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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모독(2)
-금강대협곡 살인-
조덕수의 피살현장을 찾기 위해 옌지에 온 정명철은 대주호텔에 묵기로 했다. 리셉션 데스크에서 방 열쇠를 받아 들고 돌아서는데 상양툰에서 보았던 그 사나이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얼른 쫓아갔지만 이미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문 앞에 서서 층별 표시등을 통해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한 동안 올라가던 엘리베이터는 5층에 머물렀다.
정명철은 다시 리셉션 데스크로 돌아 와서 물었다.
“지금 막 일행 중 한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는데 급히 전해 줄 것이 있어요. 그 사람 방이 몇 호실이지요?“
데스크 아가씨는 정명철을 물끄러미 보다가 대답했다.
“503호실입니다.”
“고마워요.”
돌아서려다가 멈칫 섰다. 머리를 스친 생각이 그를 붙잡았다.
“아가씨, 일행인데 기왕이면 502호실로 바꿔주시오.”
아가씨는 또 한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명철은 여행 중 조선족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주려고 가져온 초코파이를 하나 그녀에게 내밀었다.
“한국 초코파이 맛 있어요. 한번 먹어 보세요.”
그러자 데스크 아가씨는 손을 내밀어 그의 방 열쇠를 받은 후 초코파이를 받았다.
“502호실은 없구요 501호실이 비어 있어요.”
“아! 괜찮아요.”
그는 열쇠를 받아들고 다시 엘리베이터로 갔다.
5층에서 내려 보니 501호실이 엘리베이터에서 가까웠다. 그는 501호실 문을 열지 않고 복도 안쪽으로 향하면서 503호실을 지나쳐 갔다. 슬쩍 503호실 문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가 고개를 바로 했다. 안에서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룽징(龍井)으로 가서 일송정휴게소 현장을 둘러보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다음 선양까지 그 사나이를 미행해 볼 작정이었다.
정명철은 룽징 시내에서 일송정으로 가는 비암산 입구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 입구에는 룽징 운동장이 있고, 운동장 옆을 돌아 질러가는 길로 들어섰다. 쓰레기 매립장인 듯 야트막한 언덕 가장자리에 쓰레기들이 쌓여 있었다. 언덕에는 나무들이 심겨져 있었으나 아직 어려 올라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중간쯤 가다가 보니까 부녀자들이 저 위 포장길에 늘어서서 덩실덩실 춤추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도 정겹게 보여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5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자들이어서 관광객들인가 싶었다.
“아주머니들 어디서 오셨어요?”
“용정 시내서 왔시오.”
“아, 그러면 용정 삽니까?”
“용정 사는데 놀이 나왔시오. 아주바이는 어디서 오셨시오?”
“한국서 왔어요. 반가워요. 잘 노시라요.”
“우리 아이도 한국에 사는데 반갑시오. 이거 하나 드시라요.”
아들이 서울에서 일한다는 아주머니는 특별히 반가운 기색을 보이며 삶은 옥수수 하나를 권했다. 그러고 보니 길옆에 카셑 라디오를 켜놓고 조그만한 보따리에 옥수수와 감자 등 먹거리를 갖다놓았다. 정명철이 이 아주머니와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에도 아주머니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이곳 조선족 여인들이 일상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푸는 모습이었다.
혹시나 하고 살인사건을 물었다.
“저 위 일송정휴게소에서 죽은 사람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까?”
그 아주머니는 주춤주춤하다가 주위를 살핀 후 조그맣게 말했다.
“들었시오. 죽은 사람이 조선족 청년이란 말입메.”
“그래요. 혹시 다른 얘기는 못 들었어요?”
그러자 아주머니는 정명철의 손을 잡아 옆으로 끌고 가더니 숨죽인 소리로 뜻밖의 소식을 알려주었다.
“아주바이, 나 좀 보기요. 한국에서 왔다느 말으 믿고 내 얘기함둥. 북조선 사람이 청년으 데리고 이리 왔다가 쥑였다는 소문이 납소꼬망.”
아주머니는 그래놓고 일행이 눈치 챌세라 얼른 춤판에 끼어들었다.
