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43∼48 네 이웃을 사랑하라
중국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잠시 영국에 귀국하여 선교에 함께 할 동역자들을 모집하기 위해 지원자들이 사명감이 있는지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 "왜 중국에 선교사로 가려고 하십니까?" 여러 답변들이 있었다. 중국인의 영혼을 구원하려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서,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 되려고 등등의 대답이 있었다. 모두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허드슨 테일러는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그 때, 지원자 가운데 한 사람이 허드슨 테일러에게 되물었다. "그러면 선교사님은 왜 중국에 선교사로 가셨습니까?" 그때 허드슨 테일러는 서슴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예, 저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하나님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무엇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할 때에 사랑의 대상, 사랑의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며 이렇게 말할 때가 많이 있다. “저런 사람도 사랑해야 하나? 저 사람은 아니야...”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관점에서 사랑할 수 없다고 여겨지면 이런 저런 핑계와 변명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관점보다 내 관점이 더 중요함) 이와 같은 반응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반응이었다. 주님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여전히 율법의 가르침을 따랐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자신이 편리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해서 해석하고 가르쳤다.
구약 성경 레19:18에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하셨다. 분명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셨고 신약 성경에 보면 같은 말씀을 즉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레19:18에 ‘네 이웃을 사랑하라’ 는 말씀에는 두 가지 원리가 들어 있다. 첫째는 사랑의 대상에 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이웃은 물론 우리를 미워하고 해한 원수도 사랑하라 하셨다. 방금 읽은 레19:18 뿐만 아니라 출23:4-5에도 보면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 하셨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사사로이 원수를 갚을 권한도 없고, 동포를 원망할 권리도 없다. 누구든지 사랑할 책임만 있다. 둘째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단순한 사상이나 감정이나 느낌이나 구호가 아니다. 사랑은 말과 행동으로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그래서 레19:18에서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내 자신의 몸을 아끼고 돌보듯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 몸이 주리고 목말라 할 때는 먹이고 마시우고, 우리 몸이 추울 때 옷을 입히고, 우리 몸이 피곤할 때 재우고 쉬듯, 이웃에 대한 사랑을 그렇게 구체적으로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잠25:21-22에 보면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말씀하셨다. 여러분,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이웃이 필요한 것을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 이런 행함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눅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강도 만난 이웃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럼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했을까?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웃 사랑의 원리를 모두 무시해 버렸다. 레19:18을 자기들이 편리한대로 왜곡하고 자신들의 뜻대로 가르쳤다. 오늘 본문 43절에 보면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다. 이들의 가르침은 맞는 것 같이 보였지만 모두 틀린 가르침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가르치기보다 자신의 관점에서 가르쳤다. (인본주의 신앙의 특징) 말하자면 조상들의 전통과 장로들의 유전을 중시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 마음대로 가감하여 가르쳤다. 갈1:7-9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말씀하셨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가르쳤는데 그 잘못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첫째, 그들은 사랑의 대상을 제한시켰다. 그들은 원수는 미워하고 이웃만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그들에게는 이방인, 유대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인, 혼합 족속인 사마리아인, 그리고 세리와 창기 등등 자신들의 관점에서는 사랑할 수 없고, 미워할 수밖에 없는 대상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자기 편리에 맞게 해석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사람들의 마음속에 미움이 자리를 잡았고 심히 강퍅해졌다.
둘째, 그들은 사랑을 구체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말과 혀로만 사랑했다. 분명히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은 빼 버리고 그저 단순히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그렇게 가르친 것은 그들이 그렇게 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눅10장에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여러 핑계와 변명으로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지 못하고 피해서 지나간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원수까지 이웃으로 여기고 ‘사랑하라’ 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원수였던 죄인들을 친히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사랑해 주셨다. (예수님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으시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심 -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사랑해 주심)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이와 같은 사랑을 보이시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100% 반응해야 함 -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은 인본주의 신앙을 가진 자가 되는 것임) 45절에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본 받아야 한다. (선택이 아닌 필수) 46-47절에 보면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이웃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을 발견한다. 그것은 ‘문안’이다. 사랑에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문안이다. ‘문안’은 원어로 ‘아스파조마이’ 인데 ‘환영하다’, ‘포옹하다’, ‘인사하다’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사랑과 문안을 연결하여 말씀하셨다. 그렇다. 사랑하는 이웃에게 적절한 환영의 인사를 하는 것은 예의와 존경의 표시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의와 존경의 표시인 문안을 형제에게만(자신이 생각하는 이웃에게만) 한다면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에 대한 결론을 48절에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말씀 안에는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유대인들이 온전하지 못하다는(의롭지 못하다는) 의미가 들어있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보이신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도 온전함을 보여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예수님이 죄로 인해 죽어 영벌을 받을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말과 혀로 사랑하지 않으시고 죄인인 우리들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예수님 자신처럼 사랑해 주셨다. 이제부터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예수님처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온전한 성도들이 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기를 축원한다. 요일3:18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