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월 8일
아침부터 빵을 먹고 출발할려고 했으나 교회 집사님들께서 선교하려 갈려면 든든히 먹어야 한다면서 새벽예배를 맞치고 아침을 차려주셔서 정말 든든히 먹고 공항을 출발하였습니다.
인천공항도착. 10시 5분 베트남 하노이 비행기.
이제부턴 우리가 선교를 하러 간다고 말할수 없기에 풍성한 삶, 성경책... 그 어떤것도 꺼내 볼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순장님이라는 단어 조차도 사용할수 없었습니다.
아! 이제 드디어 시작이구나...
우리나라 시간 3시. 베트남 시간 1시-한국과 베트남의 시간차는 2시간 정도-
하노이 공항 도착.
공산주의 국가들을 알리는 듯한 군인 제복, 여기 저기 살피는 눈초리들...
베트남에 대해 알지 못해도 공산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알수 있을 정도로 경찰과 군인들의 옷은 북한인들의 옷과 매우 흡사했고, 감시도 많았습니다.
공항 도착후 선교사님이 우리를 마중나왔고 우리는 차 안에서 베트남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노이는 베트남의 북부지방에 있는 곳이고, 하노이 역시 지금은 약간 추운 날씨인데 우리가 선교온 것을 반기는 듯이 날씨가 이상하게 따듯했습니다.
우리는 선교사님께서 알아봐 주신 아파트에 머물렀는데 그 곳은 우리가 생각했던것이랑 틀리게 한국의 아프트 처럼 잘 되어 있었고 침대도 자매 둘이 써도 좋을 정도로 컸습니다.
잠깐의 방 구경을 하고 선교사께 베트남의 사정을 들었는데,
베트남 역시 한국과 아주 비슷하게 북부지방과 남부지방이 있는데 북부와 남부를 통일 시킨 사람이 호치민 이였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북부지방에선 호치민 사상이 강력하여 선교활동이 금지되어 있지만 남부지방은 활발하게 선교가 진행되어져 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선교사님께서 더욱 더 강조하신 것은 지금부터 언어에 대한 조심성 이였습니다.
특히 베트남사람들이 한국을 좋아해서 한국말을 할줄 아는 사람들이 있기에 더욱 더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장님들에겐 chi(찌) -베트남어로써 여자에게 부르는 높임말-
또는 ahn(아잉) -남자에게 부르는 높임말 -으로 높여주기로 했습니다.
기도나 찬양도 큰 소리로 할 수 없었고 외출할때는 반드시 성경책과 큐티책들을 숨기고 하여야 했습니다.
온 첫날은 베트남 시간으로 10시 (우리나라 시간으로 12시)에 취침을 하고 다음 날부터 베트남시간으로 맞추기 위해 베트남 시간 6시에 기상을 해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2002년 1월 9일
6시 기상
큐티를 하고 아침을 해 먹고 신약 성경통독을 시작하였습니다.
밖으로 처음 나갑니다.
거리엔 한국과 정 반대로 차는 셀수 있을 정도로 몇대 안 되었고 오토바이 거의 도로를 꽉 매우고 있었습니다.
오토바이 거리는 중앙선도 없고 아무런 법칙도 없듯이 먼저 진입하는 것이 먼저 였고 인도에도 사람들이 걸어다닌다기 보단 오토바이 전용주차장 이였습니다.
매연이 엄청났으며 정말 가만히 있어도 기침이 났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직접적으로 베트남인들과 부딪칠수 있는 한국어 교육을 위해 E센터를 방문 하였습니다. 한국어 교육은 우리가 가는 날까지 매일 하기로 되어졌습니다.
E센터는 선교사님께서 운영하시는 기관으로 베트남인들을 모아 한국어 교육을 가르치면서 그 중에 성실하고 준비되어 있는 학생들에서 복음을 알리기 위해 운영되는 곳입니다.
우리는 처음으로 베트남인들을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기쁨과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설레임으로 들떠 그것들을 팀별로 준비하였습니다.
그 전에 우리가 더욱더 준비해야 했던 것이 있었는데 역시 언어의 문제였습니다.
E직원중에 한국말을 아주 잘 하는 베트남인이 있어서 특히 언어 사용에 중요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들만의 은어 하나님=아버지, 예수님=토끼, 아멘=OK, 기도=랩, 예배=휴식, 교회=공장, 간사님=선생님, CCC=단체 또는 코카콜라클럽 이라고 정해놓고 항상 랩을 시작하여 OK소리에 맞춰 끝내고 수업에 들어갔습니다.
