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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端의 追憶 #87, 추억같은 사진 한 장
내가 큰아들 ‘성자’와 처음 만난 곳은 충청남도 천안에 있는 이 공동체 소유의 넓은 목장 겸 농장이었다. 첫 눈에 보기에도 인텔리 스타일의 준수한 외모는 많은 여자들이 따를 만도 해 보였다. 내가 ‘성자’를 만난 그 날은 그가 농아인 어린 아들, 그러니까 교주의 손자를 데리고 부자(父子)가 야외 농장에 나들이를 나온 날이었다. 그 때 간부들의 태도는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문정열자서전 질곡의 삶, 애증의 세월 <샬롬 요엘> 06. 이상한 공동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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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자서전은 언제 읽어도 늘 흥미롭다. 질곡같았던 그의 삶 속에서 그가 보낸 세월은 얼마나 애증(愛憎)이 점철되었을까. . .
그의 책에서 위의 내용을 읽다가 그의 이야기와 오버랩되는 추억같은 사진 한 장을 오래된 잡동사니 가방안에서 발견했다.
노광공의 큰아들 노영도, 바로 ‘성자’ 아바 할아버지(?) 와 그의 벙어리 아들 요한(본명 정무), 그리고 그를 데려와서 키운 동방교의 나이 많은 할머니 여신도의 사진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이 사진 한장이 어떻게 지금까지 이렇게 보관되어 있었을까, 세칭 동방교에 몸담았던 그 미망의 한 시절, 그러나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렬히 추종했던, 당시의 열혈신도가 가졌던 충성심의 강도가 오늘 다시 상기되는듯 해서 감회가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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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생모는 대구의 세칭 동방교 신도였던 김옥희라는 여인이다. 요한은 김옥희라는 여인과 노영도 사이에서 출생했으나 이후 김옥희라는 여인은 세칭 동방교를 떠나버렸고 어린 핏덩이의 요한을 데려와 동방교의 나이 많은 할머니 여신도가 키웠다는 것만 알려진 사실이다. 그후 요한은 어느 정도 자란 소년기에 그의 삼촌이 되는 2대 교주 노영구가 독일의 어느 농아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켰고 지금은 결혼하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세칭 동방교내에서는 요한의 생모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것은 금기사항이며 누구도 그일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김옥희라는 여인은 유스도 김여사의 동서 형님이 되는 것이다. 노광공의 장남 노영도의 여성 편력이 상당히 복잡했다는 것은 세칭 동방교내에서도 알려진 주지의 사실이었다. ‘누구 누구가 아바 할아버지(노영도를 지칭)에게 당했다더라’라는 소문은 대기처 신도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이단의 추억 # 71, 유스도, 김여사에 대한 소고(小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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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샬롬 요엘'의 저자가 교주 노광공의 큰아들 ‘성자 노영도 아바'와 처음 만난 충청남도 천안에 있었던 이 공동체, 세칭 동방교 소유의 넓은 목장 겸 농장, 바로 그 주학목장에서 일어났던 재미있는 실화 한토막이 '이단의 추억 #56, 주학목장의 밤' 답글중에 올라와 있어 그대로 복사해 올린다. akj3180님이 쓴 답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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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님은 참 감성이 풍부하고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분 같아요. 뵈면 알 수 있는 분일것 같기도 아닐것 같기도 하고요. 이런 편지들을 강산이 변하도록 버리지 않고 가지고 계셨다는건 왕의씨만(@@ㅋㅋㅋ)할 수 있는일 아닌가요?
죄송요~ ^^
제가 그곳에 있을땐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스라야영수님이 책임자였어요. 그분역시 가족들을 내팽개치고 집을 뛰쳐나온 가장이었지요. 기가막힌 일이죠~ 밖았일을 많이해서 그런지 언제나 얼굴이 뻘개서 한잔 하신분 같았는데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했답니다
이름도 명명도 기억에 없지만 서울 말씨에 별로 호감가는 인상은 아니였지만 그림을 잘 그리는 서울출신의 여성분이 있었는데 미대 출신인지 그냥 본인의 끼로 그리는지, 순회자님이 물감까지 사다 주셔서 수채화를 몇일동안 그려서 축사내에 전시회 하듯이 걸어놓기도 하고 했던 그녀~
바지런한 스타일에 아버지가 교회 목사였다고 했던가 그런 여성분이 있었는데 믿음도 좋이보였고 기도도 열씨미 하는 분이였어요.
