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적인 삶이란(딤후4:1-2)
2021,1,17 해외선교주일, 김상수목사(안흥교회)
20세기 독일의 세계적인 석학이자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에밀 브루너(E. Brunner,1889~1966)는 이렇게 말했다.
“불은 타오르기 위해서 존재하듯이 교회는 선교를 위해서 존재한다.”
오늘은 해외선교주일이다. 해외선교란 쉽게 말하면 해외에 가서 그 나라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정확한 통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나라에서 선교에 관심을 가진 신자들 중에서 실제로 해외에 선교사로 헌신하는 것은 불과 1%도 안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국내에 남아있는 99%의 성도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린다면, “선교적인 삶(Missional Life)”을 살아야 한다. “교회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역들이 있지만, 결국 모든 사역의 최종 종착점은 에밀 브루너의 말처럼 선교 즉 영혼구원에 있다. 순교보다 어려운 것이 순교적인 삶”이라는 말이 있듯이, “선교보다 어려운 것은 선교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적인 삶은 단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선교에 대한 말씀을 준비하면서 “~답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았다. 예를 들면 ‘교회답다’, ‘성도답다’ 등과 같은 표현들이다. 어떤 교회가 교회답고, 어떤 성도가 성도다운 것일까? 선교적인 삶을 추구하는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이고, 선교적인 삶을 사는 선교사와 성도가 바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교사와 성도다운 삶의 방향이 아닐까?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선교적인 삶을 사는 것일까?
1. 선교적인 삶이란, 늘 선교에 관심을 갖고, 보내는 선교사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관심과 시간)
‘사랑은 관심’이고,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들이 선교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선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보내는 선교사(Sending Missionary)라는 말이 있다. 파송된 선교사를 위해 배후에 중보기도하고, 격려하고, 후원하는 성도들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들이 해외 선교사로 직접 나가지 못한다고 해서 선교적인 삶까지 포기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이처럼 관심과 함께 중요한 것이 “타이밍” 즉 시간이다. 영혼구원 사역은 “지금”해야 한다. 예전에 “나중에 돈 좀 벌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좀 한가해지면 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말을 하는 분들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이 선교도 마찬가지로 지금 못하는 사람은 나중에도 못한다. 주님의 말씀처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가 큰 것에도 충성한다(눅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16:10)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인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강조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2)
그러므로 선교에 관심을 갖고, 지금 우리 앞에 주어진, 우리 일생의 단 한번 밖에 있지 않은 귀한 시간들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자. 이것이 선교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2. 선교적인 삶이란,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부터 전도하기를 힘쓰는 것이다(지역).
선교적인 삶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부터 전도하기를 힘쓰는 것이다. 가까이 있는 이웃의 영혼을 구원시키려고 애쓰는 사람이 멀리 있는 외국의 영혼에게도 선교하게 되어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해외로 보내심을 받지 않더라도 이미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복음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서 지금 내 옆에 가까운 사람들부터 전도를 시작해 보자. 이것이 선교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3. 선교적인 삶이란, 사랑하는 마음으로 동참하는 것이다(동기).
사랑은 우리들이 주님의 영혼구원사역에 참여해야할 가장 중요한 동기다. 사랑하면 전도하고, 사랑하면 선교한다. 누구를 사랑하는가 하면, 첫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주님이 사랑하는 그 영혼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교하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게 만든다. 사랑은 우리들이 행동하지 않고는 못견디게 만든다. 이것이 사랑의 특징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면,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부활의 주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양들을 위임하시면서 다른 어떤 것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도 이런 맥락이다(요21장). 만약 내 안에 사랑하는 마음이 별로 안생긴다면, 사랑하는 마음을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해야 한다.
우리교회도 이처럼 사랑의 동기로 이미 해외에 선교사님들을 파송했고, 여러 교회나 선교센터 등을 건축했고, 지금도 건축 중에 있고, 여러 미자립 교회들도 지원하고 있다. 만약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찌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하고, 선교비를 보내고, 재정을 후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앞으로도 주님이 주신 이러한 사랑의 마음을 변치말고, 전도와 선교에 더욱 힘쓰는 성도들이 되자. 이것이 선교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는 이러한 하나님과 양들을 사랑하는 동기로 선교에 힘썼던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이 에릭 리델(Eric H. Liddell, 1902~1945) 선교사다. 에릭 리델은 스코틀랜드의 육상 선수이자, 중국에서 선교했던 장로교 선교사였다. 그의 일대기는 “불의 전차(1981)”라는 영화로도 제작 되었다. 에릭 리델은 중국 톈진에서 선교사 부모에게 태어났고, 영국의 에든버러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에릭 리델은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400m에서 세계 기록을 세우면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올림픽에 출전하기 전부터 자신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달린다고 자주 고백했었다. 에릭은 원래 100미터가 주종목이었지만, 100미터 경기가 주일에 열린다는 이유로 포기했다. 그대신 200미터와 400미터에 출전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별로 기대를 걸지 않았다. 출발신호가 울리자 마자 그는 마치 100미터 달리듯이 달렸다.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얼마 뛰지 못하고 에릭이 쓰러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러나 결국 400미터 전구간을 불의 전차처럼 초인간적인 힘으로 달리면서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경기 후에 기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괴력을 발휘할 수 있었느냐고 질문할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100미터는 내 힘으로 뛰었고 나머지 300미터는 하나님이 뛰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과학과 신학 학위를 취득한 후, 다시 중국 텐진으로 건너가 선교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대동아전쟁이 일어났고 일본군들에게 중국군의 간첩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고 수용소에 억류되었다. 에릭 리텔은 수용소 안에서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다가 42세에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확신컨대 그는 천국에서 올림픽 금메달보다 더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생명의 면류관을 받고 기뻐했을 것이다.
*** 에릭 리델의 "불의 전차" 영화 리뷰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fbiIHf5RyN0&t=231s
에릭 리델은 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서 누릴 수 있었던 명예와 부(富)를 포기하고, 다시 중국 선교사로 떠났을까? 그것은 마치 순교자 문준경전도사님이 공산당의 총칼에 죽어가는 양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신안의 섬들로 들어갔던 것처럼, 또는 “쿼바디스”라는 영화에서 사도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양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시 로마로 가서 순교 당했던 것처럼, 에릭 리델 역시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부모가 목숨을 버려 사역했던 양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그가 일생동안 선교적인 삶을 추구했던 동기였고, 운동장에서 달렸고 중국으로 건너갔던 이유였다. 에릭 리델의 이러한 열정적인 삶의 모습이 지금 우리들이 추구해야할 선교적인 삶의 모습이라고 확신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옥의 불에서 살려내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오신 인류 최대의 선교사이시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주님께 사랑의 빚을 졌고,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과 나를 교회로 인도해 준분들에게도 사랑의 빚을 졌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선교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서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가까운 이웃에게 전도해야할 이유이고, 해외에 선교해야할 이유다. 성령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