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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계룡산 갑사의 문화재 소개
신라 5악의 하나인 계룡산 갑사의 창건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전해오지만
일반적으로 420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설을 따르고 있다.
창건에 대한 기록은 이처럼 확실치는 않지만, 그 시기는 삼국 통일기
이전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신라시대 의상 대사의 화엄십찰 중에
계룡산 갑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통일 신라 시대 때부터 몇 차례의 중창을 거듭하여 법등을 유지하던 갑사는
정유재란으로 모든 전각들이 소실된 것을 1604년에 다시 중창하여 현재의
가람을 이어오고, 조선 중엽까지도 계룡갑사'(鷄龍甲寺)라 불렸으나,
지금은 갑사라고만 부른다.
"춘마곡 추갑사"라는 말처럼 봄에는 마곡사가 가을에는 갑사의 경치가
아름답다.
갑사 일주문(하)...산문에 들어서서 처음 만나는 일주문은 근래에 신축된
것이다. 불법 귀의의 일심을 상징하듯 큰 기둥을 나란히 세운 겹처마
팔작 지붕의 건물이다.
원래는 계룡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각각 큰 사찰이 건립 되었는데,
동쪽에는 동학사가 있고 서쪽에는 갑사, 남쪽에는 신원사가 있다.
북쪽 상신리에는 구룡사가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폐사된 후
선도(仙道)꾼들이 찾아 들었다.
좌청룡 우백호에 산이 마치 연꽃처럼 겹겹이 둘러싸여 있어 어머니
자궁 같은 곳으로, 꽃 봉우리처럼 기운이 응집되는 풍수다.
물도 서에서 동으로 빠지고 있어, 외부에 잘 노출되지 않는 지역이라
선도인들에겐 수도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소로 곳곳에 거사들이
남긴 글귀들이 바위 곳곳에 새겨져 있다.
불교에서 승려들은 화장을 한 후 수습된 유골을 탑이나 부도에 보관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갑사에는 일반인처럼 무덤을 남긴 스님이 있는데, 그가 바로
영규대사 이다.
임진왜란 중 승군 800명을 모아 청주성을 탈환 하는데 큰 공을 세운
기허당 영규대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군이 최초로 전투에 참여한 것이다.
영규 대사는 공주시 계룡면 봉명리에서 태어나 공주 갑사에서
서산대사의 제자로 출가한다.
갑사의 청운암에서 수도하던 중 외적의 침입에 대한 소식을 듣고,
구국의 일념으로 전쟁터에 나가서 관군과 함께 청주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다.
나중에 조헌의 의병과 금산에서 최후까지 싸우다가 부상한 몸으로,
현재 영규대사의 정려비각(旌閭碑閣)이 있는 계룡면사무소 앞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그 후 갑사의 승려들이 이곳에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 영규대사의 무덤이 있는 계룡면 유평리는 큰길에서 약간 벗어나서
해발 150m의 산 경사면을 깎아 만들었고, 묘소는 봉분, 축대, 계단 등의
시설로 잘 보수가 되어있다.
1738년에는 영조 임금의 명으로 임진왜란 때의 대표적 승병장인 서산.
사명.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신
갑사의 가람은 동서를 가로지르는 계곡을 따라 본래 가람의 중심지인
대적전(大寂殿) 구역과 대웅전(大雄殿) 구역, 팔상전(八相殿) 구역,
신흥암(新興庵), 대자암(大慈庵), 대적암(大寂庵) 등이 있다.
갑사가 소장하거나 관리하고 있는 문화재들을 소개 한다.
*국보 298호 갑사 삼신불괘불탱(사진; 아래쪽 위)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와 노사나불 등 삼신불이 진리를 설법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괘불이다.
이 그림은 길이 12.47m, 폭 9.48m의 크기로 전체적으로 상·중·하 3단
구도를 이루고 있다.
맨 윗부분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상, 제자상, 금강역사상 등이
배치되어 있고, 가운데에는 비로자나불, 석가, 노사나불 등 삼신불을,
맨 아래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상, 사천왕상, 사리불 등이 묘사되어 있다.
