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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마가복음16:14)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간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방법은 죄를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인간의 모든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시고 십자가의 죽으심이 바로 자신을 위하여 죽으심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자들에게 구원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으므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들이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기에 그의 말씀을 따르고, 명하신 모든 명령을 순종하되 죽기까지 따르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루신 구원의 일들을 완성하기 위하여 영원히 이당에 계셔서 십자가의 사건을 이 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이 땅 위에 계시다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나라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승천하시기 직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명령을 하셨는데,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지상 명령 즉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를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시던 권능을 이 지상명령을 행하려고 하는 믿는 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표적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권능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나타나는 표적이 되어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 말씀의 믿게 하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셨던 모든 능력을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지금도 역사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로부터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런 권능을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주신 것일까요? 이런 권능을 주어 사람들에게 표적을 나타낼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심을 깨닫게 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 래서 본문 15-17절에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온 천하에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으로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사도들과 많은 믿는 성도들을 통해서 이런 표적이 일어났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20절에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을 믿고 예수님께서 말씀대로 제자들이 행하여 많은 표적을 통해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게 된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는 오늘도 믿는 우리를 통해서 일어나기를 원하고 있고, 지금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일어나기 원하고 계십니다. 표적과 역사가 복음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나 미련한 인간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게 하는 말씀의 확실성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이 말씀이 확실히 증거 되는데 또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표적이라는 이 말씀을 깨닫고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행함으로 많은 표적을 나타내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냅니다.
본문 17절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가버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서는 고쳐 주셨으며,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 주셨으며,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셨고, 그밖에도 많은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은 제자들에게도 이미 허락하셔서 사도들도 이 능력을 전도 여행 중에 행사했습니다.
이처럼 귀신들은 ① 사람에게 각종 질병과 불구를 유발시킬 뿐만 아니라 ② 사람들을 부도덕한 길로 인도하고(거짓말, 음란, 악행 등), ③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적 성장을 저해합니다. 그래서 귀신이 들리면 인간성이 무너지고,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가정이 파괴되고, 개인과 가정이 행복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귀신의 존재에 대하여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귀신은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귀신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귀신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요? 이사야 14장 12절에 보면 루시퍼라는 천사가 나옵니다. 루시퍼는 계명성이라는 천사장이였습니다. 그러나 루시퍼는 그 영광의 자리를 이탈하여 하나님께 도전하다가 이 땅으로 추방을 당한 존재로서 타락한 루시퍼를 사탄이라고 말합니다. 루시퍼가 타락하여 세상으로 쫓겨날 때 따라 나온 졸개들이 바로 귀신들입니다.
이런 귀신을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귀신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에는 여러 가지 질병과 사고, 그리고 불행을 유발시켜 인간을 괴롭히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귀신이 우리 생활 속에 얼마나 큰 고통을 주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거라사 지방에 군대 귀신들린 자의 모습은 사람들이 쇠사술로 묶어 놓을 수 없고, 무덤에서 벌거벗고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에게 무서움을 주는 것과 같이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귀신이 들려 당하는 고통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문제만 보고 애쓰는 것을 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고난이 있습니까? 먼저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내가 당하고 있는 문제가 죄로 말미암아 온 문제도 있고, 귀신이 나를 넘어뜨리기 위한 역사가 많이 있습니다. 귀신이 내게 역사하는 것이라고 깨닫게 되면 보이는 문제와 싸우지 말고 귀신의 역사를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귀신들을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을 믿는 자들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창세기 3장15절에서 사단으로 나타났던 뱀에게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아픔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귀신을 무리치는 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 점치는 귀신을 물리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세상의 다른 방법으로는 귀신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어느 여자 집사님의 남편이 외도를 했습니다. 실망과 배신감에 몸부림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남편에게 애원도 하고, 협박도 하고, 멀리 이사도 해보고 노력을 했지만 허사였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던 중에 환상 중에서 남편의 몸에 많은 더러운 벌레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본 집사님은 음란 마귀가 들어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금식하며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금식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더니 남편은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정리하겠다고 고백하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우리의 삶 속에 들어와 고통을 주고 있는 귀신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분명히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라고 말씀하심처럼 귀신의 역사는 반드시 물러갈 것입니다. 귀신이 물러가면 귀신을 통해서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게 하여 승리할 수 있게 함으로 복음 전도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2. 새 방언을 말하게 됩니다.
17절에 새 방언을 말하며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새 방언'은 영적인 언어를 뜻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은사 중에 하나인 방언과, 오순절 날에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사람에게 하는 방언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방언들은 인위적으로 배워서 하는 언어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초자연적으로 발성케 되는 언어들입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언어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말을 하는 언어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다.
