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창 15장 1-6절
설교제목 : 꼭 필요한 한 가지
만질 수 없었던 아버지의 세계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열대야가 거의 한 달간이 지속되면서 무더운 여름을 나고 있습니다. 이 무더위와 확산되는 코로나에 건강하시길 빕니다. 무더위 속에서도 바람의 끝은 조금 달라졌고, 밤과 아침으로 귀뚜라미 소리는 가을이 서서히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새로운 시간이 우리에게 다가와도 우리가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거나, 무감각하여 그 시간을 제대로 응대하지 못하면 어떤 삶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음의 그림은 상징주의 대표 화가로 알려진 오딜롱 르동(1840-1916)의 작품입니다. 르동은 어린 시절 병약하여 집안의 골칫덩이로 취급받았고, 친척 집에 맡겨졌습니다. 병이 나은 뒤 집에 돌아왔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뭐든 서투른 르동을 향하여 그의 아버지는 늘 한심한 듯 쳐다보았고, 그의 어머니도 재능있는 형을 예뻐하며 그를 없는 사람 취했습니다. 그는 학교에서도,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너는 그림에 별 재능이 없어. 건축가가 되거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무서워한 나머지 아버지의 뜻을 따라 22살에 파리로 떠나 프랑스 국립 미술학교의 건축학과 입학시험을 치뤘지만, 떨어졌습니다. 그 일로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그런 시설을 보내며, 그는 렘브란트의 흑백 그림에 영감을 얻어, 사실주의 미술의 대가 장 레옹 제롬의 제자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르동은 제롬에게 “네 그림은 그림도 아니다”라고 혼이 나기 일쑤였습니다. 30대가 되어도 이룬 것 없고 막막했습니다. 쌓은 울분을 그림으로 표현했지만, “무섭고 꺼림직하다”는 반응만 싸늘하게 돌아왔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길을 놓지 않았고, 훗날 모네, 고흐, 세잔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찬사를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르동의 유일의 도피처는 예술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아버지가 떠난 뒤에 그렸습니다. 제목은 “원시적 존재(1876, 시카고 미술관)”입니다. 벌거벗은 남자는 죽은 거인의 머리에 손을 뻗고 있습니다 거인이 살아있을 때는 감히 만질 수 없었던 것을 만지며 아버지의 세계를 더듬고 있습니다.[성수경, “성수경의 그때 그 사람들”, 한경, 2024,07. 20]
그 거대하여 차마 두려움에 만질 수 없었던 목이 잘린 얼굴은 실제 개인의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이 극복해야할 아버지 콤플렉스였을 것입니다. 36세의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벌거벗은 자신은 어떤 페르조나도 걸치지 못하고 외적 인격의 적응적 태도를 가지지 못한 그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희망적인 것은 이제 그가 손을 뻗어 거대한 아버지의 세계를 만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르동은 이후로 그의 화폭에 색채가 가미되고, 다른 여러 화폭의 변화가 생겼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만지기 어렵고,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들과 마주하여 다가가는 순간, 우리의 삶 속에 변환이 일어남을 마음 속에 새기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방패
아브람은 잡혀간 롯과 그 일가를 되찾기 위해 318명의 사병을 데리고 가서 전쟁을 치르면서 큰 승리를 거둡니다. 승리 후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고, 소돔왕으로부터도 큰 환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있은 후,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1).”
아브람은 이제 전쟁의 승리 후에 주변 부족 국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았고 걱정할 것이 없는데, 왜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고, 내가 너의 방패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전쟁은 승리하였지만, 패전한 부족들은 다시 복수하기 위해 아브람을 노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끊임없이 원한에 대한 복수가 반복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하마스와의 전쟁은 결코 끝나기가 어렵습니다. 하마스의 지도자를 죽이면, 또 다른 지도자가 나오고, 그러면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테러를 감행하고, 이스라엘은 또 보복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수색 작전에서 나이든 노인과 어린이를 앞세워서 한다는 기사는 이러한 전쟁이 얼마나 잔혹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람의 두려움과 불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람을 향하여 내가 너의 방패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는 아킬레우스의 방패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 방패는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인 여신 테티스가 대장장이 신 헤파이토스에게 부탁하여 만든 것입니다. 그의 방패는 천하무적이었고 어떤 공격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테티스가 그의 발만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줄 강물에 담그지 않았기에, 그의 발목에 화살이 맞아 죽습니다. 우리는 어떤 방패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으신가요? 제 아무리 강력한 권력도, 많은 재산도 우리의 대단한 인맥도 궁극적으로 우리의 방패가 되지 못합니다. 시편기자는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며, 우리의 힘이시며, 어려운 고비마다 우리 곁에 계시는 구원자이시니, 땅이 흔들리고 산이 무너져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시 46:1-2).”