어느날 밤 ○○○(남)이랑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야밤도주~ 지금 생각하면 멋져요~ㅎ
용기 좋았지요. 그 당시는 이럴수가 그럴수가 저럴수가~ 저렇게 변심할수 있을까 사탄이 씌였다고 마귀가 붙었다고 부들부들 떨었지요.
아무도 모르게 사랑의 싻을 튀웠나벼요~~ 차비도 없었을텐데 어떻게 탈출 했을까?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을까.
훗날 소문에 ○○○랑 집에 같이 갔는데 결혼은 집에서 극구 반대해서 그냥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는 얘길 들은것 같애요 순회자한테 반죽음이었지요. 전부 죄자복하라고~~ 회개기도 하라고요.
카리스마 철철넘치는 나사로장노님~ 이분의 뒷얘기(註1)가 궁금합니다.
젖소들의 양식 풀을 베러 산에가서 기드온이랑 소나무 아래 누워서
날이 밝으면 멀리 떠날
사랑하는 님과 함께
마지막 정을 나는노라면
기쁨보다 슬픔이 앞서~~****
목이 터져라 불렀던 이 노래는 지금도 좋아 한답니다
기드온은 부산 초량이던가 요셉목사님이 상주 해계시던 그 대기처에서 어두컴컴한 지히실에서 구슬빽을 만든답시고 맨날 구슬을 꿰메던 시절부터 참 많은 날들을 같이 한 친구였지요.
맨날 꿰멘 구슬빽은 그동네 어느집에서 하청을 받아서 부업을 한거였고 수금은 대기자가 해서 지성을 올렸던것 같아요.
그 대기처에서 요한(註2) 일대조 할아버지(이렇게 얘기해도 될려나)를 몇 번 봤었는데 세상이 험악해서 말문을 막아 놓으시고 때가되면 트일것이라고 해서 궁금했었는데 역시 지금도 그런가 보네요. 구포다리 건너 배밭이 많던 그동네 교회(註3)에서도 우린 수도사로서 같이 지냈었고 ~~~
아직도 그렇게 이레조부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지 쌈박질도 많이 했었는데....
이렇게 인생은 짧기만 하고 세월은 유수같아서 안타깝기만 한데 기드온아 ! 니도 내생각 가끔하기나 하는지 그립다 =
마리아장노님이 주방 담당을 하셨는데 연세가 무척 많으셨고 아들이 모셔갈려고 해도 꿈쩍없이그 자리를 지키셨어며 굽은 허리를 하시고도 개밥까지 챙기셨던 그분도 참 궁금합니다. 당연 돌아가셨겠지만요. 이땅 좁은길 안에서는 고행을 많이 할수록 하늘나라에 재물이 쌓인다고 사상교육을 치명적으로 받았어니~
이레할아버지 오시면 이깟 육신의 고달픔은 아무것도 아니야 하시면서 자녀들과의 고리를 끊어셨죠 슬프게도..@@
어느날아침 장노님이 얼굴이 울그락 푸르락 하시면서 찬장에 밥이 없어졌다고 그 많은 밥을 누가 다 먹어 치웠다고 난리가 나셨었지요 .
하박국 이저씨!
그렇게 기계처럼 농장일, 제2축사도 지으시고 동분서주 일을 많이 하셨지만 느을 배고팟겠지요.
그날 아침 배탈이 나서 체조시간에 결국 못나오셨답니다 ㅠ ㅠ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안타까웁지요
힘센 장정이 일에 비해 얼마나 먹는게 부실했어면 밥도 훔쳐먹고~~총각이었던것 같았는데
어디선가 행복하게 잘 사셨어면 좋겠어요.