언어는 곧 힘입니다. 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데 그 힘은 어떤 힘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말씀을 하시는 중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말 속에는 늘 거짓의 영이 함께 하기 때문에 우리의 말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위로하고, 소망을 주기 보다는 거짓을 말하고, 상처주고, 넘어뜨리게 하고, 저주하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을 때에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심으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 즉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게 되며, 그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의 입술로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사적인 방언은 우리의 기도의 생활에 매우 큰 유익을 줍니다.
방언은 하나님과 내 영이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방언의 통변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면 그 방언의 기도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릅니다. 사탄도 모를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을 영의 비밀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전서 14장 18절에서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 했습니다.
은사적인 방언은 우리의 기도에 많은 유익을 주지만 기도만이 우리의 언어가 다는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의 시간보다 생활 속에서 말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생활 속에서의 말은 어떤 방언이어야 합니까? 우리의 생활 속에서의 말이 먼저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본래 마귀에서 났으므로 진리가 속에 없음으로 거짓을 말하며 서로 속고 속이는 말에서 성령 안에서 새 방언을 말하게 되어야 합니다.
새 방언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의 언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죽겠다는 것입니다. 야이로가 예수님에게 가서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를 따라 가는 도중에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당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고침을 받는 사건으로 잠시 머물러 있을 때에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당신의 딸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야이로는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절망해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에게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말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었다는 말은 바로 사람을 낙심케 하고 절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반드시 우리는 절망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절망 중에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듣는 순간 우리의 마음에는 생기가 돌게 됩니다.
에스겔 골짜기에 죽음만이 가득했지만 선지자가 말씀을 대언할 때 역사가 일어났고 생명이 죽은 자가에게 들어가 살아 일어나는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즉 우리가 성령의 역사하심을 믿을 때에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임재하게 됩니다. 이 생명의 역사를 깨닫고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전하는 새 방언을 말할 수 있을 때에 좌절과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전함으로 그들에게도 좌절에서 생명으로, 실패에서 성공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역사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시스의 기도는 이런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 주여!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삼아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주고, 악행을 저지르는 자를 용서하며
다툼이 있는 곳에는 화목케 하며 잘못이 있는 곳에 진리를 알리고
회의가 자욱한 곳에 믿음을 심으며 절망이 드는 곳에 소망을 주게 하소서.
또한
어두운 곳에는 당신의 빛을 비취며 슬픔이 쌓인 곳에 기쁨을 전하는 사신이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먼저 위로를 베풀고
이해받기 보다는 먼저 이해하고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서 받고 자기를 버려 죽음으로서 영생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 예수 안에서 그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
그의 기도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절망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생명을 주는 새 방언을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말은 다른 사람에게 죽이는 말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살리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축복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통해서 소망을 줄 수 있기를 원하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새 방언을 말을 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수많은 세상의 독에서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18절에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체내에 들어온 독극물의 독성에서 보호하는 힘과 맹수와 독충으로부터의 공격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의 문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실제적인 문제로 뱀을 집는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로 가는 도중 큰 풍랑을 만나 배가 파손한 후에 멜리데 섬에 들어갔을 때 불을 피우기 위하여 독사에 물렸으나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짐을 받았으나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뱀의 독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특별하신 은혜로 말미암는 경우와 성령의 충만으로 인한 거룩한 능력이 사자의 입에서 지킴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 제롬은 성경 원전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또 많은 주석을 써서 교계에 크게 기여한 성경학자였습니다. 그가 동굴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성경 번역할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그 동굴에 사자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제롬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고함을 지르며 도망치는데, 그만은 태연히 성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자는 그에게로 다가가더니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그 앞에 앞발을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자의 발톱 사이에 큰 가시가 박혀 있었습니다. 제롬은 그 가시를 뽑아 주고 약을 발라 주었습니다. 그 후 제롬과 사자는 친구가 되었고 사자는 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순종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믿음 안에 사는 자의 용기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어떻게 보호받는가, 그리고 심지어는 자연까지도 하나님의 사람에게 순종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가 산업사회가 되면서 먹는 것과 환경이 독이 많아졌습니다. 또 물질적인 독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독도 많아졌습니다. 식량을 대량화하기 위하여 많은 비료와 유전자 변경은 음식의 독소를 많이 생기게 되였습니다. 환경이 좋지 않아짐으로 인하여 공기와 물이 나빠짐으로 많은 질병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허락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 해결의 방법은 말씀으로 사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 후에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사단은 예수님께서 금식하신 것을 아시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할 때 예수님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10년 전 영국을 살핀 어느 목사님이 쓴 글에 이런 글이 쓰여 진 것을 기억합니다. 영국인들은 주일성수를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1990년까지는 주일 영업행위를 법으로 금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91년 12월 대형 슈퍼마켓들은 성탄절 대목을 앞두고 그동안 불경기를 만회하기 위하여 일제히 문을 열었습니다. 그 후에 종교 지도자들은 공동서한을 당시 총리에게 보내어 상점들이 규정을 어기고 주일에도 영업하는 행위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영국 의회는 수백 년간 지켜온 주일 영업행위 금지 규정을 폐기했습니다. 그 후에 모든 상점들이 주일 종일 영업을 했답니다.
