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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 고령 문화답사기/이명철
가야문화 유적지로 가는 차창밖에는 산봉우리에서부터 시작한 가을이 산 밑으로 내려와 노랗고 빨갛게 물들이며 여름을 밀어내고 있었다.
들판에는 하얗게 포장된 볏짚뭉치가 무질서의 질서로 들판 가득히 널려 있는 것들을 보면서 첫 목적지인 대가야박물관에 도착하
였다.
1호차 담당 문화관광해설사를 따라 맨 먼저 대가야박물관으로 들어갔다. 대가야박물관은 상설전시관과 기획전시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상설전시실은 대가야 및 고령지역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구석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역사ㆍ문화에 대한 유물을 전시해 놓았고 명확한 설명도 해놓았다. 2,000여 점의 유물을 통해
대가야의 찬란한 문화를 직접 느낄 수 있다는 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며 박물관을 나와 왕릉전시관으로 이동하였다.
국내 최초로 확인된 최대 규모의 순장 왕릉인 지산
동 44호분의 내부를 발굴 당시의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은 전시관이었다.
우리는 44호분 속으로 들어가 무덤의 구조와 축조방식, 주인공과 순장자들의 매장모습, 부장품의 종류와 성격 등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가야란 지명은 어디서부터 유래했는지를 알아본다. 가야는 석가모니가 성불한 인도의 부다가야의 가야산에서 유래된 것으로 범어에서는 소를 가야(kaya)라 하며, 인도에서는 가야산을 우두산(牛頭山)이라 부르면서 산의 모양이 코끼리의 머리를 닮았다 해서 상두산(象頭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공교롭게도 이곳 가야산의 주봉도 상두산(象頭山)이라 부르며, 우두산(牛頭山)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 가야산은 가야연맹 권역 안에서 높고도 큰 산이어서 그렇게 부른다는 설도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수로왕이 즉위하여 가야국의 경계를 정하되, 동으로는 황산강, 서남으로는 창해, 서북으로는 지리산, 동북으로는 가야산, 그리고 남으로는 나라 끝으로 정했다.” 고 되어 있으나 나의 좁은 소견은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를 전적으로 믿지는 않는다.
이중환의 [택지리]에 “합천의 가야산은 끝이 날카로운 바위들이 늘어선 모양새가 흡사 불꽃이 공중으로 솟아 오른 듯 하며 매우 높고 또 수려하다.”고 되어있다.
가야산은 정상주변의 바위봉우리들이 마치 치솟는 불꽃마냥 아름답지만, 산정에서 흘러내린 수려한 계곡에도 도처에 비경이 숨어 있다.
이렇듯 수많은 명승을 품고 솟은 가야산은 일찍이 조선팔경에 들었고, 12대 명산에도 꼽혔으며, 1966년에는 명승지 제5호로, 1972년에는 국립공원 제9호로 지정된바 있다.
“산형은 천하에 으뜸, 지덕은 해동 제일” 가야산은 가야연맹의 진산이다.
물이 넉넉하고, 땅은 기름지고 후기가야의 맹주 대가야의 도읍지 고령, 고령 사람들은
“대가야의 도읍지 우리고령은 가야산연봉의 푸른 정기와 회천의 맑음 물빛에 서려 찬란한 문화를 창건한 자랑스러운 고장이다.”라고 말한다.
서북쪽의 가야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온 수도지맥의 가지 하나가 고령읍 서쪽에서 합천군과 군계를 이루면서 미승산(743m)을 세워놓고 ‘동쪽으로 내려선 뒤, 읍내 지산동에서 주산(320m)으로 올라섰다가 회천(낙동강 지류)자락에 꼬리를 내린다.
따라서 고령은 북서쪽과 남쪽은 험한 산줄기가 울타리가 되어 막아주고 있고, 동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르면서 천연의 요새가 된다.
고령은 북쪽과 서쪽, 남쪽으로 에워싼 산기슭에서는 여러 갈레의 물길이 흐르다가 낙동강에서 한 몸으로 섞이는데, 모든 물길들이 돌아 모여 흐른다 해서 회천 또는 모둠 내라 부른다.
“고을 바깥 가야천 주변은 논이 아주 기름지다. 물이 넉넉하여 가뭄을 모르고, 또 밭에는 목화도 잘되어 이곳을 의식(衣食)의 고장이라 한다.”
[택지리]의 기록처럼 고령지역은 농사짓기에 아주 좋은 입지조건을 갖고 있다.
기원전 1세기부터 3세기까지 이 땅은 삼한시대였다.
