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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숙론
인간의 의지, 생존을 위한 유일한 항체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문제보다 해결중심의 입장을 지지하기 때문에 문제가 어떻게 발생되었느냐, 즉 원인에 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인간관계에서는 분명한 원인과 결과란 없기 때문에 문제의 원인을 밝히기보다는 문제가 해결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즉, 문제의 내용보다는 문제에 대한 어떤 해결방안이 있으며, 어떻게 새로운 행동 유형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에 초점을 둔다.”
- 김유숙 <가족치료>에서
Ⅰ.
에이브럼즈 <거울과 램프>에서 문학을 바라보는 4가지 관점인 모방론 표현론 효용론 존재론을 제시하였다. 팔이 두 개이듯 사람들은 누구나 두 개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세계와 우리가 속한 사회의 리얼리티를 반영함으로써 문학은 ‘거울’의 작용을 한다. 그리고 문학은 새로운 관점으로 진실을 조명하며 앞으로의 세상에 관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으로 ‘램프’의 기능을 한다.
부모와 자식이 겪는 이상과 현실의 갈등은 본래 '인류의 역사' 속에서 매번 반복되었으니, 조경숙 수필가가 다루고 있는 수필 속의 어머니와 아들이 겪고 있는 이 갈등 또한 보편적인 것이 아닐까. 어머니와 아들의 갈등을 다룬 조경숙 수필가의 <난청에 들다>가 다스림 합평무대에 오른다. 문학평론가 권대근 교수는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갖는 다스림 세미나, 오는 4월 1일 첫째 주 월요일 오전 11시부터 교수연구실에서 수필 <난청에 들다>를 분석한다. 물론 이 수필은 어머니와 아들, 가족간의 신뢰회복을 위한 노력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수필은 청력이 좋지 않은 어머니와 그 아들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수필 <난청에 들다> 는 가족 안에서 느끼는 고민과 갈등의 양상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다. 개인이 속한 가족이라는 체계를 객관적 거리에서 바라보고, 작가는 더 건강한 삶의 방식과 관계를 꿈꾼다. 문학과 치료는 어떻게 닿아 있을까. 둘 다 고통에서 출발하고 치유를 지향한다. 이를 통해 소통의 관리와 노인의 처우 현실을 되돌아본다. 어떤 화해해결구도를 지향하는지 살펴보자.
Ⅱ.
H. 클라이스트는 ‘악이 우리에게 신을 인식시키듯, 고통은 우리에게 기쁨을 알게 한다.’고 하였다. 슈펜하워는 ‘약간의 근심, 고통, 고난은 항시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바닥 짐을 안 실은 배는 안전하지 못하며 곧장 갈 수 없을 것’이라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고통은 곧 생활이니까 고통이 없는 인생엔 아무런 쾌락도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문학의 효용이 사그라지지 않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인간이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고통의 내용이 다르고 형태가 다르고 그 체감의 역치도 제각각이지만 온전히 아무리 고통 없이 삶을 누리는 사람은 없다. 사람의 모든 고통이 문학의 영역이 되는 것처럼, 사람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곧 문학의 영역이기도 하다. 문학은 때로 사람의 고통을 후벼파서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치유의 한 과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조경숙의 <난청에 들다> 중에 등장하는 다음 구절은 매우 적확한 표현이다.
“자식의 일이라면 직접 보고 듣지 않아도 얼핏 감이라도 당겨 잡을 수 있을 어머니다. 그러니 반만 들어도 척하니 그 속을 꿰뚫듯 훤히 보고 있을 당신이 피붙이가 전하는 뜻을 모를 리 없지 않겠는가. 척하면 척할 어머니가 알아도 모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며 철없는 아이의 모습으로 응석하듯 칭얼거리는 건 아들의 사랑이 몹시 그리운 것이리라.”