어깨를 감싼 옷을 걸치고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싼 지권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손을 어깨까지 들어올려 설법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오른쪽의
석가불은 악귀를 물리친다는 뜻의 손모양인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맨윗부분은 붉은 색의 두광을 가진 관음·세지보살과 십방제불,
나한 등이 화려한 빛깔의 구름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천상세계를 만들고 있다.
비교적으로 단순한 구성을 보이고 있는 맨아래부분은 사천왕과
문수보살·보현보살, 사리불이 배치되어 있다.
이 괘불은 효종 원년(1650)에 제작되었는데 중단의 삼신불을 크게 강조한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고, 괘불 조성에 필요한 많은 물품의 시주자도
적어놓고 있다.
*보물제256호 갑사철당간및지주(甲寺鐵幢竿및支柱)(사진;위쪽 아래)
갑사(甲寺) 동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이 당간은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높게 세우고
양 옆에 당간지주를 세워 지탱하였다.
당간을 지탱하는 두 개의 지주는 동
소박한 모습이다.
기둥머리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안쪽에 구멍을 뚫어서 단단하게
고정시키고 있다.
기둥머리의 곡선과 기단부의 단순한 조각이 잘 어우러져 소박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준다.
통일신라 전기인 문무왕 20년(680)에 세워진 것이라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고, 양식상으로 보아 통일신라 중기의 양식을 갖춘 것이다.
높이가 2.05m인 이 부도는 원래 계룡산 수정봉의 중사자터에 있었는데,
1971년에 현재 자리인 대적전 앞으로 옮긴 것이다.
올리고 지붕돌을 얹은 형태이다.
높직한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은 아래·가운데·윗받침돌로 나뉘어지는데
특이하게도 아래층이 넓고 윗층은 차츰 줄어들었다.
아래받침돌은 사자.구름·용을 대담하게 조각하였으며, 거의 원에 가까운
가운데받침에는 각 귀퉁이마다 꽃모양의 장식이 튀어나와 있고,
그 사이에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을 새겨 놓았다.
갑사부도(상) 기단부(중)
갑사부도하대석(사진;맨아래 오른쪽)…. 여러 매로 구성된 8각의 높은
지대석위에 정교하게 조각된 원각의 조각상들을 하대에 배치하고 있다.
기단의 하부는 8각 모퉁이에 연잎과 동자상, 사자상을 크기를 줄여 가며
생동감 있게 배치하였으며, 그 상부에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꿈틀거리는
용의 몸체를 입체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 상부는 별석의 부재를 물길을 위한 장치로 고안하여, 8각의 난간형
받침을 끼워서 중대를 지탱하고 있다.
탑신을 받치는 두툼한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둘러 새겼다.
탑 몸돌은 4면에 문모양과 그 안에 자물쇠를 새겨 놓았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을 두드러지게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기왓골을 표현하는 등 지붕모양을 정교하게 모방하고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모두 없어지고 후에 새로 만든 보주(寶珠:
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올려져 있다.
기단부의 조각은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전체에 조각된 각종
무늬와 기법 등은 고려시대 부도탑들 중에서도 우수작이다.
*보물 제478호 갑사 동종
조선 초기의 종으로 국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갑사에 매달 목적으로
선조 17년(1584)에 만들어졌다.
이루고 있으며, 중간 지점부터 입 부분까지 직선으로 되어있다.
갑사 범종과 범종각
갑사범종각… 범종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겹처마 사모 지붕 건물이다.
잘 다듬어진
상부는 살창으로 처리하고 있다.
보통 사모 지붕은 정자에 많이 사용되는 형식으로서, 내부에 서까래를
노출시킨 연등 구조 방식을 취하고 있다.
종의 어깨에는 물결모양으로 꽃무늬를 둘렀고, 바로 밑에는 위 아래로
나누어 위에는 연꽃무늬를, 아래에는 범자를 촘촘히 새겼다.