기도를 할 때도 눈을 감고 할수 없기에 눈을 뜨고 벽을 바라보며 때론 딴짓하는 것처럼 하면서 하나님과 대화 하였습니다.
처음 베트남 학생들을 만났고 그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쳐 주면서 그들의 순수하고 한국인들을 너무 좋아하는 모습에 정말 아름다은 사람들이구나 라고 생각되어졌습니다.
그들은 ' ㄹ'과 'ㅑ'발음이 특히 안되서 발음 고정을 시켜 주는데 정말 답답하면서도 재밌는 시간이엿던 것 같습니다.
2002.년 1월 10일
많은 관광(?)을 하였습니다.
특히 베트남에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열기 호치민의 묘를 가보는 날입니다.
영어를 할줄 아는 가이드가 와서 호치민 묘를 방문하는데, 1964년도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치민 사상의 열기는 그들에게 절대 빼앗을수 없는 것이라는 걸 확신시켜 주듯 엄청나게 컸으며 그 곳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도 엄청났습니다.
호치민을 보기 위해 들어가는 모든 계단과 곳곳에 군인들이 세워져 있었으며 정작 안으로 들어갈때는 주머니 속에 있던 손을 빼라고 하면서 호치민의 존경을 표시했습니다.
호치민은 죽었지만 그 시신만큼을 죽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고 우리는 그것이 모형일거라 생각했지만 가이드는 그것이 실제 그대로 라고 말하였습니다
정말 그렇게 고대로 보존했다는 모습에 감탄의 소리뿐이 나오지 않았으며 호치민에 대한 존경심을 다시 한번 알게된 날이였습니다.
그후 가이드를 따라 많은 사찰을 들렸습니다.
그곳에 세워진 많은 우상들이 정말 섬뜩할 정도 였습니다.
가이드는 우리에게 절을 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순간 너무 당황했고 필요없다고 하였습니다. 나중엔 향을 갖다 주면서 꽂으라고 우리에게 하였지만 그것역시 우리는 받지 않았습니다.
가이드는 이상하게 우리는 생각했지만 계속해서 왜 안하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말하고 싶었지만 우리가 온 것은 관광이기에 그냥 어물쩡하게 넘어갔습니다.
그 많은 사찰들에 세워진 우상숭배들과 우리에게 향을 갖다 준 가이드-가이드 이름은 홍입니다.-을 위해 우리는 기도를 심었습니다.
2002년 1월 11일
시내 리서치 날입니다.
택시를 타고 아무곳에나 내려 주면 그곳에서부터 지도를 보고 E센터까지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팀은 어제 들렸던 옥산사 근처에서 내렸습니다.
골목골목을 들어가면서 E를 찾아가는데 생각 했던것과 틀리게 주의 주의에 절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중 한 곳을 들렸는데 할머님들이 모여서 얘기 하시고 우상을 두고 절하고 돈내고 하는 모습들이... 정말 너무 안타까웠고 우리를 끌고 들어가서 역시 절을 하라고 하시는 할머님에게 우리는 그냥 구경하겠다고 하면서 우상앞에서서 랩을 시작하였습니다.
어두컴컴한 분위기와 크게 세워진 우상들 때문에 좀 무섭기도 했지만 싸울수 있기에 그리고 그 할머님들을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눈을 똑바로 뜨고 그 우상을 바라보며
"아버지의 이름으로 물러갈찌어다..".라며 외쳤습니다.
E센터에서 모인후 지체들 나눔속에 모두 똑같은 생각들뿐이였습니다.
정말 베트남 이 산지를 내게 주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한국에 교육 시간에 팀이 좀 바뀌어져서 다른 팀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따이 라는 소년을 만났는데 16살 남자아이였고 태권도 1단까지 가지고 있는 한국을 정말 사랑하는 친구였습니다.
2002년 1월 12일
천주교 마을을 방문하는 날입니다.
3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간 천주교 마을은 19세기에 천주교가 베트남에 들어왔지만 베트남의 우상숭배와 많은 사찰들의 모습과 같이 어우러 지는 바람에 눈을 닫게 된 곳이 였습니다.
천주교 마을을 들어가는 순간 우리에게 보인 것은 십자가... 그것이였습니다.
