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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appiest Man on Earth』라고 하면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라고 번역해야 할 텐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100세 노인』이라고 번역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에디 제이쿠’노인은 2022년 10월 12일, 102세를 일기로 호주 시드니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사람의 일생을 말할 때, 흔히 ‘말로 다 할 수 없는’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그만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을 경우가 그렇다. 저자이자 주인공이 쓴 인생이야기를 얼마나 여기에 옮겨올지는 잘 모르겠지만, 책에 쓰인 그의 일생을 들여다보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한 인생이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저자는 1920년 독일 제2도시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살로몬 아쿠보비치였고, 아버지 이시도로는 폴란드에서 이민 와 독일에서 살았는데, 독일 시민이 된 것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어머니 리나는 열두 형제 가운데 한 명으로, 외할아버지는 군종 목사였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목숨을 잃었다. 외할머니가 억척스럽게 어머니 형제들을 키웠다고 하는데, 에디는 그런 외할머니를 무척 존경했다고 한다. 라이프치히에 살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는 물론 시민들을 위해서도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회당을 짓고, 조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연합국에게 패해 전쟁 배상금을 물게 되면서 6,800만 독일 국민은 고통의 늪에 빠졌고, 안락했던 에디 가족은 중산층으로서 돈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생필품을 구할 수 없는 지경으로 경제가 피폐해졌다고 한다. 연료와 식료품을 살 수 없었으며, 빵 하나를 사는데도 여행 가방 가득 현금을 갖고 가야 했다.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부유했던 사람들조차 살기 힘들어지자 독일인들은 분노와 수치심에 휩싸였다고 한다.
이런 혼란 속에 1933년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시작되고, 에디는 자신이 원하는 학교에도 갈 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만든 가짜 신분증으로 비유대인으로 위장해 당시 첨단 기계공학교이던 ‘지터 운트 시어리’기계공학 대학에 입학해 5년간 공부했다. 학생 때는 몰랐으나, 졸업 후 정밀 의료기기를 제작하는 회사에 취직한 뒤 나치가 유대인을 억압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일상 속에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질렀다. 부모님의 스무 번째 결혼기념일을 축하하고, 부모님을 깜짝 놀라게 할 생각으로 고향 집을 찾았는데, 부모님은 보이지 않았고 집안에서 쉬고 있을 때 게슈타프가 몰려와서 그를 연행해갔다. 유대인이란 이유였다.
트럭에 실려 서 간 곳은 동물원, 그곳에서 다른 유대인들과 같이 격납고에 갇혔다. 밤새 사람들이 끌려왔고, 그 숫자가 150명에 이르자 다시 트럭에 태워 라이프치히를 벗어나 부헨발트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공산당임을 자백하라는 고문을 받았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았다. 다행히 소장이 그를 병원으로 후송해 주었고, 병원에서 간호사의 도움으로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도망을 시도했다가는 15분 만에 잡혀 교수대에 매달릴 거예요”라는 간호사의 말에 그는 절망했다. 수감 된 사람들은 나치의 첫 제거 대상이었던 공산주의자였으나, 에디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많은 수감자들이 부헨발트에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결론에 내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거기서 수용소에서 간수가 되어 있었던 기계공학과를 같이 다닌 헬무트를 만났다. 헬무트는 에디가 유대인인 줄을 몰랐다. 그는 수용소 소장에게 ‘에디는 좋은 사람이며 탁월한 기계공’이라고 말해 주었다. 당시 나치에게는 기계공이 꼭 필요했다. “나는 데사우 비행기 제조공장으로 징발되었고, 독일을 탈출할 절호의 기회임을 알게 되었다. 에디는 아버지와 벨기에로 가는 차를 몰았다. 어머니와 동생도 뒤따라올 계획이었다. 에디는 독일인 신분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또 화근이었다. 벨기에와 독일은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벨기에 감옥에 석 달 동안 갇혔다가 풀려났고, 그들은 다시 밀입국 알선책을 통해 벨기에에서 프랑스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벨기에 헌병대에게 붙잡혔다. 이번에는 유대인이어서가 아니라, 독일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불법으로 국경을 넘었다는 죄였다.