그는 ‘조선족 청년을 북한사람이 데리고 와서 죽였다고...’ 되뇌이며 일송정휴게소 쪽으로 올라갔다. 휴게소 가까이 다가 갈수록 주변이 어수선했다. 외딴 곳이라 그런지 입구에 줄만 쳐 놓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줄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서 살폈다. 유리 조각하며 벽을 부수어 생긴 콩크리트 조각들이 널려 있어서 단서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미 중국 공안이 현장 수색을 끝낸 터라 별 기대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조그만 포장지가 눈에 띄었다. 창가 가까운 바닥에 널려진 유리조각에 눌려 있었다. 어디서 본 듯한 포장지라 생각하며 주어 보았다. 겉에 ‘상양툰’이란 상호가 인쇄된 이쑤시개 포장지였다.
-아! 상양툰 이쑤시개!
그는 혼자 소리를 질렀다. 상양툰 이쑤시개에 대한 의혹이 다시금 살아났다. 상양툰에서 이쑤시개의 장본인을 만났지만 단순 이쑤시개 사용자로 판명되어 이쑤시개를 둘러싼 추리가 필요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제2 살인현장에서 또 이쑤시개가 발견되다니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혼자 골돌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인기척이 났다. 섬뜩하여 획 뒤돌아보다가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아까 그 용정 아주머니가 들어서고 있었다.
“아, 아주머니가 왠 일이에요?”
“아주바이, 잠간 나 좀 봅세.”
이들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동안 일송정휴게소가 내려다보이는 산언덕에서 한 사나이가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바짝 다가오더니 정명철의 손을 잡아끌었다. 왜 그러나 하고 의아해 하면서 따라가니까 문 밖으로 나가더니 휴게소 뒤 언덕으로 갔다. 그리고 쓰레기 더미 밑을 파헤쳤다. 뭔가가 손에 잡힌 것을 들어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종이에 싼 것을 풀어 보니 휴대폰이었다.
시체가 발견되기 전에 혼자 바람 쏘이러 일송정휴게소 옆을 지나다가 눈에 들어와서 주었다고 했다.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준다고 말한 후 부리나케 언덕길을 내려갔다.
강철은 동생 같은 조덕수를 일송정휴게소로 불러내 살해하라는 지령을 남강식으로부터 받은 후 자신의 처지를 두고 끌탕을 앓고 있었다.
강철은 중국 공안의 수사에 혼선을 일으키기 위해 살해현장에 상양툰에서 가져온 이쑤시개를 버렸다. 사후 안전판을 만든다고 한 짓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조덕수를 없애라니 납득할 수 없었다.
지시대로 문석인을 죽였는데 상은 주지 못할지언정 살해하라니 어처구니없었다.
조덕수가 누구인가?
연변에 사는 조선족들이 남조선과 중국 간에 국교가 수립된 이후 너도 나도 서울로, 서울로 가고자 하는 판인데도 조덕수는 조국을 떠나기 싫다며 남조선행을 거부했다. 그는 단순히 남조선에 가기가 싫은 것이 아니라 조선족들이 남조선으로 가려는 것을 조국을 배반하는 반역이라고 생각했다.
“이때까지 장군님을 우러러 보며 혁명전선에 한 몸을 바치겠다고 하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남조선이 살기 좋다며 우루루 몰려가는 꼴은 도저히 그대로 볼 수가 없어!”
강철이 어느 날 그에게 ‘동무도 기회가 있으면 남조선에 갈 거이 아니냐’고 다그치자 그렇게 강하게 거부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강철은 그런 그를 동생이라고 부르며 형제지간 우애를 두텁게 해왔다. 사실 그를 이번 암살작전에 끌어들인 것도 둘이서 공을 세움으로써 형제는 용감했다는 것을 평양의 고위층에게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잘 되면 장군님의 귀에까지 들어 갈 수 있게 되고 나아가 둘이 나란히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남모르게 부풀었다.
-내래 어캐 덕수를 죽음으로 몰고 가지비?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강요한 남강식을 오히려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 후가 문제였다. 남조선으로는 가고 싶지 않고 중국에 있으면 체포되어 처형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남 공작대장이 강철의 속마음을 궤뚫어 보듯 단호히 한마디 던진 것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동무, 만에 하나 덕수를 살려 둘 생각을 한다면 그날로 동무는 반역죄인이 되어 평양 만수대광장에서 처형될 줄 알라우.”