베트남땅에서 십자가를 보다니... 너무 기뻤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그곳에 있는 모든 성당들은 문을 닫고 있었고 그 중에 한 곳을 개방해 줘서 들어가게 되었는데 들어가는 순간 절의 분위기가 확 느껴질정도로 너무 화려했으며 천장에는 요셉, 모세...같은 그림들이 붙어있었고 목에 날개가 있는 천사들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성당 중심에는 마리아가 서 있었고 그 아래 예수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이러니깐 망하지...'라는 생각이 확 떠올랐습니다. 그 안을 돌면서 우리는 팀별로 기도를 심었고 그 후 하노이의 옛 수도를 방문하였습니다.
옛날 왕이 살던 곳이 라고 하였는데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곳은 빈민들이 사는 마을이였습니다. 아이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돈을 구걸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달라고 때쓰기 시작했습니다. 왕이 살던곳을 보고 차를 탈라고 할 때도 그곳 사람들 때문에 나올수가 없었고 아무것도 사주지 않고 그냥 나올 때 그들의 욕하는 소리에 너무 무서울 정도 였습니다.
그때부터 조금씩 베트남인들을 품어야 한다는 생각보다 무섭다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2002년 1월 13일
드디어 공장에 가는 날입니다.
처음 가는 한인교회라 조금 헤매는 바람에 좀 늦게 도착했는데 그 순간 성가대 합창소리가 들렸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큰 소리로 기도할수 있다는 것도 좋았고 큰소리로 찬양을 할수 있다는 것도 넘 기뻤습니다.
육적으로 영적으로 많이 지쳐있었는데 성가대의 소리는 우리에게 더욱 더 큰 힘을 주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로를 씻어주시기 위해 마련해 주신 소리같았습니다.
휴식을 마치고 쇼핑을 좀 하였는데 우리를 본 많은 장사꾼들이 갑자기 몰려서 지체들 한 순장님이 소매치를 당했습니다. 베트남인들이 더욱 더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2002년 1월 14일
드디어 하노이 대학들을 돌아다니면서 친구를 사귀는 램프사역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우리 팀이 간곳은 하노이 국립대학과 외국어 대학이였습니다.
길을 잘 몰라 물어 물어 하노이대를 찾아갈려는데 그 중 한사람이 자신이 하노이대학생이라면서 우리를 인도해 주었습니다.
근데 그는 그 후에도 우리를 계속 쫓아다녔고 우리는 조심해야 되다면서 그 사람을 보낼려고 바디랭귀지를 하며 계속 가라고 하였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어제 한 순장님이 소매치기 당한 것을 본 다음날이라서 그런지 가까이 가기가 두려웠고 그 사람이 말을 걸라고 하면 그냥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는 조용히 사라졌고 그렇게 생각한 나의 마음이 조금 미안했습니다.
하노이 국립대학에서 한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그는 우리보다 영어를 더 잘해서 베트남말보다 영어로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와 이메을과 주소를 주고 받은후에 내일 2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우리는 E센터로 향했습니다.
2002년 1월 15일
만나면 할 얘기들을 베트남말로 배운후 부푼 기대롤 품고 하노이 국립대학으로 향했습니다.
2시가 되고 3시가 되고 3시 30이 되어도 그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과 헤어질 때 내일 안나오면 어떻하지 하면서 걱정을 하였는데 기도보다 걱정을 먼저 해서 하나님께서 기도할수 있는데 왜 근심하느냐고 말씀하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순 없습니다.
한국에 가서 이메일로 그와 대화할것입니다.
그 영혼이 정말 우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배해 두신 준배해 놓으신 영혼이길 바랍니다.
베트남을 한번 이메일을 보낼려먼 30분 정도의 오랜 시간이 흐릅니다.
그가 그것 때문에 우리와의 연락을 소홀히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올해 8월에 한국에 온다고 하였는데 그때 더 깊은 교제를 나누고 싶습니다. -아멘-
2002년 1월 16일
선교사님댁에서 점심초대를 해 주셨습니다.
떡볶이 사라다... 튀김 얼마만에 먹어보는 건지 정말 꿀맛이였습니다.
선교사님 사모님도 같은 선교사였습니다.
정말 서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사시는 모습들이 너무나 많은 도전이 되었고 내가 알고 있었던 선교사라는 삶에 대해 다시 한번 깨우쳐 주는 시간이였습니다.
오후에 성경책을 피고 통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벨소리가 들렸습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 였습니다.
우리는 불난 듯 성경책을 치우고 찬양집도 치우고... 정말 후다닥 그 자체 였습니다.
다행히 아주머니는 우리가 있는 것을 보시곤 다시 오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정말 잠깐의 헤프닝이였지만 그 모습들을 보며 우리는 씁씁한 미소를 흘렸습니다.