“나는 내 입장을 알리는 탄원서를 벨기에 정부에 보냈다. 그러나 우리는 난민으로 취급되어 벨기에 수용소에서 1년 가까이 머물렀다. 1940년 5월 10일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하면서, 난민으로 머무는 것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프랑스로 도주하기로 결심했다.”하지만 프랑스 국가 주석 페탱은 나치의 부역자였고, 전쟁 포로 중에 전문직 종사자를 석방해 주기로 하면서, 좋은 협상 카드로 우리를 이용했다. 프랑스 난민수용소 소장은 에디를 다른 유대인과 함께 어디론가 보냈다. 5,000명의 수용소 인원 중에 800명이 유대인으로 우리는 열차에 태워졌고, 거기서 폴란드 아우슈비츠로 압송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우슈비츠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순간이었다.
아우슈비츠로 가는 열차 바닥을 뚫고 바닥에 매달려 일행은 겨우 탈출할 수 있었는데, 거기는 벨기에 땅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돈이 없었다. 심각한 것은 식량 배급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했고, 벨기에 시민이 아니면 배급표를 받을 수 없었다. 절박한 심정으로 여러 공장을 찾아다니며 일자리를 알아봤지만, 신분증이 없으면 취업할 수가 없었다. 에디 가족은 에디가 꼬박 1년 동안 네덜란드인이 운영하는 기계공장에서 임금 대신에 담배를 받기로 하고 일하고 받은 담배를 암시장에 내다 팔아 그것으로 빵과 감자, 치즈를 바꿔 먹고 살아야 했다. 고기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담배 암매를 중재해준 빅토와르는 배급표를 많이 갖고 있었지만, 그녀도 고기는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 정보망에 걸리고 말았다. “내가 새벽 3시에 집에 돌아왔더니 컴컴한 집안에 경찰 9명이 눈을 반쯤 감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반항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자들은 브뤼셀 케슈타프 본부로 에디를 데려갔다. 다른 가족들은 이미 그곳에 잡혀 와 있었다. 며칠 뒤, 우리 가족은 열차에 태워져 아홉 번 낮과 여덟 번의 밤을 보낸 뒤인 1944년 2월 말 어느 날 폴란드 아우슈비츠 - 비르게나우 기차역에 도착했다. 가시 돋힌 철조망이 쳐진 기차역 구내에는 악명높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아르바이트 마히트 프라이(Arheit macht frei)’
‘노동이여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
거기에서 에디 가족은 분류되었는데 ‘아버지는 저쪽, 나는 저쪽’이런 식이었다. 이틀 뒤에 나치 친위대 장교에게 아버지가 어디로 갔는지 물었을 때, 그는 막사 사이로 보이는 굴뚝을 가리키면서 “저기가 바로 네놈 아버지가 간 곳이다. 네놈 어머니도 그렇고. 가스실 그리고 화장터”라고 말해 주었다. 에디는 같이 끌려온 부모님이 죽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인간에게 최악인 것은 죽음이겠지만, 존엄성을 빼앗는 것도 그에 못지 않다. 히틀러는 자신의 책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온갖 증오와 분노의 원인이 유대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을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로 만들어 굴욕감을 느끼게 해야 한다’는 공상을 펼쳤다. 그 터무니 없는 공상은 현실이 되었다. 에디는 헝가리,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 각지에서 끌려온 유대인 400명과 같은 막사에서 지냈다. 이들은 인종과 유형별로 분리 수용되었는데, 히틀러에게는 모두가 똑같았겠지만, 서로 다른 나라에서 왔고, 직업도 각양각색이었다. 말도 서로 통하지 않았다. 공통점이라고는 유대교를 믿는다는 것뿐이었다. 유대교를 깊이 신봉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에디는 이전까지 유대교에 대해서는 별 관심도 없었다.