삼한시대 마한은 백제 권역이고, 진한은 뒷날 신라가 된 곳이며, 변한에서는 가야소국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이때 고령은 변한에 속했으며 나라이름은 반로국(半路國)이었다. 반로국이 가야연맹의 중심세력으로 발전한 것은 4세기 무렵이다. 왜구들의 빈번한 침입을 감당하지 못한 신라가, 만주를 호령하던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이었다.
백제와도 미묘한 관계에 있던 광개토대왕의 5만 군사가 낙동강 아래쪽까지 휩쓸고 지나간 뒤, 세력이 약화된 금관가야 등의 전기 가야연맹의 일부는 신라에 예속됐고, 일부는 일본으로 피해 달아났으며, 또 일부는 전화(戰禍)가 적었던 반로국으로 옮겨 가거나 흡수되었다.
반로국은 철 생산의 본거지였던 야로현(冶爐縣):지금의 합천군 야로면 일대)에 편입 되면서 더욱 빠르게 발전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이때부터 반로국이 중심이 된 후기가야연맹은 고령, 합천, 진주, 산청 등 경상도 내륙 산간지방을 비롯해서 밀양, 김해, 함안, 고성 등 전기 가야지역까지도 포함하는 연맹체가 되면서 나라 이름도 대가야국이 된다.
가야연맹에는 두 개의 건국신화가 전해오고 있다.
하나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실려 있는 금관가야의 건국신화로 수로왕의 난생설화다.
또 하나는 조선조 때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쓰여 있는 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다.
신라 말 최치원은 이정(利貞)이라는 승려의 전기를 석리정전(釋利貞傳)에 써 남겼다.
그 전기에 대가야의 건국신화인 가야산 산신들의 이야기가 쓰여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그 기록을 인용해서 대가야의 건국신화를 남겼다.
“가야산의 산신정견모주(山神 正見母主)가 하늘의 천신(天神)인 이비하(夷毗訶)의 감응(感應)을 받고 두 아들을 낳았다.
그 하나는 뇌질주일(惱窒朱日)이고 또 하나는 뇌질청예(惱窒靑裔)다.
여기서 뇌질주일은 대가야의 시조라 전해오는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이고 뇌질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
김해 구지봉의 난생설화에서는 알에서 먼저 나와 수로왕이 되었지만, 대가야의 건국신화에서는 수로왕인 뇌질청예는 뇌질주일의 동생이 된다.
아무튼 대가야의 건국신화에는 천신과 산신을 숭배하는 내용으로 엮어져 있고 그 흔적은 양정동의 바위그림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학자들은 바위에 그려진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그밖에 문양들은 신의 얼굴신면상(神面像)과 우두상(牛頭像)으로 보고 있다.
기름진 농토가 있고, 야로(冶爐)에서 철이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대가야의 영향권은 자꾸 커지게 된다.
관활 구역도 넓어져 거창, 함양을 지나 전남의 광양, 여수와 전북의 남원, 장수, 임실까지 미치게 된다.
이 무렵 대가야는 중국의 남제(南薺)와 교류하면서 보국장군 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이라는 작호를 받았으며, 일본과도 철기류 등을 교역하기도 했다. 481년 대가야는 대사(帶沙:하동) 자타(子他:진주) 등지에 산성을 쌓고 백제와는 대립하면서 신라와는 혼인동맹까지 맺고 우의를 다져보지만, 법흥왕의 배신으로 동맹관계가 깨어지자 가야연맹 내부에서도 분열 조짐이 나타나게 된다.
해설사의 해설을 잠간 인용해본다.
백제 聖王은 가야연맹에 사신단을 왕성으로 불러 사비회의(泗沘會議)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서로의 이해관계가 달라 양측의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결국 백제의 끊임없는 설득과 문물 증여에 따라 백제의 뜻이 관철되면서 가야연맹은 550년 전후, 백제의 반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가야, 왜의 연합군은 신라에게 패배했으며, 특히 많은 수의 군대를 잃은 가야연맹은 멸망직전까지 몰리게 된다. 그 후 562년 고령의 대가야가 신라의 급습으로 멸망하면서 가야연맹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서기 42년, 신라 유리왕 18년, 김해 중심의 금관가야는 제10대 구형왕(532년) 법흥왕의 침략을 받고 막을 내렸으며, 같은42년, 이진아시왕이 고령에 터를 잡은 대가야는 서기562년 신라 진흥왕 23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가야가 멸망한 후 신라는 이곳에 대가야군을 두었고, 757년에는 고양군이라 불렀다.