조경숙은 이 수필에서 어머니가 난청에 든 이유를 ‘아들의 사랑을 받고 싶은 어머니의 응석’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한 사람의 양모는 백 사람의 교사에 필적한다’고 J.F.헤르바르트는 말했다. 자신의 뱃속으로 나은 아이의 심정을 어찌 어머니 당신이 모르겠느냐는 작가의 진단이 공감을 주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임어당의 ‘아버지의 의의는 인간의 문명 속에서 자라난 하나의 배양된 감정이지만, 어머니로서의 의의는 천성불멸의 것이다’라는 말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겠다. 누구의 어머니이건 다 마찬가지지만 세상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얼마나 우수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듣고 싶어한다. 우리에게 가족이란 처음이자 마지막 의지처이다. 하지만 사이가 틀어지면 그것만큼 괴로운 존재도 없다. 살을 맞대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더욱 서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가족 간 갈등과 소통을 다룬 수필이 막을 올린다. 이 수필은 부자간의 갈등과 화해라는 기존 이야기의 틀은 유지하되, 그 과정을 조금 더 심도 있게 파고든다. 갈등을 다루는 작가의 거리와 해결방안이 관전포인트다. 수필의 발단부부터 살펴보자.
승패를 가를 수 없는 다툼이었다. 듣지 못하는 자와 듣지 않으려는 자의 다툼은 출발부터가 달랐으니까. 싸움엔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일 텐데 이런 공정하지 않은 싸움판에 진정한 승자가 있기나 할는지. 그럼에도 한 치 물러섬이 없는 두 사람의 아귀다툼은 연일 계속되고 있다. 어머니와 오빠의 언쟁은 오늘도 여전하다. 구순 노모와 칠순 아들의 다툼엔 조석이 따로 없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얼굴을 마주치기 전부터 슬슬 발동이 걸리기 시작하여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이어지니까. 툭하면 분쟁을 일삼는 두 사람이나 이를 지켜보는 가족도 시비의 발단을 알지 못하니 명확히 시시비비를 가려낼 수 없다. 그렇다고 전후 사정도 모르면서 어느 한쪽만 두둔하거나 탓할 수도 없다. 듣지 못하는 자와 듣지 않으려는 자의 만남은 뒤틀어져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 가구처럼 맞추려 하면 할수록 삐걱거리는 소리만 요란하고 상처만 날 뿐이다. 두 사람 사이엔 건너지 못할 강이 굽이쳐 흐른다. 강은 깊고 물살이 빨라 자칫 급류에 휘말려 들까 그 누구도 선뜻 발을 들이지 못한다. 마음만 동동 굴릴 뿐이다.
조경숙의 수필 <난청에 들다>는 전통의 소재인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이 아니라 어머니와 아들의 갈등을 변화된 시대상에 맞춰 조명한다. 구십대 어머니와 칠십대 아들간의 문제다. “듣지 못하는 자와 듣지 않으려는 자의 만남은 뒤틀어져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 가구처럼 맞추려 하면 할수록 삐걱거리는 소리만 요란하고 상처만 날 뿐이다. 두 사람 사이엔 건너지 못할 강이 굽이쳐 흐른다. 강은 깊고 물살이 빨라 자칫 급류에 휘말려 들까 그 누구도 선뜻 발을 들이지 못한다. 마음만 동동 굴릴 뿐이다.” “툭하면 분쟁을 일삼는 두 사람이나 이를 지켜보는 가족도 시비의 발단을 알지 못하니 명확히 시시비비를 가려낼 수 없다. 그렇다고 전후 사정도 모르면서 어느 한쪽만 두둔하거나 탓할 수도 없다.”
