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3676]정사도(鄭思道)선생시 迎日閑居
영일한거(迎日閑居), 영일에서 편히 살도다, 鄭思道 屛迹村廬車馬稀,병적촌려차마희, 시골 초막에 묻혀 찾아오는 수례와 말이 드물어 出門看雪立移時,출문간설립이시, 문밖을 나가 눈을보니 한참이 흘러간다 漁蓑堪畵晩江上,어사감화만강상, 고기잡이 도롱이를 그릴만한 저문 강위에 只恨都官無好詩,지한도관무호시, 다만 한하노니 도관에게 좋은 시가 없었는 것을,
迎日閑居[영일한거] 정사도(鄭思道) 屛迹村廬車馬稀。병적촌려거마희 出門看雪立移時。출문간설입이시 漁蓑堪畫晚江上。어사감화만강상 只恨都官無好詩。지한도관무호시 촌 초막에 자취 감췄으매 수레와 말이 드문데 문을 나가 눈을 보기 한참 동안 고기잡이의 도롱이를 그릴 만한 저문 강 위에 다만 한하노니 도관(都官)이 좋은 시가 없구나
屛병=죽이다.병풍.덮어서 막다. 屛居=은퇴하다. 屏迹병적= 자취를 감추다. 은거하다 . 숨다 村廬촌려=시골 마을에 있는 보통의 집. 蓑=도롱이 사, 잎 우거질 최, 잎 시들 최 (다른 표현: 꽃술 늘어질 쇠),동자(同字)簑, 漁蓑어사=어부의 도롱이. 堪畫감화=그림을 그릴만하다. 都官도관=唐나라 시인 정곡(鄭谷)의 벼슬이 都官이었는데 눈을 두고 지었는데 이 시와 비슷한 구절이 있다.
정곡(鄭谷)의 시
亂飄僧舍茶烟濕 난표승사다연습 눈발 나부끼는 가람에 茶다리는 연기 축축하고 密灑歌樓酒力微 밀쇄가루주력미 소복이 내린 주루엔 술기운도 희미하네 江上晩來堪畵處 강상만래감화처 강가에 느지막이 와 그림 그릴 만한 곳 찾았는데, 漁人披得一蓑歸어인피득일사귀 어부는 얻은 것을 펼쳐 보이며 도롱이 걸치고 발걸음 돌이키네!
江강 : 강 강,上상 : 윗 상, 晩만 : 늦을 만, 해가 지는 해질녘을 말함, 늦다 ②(해가)저물다 來래 : 올 래, ①오다 ②돌아오다 堪감 : 견딜 감, ①견디다 ②참다, 참아내다 畵화 : 그림 화, 그림 ②그리다 處처 : 곳 처, 걸어서 걸상이 있는 곳까지 가서 머무름의 뜻 漁고기 잡을 어, 물 속의 물고기를 잡는 일, 人사람 인, 披헤칠 피, ①헤치다, 펴다 ②(끈을)풀다 得얻을 득, ①얻다 ②손에 넣다 一하나 일, 蓑사 : 도롱이 사, 歸돌아갈 귀, ①돌아가다, 돌아오다 .............. 江上晩來堪畵處 漁人披得一蓑歸 강상만래 감화처 어인피득 일사귀 堪畵處: 그림 그릴 곳을 찾아내다, 堪: ①견디다 ②참다, 참아내다 漁人: 어부는. 披得: 얻은 것을 펼쳐 보이며 一蓑歸: (어깨에 걸쳐 두르는 )비옷을 걸쳐 입고 돌아간다. 蓑도롱이 사, (짚, 띠 따위로 엮어 허리나 어깨에 걸쳐 두르는 비옷)
ⓒ 한국고전번역원 | 김달진 (역) | 1968
鄭思道 양필, 오천군, 문정, 사도(思度) 어릴 때 이름은 정양필(鄭良弼)이며, 자는 사도(思道)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정사도(鄭思度)라 하였다가 공민왕 때 다시 정사도(鄭思道)로 고쳤다. 연일(延日: 경상북도 포항시 연일읍) 출신이다. 증조부는 정균지(鄭均之), 조부는 정윤(鄭潤), 아버지는 정유(鄭侑)이다. 어머니 채씨(蔡氏)는 채유길(蔡惟吉)의 딸이며 경원군부인(慶原郡夫人)에 봉해졌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47년(충목왕 3)에 대언(代言)으로 정방 제조(政房提調)가 되었으며, 1348년에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주관하여 시와 부를 시험하여 박형(朴形) 등 52명과 10운 시를 시험하여 김득제(金得齊) 등 46명을 선발하였다. 또한 1361년(공민왕 10) 제2차 홍건적 침입이 있었을 때, 전직 밀직제학으로서 김규(金㺩)와 함께 절령책(岊嶺柵)을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았으나 적의 공격을 받아 후퇴하였다. 1365년에는 경상도순문사에 임명되어 합포(合浦: 마산)에 있었는데, 마침 최영(崔瑩)이 신돈(辛旽)의 참소를 입고 동서강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에서 계림윤(鷄林尹)으로 전보되어 경주에 오게 되었다. 왕의 조처에 불만을 가진 신돈이 다시 일을 꾸며 보고하고 당류(黨類) 이득림(李得霖)을 경주에 보내어 최영을 사죄(死罪)로 엮어 죽이려고 하자, 이에 죽음을 무릅쓰고 반대하다가 파면되었다. 그 뒤 1368년에는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있는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영전(影殿)이 협소하다고 하여 마암(馬巖)으로 옮겨 짓도록 하였다. 이때에 정사도는 첨서밀직(僉書密直)으로 있었는데, 첨의시중(僉議侍中) 유탁(柳濯)의 제안에 따라 동지밀직(同知密直) 안극인(安克仁)과 함께 영전을 옮겨 짓는 일은 백성을 괴롭히고 재물을 낭비하는 것이므로 이 역사를 중지할 것을 건의하다가 왕의 비위를 건드려 순군옥에 일시 갇혔다가 곧 석방되었다. 1371년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승진되어 명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갔다왔으며, 1375년(우왕 1)에는 당시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을 죽이려 하였다고 의심받아 박형(朴形)·이성림(李成林)·윤호(尹虎)·최을의(崔乙義) ·조문신(趙文信)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1379년 향년 62세로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동문선권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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