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에 대한 찬송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자주 부르는 찬송 중에 “내 진정 사모하는(88장)”의 후렴에는 ‘주는 저 산 밑의 백합, 빛나는 새벽별...’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특별히 일제 강점기와 6.25를 지나면서 이 백합과 가시밭을 연결해서 부른 찬양들이 생겨났습니다.
지금도 이 찬송들은 여전히 불립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때”라는 복음 찬송의 후렴은 사람을 휘몰아치는 감성이 있습니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니...’
아울러 “가시밭의 백합화, 주의 성도여”로 시작하는 복음 찬송도 있습니다.
어릴 때 배운 가곡도 있습니다.
‘가시밭의 한 송이 흰 백합화야’로 노래가 시작되는 김성태 작사, 작곡의 “한 송이 흰 백합화”입니다.
이 가곡도 전쟁 중인 1951년(출판 1957년)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구약 아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아 2:1-2).”
마태복음에는 “...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마 6:28)”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백합과 성서에 나온 백합이 같은 종류가 아니라는 연구 결과는 일단 인정하고 가고요.)
백합에 대해 말하자면, 발자크의 소설 ‘골짜기의 백합’을 비롯해서 끊임없이 나오니 출처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언젠가 설교하면서 이 가시밭의 백합을 가지고 잠시 예화를 든 적이 있습니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니.
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바람과 가시와 백합과 향기를 같이 연결했을까요?
바람이 불면 가시밭의 백합화는 온통 가시에 찔립니다.
그러면 꽃과 줄기와 잎에 온통 상처가 납니다.
바람이 불수록 더하겠지요.
그런데 바람이 불면 불수록 상처 입은 백합의 향기는 더 사방에 퍼뜨려집니다.
고난과 고통의 시기에 성도들은 자신을 상처 입은 백합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상처만 핥고 마는 존재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가중되는 고통 중에 오히려 이 상처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향기가 되어 사방에 뿌려지리라고 믿었습니다.
이 고백은 지금도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합니다.
삶은 아픔입니다.
너무 염세적이지 않습니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철저히 아픔을 직시하면서 베풀어집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직시하는 이들은 또한 거기서 환희를 봅니다.
고통에서 환희를 본다 하면 무슨 변태적인 생각이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말하는 환희와 내가 고백하는 환희는 전혀 다른 거라고 밖에 말할 것이 없습니다.
왕으로, 세상의 구원자로 들려올리신 그리스도의 일은 이미 십자가에서 완성됩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명료하게 주장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면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십니다.
성서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나야 했던 일들은 모두 이렇게 일어난 것이다. 예수의 일은 끝난 것이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부탁한 일을 완전히 끝냈다. 그는 초를 마신 후에 ‘다 이루었다’고 말하고, 머리를 숙이고 운명한다. 이것은 완성의 영역에 속하는 말인바 ‘내가 당신을 지상에서 영화롭게 했으며 당신이 내가 행하도록 내게 준 일을 완성시켰다(17:4)’가 지금 막 역사적 현실로 나타났다. 말하지면 세상이 그의 모든 것을 실패로 보는 지금,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이다(R. Bultmann, ‘요한복음서 연구’).”
개인적으로는 이래저래 힘든 며칠이었습니다.
다시금 가시밭의 백합화를 읊조리며 늦은 오후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