고려 제8대 현종9년(1018년) 영천현이 되어 지금의 성주인 경산부에 속했다가, 조선조 태조3년(1393년) 고양군과 영천현에서 한자씩을 따, 고령현이 되었고, 1914년 부, 군이 통폐합 되는 행정개편 때 고령의 틀을 갖추었다.
고령 양정동에 선사시대의 암각화가 있고, 지산동 주산 능선에는 순장풍습이 확인된 고분을 비롯해서 2백 여기의 크고 작은 고분들이 밀집돼 있다.
그릇 빚기에 좋다는 고령토가 많이 나와, 청자와 분청사기를 구워내던 가마터가 있고, 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개포동 기왓골도 있다.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정정골이, 낙동강의 큰 포구, 개포 나루터, 영남학파의 종조 점필재 김종직의 종택이 있는 4백년 집성촌 개실마을 등이 있는데 가보지 못했다.
바위벼랑에 쪼아 새긴 신의 얼굴, 풍요의 기원
고령에는 가야산신과 하늘 신(天神)이 교합해서 알을 낳았다는 난생설화가 전해오고 읍내 장기리에는 알터 마을도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양정동으로 마을을 끼고 도는 회천 변 바위벼랑에 여러 문양의 그림들이 새겨져 있다.
이름 하여 양정동 암각화(알터 바위그림)로 청동기시대 그림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70젼 12월 경북 울주군 천천리에서 처음으로 바위그림이 발견되었고, 그로부터 두 달 뒤인 1971년 2월에는 영남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이 이곳고령 양정동에서 바위그림을 찾아냈다.
높이가 3m, 폭이 6m쯤 되는 긴 네모꼴형의 바위벼랑에 겹 동그라미(同心圓)와 십자무늬, 가면모양(기하문양으로 보기도 한다)의 특이한 문양 30여 점이 새겨져 있다.
풍요를 기원하며 그렸을 것으로 보는 겹 동그라미가 4개, 십자문양이 1개이며, 사람의 얼굴을 추상화해서 신의 얼굴로 표현했다는 가면 문양은, 보는 이에 따라 17개에서 29개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가면 문양은 태양의 얼굴이며 주위에 둘러있는 빛살은 퍼져가는 햇살로 풀이하는 학자들도 있다.
힘을 상징하는 방패 문양으로 보기도 하고 가야산의 우두봉과 연관 지어 우두상으로 보기도 한다.
선사시대의 간절한 기원이 새겨있는 제단으로 보물 제605호로 지정돼 있다.
무덤 속에서 풀어보는 수수게끼 왕국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
가야산을 내려선 수도지맥의 곁가지는 함양 야로면 미승산(755m)에서 고령 땅으로 넘어와 읍내 복판에 주산(310m)을 세워놓고 모듬 내로 잦아든다.
일명 이산(耳山)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부르는 주산은 고령읍의 진산으로 이 고을의 등뼈가 된다.
그 남쪽 자락위에 크고 작은 무덤들이 줄을 지어 들어앉아 있다. 거의가 가야시대의 무덤들로 이름 하여 자산동 고분군이다.
지표조사를 통해 확인된 고분들이 2백기가 넘고 겉모습이 뚜렷한 고분만 골랐어도 번호가 72호분까지 붙여졌다.
무덤들은 큰 것은 봉토아래 지름이 20m가 넘고, 중형 분도 10m에서 15m쯤 된다.
대부분 능선 위쪽이나 산 중턱에 줄을 지어 들어앉아 있다. 그보다 작은 무덤들은 능선 위아래 구분 없이 무덤 사이사이나 언덕 아래쪽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다 모두가 망해버린 나라의 문화와 역사 영화를 안고 묻혀있는 무덤들이다. 그래서 가야를, 수수께끼 왕국이라 부르는가보다.
지산동 고분들은 한일침탈 이후인 1900년대 초,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심하게 파헤쳐 진다. 이렇다 할 기록이 없어 한일고대사에서 쟁점이 되고 있던,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꼬투리를 찾기 위해 몰려온 일본의 학자들이 무차별적으로 파헤쳐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무덤 속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들은, 일본의, 이 나라 남부지방지배설을 밝혀줄 만한 것은 없고 오히려 그들의 문화를 선도했음을 입증하는 유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왕권을 상징하는 왕관이 그렇고, 철제 갑옷과 투구, 철제 무기류와 마구류 등은, 강력한 기마군단을 거느렸던, 군사강국 가야의 실체를 활인해줄 뿐이었다. 일인들은 반출보고서 한 장 제대로 남기지 않고 유물들만 모두 자기들 나라로 약탈해 가버렸다. 이렇다 할 기록도 없어 수수께끼 왕국이던 가야의 역사는 더욱 캄캄한 미궁 속에 빠지고 말았다.
