했다.
신시아에 따르면
존 레논은 그 장소에서,
'les beat'와 같은 "프랑스어 느낌의" 이름을 정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고 한다.
후에 레논은 한 잡지와의 1961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농담하기도 했다.
"불타는 파이(flaming pie) 위에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부터 당신들은 "A"를 쓰는 비틀즈다!'(From this day on you are Beatles with an "A".)"
레논의 이 이야기는
후에 폴 매카트니의 솔로 앨범 《Flaming Pie》의 제목과 동명의 수록곡에 영향을 주었다.
비틀즈는
데뷔 이전 쿼리맨, 실버 비틀즈 등으로 리버풀의 캐번 클럽과 독일 함부르크 등에서
라이브 공연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눈에 띄어
그는 비틀즈의 매니저가 되었고,
그의 노력으로 비틀즈는 1962년 1월 1일 데카 레코드의 오디션을 보지만 거절 당하였다.
그러다가 EMI의 팔로폰 레코드에서 일하는 녹음 기술자 조지 마틴이
록밴드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엡스타인은 조지 마틴에게 찾아가 비틀즈의 시험음반을 들려주었고,
조지 마틴은 오디션의 기회를 주었다.
비틀즈는 오디션을 통과했으며,
팔로폰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드러머 피트 베스트는
마틴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으며,
멤버들은 그를 추방시키고 새 밴드를 찾고 있던 링고 스타로 드러머를 교체한다.
그 후 비틀즈는
드디어 첫 싱글〈Love Me Do / P.S I Love You〉를 발표 했으며,
차트 17위까지 오르는 무난한 성적을 이루었다.
그리고 다음 해 1월에는
두 번째 싱글 《Please Please Me》로 차트 1위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다.
비틀즈는 이번엔 싱글형태가 아닌 10곡 이상으로된 정규앨범을 내자는 제안을 하였고
결국에는 첫 정규 1집《Please Please Me》를 1963년 3월 22일에 발표 하였고,
그 주 차트 6위까지 올랐다가 후에 1위까지 오른다.
이로 인해 비틀즈는 역사적인 데뷔를 할 수 있었다.
《Please Please Me》 발표 이후
비틀즈는 싱글 〈From Me To You〉로 차트 1위를 달성하게 되고,
뒤이어 발표한 싱글 〈She Loves You〉는
차트 1위는 물론, 영국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때부터 비틀마니아라는 신조어의 등장과 함께
비틀즈는 엄청난 팬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She Loves You〉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두 번째 정규앨범 《With the Beatles》를 1963년 11월 22일에 발표했다.
그리고 싱글 〈I Want To Hold Your Hand〉를
선주문 100만장이라는 경이로운 기록과 함께 발표,
곧바로 차트 1위곡이 되었다.
그 후 비틀즈는 미국 진출을 노리며
미국에도 〈She Loves You〉와 〈I Want To Hold Your Hand〉를 차례로 발표,
곧바로 미국의 인기 프로그램인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였다.
비틀즈가 출연한 에드 설리번 쇼는
시청자 수 약 7천 3백만명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비틀즈는 싱글 〈Can't Buy Me Love〉를 미국에 발표,
단숨에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
그리고 1964년 4월 4일
빌보드 싱글 차트에는 1위에서 5위까지의 노래가
모두 비틀즈의 노래가 된 놀라운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써 비틀즈는
영국 뿐만이 아니라 미국에서까지 슈퍼스타가 되었다.
이런 비틀즈의 활약을 평론가들은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고 칭하고,
그에 해당하는 밴드들은 비틀즈 뿐만이 아니라
롤링 스톤즈, 더 후, 킹크스(The Kinks), 애니멀스(The Animals) 등이 있다.
초창기 비틀즈는 미국의 초기 로큰롤 및 R&B 가수들의 노래를 커버하기도 했다.
비틀즈는 엘비스 프레슬리, 버디 홀리, 칼 퍼킨스와 같은
백인 음악가들과 척 베리, 리틀 리처드, 레이 찰스와 같은 흑인 음악가 양 쪽 모두에게 칭송받았다.