아우슈비츠는 죽음의 수용소였다. 하룻밤을 견디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침에 찬물 사워로 잠을 깬 뒤, 커피와 빵 한두 조각을 받아먹고 독일 공장까지 걸어가서 하루 12시간씩 일을 해야 했다. 눈과 비바람에도 몸을 보호해주는 것은 죄수복뿐이었고, 나무판자와 천으로 만든 신발이 전부였다. 일터로 오가다 누군가 넘어지면 간수는 총을 쏘아 죽였는데, 수감자들은 그 시신도 수용소까지 옮겨야 했다. 누구든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되는 순간 나치에게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고, 그러면 즉시 목숨은 끝이었다. 그런 에디에게 다행히 친구인 쿠르트가 같이 수감 되어 있었는데, 그는 ‘제화공’으로 실내에서 일했으므로, 걸어서 작업장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쿠르트는 가끔 먹을 것이 생기면 몰래 만나 에디에게 전해 주기도 했는데, 둘은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되었고 힘듦을 견딜 수 있게 해 주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는 평균 기간은 7달 정도로, 애디는 스스로 쿠르트가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감기에 걸려 목이 아플 때 쿠르트는 자신을 목도리를 반으로 잘라 에디에게 주기도 했다. 에디는 한팀이 7명인 석탄채굴팀에서 일했는데, 한 명이 착암기로 석탄을 부수면 나머지 여섯 명이 조각난 석탄을 지상으로 끌어올리는 매우 힘든 작업이었다. 허리를 펼공간 조차 없는 곳에서 몸은 구부리고 다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치 친위대 중 한 명이 에디가 정밀기계공학 전문가라는 것을 알고는 ‘경제적으로 필요불가결한 유대인’으로 그를 분류했고, 일할 수 있는 한 목숨은 부지될 것을 알았다. 그럴 때마다 에디는 ‘기술을 공부하게 해 준 아버지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세상이 돌아가는 기본적인 원리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는데, 그중 하나가 ‘사회라는 조직이 늘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고.
에디는 결국 IG 파르벤사 기계공이 되었다. 거기는 독가스를 제조하는 곳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공장이 없었다면 그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일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아버지가 옳았다. 에디는 스스로 ‘내가 교육받은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전에도, 그 후에도 여러 번 그 덕분에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라고 말했다.
‘나치’하면 흔히 강력한 독재자 히틀러가 리더 하는 독일독재집단으로 알지만, 사실 나치 체제에서 독일인은 나약했고, 쉽게 조종당한 것이지 모두가 사악한 인간으로 전략한 것은 아니었다. 나약한 그들은 서서히 도덕성과 인간성을 잃어갔다.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다른 사람을 고문하고 집에 돌아가 아내와 아이들을 마주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갔다. 전두환 시절 전두환과 박종철을 고문치사 한자,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떠올려보면 알게 될 것이다.
매일 아침 종이 울리면 막사에서 나와 인원 점검을 받는데, 1945년 1월 18일 새벽 3시에 종이 울렸고, 그날은 일하러 가지 않는 대신 독일을 위해 행진을 시작한다고 했다. 戰勢가 나치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러시아군이 20㎞ 근방까지 진군해 오자, 그들에게 아우슈비츠의 만행이 탄로 날 것을 우려해 수용소를 비우고 폭파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던 것이다. 독일 영토 깊숙한 곳에 수용소로 가기 위해 걸어가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죽음의 행진’으로 지금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나치가 전열을 가다듬는 동안 일행은 거대한 격납고에 수용되었다. 그곳에서도 탈출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전세가 나치에게 불리해질수록 친위대들은 점점 더 포악했고, 광기에 휩싸였다. 옮겨온지 사흘째 되는 날 친위 대원이 “여기 기계공 있나? 하고 물었다. 에디는 머뭇거리다가 손을 들었다. 수용소에서 20㎞ 떨어진 ‘아우마’기계공장에서 비교적 손쉬운 일을 했다. 공장 안에는 실수하면 교수형에 처한다는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연합군이 옥죄어 오자 독일군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갑자기 모두를 총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겁이 덜컥 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면 이자들이 저지른 잔혹 행위의 목격자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원래 살인자는 목격자를 죽이는 법이다. 그날 밤에는 낮에 벌판에 버려진 말 한 마리를 잡았는데, 간수와 수감자들이 그 말 스프를 얻어먹으러 식당에 모여들었다. 그때를 탈출의 기회로 생각한 에디는 탈출을 감행했다.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숲속을 헤맨 끝에, 이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이 힘이 빠진 상태에서 고속도로로 내려갔다. 그는 저쪽에서 탱크가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미군 탱크였다. 미군 병사는 그를 담요로 감싸주었다. 그로부터 1주일 후에 그는 독일의 한 병원에서 깨어났다. 이미 콜레라와 장티푸스에 걸려 있었고, 몸무게 28㎏에 불과했다.