그 아래 4곳에는 사각형모양의 유곽을 만들고, 그 안에는 가운데가 볼록한
연꽃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종의 몸통 4곳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따로 두었고, 그 사이에는
구름위에 지팡이를 들고 있는 지장보살이 서 있다.
종 입구 부분에는 덩굴무늬 띠를 둘렀다.
옮겨온 민족과 수난을 같이 한 종이다.
*보물제582호 선조2년간 월인석보 판목(月印釋譜板木)(사진;아래 위쪽)
『월인석보』는『월인천강지곡』과『석보상절』을 합하여 세조
5년(1459)에 편찬한 불교대장경이다.
세종 29년(1447) 세종은『석보상절』을 읽고 각각 2구절에 따라 찬가를
지었는데 이것이 곧『월인천강지곡』이다.
『월인석보』는 완질이 현재 전하지 않으므로 전권의 수량은 확인할 수
없으나, 2대에 걸친 임금의 명으로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불교대장경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조선 전기의 훈민정음 연구와
불교학 및 서지학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이 판목은 현재 갑사에 소장되어 있는데 70여년 전에 입수하였다고 하나
그 경로가 확실치는 않다.
본래는 57매 233장으로 모두 24권이었으나 현재에는 21권 46매만 남아있다.
『월인석보』제21매 판목에 보면, 선조 2년(1569) 충청도 한산지 죽산리에
사는 백개만이 시주하여 활자를 새기고, 충남 논산 불명산 쌍계사에
유치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판목재는 계수나무라 새겨져있고, 판식은 돋을새김으로 새겼으며,
판목의 오른쪽 아래에 시주자의 이름과 새긴 이의 이름을 새겼다.
내용표기에 있어서는 방점과 글자획이 닳아 없어져 변모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 처음 나온 것으로 15세기 당시의 글자와 말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국어변천을 아는데 국어학상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판목은『월인석보』를 새겨 책으로 찍어내던 판각으로써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것 중 유일한 판목이다.
*시도유형문화재 제50호 갑사 석조약사여래입상(사진;위의 아래쪽)
갑사 동쪽 계곡 약 100m 지점의 자연 동굴안에 있는데 고려 중기에 만들어
진 불상으로 , 원래는 갑사 뒷산의 사자암에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머리에는 상투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고 얼굴은 긴편이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을 약간 노출시키고, 무릎 아래까지 늘어져
있다.
가슴 아래로는 반원형의 옷주름이 표현되었고, 왼쪽 어깨 부근에서는 한
가닥의 주름이 어깨너머로 넘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손모양을 살펴보면 오른손을 가슴까지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왼손에는
약그릇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다.
*시도유형문화재 제51호 갑사석조보살입상(甲寺石造菩薩立像)
갑사 뒷산 사자암에 약사여래입상, 갑사 부도와 같이 있던 것을 갑사
진해당(振海堂)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석조 보살입상 보호각(상)석조보살입상(하)
얼굴은 마멸이 심해 분명하지 않으나 코가 오똑하고 눈은 감은 듯 하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한 자락이 오른손 손목을 거쳐 등쪽으로
넘겨졌다.
하체에 걸쳐진 옷은 선이 부드럽고 얇아서 신체의 굴곡을 충실히 표현하고
있다.
가슴부분의 오른손은 뭔가 들고 있는 듯 하나 분명하지 않고,
왼손은 팔을 내려 무릎 부분에서 목이 긴 병을 들고 있다.
전체적으로 잘록한 허리, 어깨 등 조각수법이 세련된 백제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시도유형문화재 제52호 갑사 사적비
갑사의 창건과정과 역사를 적은 비로, 바윗돌 위에 사각의 비받침돌을
마련하여 비몸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몸에는 4면 모두 비문을 새겼는데 일부 손상된 부분은 읽을 수가 없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비석재(碑石材)속에 금이 들어 있어 그것을 파내기
위한 소행이었다고 한다.
조선 현종 원년(1659)에 세운 비로, 비문은 여주 목사 이지천이 짓고
공주목사 이기징이 글씨를 썼다.
