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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鄭道傳, 1342년[4] ~ 1398년 8월 26일)은 고려 말기, 조선 초의 문신, 유학자이자 시인이며, 외교관,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이다. 한국의 초기 성리학자의 한사람이며,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峯),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별칭은 해동장량이다.아버지는 형부상서 염의선생 정운경이고 어머니는 우연의 딸 영천 우씨이다.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과거 급제 후 성균관 등에 있으면서 성리학을 장려하였고, 외교적으로는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명나라와의 외교론을 주장하다 여러 번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였으녀 1383년 이성계를 만나 정사를 논하다가 역성혁명론자가 되었다. 이후 정몽주, 이성계 등과 함께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했다가 1392년 조선 건국을 주도하여 개국공신 1등관에 녹훈되었다. 관직은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초대 영의정부사를 거쳐 판삼사사에 이르렀으며, '봉화백'(奉化伯)에 봉작되었다.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그는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 서울시내의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제1차 요동 정벌과 제2차 요동 정벌에 반대하였으나 명나라의 횡포가 거세지자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 외교 마찰을 빚었고, 공신과 왕자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병을 혁파하려다가 갈등한다. 그뒤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 등을 세자로 추대하였으며 요동 정벌을 계획하여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갈등하던 중, 이방원이 정변을 일으킨 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군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성리학이념 보급에 기여하였으며, 그는 안향-백이정-이제현의 학통을 계승한 이색의 문하생이자 정몽주, 권근의 동문으로 초기 사림인사의 한사람이었으나 정몽주, 길재의 문하생들에 의해 격하되었다. 태종은 그를 역적으로 만든 뒤 정몽주를 추상하였으며, 이후 역적의 대명사로 매도되어 오다가 고종 때 흥선대원군에 의해 복권된다.
[편집]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출생과 가계삼봉 정도전은 1342년 아버지 형부상서 정운경(鄭云敬)과 어머니 영천 우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년대는 다소 불확실하여 1337년생 설도 있다. 그의 호 삼봉은 삼각산과 같이 학문과 경술에 우뚝하라는 뜻으로 이존오,박의중,이집,김구용 등이 1369년 가을 삼각산 그의 집을 찾아와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그의 고조부는 봉화호장 정공미(鄭公美)인데 그 이전의 가계는 실전되어 그의 문중은 정공미를 시조로 한다. 아버지 정운경은 중앙에서 벼슬하여 형부상서에 이르렀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영천우씨(榮川禹氏) 산원(散員) 우연(禹淵)이다. 정도전이 지은 아버지 정운경의 행장이나 봉화정씨 족보에 영천우씨로 되어 있다. [편집] 유년기![]()
스승 이색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였다. 정도전이 유년을 보낸것은 양주 삼각산이다. 그의 시문 포은 정몽주의 시문집 서에 15~6세 때 삼각산에서 성율을 공부할 때 정몽주에게 대학과 중용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였다, 정도전의 외가는 영주이다. 영주의 산원(하급군관)으로 있는 영주우씨 우연(禹淵)의 따님이 그의 어머니다. 아버지가 중앙으로 관직을 옮김에 정운경 따라 개경으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 정운경은 이곡과 나이를 잊은 두터운 친교가 있었기 때문에 이곡(李穀)의 아들 이색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고, 성균관 진사로서이색의 제자가 되었다. 이색은 한국의 초기 성리학자로 안향과 백이정, 이곡, 이제현의 학맥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그 뒤 성균관에서 이색과 스승과 제자로 다시 만나 성리학에 대해 한층 심도있게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5] [편집] 수학과 소년기![]()