강철은 결국 자신의 혁명정신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따를 수 밖에 없다는 쪽으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 첫 번째 희생이 조덕수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노정에 제2, 제3의 덕수가 나타날 날 수 밖에 없는 것이 혁명가의 운명이라는 판단에 이르자 덕수를 일송정휴게소로 불러냈다.
조덕수는 강철로부터 일송정휴게소에서 만나자는 전화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때까지 해오던 대로 강철과의 통화 내용을 삭제했으나 어머니와의 일상적인 통화내용은 삭제 대상이 아니라 그대로 두었다. 그는 ‘일제시대 선조들의 투쟁정신을 기리며 얘기를 나누자’는 강철의 제의로 일송정휴게소로 갔다가 다른 사람이 아닌, 형 같은 그에게 변을 당했다.
강철은 여기서도 상양툰에서 가져온 이쑤시개 포장을 하나 떨어뜨려 놓았던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상양툰의 이쑤시개 사나이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기 위해서였다.
정명철은 오래 있다가는 중국 공안의 눈에 띌 것 같아 잠시 휴대폰을 살펴 본 후 내려가려고 했다. 이때 뒷산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그 사나이가 정명철 뒤로 가만가만 다가오고 있었다. 휴대폰을 열어 보던 정명철은 호텔에서 천천히 살펴보는 것이 낫겠다 싶어 도로 닫고 안주머니에 넣었다. 막 돌아 서려는데 인기척을 느꼈다. 누군가 하고 사람을 의식하는 것과 동시에 커다란 손이 입을 털어 막았다. 위험을 느낀 정명철은 털썩 주저앉으면서 오른쪽 팔꿈치로 사나이의 명치를 가격했다. 사나이는 잠시 윽! 하고 숨이 멎는 것 같았지만 이내 손아귀에 힘을 주어 압박을 가했다.
정명철은 직감적으로 힘이 부치는 것을 느끼자 무엇인가 무기가 될만한 것이 없는가 마음속으로 살폈다. 둘이서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발바닥에서 유리조각 밟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팔로 사나이의 팔을 부여잡고 다시 주저앉으면서 온 몸의 무게를 팔에 실어 앞으로 꼬꾸라지듯 사나이를 내동댕이쳤다. 그가 움찔하며 앞으로 몸이 수그러지는 틈을 타 손에 잡히는 대로 유리조각을 주어 들고 공격을 했다. 순간 사나이가 으악! 소리를 지르고 주춤거렸다. 손등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 사이 유리조각으로 2차 공격을 가하려는 찰라 사나이의 무쇠 같은 주먹이 정명철의 면상을 후려쳤다. 홍두깨로 얻어맞은 것 마냥 얼얼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는데 사나이는 재빨리 팔로 목을 감고 옥조이기 시작했다.
캑 캑 캑-숨통이 끊어질 것 같았다. 발버둥 쳐봤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점점 의식이 몽롱해지면서 위기를 느꼈다. 고함을 치려고 해봤지만 입을 벌일 수 없었다.
-이 놈이 누군지도 모르고 당해야만 하나.
흐릿한 의식으로도 울분 같은 것이 차올라 그냥 죽을 수가 없었다. 하는 데까지 해보고 죽자, 하는 오기가 발동하자 힘이 불끈 솟는 것 같았다. 다시 한번 처음 시도했던 공격을 감행했다. 젖 먹던 힘을 다 하여 기합을 넣는 순간 그 놈을 앞으로내동댕이쳤다. 그러나 마음뿐이었다. 앞으로 꼬꾸라져야 할 놈이 오히려 힘껏 팔을 조여 숨통을 끊을 작정이었다. 정명철이 축 늘어지는데 어디선가 둔탁한 소리가 퍽! 하고 들렸다. 그 소리에 의식이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숨통을 조여오던 팔이 풀리더니 후닥닥 달아나는 소리가 이어졌다. 캑 캑 기침을 뱉은 후 숨을 헐떡였다. 얼떨결에 눈을 뜨고 두리번거렸다. 누군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정 선생, 나요.”
