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반만 말해진다>
아무리 논리적이며 정교한 언어로도 진리를 포착할 수 없다.
아무리 말을 잘 한다 해도 진리를 표현해 낼 수 없다. 그래서 고따마 붓다는 깨달은 직후 그대로 적멸에 들려고했다. “내가 깨달은 법은 세상을 거슬러 가는 길(逆流道)이라, 아무도 내 가르침을 이해하거나 따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비록 입을 열어 가르친다 해도 내 입만 피곤할 뿐, 중생에게 이익을 주지 못할 것이니 차라리 열반에 들어야겠다.” 이에 놀란 범천이 하늘에서 내려와 법을 설해주실 것을 세 번 간청함에 비로소 붓다는 개구일성을 토하였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부처님의 도가 세상을 거슬러 가는 길이라 함은 ①욕계 중생의 습성인 탐진치를 따르는 게 아니라 반대로 맑히고 줄이며 끊는 방향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며 ②탐진치가 중생의 업식(무의식)에 명언종자(名言種子, 記標)로 저장되어 세계의 구조와 일상생활 전반에 드러나(現行) 그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주인기표) 있으므로, 세계의 실상을 깨달으려는 사람은 세속적 언어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속의 언어습관은 욕계의 질서(삼독심, 유신견, 아견, 계금취견 등 10結)가 개인의 내면을 장악(super-ego)하여 욕계의 노예로 살도록 강제한다. 그러기에 욕계에서 해탈을 구하는 자는 먼저 언어문자의 족쇄에서 풀려나야 한다. 그래서 진리에 눈 뜬 자의 길은 “실상무상, 언어도단;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다.
實相無相, 실상무상. 일체의 참 모습은 형상과 개념으로 포착할 수 없다.
言語道斷; 언어도단; 진리는 언어로 전달될 수 없다.
不立文字, 불립문자, 진리는 문자로 포착되는 것이 아니다.
敎外別傳. 교외별전. 진리는 문자로 된 경전 밖에서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위에서 들먹인 “실상무상…견성성불” 역시 세속의 언어가 아닌가? 세속의 언어가 중생을 욕계에 붙잡아 놓는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라면서 거기에서 벗어나는 길을 보여주는 가르침 역시 세속의 언어가 아닌가? 그러면 자가당착이며 모순이 아닌가? 맞다, 모순이다. 그러나 여기에 반전이 있으니 살인자가 칼을 잡으면 사람을 죽이지만 의사가 잡으면 사람을 살리듯, 무명중생이 세속 언어에 빠져 살면 번뇌가 증가되지만 깨달은 분이 세속언어를 사용하면 중생의 번뇌를 끊어 쉬게 해준다. 선지식의 언어사용은 인간의 본래면목을 살려내기에 활구(活句, 살리는 말)라 한다. 선지식의 한마디는 중생의 무명을 찰나에 끊어 붓다-생명으로 거듭나게 한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을 살리는 말을 잘 했다 하더라도 말에는 흔적이 남고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마련이다. 모든 말은 때와 경우에 맞게 적용되었던 것이라, 그 때와 경우가 달라지면 말은 효력을 상실한다. 때와 경우가 다른 데도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은 선지직이 게으르거나 임기 방편이 부실한 것이다.
말해진 진리는 벌써 진리와 어긋났다. 왜냐? 진리는 말을 붙일 수 없기에. 부득이 해서 한 마디 한 것이지만, 입에서 말을 뱉은 즉시 그르친다(開口即錯개구즉착). 그래서 진리는 반만 말해진다. 선지식이 아무리 진리를 잘 말했더라도 반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반은 말을 듣는 쪽에 있다. 듣는 사람의 마음에 불씨가 튕겨 불이 붙어 확 밝아지거나 아니면 멍청한 그대로 거나는 우발적인 사건(시절인연)이다. 그런데 말하는 사람과 말 듣는 사람을 떠난 ‘말 되어질 수 없는 곳, 말이 나와서 사라지는 곳’-지금 여기-에 진리가 빛나고 있음을 알라. 진리는 언어라는 낚시로 낚을 수 없는 생물이다. 진리는 문답을 허용하지 않는다.
暗壁老松含素月, 암벽노송함소월
池邊默竹起淸風; 지변묵죽기청풍
無盡風流韻不齊, 무한풍류운부제
葉盡土菴孤燭燈. 엽진토암고촉등
咿!
검은 절벽의 늙은 솔은 하얀 달빛 머금고
연못가의 고요한 대숲엔 맑은 바람 일어난다
다함 없는 풍류가 있으나 곡조를 고르기 어려워
낙엽 진 토굴에 외로운 등불만 가물가물
피식!
첫댓글 진리는 언어라는 낚시로 낚을 수 없는 생물이다...
멍ㅇㅇ인가?
쨍ㅇㅇ인가?
마 하 반 야 바 라 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