동지이자 정적인 포은 정몽주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그는 성리학적 충효 사상과 예학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충효 사상과 예학 외에도 맹자의 성선설과 역성혁명론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부패한 사회의 현실을 보면서 맹자의 성선설에는 다소 회의적인 견해를 품게 되었다. 이때 그와 함께 공부했던 이들은 포은 정몽주(鄭夢周), 박의중, 윤소종(尹紹宗), 이존오(李存吾), 이숭인(李崇仁),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박의중(朴宜中), 설장수(?長壽) 등이며, 성균관에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는데 특히 문장과 성리학에 능하였다. 당시 권문세족들의 전횡 못지않게 불교와 도교, 무속 신앙이 미신을 조장한다고 보게 되었다. 삶조차 완벽하게 알지 못하는 인간 세계에서 사후 세계를 논한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생각이라는 공자의 의견에 강하게 동조하게 된다. 이후 무속 신앙 제단 혁파와 불교에 대한 비판을 꾸준히 키워갔으며, 나중에 불씨잡변을 내놓게 된다. 특히 동문수학한 동료들 중 그는 정몽주와는 마음이 맞아, 그가 말한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 권문세족으로부터 농민들을 해방시켜야 된다는 사상에 정몽주는 깊이 감격, 공조하였다. 이후 정몽주와는 오랜 친구로, 청소년기때부터 권문세족과 외척의 발호로 부패한 고려사회를 성리학적 이상향으로 개혁해야 된다는 사상을 품고 사상적, 정치적 동지로서 협력하였으나 뒤에 정적으로 돌변한다. [편집] 관직 생활과 권문세족과의 갈등[편집] 과거 급제와 관료생활 초기공민왕 때인 1360년공민왕 9년) 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한 데 이어 2년 뒤1362년 문과 동진사로 급제하여 1363년 관직에 나갔다. 그해 충주사록(忠州司錄)을 거쳐 전교시주부(典敎寺主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냈다. 그뒤 성균박사, 태상박사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출세를 하였다. 그러나 그의 벼슬살이는 순탄하지 않았다. 공민왕이 신돈을 기용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해서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1월과 12월에 연이어 작고하여 영주에서 3년간 여묘살이 하며 학문연구와 교육에 힘썼다.[5] 당시 관료들과 지식인들은 백일상이 일반적인 관행었으나, 그는 주자가례에 따라 3년상을 봉행 실천하였던 것이다. 영주에 내려가 3년간 여묘(廬墓)살이 하면서 지방의 후학들과 동생 도존, 도복을 가르쳤다. 1369년 가을 부모의 3년상을 마치고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다. [편집] 신돈의 죽음과 성균관 강학![]()
성균관 경내 나라에서 성균관을 중건하고 이색이 성균관대사성임명하자, 1371년 이존오, 박상충, 김구용, 윤소종, 박의중, 정몽주, 이숭인 등 벗들이 천거하여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성균관의 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강론하였다. 다시 72년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곧 예의정랑이 되었다. 신돈이 제거된 뒤에도 정도전은 기용됐으나 1374년(공민왕 24)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친명파에 속했던 정도전은 다시 정치적 위기를 겪는다. 그때 정국은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가 대결하고 있었다.[5] 그는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강학하면서 한편으로는 정몽주 등과 함께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후 그는 공민왕의 부패와 타락을 옹호하거나 묵인하는 권문 세족들을 왕의 눈과 귀를 가린다며 비판을 가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홍륜 등에 의해 암살당하자 그는 이 사실을 명나라에 고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이인임(李仁任) 등의 미움을 받게 된다. [편집] 친원파, 권문세족과의 갈등이때 그는 부와 권력을 독점한 권문세족들로부터 전답 등의 농토는 실제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권문세족들의 분노를 샀다. 또한 그는 미신적인 불교의 사상이 사람들을 혹세무민한다 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극락이란 존재로 사람들을 현혹한다고 규탄했다. 1375년(우왕 1년) 성균사예·지제교가 되었다. 