*시도유형문화재 제95호 갑사 강당
해탈문과 대웅전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강당은 승려들이 법문을 강론하던
건물로 정유재란(1597)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뒤로 다시 지은 것이다.
계룡 갑사 강당 현판과 외부
강당외부......정면과 배면은 창호를 설치하고 측면은 벽체로 구성하였으며,
공포는 내외 2출목으로 삼제공 살미 최상단에 연꽃을 조각하고 있다.
측면에 공포가 설치되어있지 않으며, 풍판 없이 가구를 드러내고 있다.
평방 위의 현판은 1887년 충청 감사
예서체 형식의 백지 청서 양식이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맞배지붕집이며,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배흘림의 기둥 위에 다포식 건물이다.
단청은 완전히 퇴색되어 무늬의 흔적만 남아 있으며, 문짝은 많이 변형되어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절도사 홍재의가 쓴 ‘계룡갑사(鷄龍甲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전체적으로 기교를 부리지 않은 조선시대 후기의 웅장한 건축물이다.
보수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강당이 아닌 갑사의 정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시도유형문화재 제105호 갑사대웅전
갑사 대웅전은 절의 중심에 있는 법당으로 원래는 현재 대적전이 있는
근처에 있던 것으로 보이며, 다시 지을 때 이곳에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앞면 5칸·옆면 4칸으로 1층이며, 맞배지붕으로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가 다포 양식이다.
대웅전(상) 대웅전 기단과 공포(중) 대웅전 현판과 내부 불상(하)
갑사대웅전기단…. 작은 석재로 기단을 축조한 후 상부 기단을 올린 이중
기단 형식이다.
하부 기단 상부에 한 칸 뒤로 물린
장방형의 자연석으로 마감한 모습으로, 대웅전의 위엄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기단의 중앙부에는 어칸의 출입 계단이 없으며, 좌우 측면의 계단만
설치되어 있다.
대웅전 공포… 다포식 내외 3출목 구조로 살미는 쇠서의 앙서와 수서를
중첩하고 있다.
조선 중기, 후기의 공포 양식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갑사대웅전 현판… 조선 전기 4대 서예가 중 한 사람인 석봉 한호의
글씨체이다.
1654년의 중창 때 석봉체에 능한 이의 글씨를 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669년 작품으로 글씨의 절대 연도가 명기되어 있어 각법과 서풍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현판이다.
대웅전 불상....불단 상부에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좌우로 약사불,
아미타불의 3존 좌상을 봉안하고, 협시 보살로 대세지, 문수, 관세음,
보현 보살 입상 등 4구를 배치하고 있다.
3존불은 모두 소조로 제작되었으며, 수인을 제외한 3존 모두 유사한 조각
수법을 가지고 있다. 4보살은 지물이 다르다는 것 외에 거의 3존불과
흡사한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가운데 3칸은 기둥 간격을 양 끝칸 보다 넓게 잡아 가운데는 공포를 2개씩,
끝칸에는 1개씩 배치하였다.
내부는 우물천장으로 되어있고, 불단을 만들어 석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그 위에는 화려한 닫집을 설치하였다.
갑사대웅전4보살…. 3존상 사이 협시로 배치된 4보살 역시 화려한 장엄과
지물 외에는 동일한 모습으로 머리에 화염 무늬와 연화 무늬가 조각된
높은 보관을 쓰고 있다.
높이 205㎝로 통견의 천의 위에 두 줄의 보발과 영락을 장엄하였으며,
전체적으로 획일적인 얼굴과 옷 주름을 표현하고 있다.
석가 모니불과 약사불(상) 대웅전의 아마타불과 금고(하)
석가모니불.약사여래불.아미타불(시도 유형문화재제165호)...위의 3존불은
수인을 제외한 모두 유사한 신체와 조각 수법을 보여 준다.
소조로 만들어진 3존불 좌상은 살이 오른 타원형 얼굴에 나발과 낮은 육계,
중앙 계주를 표현하고, 굳게 다문 입 등 작은 이목 구비에서 근엄함과
우울함이 느껴진다.