겨우 눈을 뜨고 간호사에게 의사가 뭐라고 하는지 물었다. 간호사는 “죽을 확률이 65%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살아날 확률도 35나 된데요.”라고 말해 주었다. 그때 그는 다짐했다. ‘내가 만약에 살아난다면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겠다. 만행을 저지른 독일 땅에서는 살지 않겠다.’라고. 그는 희망을 끈을 놓지 않았다. 에디는 6주일간 입원했고, 서서히 기운을 되찾았다. 그는 벨기에로 가서 남은 가족들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말렸다. 그래도 그는 벨기에로 갔고, 거기서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가 평생 친구 쿠르트를 만났다. 부모님을 잃었고, 여동생은 생사조차 모르지만, 가족이나 다름없는 친구를 만남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쿠르트는 숙련된 가구공으로 얼마 안 돼 가구공장의 감독 자리를 얻었다. 에디도 기계공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는 스위스 기계공장에 25명이 일하는 공장의 감독으로 취직을 했다. 이어 둘은 브뤼셀 중심가에 아담한 아파트를 구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유대인을 괄시하고 못마땅하게 보고 있었다. 몇 달 뒤 그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가족을 찾는다는 광고를 냈고, 여동생이 그 광고를 보았다. 쿠르트와 에디는 여동생과 같이 살기 시작했다.
나치 전쟁 전후 벨기에서는 25,000명의 유대인이 추방됐고, 이 중 살아남은 사람은 1,300명도 채 되지 않았다. 벨기에에 살면서 어느 날 길을 걷던 에디는 같은 막사에 있었던 ‘카포’라는 이를 보았다.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나치를 도와 유대인을 억압하던 범죄자였다. 그가 버젓이 살아 자유를 누리다니? 에디는 믿을 수가 없었다. 경찰서로 찾아가 이 사실을 고발했다. 하지만 카포는 브뤼셀 고위 정치인의 딸과 결혼해 살던 상태로 경찰은 오히려 에디를 말렸다. 혼자 복수할 궁리를 했지만, 카포는 이후부터 경호원 여러 명과 전투견 세퍼드 2마리를 데리고 다니면서 잘살고 있었다.
벨기에 난민 신분이었던 에디는 6개월마다 거주 신청서를 내야 했고, 한 공장의 책임자로 2년 동안 일한다는 계약서가 있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에디가 겪는 애환은 친구 쿠르트 말고는 아무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쿠르트와도 영원히 같이 살 수는 없었다. 그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1946년 2월 결혼했다. 혼자 외로워진 에디는 두 달 뒤 직장 상사 앙체르가 소개해준 플로르와 결혼을 했다. 둘은 처음에는 영 맞지 않았다. 살아온 과거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다만 플로르의 어머니, 장모인 푸르튜네는 에디를 친아들처럼 대해 주었다. 한꺼번에 두 여자를 얻은 에디는 행복해질 준비를 열심히 했다.
결혼한 지 1년 만에 아내가 임신을 했다. 이때 에디는 유럽 전역을 돌며 수술 장비를 설치하는 회사로 직장을 옮겼다. 장비를 설치하는 것은 물론 직원들에게 장비 사용법도 교육해야 했는데, 그는 그 일에 만족하고 돈도 많이 벌었다. 그러나 여섯 달마다 체류 서류를 내야 했고, 쿠르트는 이스라엘로 아내와 함께 갔으며, 여동생도 결혼해서 호주로 갔다. 에디는 프랑스와 호주, 둘 중 한 곳으로 갈 수 있는 신청서를 냈고, 1950년 3월 호주에서 일하며 살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호주에서도 의료기기 제작 일을 했다. 가족이 호주에 정착한 지, 11개월 뒤 새집으로 이사했고, 에디는 자신을 좋아하고 자신도 좋아했던 장모를 벨기에에서 호주로 모셨다. 그리고 둘째가 태어났다. 가족이 한 명 한 명씩 늘어나는 것은 그에게는 너무도 멋진 일이자 완벽한 기쁨이었다.
이제 50대 중단이 된 에디는 내 사업을 해도 좋을 만큼 경험이 쌓였다. 그는 자동차 수리점을 인수해 ‘에디 수리 센터’를 열었다. 사업을 날로 번창했고 르노 자동차를 파는 신차 전시장까지 갖추었다. 에디는 아내와 그 일로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다가, 1966년 부동산 중개업소를 열었다. 90대가 되도록 부동산 중개업을 하다가 마침내 은퇴했다. 에디는 말한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우리 자신의 행복을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