정신을 차려보니 김기진 영사였다.
그는 옌지에서 정명철을 만날 시간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그가 제2살인 현장으로 가는 것을 보고 신변안전이 걱정돼 달려왔다는 것이었다. 때마침 정명철이 위기에 처해 있자 몽둥이로 사나이의 어깨를 내리쳤다고 했다.
“하마터면 큰 일 날뻔 했어요. 우선 옌지로 갑시다. 이런 데에 혼자 오면 위험합니다.”
김 영사가 사나이의 인상착의를 물어 봤지만 뒤에서 공격을 해와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정명철은 김 영사와 얘기 도중 혹시 조선족 아주머니가 준 휴대폰에 대해 물어 볼까 봐 경계하고 있었으나 피살자의 소지품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둘이 서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달아났던 사나이는 다시 다가 와 멀찍이 나무 뒤에 서서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김 영사는 빨리 이곳을 벗어나자면서 정명철과 함께 룽징운동장 옆으로 난 지름길로 가지 않고 운동장 뒤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갔다.
정명철은 대주호텔로 돌아와서 바로 501호실로 갔다. 거기서 503호실의 인삼장수 사나이가 수상하다는 점을 김 영사에게 설명했다.
그가 대주호텔에 체크인할 때 5층에 내려 복도 끝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면서 잠시 503호실 문 앞에 섰다. 안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숨을 멈춘 채 신경을 곤두세웠다. 간간히 말소리가 새나왔다.
“네? 아 네. 상양툰에... 네? 가지 말... 네? 선양으로요... .”
무슨 말인지 잘 몰라 고개를 갸우뚱 하는데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객실 손님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걸어오고 있었다. 정명철은 시치미를 뚝 뗀 채 501호실로 왔다.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워 503호실에서 엿들은 말을 정리해 봤다.
‘상양툰’ 다음 말이 분명히 들리지 않았지만 ‘가지 말...’까지 들린 걸 보면 ‘상양툰에 가지 말고 선양으로 바로가라’는 말인 것 같았다. 마지막에 들은 ‘선양으로요’라는 말과 종합해 보면 그렇게 짜 맞추기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양툰은 노출이 되어 위험하므로 선양으로 복귀하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 사나이가 문 선생 살해사건과 직접 관련이 있을 개연성이 커졌다.
김 영사는 대충 인상을 얘기 듣고는 그 사나이가 선양 주둔 북한 특수공작대 요원 중에 보지 못한 얼굴이란 것을 알았다. 어쩌면 지난번 국정원 요원을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한 그 놈인지 몰랐다. 그렇다면 아주 위험한 존재다.
김 영사는 혼자 다니지 말라고 정명철에게 경고했다. 그는 온 몸이 오싹해지는 느낌이었다. 한발 늦었으면 그 사나이에게 당할뻔 한 것이다.
이 시간에 아까 정명철을 기습했던 사나이는 한 중년 여인을 붙잡고 다그치고 있었다.
그가 김 영사와 함께 일송정휴게소를 떠나고 얼마 후 사나이는 다시 휴게소로 내려왔다. 무언가 잊어버린 것이 있는 사람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뒤에서 인기척을 듣고 돌아섰다. 뜻 밖에도 한 여인이 손짓을 하며 올라오고 있었다.
“아주바이요! 나 좀 봅세.”
정명철이 휴게소에서 만났던 용정 아주머니였다. 그가 김 영사와 운동장 뒤쪽 포장도로로 내려 간 사이 언덕 지름길로 오느라 길이 어긋난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것도 모른 채 이 사나이를 정명철로 알고 손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내에 다다를 무렵 서울 아들 주소를 서울 아주바이에게 알려 줄 것을 깜박 잊었다는 것을 깨닫고 일송정휴게소로 다시 올라오던 중이었다. 여인은 험상궂은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사나이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제야 일이 잘못 됐다 싶었다. 막 돌아서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사나이의 억센 손이 여인의 팔을 붙잡았다.
“이 보라우 여성 동무, 나 좀 봅세.”