초창기 비틀즈 스스로의 작곡은
비틀즈 멤버 자신들이 영웅시하는 선배 음악가들의 양식을 모방한 데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 후 비틀즈는 그들 특유의 타고난 음악적 악상을 바탕으로
그들만의 개성이 돋보이는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들은 계속 승승장구 하였고,
정규 앨범 《A Hard Day's Night》을 1964년 7월 10일에 발매하고
앨범차트 1위를 차지, 앨범에 속한 곡들을 넣은 동명의 영화까지 찍게 되었다.
이 앨범에서 그들은 최초로 전곡을 자작곡 했으며,
12현 기타를 이용한 로큰롤 사운드는 밥 딜런, 버즈 등의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끼치며,
포크 록, 쟁글 팝 과 같은 장르의 탄생에 영향을 끼쳤다
(싱글 〈A Hard Day's Night〉 역시 1위를 차지했다).
그들의 음악은 단순했던 초기 히트곡들에 비해
갈수록 예술성이 풍부해졌다.
그리고 녹음을 하면서
스튜디오 레코딩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한 그들은
높은 수준의 레코딩들을 발표해 선보였고,
동시대의 어떤 뮤지션보다 앞선 실험들을 선보이게 된다.
하지만 바쁜 공연 일정 속에
그들은 작곡하는 시간조차 부족했다.
새 싱글 〈I Feel Fine〉은
무난한 평가와 함께 1위를 차지하였으나,
바쁜 스케줄을 쪼개서 작곡, 녹음하여
1달 뒤 발매된 정규앨범 《Beatles for Sale》은
비틀즈 앨범들 중 상대적으로 가장 떨어지는 앨범으로 평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범차트 1위를 차지하고,
싱글 〈Eight Days A Week〉도 1위를 차지하였다.
1964년 밥 딜런과의 만남 이후
비틀즈는 가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초기 그들의 노래 대부분은 사랑과 이별에 관한 노래였으며
큰 깊이는 없는 가사들이었다.
그들은 1965년에 신선한 느낌의 싱글 〈Ticket To Ride〉를 발표하여
차트 1위를 차지하였다.
뒤이어 8월 6일에 싱글 〈Help!〉와 동명의 정규앨범 《Help!》를 1965년 발매하여
또다시 1위를 차지하였다.
앨범 《Help!》는
한층 진일보한 음악성을 보여주며 대중과 평론 모두에게 호평을 받았다.
싱글 〈I Feel Fine〉 에서 역사상 최초의 피드백 주법을 시도했던 비틀즈는
이 앨범 4번 트랙 〈I Need You〉 에서 와와 페달 또한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더 후, 크림,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등의 음악가들의 하드 록 사운드에 영향을 끼친다.
또한 13번 트랙 〈Yesterday〉에선 현악 4중주를 도입하기도 했다.
이 곡은 기존의 팝에 새로운 예술성을 부여한 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Yesterday〉역시 싱글로 발매하여 1위를 차지했다.
1965년 8월 15일엔 북미투어의 일환으로
뉴욕에 위치한 야구 경기장인 Shea 스타디움에서 공연했다.
이 공연은 역사상 최초로 대형 경기장에서 치러진 공연이며
관중은 55,600명으로 이 또한 전례가 없는 기록이었다.
그리고 1965년 12월 3일,
비틀즈는 섬세한 서정성이 돋보이는 명반 《Rubber Soul》을 발표하였다.
포크 록적인 성향이 짙어진 이 앨범에서
그들은 한층 성숙한 느낌을 표현하였고,
특히 작사능력이 발전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비틀즈는 이 앨범에 수록된 곡 중 한 곡도 싱글로 따로 발매하지 않았다.
이는 비틀즈 스스로의 결단이었다.
록큰롤 사상 처음으로 앨범을 단순한 싱글 모음집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을 깨고,
앨범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여긴 것이다.
그래서 이 앨범은 '록 역사상 최초의 명반'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비틀즈는 《Rubber Soul》이 발매되기 전 발표된
싱글 〈Day Tripper / We Can Work It Out〉의 두 곡을
A사이드에 발매하여 모두 1위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Rubber Soul》에는 넣지 않았다.
