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 약찬게 열한 번째강설(5)
❂ 대천안주주지신 大天安住主地神
열한 번째 강설(5)
❂ 대천안주주지신 大天安住主地神
대천신과 안주 우두머리 지신(地神)
선재가 넓고 큰 보살행에 들어가 여러 선지식의 신통력을 생각하며 대천신大天神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보살행에 관해 묻자, 대천신은 손을 뻗어 사해四海의 물을 모두 가져다 자기의 얼굴을 씻고 금색 꽃을 선재에게 뿌리며 말했습니다.
“모든 보살의 물은 번뇌의 불을 끄고, 모든 보살의 불은 일체중생의 탐애를 다 태우며, 모든 보살의 바람은 일체중생의 집착하는 마음을 다 흩어버리고, 보살의 금강은 일체의 아상我相‘을 없애 버린다.”
그리고 보리장중에 있는 안주지신을 만나보라고 하였습니다.
대천신은 10회향 중 제9 무박무착해탈회향無縛無著解脫廻向입니다.
선재가 안주지신安住地神을 찾아갔더니, 안주지신은 벽안지신과 같이 있다가 선재를 보고 땅을 발로 굴렀습니다. 그러자 백천억 아승지 보살의 백천억 아승지 보장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선재는 여기서 보살의 무너지지 않는 창고[不可壞藏,불가괴장]의 법문을 배우게 됩니다. 안주지신이 다시 선재를 보고 말했습니다.
“나는 과거에 선근공덕을 심은 결과로 이 같은 복력을 구족하였다. 나는 과거 장엄겁 중 월당세계에 나아가 묘안부처님을 뵙고 가히 파괴할 수 없는 지혜를 얻었지만, 부처님의 깊고 깊은 지혜에 들어가 몸과 마음을 부처님같이 하여 부처님 행을 이루는 것은 잘 알지 못한다. 저 가비라성 바산바연주야신에게 물어보도록 하라.”
안주지신은 10회향 중 제10 입법계무량회향入法界無量廻向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해서 선재는 10회향 선지식을 모두 만났습니다.
10회향은 보살 수행의 끝이면서 시작입니다. 보살의 정신은 중생을 버리지 않고 공덕을 중생들에게 되돌려주는 정신입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신행 생활과 수행의 최종 단계에 이어주는 말이기도 하지만 궁극의 성취를 이루기 전이라도 항상 이웃에게 베푸는 정신이 회향입니다.
십회향은 십바라밀의 몸體이 됩니다.
⓵ 육향장자鬻香長者(우발라화장자) - 구호일체중생이중생상회향救護一切衆生離衆生相廻向 : 중생을 구호하나 중생이라는 생각을 떠나서 이뤄지는 회향
⓶ 바시라선선사婆施羅船師 - 불괴회향不壞迴向 : 깨트릴 수 없는 회향
⓷ 무상승장자無上勝長者 - 등일체제불회향等一切諸佛廻向 : 모든 부처님과 동등한 회향
⓸ 사자 빈신비구니師子頻申比丘尼 - 지일체처회향至一切處廻向 :모두 모든 곳에 이르는 회향
⓹ 바수밀다녀婆須蜜多女 - 무진공덕장회향無盡功德藏迴向 : 다항 없는 공덕 창고 같은 회향
⓺ 비슬지라거사鞞瑟胝羅居士 - 입일체평등선근회향入一切平等善根廻向 : 일체의 견고한 선근을 따르는 회향
⓻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 등수순일체중생회향等隨順一切衆生廻向 : 평등한 마음으로 일체중생을 따르는 회향
⓼ 정취보살正趣菩薩 - 진여상회향眞如相廻向 : 진리의 본 모습과 같이 선심으로 선근공덕을 회향
⓽ 대천신大天神 - 무박무착해탈회향無縛楙著解脫廻向 : 속박도 집착도 없는 해탈의 회향
⓾ 안주신安住神 - 입법계무량회향入法界無量廻向 : 법계와 같은 무량한 회향
53 십지위선지식(十地位善知識) : 십회향법을 깨우쳐준 열분 선지식
십회향심(十廻向心)이라고도 하며, 보살의 52계위 중 제31위에서 40위까지를 말합니다. 회향이란 대비심으로 모든 중생을 구호한다는 뜻입니다. 이 계위는 차별의 현상으로 부터 중도(中道)의 진여를 향해 나아가며 10지(地) 이전의 인행(因行)을 10지 위의 과덕(果德)으로 향하게 하고 자기 공덕을 중생에게 돌려 베푸는 등의 단계입니다.
수행과 공덕을 닦는 일은 쉬지 않습니다. 때로는 퇴굴심도 생기고 대충 살고 싶은 절망감도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꾸준히 닦아 가면 스스로 변화를 알게 됩니다. 꼭 수행이 아니라도 세상 모든 일은 마음을 조절하면 더욱 즐겁고 유쾌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위나라 동우라는 사람이 배움에 대해서 했던 말입니다.
학지삼여學之三餘
야자일지여夜者日之餘
동자세지여冬者歲之餘
우자청지여雨者晴之餘
배움에는 세 가지 여분이 있다.
첫째, 밤은 하루의 여분이요.
둘째, 겨울은 일 년의 여분이요,
셋째, 비 오는 날은 맑은 날의 여분이다.
옛 스님들은 하루 해가 지면 다리를 뻗고 울었다 하고,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며 공부했다고 합니다. 위의 세 가지 경우를 보면 어떤 경우라도 틈을 낼 수 있다는 말로, 시간이 없어 공부 못 한다는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어려워도 자꾸 노력하면 배우는 즐거움을 알게 됩니다. 이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진晉나라 평공平公(기원전 558~532 재위) 때의 이야기입니다. 평공이 신하들을 물리치고 난 후 홀로 오후의 한가한 시간을 보내면서 문득 거울을 비춰 보았는데, 귀밑에 흰서리가 가득 내려있는 게 보였습니다. 평공은 저 멀리 앉아 있는 사광師曠에게 일부러 다가가 한마디 합니다.
“내 나이 일흔이니 공부를 하려 해도 이미 저문 듯하구나.”[吾年七十, 俗學, 恐己暮矣]
사광이 말했습니다.
“왜 촛불을 켜지 않으십니까”[何不炳燭乎]
이어서 사광은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말했습니다.
소년호학 여일출지양少年好學 如日出之陽
장이호학 여일중지광壯而好學 如日中之光
노년호학 여병촉지명老年好學 如炳燭之明
어려서 공부를 좋아하는 것은 떠오르는 해와 같고
장년에 공부를 좋아하는 것은 중천에 뜬 해와 같고,
노년에 공부를 좋아하는 것은 저녁에 촛불을 밝히는 것과 같다.
사광의 말에 평공이 느낀 바가 있었던가 봅니다.
“그렇구나!”[善哉,선재]
촛불을 밝히고 가는 것이 어찌 캄캄한 길을 가는 것과 같겠습니까?
배움은 아무리 늦게 시작해도 좋은 일임을 잘 보여준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