그길로 사나이는 사색이 된 여인을 끌고 일송정휴게소로 들어 가 족치기 시작했다.
“내 말으 잘 듣기요. 남조선 간나 새끼와 무시기 말으 했음둥?”
“별 말으 안했꼬망.”
“니 거이 죽고 싶어니까니 니러구 지랄하지비.”
사나이는 사냥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매 마냥 오들오들 떨고 앉아 있는 여인을 위압하면서 좀처럼 놓아 줄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사나이는 바로 그 자리에서 조덕수를 살해한 강철이었다. 그는 동생 같은 동지를 살해한 후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운 가운데 정명철이 살해현장을 찾아가는 것을 눈치 채고는 후환을 없애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간나새끼 하나쯤은 문제도 없다는 생각에 별 경계도 하지 않고 나섰다가 역공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자 흥분상태에 빠진 그는 때마침 나타난 용정 아주머니를 먹이로 나꿔챘던 것이다.
정명철은 창춘으로 오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인삼장수로 가장한 그 사나이가 암살에 관련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가 암살음모를 실행하기 위해 암약한 장소는 말할 것도 없이 상양툰이다. 김 영사로부터 그의 행적을 듣게 되면 사건의 실체가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자신이 할 일이 있었다. 문석연 선생을 살해한 자와 살해동기는 무엇인가, 그리고 왜 현장에 같이 갔던 조선족 조덕수를 살해했는가를 밝히는 일이다.
지금은 무엇인가가 손에 잡힐 듯한 예감이 자신을 휘감고 있었다. 조선족 아주머니가 준 휴대폰을 떠올렸다. 통화기록부터 살폈다. 작가단이 선양에 도착하기 전 날부터 그가 살해당하기 직전까지 통화기록이 하나도 없었다. 의도적으로 지운 것 같았다. 그런데 28일 오후 1시 통화기록이 남아 있었다. 아마 살해당하기 직전에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받고 미처 지우지 않은 상태에서 살해당한 모양이었다. 발신번호를 확인했다. 발신인의 이름도 나와 있었다. 뜻 밖에 여성이었다.
-박귀숙, 1384-433-6578
이름과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는 것을 보면 가까운 사람일 것이다.
창춘에 도착 즉시 김 영사에게 죽은 조덕수의 피살 당일 통화 내용과 발신인 박귀숙의 신원을 확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정명철은 혹시나 하고 휴대폰 앨범을 열어 보았다. 앨범 목록에는 중요한 단서가 될만한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상양툰 벽화가 여러 장 찍혀 있었고 몇 장을 넘기자 금강대협곡 사진이 몇 장 나왔다. 긴장한 채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숨을
훅 들이 쉬었다. 몇 십 미터 협곡 아래로 굴러 떨어진 사람의 모습이 담긴 장면이 있었다. 확대하여 보니 문석연 선생이 틀림없었다. 문 선생을 살해했다는 증거로 남겨 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조덕수가 문 선생을 살해한 후 사라졌다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것인데 아마도 증거 인멸을 위해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컸다. 이쑤시개 사나이가 한 짓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생겼다.
이쑤시개 사나이를 떠올리자 그가 상양툰에 잠복한 북한 요원일 것이라는 내면의 경고가 신경줄을 긴장시켰다. 범인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지만 혼자서 대처하기는 힘겨운 일이었다. 김 영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박귀숙의 신원을 조회해 본 결과 조덕수의 모친으로 밝혀졌다는 것이었다. 피살 당일 박귀숙이 건 전화는 아들이 며칠 집에 들어오지 않자 안부를 묻는 것이었고 조덕수는 잘 있으니 걱정 말라고 대꾸하는 평범한 내용이었다.
정명철은 창춘에 도착한 후 호텔에 들러 잠시 휴식을 취했다. 지금까지 추적한 자료를 가지고 용의자의 범위를 좁힌 후 상양툰으로 갈 생각이었다. 인삼 장수 사나이와 죽은 조덕수, 그리고 이쑤시개 사나이-이들 세 명이 문제였다. 조덕수는 살해된 것으로 봐서 공범이지만 종범 같은데 나머지 두 사람 중 누가 주범인지 알 수 없었다. 인삼장수의 행적은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지만 이쑤시개 사나이는 상양툰에 틀어박혀 있는 것만 봐서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뉴스나 보고 가자는 생각에 텔레비전을 켰다. 옌벤방송에서 중년 여성 사진을 띠우고 무언가 보도하고 있었다. 조선말 방송이라 호기심을 가지고 보니 낯익은 얼굴 같았다.