이 앨범은 싱글 중심이던 당시 록 음악계를 앨범 중심으로 바꾸는데 큰 기여를 한다.
수록곡인 〈Norwegian Wood〉는 대중음악 최초로 인도악기 시타르를 사용한 곡이다
(시타르는 그 후 대중음악에 자주 쓰이는 악기로 자리매김 하였다.
이 곡은 롤링 스톤즈의 〈Paint It Black〉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퍼즈 베이스를 사용한 〈Think For Yourself〉나 절제된 아름다움의 〈Michelle〉,
세련된 편곡과 바로크풍의 피아노 연주가 돋보이는 〈In My Life〉 등의 곡들은
그들의 예술적 성장을 여실히 보여 준다.
《Rubber Soul》은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꼽히는
비치 보이스의 《Pet Sounds》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1966년엔 싱글 〈Paperback Writer / Rain〉을 발매하였고
A사이드 〈Paperback Writer〉는 1위를 차지했다.
이 싱글은 사이키델릭 록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보여준다.
특히 이 싱글을 통해 비틀즈는 그동안 인기에 비해 과소평가 받던 연주실력에 대해 재평가받았다.
특히 해리슨과 매카트니의 연주실력에 대해선 끊임없이 찬사가 있었다).
B사이드 〈Rain〉은 테이프를 역회전 시키는 백마스킹 기술을 최초로 사용한 노래로 화제를 모았다.
1966년 8월 5일에는 7번째 정규앨범인 《Revolver》를 발매하였다.
비틀즈는 《Revolver》를 통해 싱글 〈Paperback Writer / Rain〉에서 보였던
사이키델릭 록 성향을 더욱 확장해 펼쳐보였고,
대중과 평론계 모두에게 호평받았다.
《Revolver》에 실린 곡인 〈Eleanor Rigby〉와 〈Yellow Submarine〉은
서로 스타일이 확연히 다른 곡인데
일부로 두 곡을 묶어 싱글로 발매 하여 모두 1위를 차지하였다.
시타르 실력이 능숙해진 해리슨은
4번 트랙 〈Love You To〉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인도 음악 해석을 시작하며,
라가 록(raga rock)의 탄생에 큰 기여를 한다.
〈Eleanor Rigby〉는
현악 사중주와 보컬만으로 이루어져 있고,
〈Got To Get You Into My Life〉는
전면적으로 금관 악기(brass)세션의 연주로 이루어져 있다.
〈Yellow Submarine〉에는
수많은 기술적 효과음들을 삽입해
대중음악의 영역을 확장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Revolver》에 속한 곡들은
전술했듯 사이키델릭 록 음악으로, 마약을 한 느낌을 준다고 해서
그 당시 방송에 금지곡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14번 트랙 〈Tomorrow Never Knows〉는
최고의 사이키델릭 록 명곡 중 하나로 꼽힌다.
스튜디오 기술의 엄청난 혁신을 보여주는 이 앨범은
멤버들의 최상의 팀워크 안에서 수많은 장르의 음악들이 유기적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67년에 발매된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앨범보다
이 앨범을 더 높게 평가하는 음악팬과 평론가들도 많다.
그들은 월드투어를 하며
세계 각지에서 라이브 공연을 가졌으나,
곳곳에서 발생했던 해프닝과 안전사고 가 생겼다.
필리핀에서는
마르코스 당시 대통령의 지지자들에게 폭행을 당할뻔 하기도 했고,
일본에선
국수주의자들에게 위협을 받았으며,
안티기독교 발언으로 인해
지구 곳곳에서 살해 협박에 시달리기도 했다.
몸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도 힘들어져 갔다.
대규모 월드투어는
사실상 비틀즈가 최초였고
전례가 없던 것이라서,
안전문제부터 야외공연장 음향문제에 이르기까지
사전 노하우가 없던 탓에
수많은 시행착오와 미숙한 관리로 인한 해프닝들이 줄줄이 벌어졌다.
비틀즈는 쉴새 없는 월드투어에 점차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음악적인 창작에 매진할 시간적, 정신적인 여유를 찾게 된다.
결국 비틀즈는 1966년 8월
샌프란시스코 공연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순회공연을 중단할 것을 선언한다.