아랫동네 남자애 하나가 남자숙소에 기거하면서 소똥도 치우고 목장 허드렛일을 도와주는 애가 있었는데 참눈이 잘 생겼었어요. 너무 가난해서 걔 엄마가 밥만 먹여달라고 보낸것 같았어요. 그분 엄마가 한번씩 오시곤 했는데 역시 엄마의 눈이 젊었을땐 이뻣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문제는 걔 여동생이었어요. 오빠 만나러 온다고 찾아왔는데 짧은 치마에 굽 높은 샌달을 신고 긴 머리를 하고 나타났었지요.
역시 눈이 장난아니게 예뻣어요~~ㅋㅋ 아휴 호수같이~~
남자도 아니고 여성 동지들이 말은 아무도 안했지만 단체로 시험에 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였답니다. 거무티티한 작업복에 어디 하나 다듬고 가꿀 기회도 없이 매일 고구마도 캐고 콩 추수도 하고~~ 육신을 가꾸는 자체도 죄였어니까요.
모든 포커스를 이레 조부님한테 맞춰져 있는 우리는 크나큰 자석에 붙임을 당해서 끌려 다녔었던 거지요. 이쁜 아가씨 등장으로 여성 동지들의 휘청 하는 모습, 그걸 눈치챈 하박국 아저씨 ㅉㅉㅉ 혀를 찾었지요 다시는 쟤 못오게 하라고요~
한창 이뿌고 생기 발랄한 십대 후반 이십대 초반 애들 모이노코 수도사란 명분아래 세상을 등지우게 했어니 그럴법도 했지 않겠어요. 그렇게 모여 있어도 누가 언제 서울로 불려 올라갈지 어떻게 될지 서로가 다~ 모르는 일이었지요.
그래도 또 역시 기드온과의 서울에서의 역사가 남아 있답니다.
연단선님도 아니고 그렇타꼬 대기자도 아니고
어중개비 ~~
수도사라는 명명아래 ~~구석구석 많이 다녔지요
아까운 시절 시절 ~~
(이단의 추억 #56, 주학목장의 밤 답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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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태는 글)
註1, 카리스마 철철넘치는 나사로장노님~
이분의 뒷얘기
-->당시 동아일보에 보도된 위의 기사 중에서 ‘이상래’는 명명(세칭 동방교에서 지성-헌금-을 바 치고 받는 새 이름)이 ‘나사로’인데 보통 ‘나사로 장로’로 불리웠다. 경남지방의 마산에서 건달 같이 지내던 그가 어떻게 세칭 동방교에 전도되어 들어왔는지 알려진바는 없으나 서울 대기처로 올라가 한때 부산지방에 순회자로 내왕한 경력이 있으며 가늘게 찢어진 작은눈에 인상이 아주 험상궂었던 그도 동방교의 여러사건에 연루되어 지명수배를 당하고 곤욕을 치른후 동방교를 떠났고 그 이후 부산지방에서 얼굴을 알리지 않으려는듯이 언제나 시커먼 선그라스를 끼고 어느 노선버스를 운행하는 기사로 생활하고 있는것을 본 사람들의 목격담이 전해지곤 했었다.
(이단의 추억 #26, 마태목사 탈출사건 중에서)
註2, 그 대기처에서 요한 일대조 할아버지
-->노광공의 손자, 즉 노영구의 아들
요한(정무)을 지칭
일대조(一代祖)
-->천지만물의 창조주요 재림의 심판주인 교주 이래 할아버지(노광공)와 그의 두 아들 아바 할아버지(노영도), 아브넬 할아버지(노영구)는 대수(代數)와 무관한 성삼위일체이고 교주 노광공의 손자, 즉 노영도의 아들 요한은 1대가 된다. 이 어린아이 요한에게는 특별히 ‘요한 1대조 할아버지’ 혹은 그냥 ‘요한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원 참 ! 어린아이에게도 할아버지라니. . . 세칭 동방교는 그런 곳이었다.
(이단의 추억 #18, 자정에 올리는 제사중에서)
註3, 구포다리 건너 배밭이 많던 그동네 교회
-->대저 5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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