-아, 어디서 본 얼굴인데... .
잠시 기억을 더듬는데 일송정휴게소에서 만났던 용정 아주머니가 떠올랐다.
-용정 아주머니가 왠 일이지?
뉴스에 귀를 기울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아주머니가 일송정휴게소에서 살해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자신에게 땅 밑에 숨겨둔 휴대폰을 건네주고 부리나케 내려간 사람이 언제 다시 거기 왔다가 살해되었단 말인가? 살해장소로 봐서 조덕수를 살해한 자의 소행일 것으로 짐작했다. 그렇다면 일송정휴게소에서 기습했던 그 사나이가 결국 조덕수 살해범과 동일 인물로서 용정 아주머니도 살해한 것으로 추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명철은 일단 이쑤시개가 현장에서 발견된 점으로 보아 이쑤시개 사나이가 자기를 기습했을 것으로 가정한 후 그를 살해범으로 지목하고 혐의점을 찾아낼 작정이었다.
그가 상양툰 현관으로 들어서자 예의 전시용 조리대에서 요리사가 손님에게 줄 요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냥 지나치려는데 언뜻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요리사의 입에 이쑤시개가 물려 있었다.
-아! 저 이쑤시개!
그는 섬뜩한 기분에 얼른 얼굴을 돌려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곧 바로 103호실로 향했다. ‘탄로 날 위험’이 있다고 경고를 보낸 장소에 무언가 다른 단서가 있을 것 같아 먼저 둘러볼 생각이었다.
상양툰 마을의 신년총회 장면에서는 새로이 추가된 것이 없었다. 다만 ‘탄로 날 위험’을 알린 암호문은 지워져 있었다. 이쑤시개 사나이와 관련된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2층에는 무엇인가 있겠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103호실을 나왔다.
2층으로 가려고 복도 왼쪽으로 도는 순간 바로 위 2층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가 잠시 들렸다가 사라졌다. 의아한 생각을 하면서 현관 쪽으로 보았으나 아까 보았던 그 요리사는 그냥 그 자리에 선 채로 요리를 뒤적이고 있었다. 이쑤시개 사나이는 정명철의 동작을 아는지 모르는 지 그저 요리에만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더욱 미심쩍었다.
-왜 저 사나이가 시치미를 뚝 잡아떼고 있는 것일까?
속으로 중얼거리며 계단으로 올라갔다. 202호실로 향하면서 주위를 살폈으나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202호실로 들어서서 예의 상양툰 마을 연말총회 장면을 살폈으나 별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정명철이 이쑤시개 사나이의 혐의점을 찾는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사이 2층 화장실 쪽에서는 수상한 사나이 하나가 변기통에서 일어나 문을 살짝 열고 있었다.
정명철은 일단 전처럼 무슨 암호문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아 다른 단서를 찾고 있었다. 벽에 도배질하다 싶이 해 놓은 신문이며, 사진이 든 장식장, 진열대 위에 놓인 자기 항아리 등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나는 것 같았다. 뒷머리가 쭈뼛해지는 것을 느끼며 뒤돌아보았다. 목구멍에서 숨이 콱 막혀 왔다. 자신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었다. 눈동자에 들어온 낯익은 얼굴이 재빠르게 일그러졌다.
-아! 인삼장수 사나이가!
그가 바로 강철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자신의 가슴팍을 향해 정조준된 권총의 총구에서 불꽃이 확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당하다니!
만화경처럼 뇌리에 연속적으로 스쳐가는 영상들에 놀랄 사이도 없이 체념 섞인 신음을 토하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다. 간발의 순간에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들려온 또 한발의 총성이 팽팽한 202호실의 공기를 뒤흔들어 놓았다.