이는 지친 심신을 휴식으로 달래고,
음악적인 실험과 창작에 더욱 집중하겠다는 비틀즈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이후, 더 이상 바쁜 일정에 쫓기지 않고
충분한 여유를 가지며 창작에 매진한 비틀즈는
걸작으로 손꼽히는 싱글레코드인
〈Penny Lane / Strawberry Fields Forever〉를 1967년 2월 13일 영국에서 발매했다.
A사이드인 〈Penny Lane〉은
영국에선 2위를 했지만 미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
비틀즈는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중요한 앨범 중 하나로 꼽히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발매하였다.
이 앨범은
《Revolver》에서 보여주었던 사이키델릭 록 성향이 전면적으로 나타나며,
대중음악의 예술성을 한단계 끌어 올린 앨범이라는 평을 받는다.
3번트랙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는
발매 당시 LSD를 나타낸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레논은 그 사실을 부인했다
(사실 현재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LSD를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
레논이 자신의 곡이 금지곡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변명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6번 트랙 〈She's Leaving Home〉은
당시 뉴욕 필하모닉 상임지휘자였던 레너드 번스타인이 극찬하는 등
클래식계의 찬사가 이어진 작품이며,
13번 트랙 〈A Day In The Life〉는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가 서로의 미완성된 작품을 결합해 만든 매우 혁신적인 곡이다.
〈Within You Without You〉에서는
탐부라, 스와르만달, 타블라, 시타르 등의 인도 악기들이
동서양 악기의 협연을 보여준다.
그들은 이 곡에서 대중음악 최초로 5/4박자를 시도했다.
컨셉트 앨범 형식으로 만들어진 이 앨범은
음악가들과 대중들에게 컨셉트 앨범 형식을 제시하였다
(최초의 컨셉트 앨범은 마더스 오브 인벤션의 《Freak Out!》이라고 인정받는다.
실제로 폴 매카트니는
이 앨범에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이 앨범은 프로그레시브 록의 시초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고,
수많은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 앨범이 발매된 67년도에는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데뷔앨범 《Are You Experienced?》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데뷔앨범《The Velvet Underground & Nico》과
핑크 플로이드의 데뷔앨범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등
기념비적인 앨범들이 많이 발매되어 대중음악 최고의 해로 불린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는
빌보드 차트에서 무려 15주간 1위를 차지했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는
싱글로 따로 발매된 곡이 없으며
대신에 비틀즈는 수록되지 않은 곡인 〈All You Need Is Love〉와
〈Hello Goodbye〉를 차례로 싱글로 발매하여 두 곡 모두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1967년 6월 25일,
비틀즈는 전 세계 최초의 위성 생중계 방송 'Our World'에 출연했다.
BBC 방송국과 기획한 이날 방송은 전 세계 24개국에 생중계되었고,
비틀즈는 여기서 〈All You Need Is Love〉를 연주했다.
그 해 8월 27일,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수면약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고,
레논과 오노 요코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멤버들 간의 사이에 점점 금이 갔다.
11월 27일에는
미리 발표한 싱글 곡들과 미발표 곡들을 묶어《Magical Mystery Tour》를 발매하였다.
이 앨범은 그 당시엔 정규앨범 형태로 발매된게 아니어서
소위 명반 목록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갈수록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비틀즈식 사이키델릭 록의 가장 완성도 높은 성과물이라 재평가받고 있다.
그들은 같은 해 동명의 영화 《Magical Mystery Tour》를 직접 제작,
감독, 각본, 주연을 맡아 제작하기도 하였다.
1968년 발표한 비틀즈의 싱글 〈Lady Madonna〉는 차트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비틀즈는 해리슨의 추천으로
인도의 리쉬케쉬로 가게 된다.
마하리시 마헤쉬 요기의 가르침을 받게 된 비틀즈는
그 곳에서의 생활에 적응해 나가지만,
마하리쉬 요기의 부도덕함에 큰 충격을 받은 그들은 다시 영국으로 오게 되었다.
나중에 이 사건은 오해로 밝혀졌다.
디팩 초프라의 증언에 따르면
조지 해리슨이 마하리쉬 요기가 비틀즈를 쫓아냈다는 사실을 들려줬다고 한다.