서로는 서로를 모른다고 한다. 아들은 난청으로 말귀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억지 부리고 외고집을 피우는 노모가 답답하기만 하다. 어머니는 귀를 굳게 닫아걸어 둔 채 큰소리로 다그치기만 하는 아들이 그저 서운하다. 구순과 칠순은 온종일 함께 있으나 함께 하지 못한다. 윽박지르는 듯한 말투에 말문을 닫아버린 작은 몸집은 위험 앞에 촉수를 말아버린 달팽이의 모습이다. 노모는 세월이 원망스럽다. 멀어져 가는 청력으로 무능하다 못해 걸리적거리는 신세가 한없이 초라하고 서글퍼진다. 반쯤 열린 귀로 반만 들으니 오해가 없을 리 만무할 터인데, 이미 엉킬 대로 엉켜 버린 실타래는 풀려 하면 할수록 꼬여가기만 하는 걸 어쩌랴.
이른 아침부터 집안에 냉기가 감돈다. 전날 저녁 딸이 다니러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게 화근이었다. 들뜬 노모는 새벽부터 갖은 찬거리를 다듬고 씻느라 주방과 안방을 밤새 들락거렸다. 반쯤 닫힌 귀에는 그러한 소리가 들릴 리 만무하였다. 하지만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밤잠을 설친 아들은 일어나자마자 절반쯤 귀먹은 노모를 호되게 몰아쳤다. 어머니는 그깟 일로 식전부터 신경을 곤두세우는 아들이 유별스럽기만 하였다. 모자간 엇갈린 주장은 서로의 파동을 상쇄시켜 버리는 맥놀이 현상인가. 아들은 꼭 막힌 귓구멍을 뚫기라도 하려는 듯 주파수를 양껏 올렸다. 날 선 소리는 무기가 되어 가뜩이나 해진 노모의 가슴을 예리하게 찔렀다.
어머니에게는 아픈 사정이 있었다. 매사에 똑똑하고 인정 많고 붙임성도 좋아 누구보다 아껴왔던 어머니의 바로 아래 동생이었다. 하지만 난청이란 난치병은 그러한 사람을 몰라보게 달라지게 하였다. 노모는 들을 수 없음이 세상과 사람으로부터 고립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동생은 육지와 점점 동떨어져 가는 외로운 섬이 되었다. 그 섬은 섬의 유일한 친구인 바람 소리, 파도 소리와 새소리마저 들을 수 없어 더욱 쓸쓸하였으리라. 멀어진 청력은 소통을 가로막는 벽이 되어 혼자만의 섬에 갇힌 지 몇 해 만에 영원의 길로 떠나고 말았다. 이별의 길에서 노모는 눈물을 훔치는 대신 보청기를 집어 들었다. 세상으로부터,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가슴 떨리도록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잃음으로 얻어지는 게 삶의 순리가 아니겠는가. 오관의 감각이 무뎌갈수록 육감의 촉수는 더욱 예리해져 가니까.
▮어머니와 아들은 화해의 접점을 찾을 수 있을까.
마음의 주파수를 맞추어라. 청력이 줄어가는 건 곧잘 오해와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일방의 귀를 대신하여 발설하지 않은 침묵의 저변까지 굽어 살펴보라는 신의 뜻이 아니겠는가. 갈수록 즉각적인 센스는 떨어진다 하여도 마음을 헤아리는 감각은 보다 웅숭깊어 가니까. 그러니 무딘 청력을 탓하기보다 말로 전하지 못한 세세한 것까지 가늠하는 마음의 안테나를 바짝 세워 봄이 어떠할지. 귀를 아무리 들이댄다 한들 마음을 닫으면 간절한 외침도 의미 없는 메아리로 흩어지고 말 테니.
노모는 전심으로 듣는다. 어머니는 걸핏하면 오작동과 불통으로 분란을 일으키는 귀를 대신하여 온 마음으로 보고 듣고 느끼려 한다. 자식의 일이라면 직접 보고 듣지 않아도 얼핏 감이라도 당겨 잡을 수 있을 어머니다. 그러니 반만 들어도 척하니 그 속을 꿰뚫듯 훤히 보고 있을 당신이 피붙이가 전하는 뜻을 모를 리 없지 않겠는가. 척하면 척할 어머니가 알아도 모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며 철없는 아이의 모습으로 응석하듯 칭얼거리는 건 아들의 사랑이 몹시 그리운 것이리라. 그러나 어미의 심중을 알아채지 못하는 아들이다. 아들은 아직 모른다. 다가와 살풋 손이라도 잡아 주기를 바라는 여리디여린 속마음을.