일본학자들이 무차별 도굴한 뒤 방치돼있던 자산동 고분은 1977년이 되어서야 우리 손으로 발굴조사에 들어가면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때 무덤의 구조가 신라 쪽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돌널무덤, 돌덧널무덤, 구덩식 돌방무덤 등, 매우 다양한 모습이었고, 무덤 속에서는, 많은 양의 토기와 함께 화려한 모습의 금동관, 철로 만든 갑옷과 투구, 고리달린 긴 칼, 마구 류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발굴 조사한 6기의 무덤 가운데 44호, 45호, 32, 34호 무덤에서 여러 사람을 순장한 흔적이 발견된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순장 풍습에 대한 기록으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이다.
“사람이 죽으면 여름에는 어름을 채워둔다.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한다. 그 수는 백 명도 된다. 기사 하월계용빙 살인순장다자백수(其死 夏月皆用氷 殺人殉葬多者百數)”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에도 있다.
“즉위 3년 봄 3월에 영을 내려 순장을 금하도록 했다. 이보다 앞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각각 다섯 사람을 순장해 왔는데 이때부터 금지했다.삼년 춘삼월 하 령금순장 국왕장 즉순이남녀각5명인 지시금언(三年 春三月 下 令禁殉葬 國王葬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
특히 44호 고분의 경우 무덤 한가운데 3개의 석실이 있고, 둘레로 돌아가며 32기의 석곽이 꾸며져 있었다.
무덤복판, 3기의 석실 가운데, 하나는 왕의 시신을 안치하기 위한 석실이었고, 양쪽의 나머지 2기는 부장품을 넣어 두기 위한 석실이었다.
무덤 둘레의 32기 석실에서는 24구의 사람 뼈가 나와, 내세에서도 임금의 시중을 들도록 순장된 사람들로 확인이 됐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어 소개한다.
32기의 순장 묘가 있는 44호 고분에서는, 사람 뼈도, 유물도 없는 빈 석실이 5개가 있다. 묘는 있지만 내용물이 없는 묘를 빌허(虛)자를 써 虛葬이라 한다. 사람 뼈도, 부장품도 없는 무덤은 순장자 명단(살생부)에 올라있던 누군가가 연줄(배경:빽)을 이용해 빠져 나온 것은 아닐까? 지산동44호 고분에선 지연, 혈연, 학연이 판을 치는 현대사회의 단면이 보여 뒷맛이 씁쓸해진다.
주산 능선의 고분관광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서면 대가야 왕릉전시관이 있고, 그 동쪽 언덕아래 대가야 박물관이 있다. 왕릉전시관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순장풍습이 확인된 제44호분의 무덤 속 모습을 발견당시 그대로 재현해놓았다. 실물크기로 무덤의 구조를 만들고 무덤의 주인공과 순장자들의 묻힌 모습, 흩어져 있던 부장품들까지 발굴당시의 모습 그대로 펼쳐놓았다. 대가야의 역사관에는 고령지역의 역사를 직접 확인 할 수 있도록, 구석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유물들을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설명과 함께 전시하고 있다.
연꽃으로 꾸며놓은 고아동 벽화고분
가야지역의 유일한 벽화고분으로 고령읍 고아리 주산 고분군의 끝자락쯤에 있다. 1963년 벽화고분이 확인 됐지만 이미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이 도굴해 갔고, 1960년대 조사 전에도 도굴꾼이 드나들어 무덤 안에 유물은 없었다. 학자들은, 지금 호암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가야금관(국보 제138호)과 국립중앙박물관의 금동 안장식이 여기서 나온 것으로 추정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는 해설사의 말에 그 내부를 들어가지는 않았다.
봉분의 크기가 동서로 약25m, 남북으로 20m쯤 되고, 높이가 7m쯤 된다.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관을 넣어두는 널방(현실:玄室)이 있고, 현실로 통하는 널길(연도)이 이어져 있다. 무덤속의 벽과 천장에는 조개가루를 이겨 회를 바른 다음, 그 벽에 연꽃을 그렸다. 이와 같이 무덤속의 천장이나 벽에 여러 개의 연꽃을 그린 것은 평양의 고구려 고분과 백제의 고분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고아동의 경우 부여 능산리의 벽화고분 연꽃을 많이 닮아, 백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대가야 말기인 6세기 후반에 만든 무덤으로 사적 제165호로 지정돼 있다.