하지만 비틀즈는 인도에서 생활하며
1968년에 발매할 《The Beatles》 앨범에 수록될 곡들의 상당수를 작곡하였다.
여전히 순회공연을 중지한 상태에서
레논과 오노 요코와의 사랑은 더욱 발전되어
비틀즈에 대한 그의 관심이 점점 줄어들게 되고,
중기 이후로 비틀즈의 주도권은 레논에서 매카트니로 움직이고 있었다.
비틀즈는 점점 결속력을 잃어갔다.
그 와중에도 8월 매카트니가
레논의 아들 줄리안 레논을 위해 쓴 노래인 〈Hey Jude〉를 발표해
9주간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
〈Hey Jude〉는 그 당시 빌보드 차트 1위에 가장 오래 머무른 노래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기쁨 가운데도
레논과 멤버들간의 불화가 끊임없이 일어났고,
비틀즈는 결속력 없이 멤버들의 솔로 곡들을 수록한 것처럼 느껴지는 앨범
《The Beatles》(통칭 White Album)을 1968년 11월 22일에 발표했다.
발매전 수록곡 문제로 멤버들이 서로 다투어
결국엔 2CD로 이루어진 30곡으로 발매되었다.
앨범 자켓은 두 버전이 있었는데
미니멀리즘을 표방한 흰색 바탕에 The Beatles라는 글자가 있는 것으로 채택되었다.
평론과 대중들의 반응은 뜨거웠으며,
평론가들은 그 당시 모든 록 스타일이 이 앨범안에 들어있다며 극찬을 했다.
White Album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더블 앨범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 앨범도 역시 싱글로 따로 묶어 발매된 곡이 없으며
〈Revolution 1〉은
〈Hey Jude〉싱글의 B사이드 였던 〈Revolution〉을 편곡하여 만든 곡이라 할 수 있다
(사실 〈Revolution 1〉은 〈Revolution〉보다 녹음을 먼저 했고
〈Hey Jude〉싱글 A사이드에 수록하려 했으나 너무 느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Revolution〉으로 편곡해서 B사이드에 나온 것이다.
〈Revolution〉의 가사 중 "Count me out?"이 〈Revolution 1〉에서는
Count me out-in이라는 것이 증거이다).
7번트랙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에서는
해리슨이 절친한 친구인 에릭 클랩턴에게 기타 연주를 부탁했고,
2CD 6번트랙 〈Helter Skelter은
헤비 메탈의 시초라 불리는 곡으로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그 밖에 레논이 쓴 〈Sexy Sadie는
마하리쉬 요기를 비판, 풍자하는 내용의 곡이며,
〈Happiness Is A Warm Gun〉은
세개의 악상을 절묘하게 합쳐놓은 곡으로,
비틀즈의 숨겨진 명곡으로 불린다.
비틀즈는 이 앨범에서 스카 스타일(Ob-La-Di, Ob-La-Da),
블루스 록 (Yer Blues),
컨트리 (Rocky Raccoon),
발라드 (Dear Prudence),
포크 (Blackbird) ,
펑크(Funk) (Everybody's Got Something To Hide Except Me and My Monkey),
팝 (Martha My Dear),
하드 록 (Helter Skelter),
실험적인 음악 콜라주 (Revolution 9)까지 선보인다.
비틀즈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주제로한 애니메이션
《Yellow Submarine》의 OST 앨범인 《Yellow Submarine》을 발매했다.
과거에 발표되었던 곡이나 보컬이 포함되지 않은 곡이 대부분이었으며
신곡은 몇 곡 되지 않았지만 인기가 높아 정규앨범으로 속하게 되었다.
비틀즈는 꾸준히 불화 상태에 있었으며 관계는 개선되려 하지 않았다.
그 가운데 매카트니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자라는 뜻이 담긴 싱글 〈Get Back〉을 발표하여
1위를 차지하는 기쁨을 맞이 했다.
그리고 레논은 〈The Ballad of John And Yoko〉를 발표해 1위를 하였다.
그 후 비틀즈는 《Get Back》 앨범의 녹음을 마치고 발매하려 했지만
매카트니는 이 앨범이 마음에 들지않았고 발매가 보류되었다.