정명철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돌발사태에 주눅이 든 것인지, 감각이 마비되어 버린 것인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소리가 얼이 빠져 있는 그를 차츰 제정신으로 되돌려 놓았다.
“정 선생! 괜찮아요?”
마치 그를 옭아매고 있는 덫을 떨쳐 버리려는 듯 몸을 한번 부르르 떨고 난 정명철은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저, 이쑤시개 사나이가!
뜻 밖에 이쑤시개 사나이가 권총을 든 채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삼장수 사나이는 뇌수가 쏟아진 채 입구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쑤시개 사나이는 국정원 요원 암살 특별수사팀 소속 문성준으로서 상양툰에 잠복근무 중이었다. 최근 북한 특수공작대 요원들이 상양툰을 중심으로 무엇인가 음모를 추진하고 있는 낌새를 차리고 며칠 사이 동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정명철이 식당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의 동태를 관찰하고 있었다. 정명철에게 오해를 받아 화장실에서 봉변을 당했지만 범인을 잡기 위해 신분을 노출하지 않고 강철 일당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문성준은 조금 전 정명철이 식당 안으로 들어 설 때부터 그의 동선을 따라 신경을 움직이고 있었는데 인삼장수로 가장했던 강철이 은밀하게 정명철의 뒤를 밟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정명철이 102호실로 간 사이 강철이 2층으로 올라가고 얼마 안 있어 정명철이 뒤따라 2층으로 올라갔을 때 문성준은 슬그머니 현관을 벗어나 아래층에서 두 사람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강철이 203호실로 향하는 것을 눈치 챈 문성준은 권총을 꺼내 들고 계단을 올랐다. 살금살금 발걸음을 내딛는 그를 알아차리지 못한 강철은 비무장인 정명철을 단숨에 해치울 작정이었다.
문성준은 일촉즉발의 순간에 강철의 뒤통수를 향해 필살의 일발을 날렸던 것이다. 정명철은 자신이 그를 내내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 겸연쩍어 눈길을 돌렸다.
북한 특공대장 남강식은 뜻 밖에 불거진 변수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문석인을 암살한답시고 1급 요원을 동원하여 일단 결행을 했으나 피살자가 문석인이 아닌 것 같다는 평양으로부터의 전언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박 대좌가 확인한 바로는 서울 고첩으로부터 문석인이 살아 있다는 첩보가 들어 왔다는 것이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분명히 중국 공안으로부터 명단을 확보하고 공항에서부터 문석인을 미행토록 하여 눈이 내리자 백두산에 올라가지 못하고 대신 일행과 함께 금강대협곡을 관광하는 그를 협곡으로 밀어뜨렸고 시체도 확인했는데 서울에서 살아 있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남강식은 박 대좌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며칠 기다려 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이날 아침 일찍 그의 뒤통수를 강타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문석인이 서울 한 텔레비전방송에 출연하여 남북관계 전망에 관한 대담을 하고 있는 장면이 평양에서 모니터에 걸렸던 것이다. 박 대좌는 전화통에 대고 노발대발하며 남강식을 족쳤다. 중국 공안에게 확인한 바 죽은 사람은 언론인 문석인이 아닌 작가 문석연이었다. 엉뚱한 사람을 죽인 꼴이 되었으니 생사람을 잡은 책임을 면할 길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 사실을 남조선 당국에서 알게 된다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시민, 학생 간나 새끼들이 떠들기 시작하면 남조선 당국에서 장군님에게 추궁할 것이 틀림없는데 어칸다?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장군님을 위한다는 것이 엉뚱한 문제만 일으킨 결과가 되었으니 철직이 문제가 아니라 장군님의 기분에 따라 처형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남강식은 결단을 내렸다. 강철을 제거하기로 했다. 실수의 책임을 강철에게게 돌리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강철을 직접 제거하기에는 부담이 따를 것이었다. 그놈은 보통 놈이 아니라 1급 살인면허를 가진 독종이었다. 섣불리 제거하려다가 어떤 불상사가 발생할 지 알 수 없었다.
해서 다른 손을 잠간 빌리기로 했다.