동년 원나라 사신이 왔을 때 원나라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문제로 조정에서는 신흥사대부와 권신들 간에 대립이 일어났다. 이인임과 지윤 등은 사신을 맞아들이자고 한 반면, 정도전을 비롯한 신흥사대부들은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인임 등은 그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원나라 사신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이인임은 정도전을 영접사로 보내려고 했다.[5] 이에 정도전은 “사신의 머리를 베든지, 그렇지 않으면 묶어서 명나라로 보내버리겠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인임·경부흥(慶復興) 등이 친원정책(親元政策)으로 되돌아가려 하고 원나라 사신이 명나라를 치기 위한 합동작전을 고려 조정에 제의해 오자, 정도전은 이를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이인임·경부흥 등의 권신의 진노를 사 나주의 속현인 회진현(會津縣)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그는 성리학 관련 서적을 연구하며 동리 청년자제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편집] 유배와 학문 연구1377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4년간 선향 영주와 안동, 제천, 원주 등을 오가며 유랑하며 지냈다. 그 뒤 1382년유배가 완화되자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와 '삼봉재'를 열어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전국에서 많은 재생들이 운집하여 교육의 즐거움을 향유하였으나 그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이곳 출신 재상(宰相)이 삼봉재를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생들을 이끌고 부평부사 정의에 의탁하여 부평부 남촌(南村)으로 이사하여 후생 교육사업을 재기 하였으나 이곳 역시 재상 왕모(王某)가 별장을 짓는다고 학숙을 폐쇄하였다.[5] 계속되는 멸시와 박해로 다시 경기도 김포로 옮겨야 했다.[5] 유배와 유랑 살이를 통하여 향민(鄕民)과 사우(士友)에게 걸식하기도 하고 스스로 밭갈이도 했다. 이때 그는 가난과 기근으로 죽어가는 백성들과 그들을 수탈하는 권문세족의 횡포와 사원경제의 팽창으로 국가경영의 존폐위기 상황을 직면하고 일대의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편집] 이성계와의 만남1383년 가을, 정도전은 드디어 비장의 결심을 하고 함길도 함흥에 있는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를 찾아갔다. 한때 이성계와 함께 왜구와 여진족을 토벌하는데 함께 출정했던 정몽주로부터 그의 명성을 듣고, 외적의 침략을 물리쳐 고려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른 이성계를 만나기 위해 함흥으로 직접 찾아간 것이다. 그는 이성계와의 오랜 대화로 세상사를 논하다가 그와 인연을 맺었다. 정도전은 부패한 관료로 인한 피폐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혁명 밖에 대안이 없다고 결론 짓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성계의 군사력이 절실하였던 것이다. 당시 조우에서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정예 군대와 일사분란한 지휘통솔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이성계 또한 정도전의 심오한 학문과 원대한 국가경영에 대한 경술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동북면 군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군령을 엄하게 지킬 뿐 아니라 무기들 또한 잘 정비되어 있으며 훈련에도 열심히 임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이 정도의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성공시키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넌지시 떠보았다. 평생 전쟁터를 누벼 온 이성계가 정도전의 말뜻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으나, 무슨 뜻이냐며 모르겠다는 듯이 반문하였다. 이에 정도전은 동남방의 왜구를 소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편집] 개혁 정치와 정변 기도[편집] 이성계와 역성혁명정도전은 그날 밤 이성계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정도전은 군영 앞에 서 있는 오래된 소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그 위에 이성계를 위해 시 한 수를 지었다.