그런데 1996년 3월 광우병이라는 괴질이 영국을 강타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소를 도살해야 했고, 수출이 금지 되였습니다. 그 후에 많은 개선 노력을 했으나 1997년에 다시 광우병 파동이 일어났습니다.
영국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광우병이 주일을 엄격하고 성실하게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온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소에 광우병이 생긴 원인을 찾았을 때 정확한 것을 모른다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소가 먹는 먹이 때문이라고들 하고 있습니다. 즉 소는 채식동물입니다. 풀을 먹어야 할 소에게 빨리 성장시키기 위하여 동물의 뼈나 부속물들을 말려 갈아서 채소와 함께 먹이는 주는 데부터 생긴 것이 아닌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순리를 벗어나는 것은 그 모든 것을 독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소에게 다른 음식을 먹인가 도이 생기고 병이 생기는 것처럼 우리 육신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아야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신토불이라는 말을 하는데 이 땅에 사는 사람은 이 땅에서 나는 것을 먹어야 건강하다고 합니다. 말씀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은 당연히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3장 7-8절에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지혜로 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살면 우리에게 늘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은 매우 나빠졌습니다. 이로 인하여 공기도 물도 나빠졌습니다. 우리 몸은 70%가 물로 되어 있습니다. 물이 나쁘다는 것을 몸이 나쁘다는 것이고, 나쁜 물이 들어가는 것은 몸이 병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쁜 물이 좋은 물을 좋은 물로 바꾸는 방법은 없을까요? 당장 먹어야 하는 물을 좋은 물로 바꾸는 비결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당장 말입니다. 없을 것 같지만 있어요? 방법은 감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은 대답을 알고 있다는 책을 기록한 일본 과학자는 실험을 통해서 물의 변화를 관찰했습니다. 좋은 물을 육각수라고 합니다. 육각수의 물을 놓고 욕을 하고 시끄러운 음악을 들려주면 육각의 물이 흐트러져서 나쁜 물로 변한답니다. 그런데 나쁜 물을 가져다가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좋은 음악을 들려주면 육각수로 변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물을 앞에 놓고 감사 기도를 드렸더니 육각수로 변화더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가 먹어야 하는 먹을거리에는 많은 독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때 독소를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독소가 음식이나 공기 속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 때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라는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23장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는 말씀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나쁜 것들이 많다고 늘 위협을 느끼지 말고 늘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 때 늘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결코 해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보호가 있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마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신유의 표적이 나타납니다.
18절에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을 고친다는 것은 구약 성경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복음 사역은 전도와 교육 그리고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는 치유의 사역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예수의 사역은 전인 구원의 사역이었으며, 당신 앞에 찾아오는 병자를 거절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이 신유의 사역은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을 통해서도 나타났으며,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수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15장 26절에서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말라기 4장 2절에서도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병든 자를 만나 치료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 17절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병을 고치실 때 보면 병자를 볼 때 먼저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 ; 막2:5 ; 눅5:20 ; 7:48)고 하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마9:22 ; 막5:34 ; 눅7:50 ; 8:48)고 하셨습니다. 이는 죄와 질병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으며, 죄사함이 신유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질병에 고통을 당하시고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께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병을 고쳐주시지 않았습니다. 죄를 서로 고하고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할 때 주님께서 저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의 신유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벧전2:24), 이 은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는 이 말씀을 믿고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오늘도 치료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 기적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단지 당시의 제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는 이 땅에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날 동안 귀신들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달려들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는 판단할 수 없지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보면 분명히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귀신들이 나를 넘어뜨리려고 합니까? 혹은 귀신의 역사로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물리치십시오. 귀신들은 당장 물러갈 것입니다. 어두움의 세력에서 노임을 받고 자유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있을 때 우리의 말은 생명이 있습니다. 안된다거나 죽겠다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을 살리고,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어지는 역사가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 믿음의 고백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도는 소망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을 격동케 하는 사람이 아니라 평화와 기쁨을 주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많은 독과 유험이 산재해 있지만 그 많은 사고와 독소들이 우리를 죽이고 있지만 하나님을 믿고 그의 보호하심을 믿고 감사하는 성도들에게는 모든 독소가 하나님이 창조한 본래대로 돌아서 우리를 풍성케 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말씀으로만 살기만 하면 사망의 골짜기로 간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보호가 있음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무슨 병이 걸려 있다고 할지라도 그 질병을 이미 십자가에서 담당해 주셨음을 믿고 기도할 때 죄와 허물을 그리고 육체의 질병을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치료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일들을 여러분들을 통해서 일하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은사를 받은 사람만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이렇게 쓰시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바로 알고 그 일에 쓰임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