《Get Back》 앨범이 보류되자
비틀즈는 사실상 마지막 앨범인 《Abbey Road》의 녹음에 들어갔고
서로 화합된 모습으로 녹음을 무사히 끝마쳤다.
그리고 애비로드 스튜디오 앞에서의 자켓촬영을 마친 후
《Abbey Road》가 발매됐고 차트 1위를 차지하였다.
무그 신시사이저를 폭넓게 사용한 이 앨범은
비틀즈 앨범 중 가장 세련된 앨범이라 여겨진다.
특히 이 앨범의 백미인 일련의 짧은 곡들로 이어지는 메들리
(트랙 9번 부터 16번까지, 일명 '애비로드 메들리')는
록 음악에 드라마틱한 오페라적 요소를 결합시켜
많은 음악팬들을 매료시켰다.
앨범의 마지막 곡인 〈Her Majesty〉는
최초의 히든트랙이라 여겨진다.
1번트랙과 2번트랙인 〈Come Together〉와 〈Something〉은
따로 싱글로 발매, 두 곡 모두 1위를 차지하였다.
특히 〈Something은
해리슨이 작곡한 노래 중 최초의 1위곡이다.
해리슨은 이 앨범의 〈Something>과 〈Here Comes The Sun〉을 통해
자신의 커다란 음악적 성장을 보여줬다.
그리고 링고 스타 또한 〈Octopus's Garden〉으로 나름대로의 음악적 성장을 보여주었다.
계속되는 성공 속에도
비틀즈의 결속력은 계속 떨어져 불화로 이어졌고,
레논은
비틀즈보다는 오노 요코와 활동하기를 원했다.
비틀즈는 사실상 해체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고
이미 멤버들은 각자의 솔로 앨범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매카트니는
비틀즈를 놓지 않았고
보류되었던 앨범인 《Get Back》을
조지 마틴이 아닌 필 스펙터에게 프로듀싱을 맡기며
결국에는 《Let It Be》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1970년 5월 8일에 발매 하였다.
싱글로 〈Let It Be〉를 발표,
1위를 차지하였고
후에 〈The Long and Winding Road〉를 싱글로 발매하여
마지막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유명한 애플 레코드의 옥상 공연이 포함된 영화
《Let It Be》가 개봉하였다.
《Let It Be》 앨범이 발매되고 나서도
여전히 멤버들 간에 사이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멤버들은 이미 각자의 솔로 앨범을 발매하였다.
언론에서도 비틀즈의 해체를 기정사실화 하였다.
그리고 결국 매카트니가 1970년 4월 10일 데일리 미러와의 인터뷰에서 해체를 공식발표하며
비틀즈는 공식 해체되었다.
해체 이후 공연이나 신곡을 녹음하는 등의 활동은 없었으나
1995년 시작된 앤솔로지(The Beatles Anthology) 기획에 맞춰
존 레논이 1977년 녹음한 미완성곡 〈Free As A Bird〉의 데모 테이프에 남은 세 멤버가
연주와 코러스를 덧입혀 비틀즈의 신곡으로 발표하였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유일한 재결성이 되었으며,
다음해 레논의 솔로 곡인 〈Real Love〉도 같은 형식으로 제작하여
비틀즈 버전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이후 2001년 조지 해리슨이 사망함으로써
더 이상의 재결성은 불가능해졌다.
2000년에는
영국 및 미국에서 음악 차트 1위를 한 곡을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 《1》을 발매,
1주일만에 360만장을 판매하여
세계에서 가장 빨리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었다.
전 세계적으로는 3000만장 이상 팔린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2003년에는 《Let It Be》앨범을
리믹스하고
보너스 디스크 〈Fly on the Wall〉을 추가한 《Let It Be... Naked》를 발매했다.
2006년에는
《태양의 서커스》 배경곡으로 사용된 악곡을 모은 《LOVE》를 발매했다.
태양의 서커스는
비틀즈 자신이 출연하지 않은 매체의 배경 음악으로 비틀즈의 원곡이 사용된
최초의 사례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조지 마틴과 그의 아들 가일스 마틴이 공동 제작했다.