이 시에서 정도전은 이성계를 늙은 소나무에 비유하고 있는데, 앞으로 때가 되면 이성계는 천명(天命)에 따라 세상을 구원하러 나서야 하며, 자신과 손잡고 큰일을 하여 위대한 역사적 과업을 남기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속마음을 은근히 드러내었다. 이성계는 개혁을 주장하는 정도전 등에게 협력하기로 하고 지원을 약속했다. 그의 인물됨됨이에 매료된 정도전은 그의 막료가 되었고 이후 역성혁명까지도 논의하게 되었으며 이 일을 계기로 정도전은 이성계의 참모로서 큰 야망을 품게 되었다. 1384년 복직과 동시에 전교시부령(典校侍副令)이 되었다. 그 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성절사(聖節使) 정몽주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승습(承襲)과 시호(諡號)를 청하고 되돌아왔다. 1385년 귀국 후 성균관 제주(祭酒)와 지제교를 거쳐 86년 외보를 요청 남양부사(南陽府使)로 도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부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그뒤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의 물망에 올랐다. [편집] 위화도 회군과 권력 장악
1388년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올랐다가 그해 음력 6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게 되자 조준과 함께 이성계의 우익이 되어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다. 그해에는 우왕을 내쫓고, 이인임의 주장으로창왕을 세웠다. 이때 우왕의 측근인 최영 일파를 제거한다. 이때 정도전은 힘껏 이성계를 뒤에서 도와주었다. 1388년 6월 제1차 요동 정벌에 출정한 이성계 등이 말머리를 돌려 위화도 회군,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하여 조준(趙浚) 등과 함께 전제개혁안을 적극 건의하고,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규탄, 공격하였다. 밀직부사에 오른 직후부터 정도전은 조준(趙浚), 남은, 윤소종 등과 함께 전제(田制) 개혁에 착수했다. 조세 제도와 토지 제도를 개혁하여 개인이 함부로 토지를 사유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권문세족들이 보유한 토지를 몰수하고 새 정권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자금 확보는 물론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그는 전국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킨 뒤 인구수에 따라 토지를 분배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스승인 이색과 친구인 정몽주 등과 의견이 달라지면서 서서히 멀리하게 되었다. 이어 최영, 이인임, 조민수 등 구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차근차근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아 나갔다. [편집] 정변과 공양왕 추대
1389년 음력 11월 여주로 유배된 폐주 우왕이 자신을 찾아온 김저(金佇)와 정득후(鄭得厚)에게 보검을 주며 곽충보(郭忠輔)와 함께 이성계를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린 음모사실이 곽충보의 고변으로 발각되었다. 이에 이성계는 우왕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유배시켜 버렸다. 정도전은 이성계, 정몽주, 조준, 남은과 함께 뜻을 같이해 창왕을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폐위시키고, 폐가입진을 명분으로 공양왕을 추대하고 공신이 되었다. 바로 최영 등을 죽이고 실권을 잡았다. 이때 그는 우왕과 창왕 부자가 왕씨가 아니라는 주장을 했으나 우왕이 신돈의 친자 여부는 입증하지 못했다. 공양왕 추대의 공으로 그는 봉화현 충의군(忠義君)에 봉군된뒤 수충논도좌명공신(輸忠論道佐命功臣)에 책록되고 공신전 100결과 노비 10명을 하사받았다. 이후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1390년(공양왕 2년) 경연지사(經延知事)에 올랐다. 그 해 1390년이성계가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명나라 주원장에게 밀고 하는윤이 이초 사건이 발생하자,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윤이·이초의 주장이 무고임을 밝히고 돌아왔다. 곧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편집] 정적 숙청과 역성혁명1391년에 이성계는 삼군도총제부를 만들고 군대를 장악하였고, 정도전은 우군도총제의 자리를 맡았다.[6] 이어 외세를 빌어 국내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윤이,이초 사건의 배후인 이색과 우현보(禹玄寶) 등을 신우(辛禑)·신창(辛昌[7]) 옹립의 죄를 물어 처단할 것을 상소했다. 그러나 이를 부담스럽게 여긴 공양왕은 거절하였고, 정도전은 거듭 이색, 우현보를 처단할 것을 극력 피력하였다. 그해 9월 평양부윤에 임명되었으나 정몽주 등은 그를 제거할 목적으로 사간원과 사헌부의 간관들을 사주하여 그가 "가풍(家風)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함에도 큰 벼슬을 받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다"라고 탄핵케 하여 봉화로 우배 되었다. 