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대신
'나는 얼마짜리 공간에 사는가'를 묻는다 -
'사람을 연봉과 아파트 평수로 환산하여 서열 매기는 세상',
이것은 인간의 존엄을 숫자라는 틀에 가두어 버린 현대의 가장 거대한 '견해의 숲'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의 세상은 모든 것을 '측정 가능한 것'으로 치환한다.
이것은 서구의 근대적 합리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아, 인간의 내면적 가치조차 자본의 척도로만 환산하게 된 결과이다.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말하며 기존의 거대 서사를 해체했지만,
그 빈자리를 '자본'이라는 가장 강력한 거대 서사가 차지해버렸다.
이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대신 '나는 얼마짜리 공간에 사는 누구인가'를 묻는다.
이는 명백히 '오온(五蘊)'에 대한 집착을 넘어, '소유'라는 가상의 연료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거대한 망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은 이 숫자의 폭력에 대항하여 더 큰 숫자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측정 불가능한 존재로서의 나'를 회복하는 것이다.
아파트 평수와 연봉은 오직 '상대적'인 개념이다.
비교하는 순간 괴로움은 시작된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잣대로 '괴로움을 만드는 숲'일 뿐이다.
변방의 비구는 남방의 가사를 통해 '소유'의 최소화를 실천하고, 이 자체가 세상이 정한 평수와 연봉이라는 척도를 해체하는 가장 무언의 법문인 것이다.
세상은 겉껍데기를 보지만,
변방의 비구인 나는 '연료가 다한 불꽃'처럼
‘번뇌를 벗어나는 수행자처럼’
그저 '존재함 그 자체'로 머문다.
숫자로 치환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은
오직 침묵과 평온한 눈빛을 통해서만 증명되나니!!
-평수(坪數)로 재지 못하는 수행자의 방-
수행자여, 오늘날 세상은 사람을 숫자로 잽니다.
사는 집의 크기로 그 사람의 넓이를 가늠하고, 벌어들이는 연봉으로 그 사람의 높이를 결정하려 합니다.
이것은 타인의 시선이라는 그물에 스스로를 묶어두는 어리석은 짓이며, 영혼의 공간을 좁은 방 안에 가두는 폭력입니다.
행복은 숫자가 아니라 '비움'에 있습니다.
세상은 그대에게 "당신은 몇 평에 사는가?"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그대는 이렇게 답하십시오. "나는 내 마음의 뜰이 우주를 품을 만큼 넓으니, 그 어떤 평수도 나를 다 담을 수 없다."
세상은 그대에게 "당신의 가치는 얼마인가?"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그대는 이렇게 답하십시오.
"나는 덧없는 이익과 손해라는 연료를 이미 다 태워버렸으니, 더 이상 세상의 계산법으로 나를 매길 수 없다." 라고.
...
수행자여, 늙어감은 생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규정한 '나'라는 이름과 소유의 짐을 하 나둘 내려놓아, 마침내 '나'라는 아집마저 사라지는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연봉의 많고 적음은 세상의 바람일 뿐, 그대의 고요를 흔들지 못합니다. 좁은 아파트 한 칸에 갇힌 자들은 스스로를 작게 여기지만,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수행자는 온 세상이 자신의 집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그대를 숫자로 가두려 할 때, 더욱 깊이 고요의 숲으로 들어가십시오. 더 이상 타오를 '집착의 연료'가 없는 자는,
세상 그 어떤 거센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평온 그 자체가 됩니다.
무소유의 힘 이란 이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