자연은 침묵으로 마음을 전한다. 자연의 소리는 들릴 듯 말 듯 한 속삭임으로 때로는 소리를 지운 침묵의 몸짓으로 서로를 보고 듣고 느낀다. 자연이 빚어내는 소리는 무한하여 좁은 귀로는 모두 담아낼 수 없으리.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변하여가는 물소리, 바람 소리, 나무와 나무가 부딪는 소리. 새소리,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러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나선다. 설령 들리지 않는다 하여도 마음을 다하여 들으려 할 때 그들이 전하는 뜻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 터이다.
행복을 느끼는 주파수가 있다고 한다. 사랑을 전하는 주파수는 얼마쯤일까.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은 안다. 그 데시벨은 낮고도 낮아 마치 침묵의 소리와 같아 가슴 저변으로 흘러들어 다른 귀에는 들리지 않아도 사랑하는 이에게는 천둥보다 크게 다가와 온몸에 짜릿한 전율을 불러일으키게 한다는 것을. 어떠한 불협화음도 협화음으로 바꾸어버리는 마법 같은 사랑의 주파수는 속살같이 연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바위보다 단단한 힘을 지니고 있다.
아들이여, 구순 노모에게 있어 당신은 아직도 어린 철부지일 뿐이다. 큰소리로 귀를 울리기보다 깃털 같은 음성으로 어머니의 마음을 진동시키어 봄이 어떠한가. 아주 오래전 당신에게 하였던 것처럼 숨결이 느껴질 만큼의 거리에서 눈동자를 맞추어가며 두서없는 이야기라도 맞장구치며 들어봄이 어떠할지. 난청에 들어 마음마저 멀어질까 두려운 노모의 떨리는 가슴을 살포시 안아주는 것은 또 어떠하겠나. 어미와 자식은 본디 말이 필요 없는 한 몸 아니던가.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면 이전의 관계에 쉽사리 그린라이트를 한번 더 켜는 건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변화하지 않으면 곧 그 관계는 더 나아갈 길이 없다. 잔인하지만 노인은 원인을 잘 생각하지 않는다. 노인의 생각은 불변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잠재력이 있다고 믿는 '해결중심 가족치료'가 필요하다는 결론이다. 이 수필의 마지막 장은 해결중심 가족치료의 권고다. 가족치료 분야에서도 경제성과 효율성이 입증된 이 치료의 놀라운 특징은 탈이론적이고 비규범적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목적지향적이다. 도움이 필요한 가족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현재의 행동패턴과는 다르게 행동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핵심은 목적을 향한 변화다. 이 수필에서 작가는 문제에 전문가라는 관점을 가진다. 아무리 복잡한 문제를 지닌 관계라 하더라도 과거의 긍정적인 경험은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이를 예외상황이라고 하는데, 작가는 이 예외상황을 발견하고 강화하도록 돕는 조력자 역할을 한다.
<난청에 들다>에서 아들은 서로의 문제를 잘 알고 있다. 상대와 내가 어떠한 행동을 했을 때 싸움의 불꽃이 튀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어떤 상황에서 갈등이 가라앉을 수 있을지도. 하지만 나름대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봤자 밝은 미래가 보이지 않아 갈등을 이어가는 결심했을 것이다. 이 수필은 해결중심 가족치료를 제시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철학을 가지면서, 누구나 관계의 문제를 해결할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기법. 강점을 강화하며 스스로가 해결의 주체가 된다고 믿는 영역이다. 사람들은 이미 필요한 자원과 경험을 가지고 있다. 만약 어머니와의 관계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더라도 어머니한테 더 발전된 모습을 아들이 보여준다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진전이다. 오빠의 전행적인 태도를 작가는 기대한느 것이다.