비틀즈의 정규 앨범에 Magical Mystery Tour와 Past Masters를 포함한
14 작품 CD 16장 분량을 디지털 리마스터 스테레오 음원으로 제작하여 발매했다.
1987년 CD화 시절 모노로만 발매되었던 4장의 초기 앨범을
스테레오로 발매했으며,
오리지널 모노 앨범을 담은 'The Beatles In Mono'도 같은 날 발매되었다.
또한 같은 날에는 음악 게임 '
The Beatles : Rock Band'가 PS3, XBOX 360, Wii 용으로 발매되었다.
이 게임의 제작에는
조지 해리슨의 아들 다니 해리슨이 참여했으며
게임의 음원 및 앨범의 제작은 가일스 마틴이 맡았다.
레논과 매카트니는 밴드의 주요 곡들을 작곡했으며,
초창기에는 작곡면에서 큰 활약은 없었던 해리슨은
후기 비틀즈에서 큰 공헌을 했다.
비틀즈는 주로 다음 가수(그룹)에게 영향을 받았다.
- 비틀즈는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많은 수의 엘비스 커버를 녹음했다.
또한 다큐멘터리 앤솔리지에서 비틀즈의 멤버 4명은 프레슬리를 스승(guru)라 칭한 바 있다.
- 비틀즈는 〈Roll Over Beethoven〉이나 〈Rock and Roll Music〉과 같은
척 베리의 노래를 그들의 초기 앨범에 수록했었고,
라이브로 공연한 적도있다.
레논이 처음 베리를 만났을 때,
레논은 "척 베리! 당신은 내 영웅이에요!"라고 소리쳤다는 일화도 있다.
- 킹은 비틀즈에 블루스적인 성격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영향은 〈Get Back〉이나 〈I Me Mine〉에서의 기타 연주에서 발견할 수 있다.
- 초기에 영향을 미쳤다.
비틀즈는 〈Words of Love〉를 녹음한 적 있다.
또한 비틀즈라는 이름이 홀리의 배킹 그룹 크리켓츠(The Crickets)에서 왔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이다.
스튜어트 섯클리프가 Beetles를 제안했고,
레논은 이를 Beatles로 살짝 변형했다.
- 밥 딜런과 비틀즈는 서로간에 영향을 주고 받은 관계였다.
밥 딜런은 비틀즈에게 영향을 받아서
기존의 포크에 락캔롤을 접목시키려는 시도에 눈을 떴고,
비틀즈는 딜런의 영향을 받아서 가사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You've Got to Hide Your Love Away〉(Help!),
〈Norwegian Wood (This Bird Has Flown)〉(Rubber Soul)과 같은 곡에서
그 영향을 찾을 수 있다.
딜런은 뉴욕의 호텔방에서 비틀즈에게 마리화나를 처음 소개시켜 준 사람이기도 하다.
- 레논과 매카트니는
돈 에벌리와 필 에벌리의 독특한 이중창을 모방했다.
〈Love Me Do〉나 〈Please Please Me〉는
에벌리의 〈Cathy's Clown〉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고,
〈Two of Us〉는 완벽한 에벌리 스타일 노래였다.
- 비틀즈는 초기에 배럿 스트롱의 모타운 레코딩인 〈Money (That's Wat I Want)〉나
마블릿츠의 히트곡 〈Please Mr. Postman〉을 카피한 곡을 앨범에 수록한 적이 있다.
- 초기의 몇몇 곡들은 리처드의 〈Long Tall Sally〉에서와 같은 가성 스크림이 등장한다.
1962년, 리처드는 함부르크에서 비틀즈와 교제한 적 있으며,
〈Long Tall Sally〉는 초기 비틀즈 콘서트에서 꾸준히 등장했던 곡이다.
EP Long Tall Sally (1964)과
더블-EP Magical Mystery Tour (1967)는
영국에서 발매한 LP가 아니므로 다음 문서를 참고 해야한다.
화석 삼엽충 종들에 애벌런처러스 레노니(Avalanchurus lennoni),
애벌런처러스 스타리(Avalanchurus starri),
스트러스치아 메카트니이(Struszia mccartneyi)라는 이름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