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 조재철 / 휴먼앤북스
부제가 "따뜻한 날들의 기억"이다. 책을 읽으면서 왠지 지금은 그 내용도 가물가물한 책,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아마도 개인의 성장기라는 것 때문에 그럴까. 아니면 잔잔하게 펼쳐지는 개인사를 전해 듣는 기분이어서 그랬을까.
박지훈, 주인공의 아버지가 대동아 전쟁이 끝나면서 어렵게 어렵게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전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지훈도 남해대교를 바라보는 고향을 떠날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고 아버지처럼 많은 상처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처럼 전쟁 중에 겪은 많은 시간들을 증오하지 않고 소중한 자산으로 여기셨다.
아버지에게는 황금 같은 젊은 날을 보낸 일본에서의 생활도 결국 소중한 인생이었던 것이다. - 18쪽
희민, 부모님께서 동란중에 북한군에게 부역했다는 이유로 어려움을 당하지만 지훈의 고향 친구로 끝까지 남는다.
의석, 지훈의 삶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친구. 대금 연주가, 국악 작곡가. 지훈의 여인이었던 성희와 결혼하여 지훈의 삶이 방향이 바뀐다.
혜진, 어릴 때 만나 연인으로 가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과 공간이 서로에게 닫혀 있던 여인. 결국 지훈의 삶의 동반자가 된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의석과 어릴 적부터 친구 남매처럼 지냈던 성희를 소개받은 지훈은 그녀와 연인관계로 발전했다. 그러나 성희가 봉사하는 단체에 도움을 주러 갔던 의석이 건물이 무너지는 사고에서 아이들과 성희를 구하려다 크게 다쳐 대금을 연주할 수 없게 되고, 성희는 어릴적부터 가까웠던 의석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결혼한다. 물론 지훈은 그 광경을 차마 보지 못하고 유학길에 떠난다. 지훈이 변호사, 사업가 등을 거치는 과정에서 의석은 대물림한 병으로 세상을 뜬다. 지훈은 오랜 방황 끝에 성희와의 관계를 정립하고 귀국하여 혜진과 남은 삶의 여정을 함께 하기로 한다.
단순한 구성이지만, 작가는 '다리'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말하고 있는 듯하다. 어렸을때 한 개 만 있었던 다리는 더 많이 늘어나고 사람들은 더 편리하게 되었다.
인구는 줄었지만 다리는 늘었다. - 317쪽
다리가 늘었다고 삶은 더 행복하고 평안해졌을까. 남해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 더 가까워졌을까. 다리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다리는 재 역할을 해야 하고 지속적으로 그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해서 이야기에서는 모스타리 다리의 재건을 크게 부각시켰는가 보다. 비록 약간의 변질이 있었지만...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서 칼로 자르듯 사람과의 관계를 맺고 끊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시종일관 견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초기에는 구분하는 것에 대해 후반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대하여 모든 것이 명료하게 마감 지을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의석과의 불편한 관계, 성희 그리고 혜진과의 관계도 회사를 정리하 듯 그렇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듯 세상에서 보여지는 부분과 감추어진 부분에 대한 작가의 견해도 보여지는 듯하다.
나는 세상을 가르는 것을 배웠고 어느덧 그 방식으로 세상을 보려하고 있었다. - 98쪽
어떤 사람이 누군가의 기억 속에 아름답게 남아 인생을 안내하는 좋은 별이 되고 있을 때 그 대상을 굳이 죽일 필요가 있을까. 내가 취재한 사람들에게서 보았던 긍적적인 부분들이 하나 둘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사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을까. - 147쪽
어떤 일이 해결되었다고 개운해 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미해결인 채로 끌어안고 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고 사회이고 역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음'이 계속 살아있고 물음과 대답이 갖는 긴장 관계가 계속 유지되는 것 같습니다. 대답이 되어서 생명을 잃은 물음이 아니라 어떤 대답에도 굴복하지 않는 그런 물음이 진짜 물음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우리는 답을 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이미 내린 답을 하나씩 지워가는 노력도 같이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 278쪽
그녀와 떨어져 보내는 시간이 늘면서 결국 그 '차이'가 우리를 헤어지게 했다. 나중에 미셀은 정확히는 그 '차이'가 우리가 살아온 문화적 차이가 아니라, 단지 그녀와 나의 현재의 삶과 지향점의 차이라고 정정했다. - 175쪽
자주 만나는 사이에 약간의 서운함에 있다는 것은 그 외에는 만족한다는 뜻이기도 하며 서운함마저도 없는 관계란 이미 아무런 관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도 알았다 - 221쪽
사랑하는 마음이 고통인 이유는 감정의 동향이 상대와 다른 방향이나 속도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정의롭지 못한 것은 사랑하지 않거나 덜 사랑하는 쪽에 의해서 주도가 된다는 점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고통을 당하고 덜 사랑하는 쪽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억울한 이치가 왜 사랑에 적용되는 것일까 - 104쪽
항상 자기 중심적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식해왔던 지훈은 혜진에 대해 생각하면서, 비로소 자신을 주변 환경에서 분리하여 보지 않고 함께 어우러 보기 시작한다. 지훈이 어렸을때 보았던 혜진의 모습만을 간직하고 있을때, 혜진은 그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고 지훈은 자신의 상처만을 보았기에 상대의 상처나 아픔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항상 나는 사람에 있어 패배자, 피해자로 간주해 왔다. 하지만 혜진에게 내가 상처를 준 것이 떠오르자 마음이 아팠다. - 296쪽
그녀는 말할 것이다. 아무리 연습을 해도 이별은 슬픈 것이라고 끊임없이 우리는 헤어질 것을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이별의 순간 다시 재회를 꿈꾸기 시작한다고. - 297쪽
내가 의지하는 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었다. - 300쪽
이야기는 쉽게 읽히고 지루하지 않다. 책의 반절을 읽을 때까지 특별한 갈등이 보이지 않아 당황(?)했었다. 그러면서 이래서 '따뜻한 날들의 기억'이 부제이구나라고 혼자 뇌까렸다. 삼각관계가 시작되고 예상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는 흐르고, 사라졌던 혜진의 깜작 등장으로 이거 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름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잔잔히 흐르는 이야기 속에서 지나간 친구들과 어린 시절을 다시 떠올리며 웃음 지을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제 이후는 다리를 보면 지난날의 따뜻한 기억을 하나씩 꺼내서 추억해야 하겠다 생각해본다. 아직 그런 나이는 되지 않았을지라도,,,
사소한 것들이, 일상적인 것들이 이렇게 즐거운 것이었을까 - 116쪽
량(梁)과 교(橋)는 둘다 다리를 뜻하지만 량이 사람만 다니는 다리를 의미하는제 반해, 교는 수레나 말 등이 다니는 다리를 뜻한다고 했다. - 17쪽
외국은 자주 여행하거니 외국 생활을 했다고 해서 넓은 마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얼마나 느끼냐에 달렸다. - 264쪽
(2016.9.4. 평상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