하나님을 나의 방패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은 불안하고 안절부절하고 두려움 많은 세상에서 주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주님을 나의 방패삼고, 찬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꼭 필요한 한 가지
아브람은 “주님께서 네가 받을 보상이 크다”라고 하시니 “무엇을 주시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상속받을 자식이 없고, 자신의 종인 다마스쿠스 엘리에셀 뿐이라고 합니다. 아브람은 부도 명예도 이제는 얻었고, 성공적인 삶을 이루어 부러울 것이 없이 살고 있지만, 꼭 필요한 한가지가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유산을 상속받을 자식입니다. 부족사회에서 상속받을 자식은 그 어떤 것보다 귀중합니다. 유산과 전통을 물려줄 자녀가 없다는 것은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할지라도 이 하나가 빠져있기에 아브람은 염려와 근심, 불안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자녀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상징적으로 자식은 미래이자, 삶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표상합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잘 구비되어 있고, 부족함없이 만족스럽게 삶이 흘러간다 할지라도, 삶의 미래와 가능성이 불투명하고, 전망이 밝지 않다면, 우리는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100억대의 자산을 보유한 분이 있었는데, 나이가 들고 그 자산을 더 이상 확장시킬 수 있는 근간이 사라지고, 자산이 줄어드는 일 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불안해하며 안절부절하지 못했습니다. 쓰다가 죽어도 못쓸 돈임에도 그의 미래의 가능성이 모두 차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현재는 돈이나 자산이 부족하다할지라도 자신의 미래에 대한 삶의 전망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희망을 안고 든든할 수 있습니다. 이 한 가지가 빠져 있으면 우리는 낭패를 볼 것입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한 가지는 미래이며, 가능성과 잠재력, 창조력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전망있는 미래가 우리의 삶에 펼쳐지기를 소망합니다.
하늘을 보기
아브람의 이야기를 든고, 주님은 단호하게 엘리에셀은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상속자가 태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람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씀하셨습니다. 주위를 환기시키며 그의 제안된 영역에서 보다 넓은 영역으로 바꾸어가려는 시도입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거별을 세어보아라.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5).”
아브람은 지금 자신의 한계와 현재의 삶의 방식 안에서 어떤 해결책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자아의 계획과 능력, 실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집에서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하늘을 보라 하십니다. 자기 절망과 힘겨움과 불안을 곱씹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앞에 펼쳐진 더 큰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을 다시 조망하게 하십니다. 자아가 가진 제한된 시선 속에 있으면, 우리는 마치 사방으로 막힌 삶의 현실에 잠식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모든 것이 막혀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 더 높이 더 멀리 시선을 응시할 수 있습니다.
어떤 20대 후반 내담자 한 분의 주호소는 “자신은 모든 것 사이로 끼어버리고 말았어요.”였습니다. 어디로도 갈 수 없고, 옴짝달짝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이 차단된 채, 정체된 삶 속에서 숨막히게 살고 있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저는 그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 사이로 끼어있고, 막혀있지만, 그 위는 열려있습니다. 끼어있고 막힌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위를 보고 그 막힌 것을 넘어갈 수 있도록 자라나야 합니다.”
예수님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아라(마 6:26-28).”
높이 바라보고 깊게 바라보면, 우리는 빈곤하지 않습니다. 자기 절망이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높이로 깊이로 향할 때, 우리는 조금 더 자랄 수 있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의 길을 조금은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