몇 달 전 국정원 요원 한 명이 특명을 띠고 선양에 파견되었다가 의문의 변시체로 발견된 일이 있었다. 당시 국정원측은 제대로 피살경위를 밝히지 못하자 대외 위신을 생각해서 사건을 덮고 말았다. 그러나 선양 주재 요원들은 북한 특수공작대의 짓일 것이라고 추측하며 이를 갈았다.
김기진 영사는 조선족 정보망을 활용하여 벌써 수개월째 특수공작대의 동태를 살펴왔다. 그러던 어느 날 상양툰에 정체 모를 사나이가 들락거린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문성준을 거기 심어 두었던 것이다.
문성준은 정명철 일행이 식사하러 온 날 낯선 얼굴 하나가 유심히 그들을 지켜보는 낌새를 눈치챘다. 그런데 일행 중 한 사람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정명철이 나타나 아래 위층으로 다니며 무엇인가 찾는 듯한 행동을 눈여겨보았다. 이때 그 낯선 사나이가 다시 나타나 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 수상한 행동임이 틀림없었다. 김 영사에게 즉시 보고했다. 선양일대 첩보세계에서 알려진 얼굴이 아니라면 지난번 국정원 요원을 살해한 놈일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마 이번에도 살해 지령을 받고 움직일 것이라는 추리를 토대로 밀착 감시령이 떨어졌다. 위험도가 높은 작전이라는 것을 문성준에게 주지시키고 언제라도 위급상황에서 총격을 할 수 있는 재량권을 주었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북한 특수공작대 정보원으로부터 그가 바로 국정원요원을 암살한 강철이며, 이번 살인사건 현장을 지휘한 자로서 위험인물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작전을 한 등급 격상시켜 강철 체포팀을 구성하고 상양툰 일대에 그물을 깔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놈을 해치울 작정이었다. 여기에 정명철이 끼어들자 체포팀은 방해하지 않고 그대로 보고만 있었다. 정명철은 강철을 낚을 좋은 미끼가 되었던 것이다.
강철은 특공대장 남강식이 자신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정명철의 뒤를 밟고 있었다. 그는 수사에 혼선을 일으키기 위해 금강대협곡과 일송정휴게소에 상양툰에서 가져온 이쑤시개 포장을 떨어뜨려 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꼬리가 밟힐 리가 없다고 안심하고 있었다.
남강식은 국정원 동북3성 책임자인 김기진 영사에게 강철의 암약에 대한 정보를 흘려주기로 했다. 강철이 작가단 중 한명인 정명철이 암살사건을 캐고 다니는 것을 눈치 채고 그를 제거하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정보를 조선족 정보원을 통해 흘렸다. 이 정보에 접한 김 영사는 룽징까지 쫓아갔다가 위험에 처한 정명철을 구하게 된 것이다.
그가 옌지에서 선양으로 돌아 온 날 조선족 정보원은 다시 강철의 행동계획을 알려주었다. 강철은 다음 날 옌지에서 창춘으로 돌아온 정명철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는 중이라고 알려주었다.
이 음모는 남강식이 강철을 제거하기 위해 착안한 것이다. 조덕수의 살해현장까지 갔던 정명철이 무언가 새로운 단서를 찾아 상양툰에 들릴 것은 뻔했다. 따라서 꼬리가 밟힐 가능성이 커졌다고 겁을 주어 강철로 하여금 상양툰에서 정명철을 저격하도록 지시했다. 그래놓고 조선족 정보원을 이용하여 흘린 정보가 상양툰에서 잠복하고 있던 문성준을 움직여 강철을 역공하게 했던 것이다.
상양툰에서 죽음 일보 전에 문성준의 즉시안타로 살아난 정명철은 총영사관으로 와서 김 영사로부터 자초지종을 얘기 듣고 기가 막혔다. 남의 나라에서까지 우리 끼리 치고받고 하는 통에 엉뚱하게 문 선생이 희생당한 것을 생각하면 한시 바삐 여기를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3월30일 인천으로 향하는 남방항공 여객기 창가 좌석에 앉아 정명철은 착잡한 심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문 선생 같은 분이 엉뚱하게도 북한 상층부의 갈등 때문에 희생당한 것을 무엇이라고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것도 장엄한 백두산 계곡에서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 대한 모독이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