2002년 1월 18일
한국어 수업 마지막 날입니다.
롤링 페이퍼를 했습니다.
그들은 맞춤법이나 자연스러운 문장에 많이 서툴렀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정말 고맙다고 몇번이고 말하는 말에 우리는 너무 아쉬웠고 정말 그들이 얼마나 순수한지 그리고 우리보다 더욱 한국을 사랑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같이 귀국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 였습니다.
2002년 1월 19일
드뎌 우리의 직접적인 목적 KOREAN NIGHT 날입니다.
아침부터 음식을 만들고 태권무, 꽃봉우리 예술단, 그리고 스킷드라마 '하트'를 준비하면서 바쁜 하루를 보냈습니다.
6시 한명씩 한명씩 그들이 왔습니다.
내가 가르쳤던 학생 링과 따이도 왔습니다.
불고기, 잡채, 경단, 식혜, 수정과, 파전, 산적, 김치볶음밥... 같이 식사를 하면서 음식들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그중 나는 불고릴 맡았었는데 처음 해보는 거고 양념장도 없어서 많이 걱정했는데 제일 많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칭찬해 줘서 하나님께 정말 감사했습니다.
불고기를 만들면서 처음 해 보는 거지만 제발 그들의 입에 맞게 해 달라고 기도했었습니다.
이곳에 와서 조금씩 목이 아팠었는데 약도 안 먹고 버텼더니 더욱 심해져서 한번 기침을 하면 토할정도로 멈추지 않았고 목 안이 퉁퉁부어서 정말 침 삼킬 정도로 아펐습니다.
요번 KOREAN NIGHT에서 특송과 스킷을 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걱정이 되었지만 하나님께 제발 이 기간 만큼은 참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특송이 끝나고 스킷이 끝나고 마무리가 끝날때까지 신기하게도 기침한번 안 나왔습니다.
그후에 집에가서 계속해서 기침이 나왔는데 너무 아펐지만 너무나 감사할수 있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맨 마지막의 스킷 '하트'입니다.
태권무와 꽁트도 물론 재미있었지만...
스킷 정말 그 감동은 말도 못할 정도 였습니다.
스킷 하트는 무언극입니다. 그들과 말도 통하지 않고 그냥 음악에 맞춰-음악도 본래 음악인 스팅이 구해지지 않아 찬양의 MR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들을 보여주었는데 그들은 하트 무언극이 무엇을 의미하는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중요한 것. 그들에게 하트 무언극이 무슨뜻이냐고 물어봤을 때 나온 대답입니다.
사랑은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소매치기 당하고 구걸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여태껏 내가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정말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너무나 너무나 감사합니다.
우리를 잘 도와준 베트남인들과 지체들 선생님들 그리고 특히 오직 우리의 주님께 정말 감사합니다.
2002년 1월 21일
귀국 하루 전날입니다.
마지막으로 배를 타고 소수민족들을 돌아보러 갑니다.
배를 타고 40분쯤 들어가서야 그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나무도 많고 돌도 많은 곳인데도 신발을 신지 않고 다녔습니다.
아이들은 너무나 귀여웟꼬 너무 안에만 있어선지 우리에게 관심이 많았습니다.
배우지 못해 말을 할줄도 잘 몰랐지만 그 순수한 마음들많은 느낄수 있었습니다.
한 순장님의 나눔이 생각납니다.
그들을 위해 복음을 전파하러 간다면...
혹시 그것이 나라면.. 난 갈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난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도 않지만 그럴 용기 조차도 그들을 보면서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꽉막힌 세상속에서 정말 그들을 위해 품고 소수민족에게 복음을 알리기 위해 일할 사람이 정말 필요한 때인데 ... 나에겐 왜 아직도 그들을 위한 헌신이 생기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중 한사람이 십자가 목걸이를 달고 있었습니다.
천주교 목걸이 같았는데 그에게 기도하냐고 물어봤더니 손모양까지 하면서 한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가망성이 있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을 때 준비할 자신이 없습니다.
단기선교...
정말 그냥 다른 나라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정말 내가 이럴수 있을까 라고 생각될 정도로 다른 나라를 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정말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지상명령 성취를 위한 준비된 많은 영혼들이 곳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질로 기도로 후원해 주셔서 정말 무사히 건강히 다녀왔습니다.
동역자님들의 기도덕분에 후원덕분에 저에게 좀 더 큰 지경이 생기게 되었고 정말 품을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