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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리 역사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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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사랑 여행 스크랩 강화, 최후까지 지켜낸 호국의 역사 - 갑곶돈대에서 강화대교까지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29 14.08.14 05: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강화도에 새겨진 전쟁의 상흔

인천광역시 강화군,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큰섬, 38년간 임금을 품고 있었던 고려의 도읍, 외적의 침입에 시달리면서도 끝끝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호국의 땅. 강화에는 이렇게도 수많은 수식어가 붙는다. 또 그런 수식어에 걸맞게 수많은 역사 유적들과 문화, 기록들이 전해지기도 하는 곳이 강화도다. 강화도의 8경은 이런 전쟁의 상흔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들이다. 해안수비 진지의 하나인 광성보가 그렇고 강화 4경인 초지진이 그렇고 강화 2경인 갑곶돈대가 그렇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바로 만날수있는 갑곶돈대를 둘러보기로한다.

선정비와 자연보호 표석, 삼충사적비가 있는 비석군碑石群

갑곶돈대를 보려고 일단 강화군 전적지 일괄관람권을 끊는다. 하나만 끊어도 갑곶돈대, 광성보, 덕진진, 고려궁지, 초지진을 모두 관람할 수 있으니 좋겠다 싶었다.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들어선 곳, 포를 쏘고 방어를 했던 기지답지 않게 잘 정돈된 공원 같은 느낌이다. 들어서자마자 한쪽으로 나란히 늘어선 비석들이 보인다. 이곳의 이름은 비석군. 조선시대 선정을 베푼 유수, 판관, 경력, 군수의 선정비와 인조14년 청나라 침입시 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강흥업, 구원일, 황선신을 기리기 위한 삼충사적비 등 67기의 비석이 모여 있다. 이 중 특히 재미있는 것은 1703년(숙종 29) 강화유수부(고려궁지) 앞 등지에 세웠던 금표인데 자세히 보면 ‘가축을 놓아기르는 자는 곤장 100대, 재나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자는 곤장 80대를 친다’는 경고문이 적혀 있다. 우리 조상들도 자연보호에 신경을 썼구나 싶으니 갑자기 멀게만 느껴졌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아는 사람들처럼 친근하게 느껴진다.



지키고 또 지켰던 역사, 갑곶돈대

비석군을 지나니 오르막이 나온다. 정갈하게 쌓여진 성곽 길을 따라 강화8경 중 2경에 해당하는 갑곶돈대에 오른다.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무려 38년 동안 몽고의 전쟁에 맞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올라선 돈대 아래로 김포와 강화 사이의 해협인 염하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바로 저 해협을 건너지 못해 몽고군이 되돌아가기를 여러 번 했다는 건가? 하긴 ‘갑곶’이라는 이름도 고려 때 몽고군이 염하 강을 건너지 못했을 때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는 한탄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 갑곶돈대가 모든 외세의 침략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때는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에 의해 수많은 침탈을 당했고 고종 3년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한 바 있다. 또한 일본의 전권대신 구로다가 상륙하여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곳이기도 하다.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그 후로 갑곶돈은 허물어졌고 이것을 1976년 복원한 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8문의 포를 둔 전략적 요새

갑곶돈대가 군대의 주둔지가 된 것은 병자호란 이후이다. 당시 나라에서는 청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과 진, 보, 돈, 등의 군사 시설을 강화하였는데 갑곶은 숙종 5년에 이르러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 그 모습을 제대로 갖추었다. 이곳에 대포 8문을 두고 소대 규모의 군대를 배치한 것이다. 돈대란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었는데 시대를 불문하고 이곳에 돈대를 위치시킨 것은 그 만큼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곽의 밖은 높이 쌓아 올리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했다. 적의 동태를 정찰하기 쉽고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적들을 포격하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과연 내려다 본 길에는 한 눈에 염하 강이 들어온다. 접근하는 모든 것이 한 눈에 들어오니 갑곶돈대는 과연 요새 중의 요새라는 생각이 든다.

돈대를 둘러보고 길을 따라 가니 이번엔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불랑기와 소포가 보인다. 이 대포는 조선시대 때 쓰이던 것이라는데 소포는 사정거리가 300m에 이르는 화기였다고 하고 불랑기는 연속 사격이 가능한 화기였다고 한다. 정자 같은 곳에 보호하고 있는 것은 사정거리 700m에 이르는 홍이포, 붉은 오랑캐의 화포라고 불렸단다. 무시무시한 대포 앞에 서니 치열했던 전투의 한 장면이 마치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전망좋은 정자, 이섭정利涉亭

촤르르 놓인 돌계단을 지나 이섭정에 오른다. 이층으로 된정자. 높은 곳으로 올라 잠시 땀을 씻고 간다. 피부에 와 닿는 햇살이 따스하다 못해 따갑게 느껴지는 팔월, 그래도 강이 저 멀리로 내다보이니 시원한 기분이 든다. 이섭정은 1398년(태조7) 강화부사 이성이 세운 것으로 무너진 지 오래 되었다가 1976년 다시 복원되었다. 태평성대에 이곳에 정자를 지은 이유는 당연히 전망이 좋은 자리이기 때문이리라. 세월이 좋을 때는 풍류를 읊었을 이곳. 그러나 몽고, 청나라, 프랑스, 일본에 말할 수 없이 무참한 침탈을 당했을 이곳.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잃었을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생각하니 괜스레 마음이 숙연해진다. 시선을 훌쩍 건네 보니 저 멀리 강화대교가 보인다. 한 눈에도 김포시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인다.

강화대교를 바라보며

다시 갑곶에 서서 염하강을 바라본다. 바로 이곳에서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대군인 몽골군과 대치했다는 말이지? 이대로 나라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뜬 눈으로 보초를 섰다는 거지? 저 대교를 건너면 겨우 3분 거리. 지척에 무시무시한 적들을 두고 뜬 눈으로 밤을 새웠을 병사들, 전쟁의 공포를 느끼면서도 호국의 의지를 불태웠을 병사들, 어쩌면 현재의 우리나라는 그런 분들의 희생으로 지켜진게 아니었을까싶다. 희생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화대교는 오늘도 그 거대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새삼 호국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그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글. 신지선 사진. 김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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