목에는 3존 모두 뚜렷한 3도를 가지며, 법의는 통견으로 건장한 어깨
사이로 군의 주름인 승각기를 표현하고 있다.
금고.....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원반형 금고로, 금고란 절에서 사용하는
도구로서 대중을 불러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리는데 사용하는 금속으로
만든 타악기이다.
금고는 지름 63㎝로, 금고를 걸기 위한 용가에 걸려 있다.
*시도유형문화재 제106호 갑사 대적전(甲寺大寂殿)
갑사 대적전은 대적광전이라고도 하며,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삼신불(석가모니·아미타불·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법당이다.
대적전(상) 석가여래좌상(아래 좌측) 문수(보현)보살(아래 우측)
대적전 석가여래좌상...8각의 목조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석가여래좌상은
목조로 짧은 목과 긴장된 어깨, 하체에 비해 살진 정방형의 상호에서 조선
후기 불상 조각 특징을 보인다.
총 높이 1.1m로 정방형의 얼굴에 작은 이목구비로 답답한 인상을 주며,
좁은 어깨에서 흐르는 통견의 계단식 옷주름이 특징이다.
대적전 문수.보현 보살...좌우 대칭 구도의 모습으로 높은 보관과 지물로
쥐고 있는 연꽃 가지를 제외하고는 중앙 석가 여래 좌상의 조각 수법과
유사하다.
하체에 비해 큰 정방형의 얼굴, 작은 이목구비, 삼도, 통견의 주름에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석가모니불 위에 천장을 한단 올림으로써 닫집의 효과를 나타내었다.
*시도유형문화재 제165호 갑사소조삼세불(甲寺塑造三世佛)
갑사 대웅전안에 모셔진 석가모니불.아미타불.약사여래불로 시도유형문화재제
105호 대웅전난에서 사진과 함께 언급하였다.
*시도기념물 제15호 영규대사묘(사진;아래 위쪽)
승병장인 영규대사의 묘소로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계룡산의 갑사(甲寺)
진입로를 조금 지나 서쪽편에 위치한다.
영규대사는 밀양 박씨로 호는 기허(騎虛)이며, 서산대사 휴정(休靜)의
제자이다.
계룡산 갑사 청련암에서 수도하면서 무예를 익혔는데 그 재능을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한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3일 동안
통곡하고 스스로 승병장이 되었다 한다.
하사하였는데, 하사한 선물이 도착하기도 전에 금산 전투에서 숨을 거두었다.
영규대사는 부상한 몸을 이끌고 현재의 묘소부근까지 와서 숨을 거두었다
한다.
해발 150m의 산록 경사면을 깎아 만든 묘소는 최근에 봉분, 축대, 계단
등의 시설을 보수공사 하였다.
묘비는 순조 10년(1810)에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문화재자료 제52호 갑사
세운 사당이다.
건물 안에는 서산대사 휴정·사명대사 유정·기허당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문화재자료 제53호 갑사 삼성각(사진; 아래 위쪽)
삼성각은칠성·산신·독성의 삼성을 모신 곳이다.
건물 이름이 삼성각 인 이유는 모두 불교 밖에서 수용한 신이기 때문에
전이라 하지 않고 각이라 한다.
신이며, 독성은 혼자 깨달은 성자를 말한다.
각각의 건물을 따로 지어 삼성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은 삼성각
안에 같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문화재자료 제54호 갑사 팔상전(사진;위 아래쪽)
팔상전은 석가모니불과 신중탱화를 모신 곳이다.
원래 팔상전에는 석가여래의 일대기를 8부분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탱화를
모시지만, 이곳에는 신중탱화 한 폭만 봉안되어 있다.
*문화재자료 제55호 갑사 중사자암지 삼층석탑(사진;아래 위쪽)
갑사 대웅전의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원래는 갑사에 딸린 암자인
사자암에 있던 것을 대적전 뒷면에 옮겨 세웠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탑은 옆면에 안상(眼象)을 새겨 놓은 바닥돌 위로 기단(基壇)의 일부분이
놓여 있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이 쌓여 있다.