Ⅲ. “작은 변화는 눈덩이처럼 뭉쳐서 큰 변화를 일으킨다”
처음에는 손만큼 작은 크기의 눈덩이었으나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뭉치다보면 눈 깜짝할 새에 눈덩이는 커다란 모양이 된다. 처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웅장함이다. 이는 작은 변화를 반복하면 큰 변화로 이어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눈사람을 만드는 원리와 해결중심 치료가 지향하는 바가 쌍둥이처럼 비슷해서다. 작은 변화는 눈덩이처럼 뭉쳐서 큰 변화를 일으킨다. 눈덩이를 불리는 효과만 떠올려도 벌써 시작이다. 해결중심 치료는 과거의 잘못이나 실패를 샅샅이 꺼내어 복잡하게 분석을 하기보다 내담자의 장점이나 긍정적인 면에 초점을 둔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 대신에 해야 하는 것을 더 많이 하도록 집중한다.
서로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우선이다. 어떤 행동이 더해졌을 때 관계가 회복될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즉 문제가 해결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지에 대해 인식해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행동을 시작할 결심이 필요하다. 비유하자면 새롭게 만들고 싶은 눈사람의 크기를 키운다. 만약 어머니와 아들의 갈등을 가정했을 때, 어머니에게 안부전화를 하지 않을 정도로 모자관계에 소홀한 아들이라면 어떤 눈사람을 키워야할까? 해결중심 치료사라면 구체적이고 명확한 목표를 가진 눈사람을 키우라고 말할 것이다. 구체적이라 함은 일주일에 1번과 같은 수치, 명확한 목표라면 어머니의 일상과 안부를 묻는 다정한 말을 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어머니께 다정하게 안부 전화를 하는 눈사람"을 키워야한다.
혹은 서로에게 무관심한 말투와 행동으로 상처를 주는 모자가 있다고 하자. 이들은 최소 이틀에 한 번씩은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 공동의 눈사람을 만드는 게 필요할 것이다. 대신 대화할 때 상대를 존중하는 말을 하고, 의견에 대해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는 규칙도 만들면 더 좋다.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것일지라도 새로운 변화는 관계에 더할 나위없이 중요하다. 그 사소한 것마저도 시도하지 않는다면 변화를 바라는 것은 망상이다. 따라서 치료사는 가족에게 지금 하고 있는 무언가를 ‘하지 말라고’ 하기보다,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라’고 권장한다. 실현 가능성 면에서 훨씬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정적인 표현은 지양하고 긍정적인 변화행동을 촉진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해결중심 기법의 효과는 자신이 변화의 키(Key)를 가지고 있다고 믿을 때 시작될 것이다. 갈등의 노출이 되었다고 해서 변화가 시작되는 건 만무하다. 어떤 관계에서 갈등을 직면하고 있고, 그 갈등에서 어떤 행동이 시작되어야 변화가 이뤄질지 충분한 고민의 시간이 필요하다. 작은 변화가 쌓여 큰 눈덩이처럼 커다란 변화가 시작될 때, 행운의 열쇠가 다음의 문으로 안내할 것이다. 어느덧 <난청에 들다> 비평을 끝마쳤다. 짧지만 핵심적인 내용을 담아 가족관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시각을 전하고자 했는데, 그 목적이 작게나마 이루어졌기를 간절히 바라는 시간이었다. 사람의 희노애락은 모두 관계에서 오는 것이므로 가족치료의 기법이 더 많은 사람들의 삶에 빛과 소금이 되도록 앞으로도 이런 유형의 수필이 많이 나오면 좋겠다. 이 글을 빌려 지금까지 가족간 갈등이 모두 잘 해결되었으면 한다. 작은 변화는 눈덩이처럼 뭉쳐서 큰 변화를 일으키기 때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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