울어라 가야금아 정정정, 정정정, 울어라
고령읍 괘빈동은 본래는 거문고 琴자에 골짜기 곡(谷)자를 쓰는 금곡(琴谷) 마을이었고, 마을 사람들은 정정골이라 불렀다. 신라 진흥왕 때의 장수 이사부가 5천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우륵은 대가야국 왕실의 악사로 왕의 가족들 앞에서 가야금을 뜯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어린 월광태자를 대숲 속에 숨겨놓고 신라군사들과 맞서 싸우다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 싸움이 끝나 돌아온 우륵은 대 숲속에서 월광태자를 찾아보았지만, 이미 굶어 죽은 뒤였다. 우륵은 태자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 혼을 달래기 위해 날마다 애절한 선율로 가야금을 뜯었다. 정정정, 정정정, 골짜구니에서 가야금 소리가 끊이지 않아 정정골이다. 우륵은 대가야의 가실왕 때 사람이지만, 생몰연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다.
조선조 순조 32년 박태원이 쓴 [산천집] “가야금부”편에 으륵은 지금의 합천군 야로면 조랭이(조양마을)라는 곳에서 오동나무를 베어다가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까지 대가야에서는 중국의 악기인 쟁(箏)을 들여다가 중국가락을 연주하며 즐겨 왔었다. 새 악기를 만들어 보라는 가실왕의 명을 받은 우륵은 오동나무를 잘라 위쪽은 하늘을 상징해서 둥글게 다듬고, 아래쪽은 땅을 본떠 평평하게 한 다음, 일년 12달을 상징해서 12줄을 매어 가야금을 만들었다. 악기가 완성되자 우륵은 12곡의 연주곡을 지어 가실왕께 바치었다. 우륵은 평생 동안 185곡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까지 전해오는 곡은 한곡도 없다. 다만 앞서 언급한 조선조 때 박태원의 [산천집]에, 우륵이 곡을 만들어 가실왕께 바쳤다는 12곡의 제목을 남겨, 그 흔적이라도 살펴 볼 수가 있다. 12곡의 제목은 공교롭게도 당시 가야의 여러 소국들의 지명들로, 아랫가야(김해) 윗가야(고령) 달기(예천 사물(사천) 물혜(밀양) 하기믈(하동) 상기물(거창) 거열(진주) 사자기, 사필해, 보기, 이사 등이다.
6세기가 되면서 대가야는 백제와 신라의 틈바구니에서 쇠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우륵은 무너지는 가야의 사직을 보다 못해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중원 땅으로 옮겨간다. 우륵은 그곳에서 신라 진흥와에게 몸을 의탁한 뒤, 나라 잃은 술픔을 가야금으로 달래다가, 여생을 마감했다. 충주 탄금대 부근에 그 흔적이 남아있고, 고령읍에는 정정골이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위에 우륵을 추모하는 기념탑이 서있다. 부근에 우륵 박물관이 있다. 우륵은 고구려의 왕산악, 조선조 때의 난계 박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에 꼽히고 있다.
순풍이다, 돛을 올려라 낙동강의 큰 나루 개포로 간다
“산은 가르고, 물은 모은다.”고 했다. 매봉산(1303m)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돌린 백두대간은, 영남과 영동, 영남과 호서, 영남과 호남을 갈라놓았다. 거슬러 오르면 고구려와 신라, 백제와 신라로 갈라진다.
낙동강은 백두대간 위의 같은 매봉산 [너들 샘]에서 발원한다. 부산과 김해사이 을숙도 앞 바다까지 천3백리를 흐르는 동안 칠백 마흔 개가 넘는 크고 작은 물길을 모아 한 몸이 된다. [동국여지승람]은 낙수(落水)라 불렸고, [택지리]에는 낙동강(洛東江)이다. 금관가야, 대가야의 동쪽으로 흐른다 해서 낙동강이다. 경상남북도의 고을고을에 물길이 닿는 낙동강은 영남사람들의 삶의 모태요 젓줄이다.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낙남정맥 등 첩첩 산으로 에워싸여 있지만, 물길이 닿는 곳마다 옥답이 펼쳐진다. 산지가 많은 경북의 경우 경지 율은 18%에 불과하지만 낙동강 줄기 따라 널부러진 농경지가 35ha가 넘는다. 나라 안에서 들녘이 제일 넓은 전라남도에 이어 두 번째로 넓은 농경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아쉬움을 남기며 발길을 돌렸다.(202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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