기단은 맨 윗돌을 제외하고는 모두 없어졌고, 탑신은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얕게 새겼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 갔으며, 밑면에 3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본래의 머리장식이 없어진 채, 돌의 질이 다른 연꽃봉오리
모양의 새로운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대웅전에서 나와 대적전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자리한 공우탑은 1단 방형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석탑 형식의 이형 부도이다.
탑은 방형 기단 위로 2단 탑신 받침을 두어 3층 탑신을 올렸으며, 옥개석은
굴곡이 심한 낙수면에 심한 반전의 전각을 가진다.
초층 탑신에 비해 2, 3층 탑신의 규모가 급격히 체감하는 모습으로 조선
후기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갑사 중창시 공덕을 세운 소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탑으로 2, 3층에
우탑(牛塔), 공(功)이라는 탑명이 새겨져 있다. 총 높이 2.95m이다.
*문화재자료 제56호 영규대사비(사진;아래 위쪽; 영규대사 비와 비각)
비문에는 숙종 19년(1693)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으나, 비를 세우는데
참여한 이덕윤, 유중, 각총스님,
순조 13년(1813)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문화재자료 제68호 천진보탑(天眞寶塔) (사진; 위의 아래쪽)
계룡산 내에 봉우리처럼 우뚝 솟아있는 자연바위로,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탑이다.
탑이란 부처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을 일컫는 것으로, 이 탑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많은 양의 사리를 발견하여 이를 시방세계(十方世界:열곳의 방향에 있는 중생의 세계로,
동·서·남·북·동북·동남·서남·서북·상(上)·하(下)에 있는 무한한 세계)에 나누어 주었다.보내어 이 바위안에 담아 두도록 하였고, 뒷날 아도화상이 이를 발견하여
‘천진보탑(天眞寶塔)’이라 이름 붙여 놓았다고 한다.
*갑사 사자암 부도(사진; 아래 위쪽)
갑사에서 동학사로 가는 길의 산중턱에는 작은 암자인 사자암이 있다.
이곳에 있는 부도는 조선 후기의 것이지만 높이가 225㎝에 이르는 큰
부도이다.
8각의
상륜부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부는 12엽의 복엽으로 이루어진 하대 위에 띠 모양의 중대가 있고,
그 위에는 16엽의 앙련이 새겨진 상대가 있다.
탑신에는 아무 문양이 없으며, 옥개석은 약간의 반전이 있으나 전각이
두껍게 되어 있어 둔중한 느낌을 준다.
대웅전 오른쪽 별도의 담장으로 구획된 응향각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정면 팔작 지붕, 배면 맞배 지붕의 특이한 외관을 가진 건물이다.
공포는 1출목 2익공 양식으로 쇠서 모두 앙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래
월인석보가 보관된 건물이었으나, 현재 주지실로 사용되고 있다.
*갑사 보장각(사진; 아래 위쪽)
응향각 뒤편에 자리한 보장각(寶藏閣)에는 보물 제582호인 월인석보 등이
보관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 지붕으로 어칸은 출입을 위한 창호를 설치하고
있다.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적묵당(寂默堂)은 ㄴ자 형태로 정면 6칸, 측면 3칸의
건물과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이 합져진 홑처마 팔작 지붕 건물이다.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 초석을 올리고 원형 기둥과 방형 기둥을 올린
모습으로 외벽은 판문과 띠살문, 판벽으로 처리되었으며, 공포는 출목 없이
초익공 양식을 가지고 있다. 1899년에 중수되었다고 전한다.
*갑사 진해당(사진; 위의 맨아래)
대웅전 우측 적묵당과 마주보는 자리에 위치한 진해당(振海堂)은 ㄱ자
형태로 현재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다.
기단은 지형에 맞게 자연석 기단을 쌓고 덤벙 초석 위로 원형 기둥을 올린
겹처마 팔작 지붕 건물이다.
1857년에 대웅전과 함께 중건된 건물로 내부 약사불을 모신 불단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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