이어 나주로 배소가 옮겨졌으며 두 아들은 삭탈관직당해 평민이 되었다. 이때 정몽주는 사람을 보내 그를 고문하는 척 하면서 죽이라고 밀명을 내렸으나, 공양왕의 반대로 1392년(공양왕 4년) 봄 고향 영주로 안치되었다. 1392년 3월 초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낙마(落馬)하여 부상을 입자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려는 정몽주 등에 의해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하여 당사(堂司)의 자리를 도둑질했고, 천근(賤根)을 감추기 위해 본주(本主)를 제거하려고 모함했다"라는 탄핵을 받고 보주(甫州)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해 4월 이방원(李芳遠), 조영규 등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함으로써 고려 왕조를 지지하는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와해되었다. 그 뒤 한성부에 내려가 있다가 정몽주가 제거된 뒤 복직하였다. [편집] 역성혁명[편집] 조선의 건국![]()
조선 태조(이성계)의 어진 6월 정도전은 비로소 소환되어 정치 일선에 나서서 새왕조 창업을 위한 정지 작업을 단행하여 7월17일 공양왕의 선양을 이끌어 내어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하였다. 그는 당시의 자신과 이성계의 관계를 한 고조 유방과 그의 참모 장량에 비유하였는데,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게 아니라 거꾸로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했다는 말을 꼭 덧붙였다. 이 말은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해 한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제국을 건설했다는 뜻으로, 자신 또한 태조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것이며, 조선 건국의 실질적인 기획자가 곧 자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주장은 정몽주 등을 제거한 이방원 등의 반발을 초래하게 된다.[8]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정도전은 왕명을 받아 새로운 왕조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17조의 〈편민사목〉(便民事目)을 지어 발표하였다. 또한 조선 건국을 반대한 정적 등 반대파를 일소하였다.[5] 조선을 건국하는 데 일등 공신이 된 정도전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겸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등의 군국의 요직을 겸함으로써 권력을 손에 쥐어 조선의 핵심 실세가 되어 행정, 군사, 외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전반적인 문물 제도와 정책의 대부분을 직접 정비해 나갔다. 태조로 즉위한 이성계는 나랏일을 모두 정도전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2인자가 되었으며, 건국 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여 새 나라의 문물 제도와 국책의 대부분을 결정하였다. 즉 한양 천도 당시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都城)의 기지를 정하고, 각 궁전 및 궁문의 칭호, 도성의 8대문 및 성안 48방(坊)의 이름 등을 제정하였다.[9] 이후 태조의 교지(敎旨)를 지어 새 왕조의 국정방향을 제시했고, 개국공신 1등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문하시랑찬성사 겸 판의흥삼군부사로 동판도평의사사사·판호조사·겸판상서사사·보문각대학사·지경연예문관춘추관사 겸의흥친군위절제사를 겸직하여 정권과 병권을 모두 장악했다. 7월 20일 도평의사사사 겸 상서사사(尙瑞司事)가 되었다. 7월 28일 좌명 공신(佐命功臣)에 녹훈되고 문하시랑찬성사 의흥친군위 절제사(門下侍郞贊成事義興親軍衛節制使)에 임명된 뒤 봉화군(奉化君)에 봉군되었다. 1392년 10월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 겸 계품사로 명나라에 가서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호소하고 승인받아왔다. 12월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가 되었다. 1393년(태조 2년) 7월 다시 문하시랑찬성사로 동북면도안무사가 되어 변방으로 나가 여진족을 토벌, 회유하고 되돌아왔으며, 한성으로 되돌아온 뒤 〈문덕곡 文德曲〉·〈몽금척 夢金尺〉·〈수보록 受寶〉 등의 악사(樂詞) 3편을 지어 왕에게 창업의 쉽지 않음과 수성(守成)의 어려움을 반성하게 하는데 쓰이는 자료로 삼도록 권고하였다. 1393년 9월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10월 관습도감판사(慣習都監判事)를 거쳐 1394년(태조 3년) 1월 판의흥삼군부사로 병권을 장악하여 병제개혁에 대한 상소를 올리고, 3월 경상·전라·양광 삼도 도총제사가 되어 지방의 병권까지 장악하였다. [편집] 체제와 관제의 정비정도전은 조선이 갖춰야 할 정부 형태와 조세 제도는 물론 법률 제도의 바탕을 만들었으며,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또한 정도전은 수도 천도를 결정하고 수도 이전을 단행하였다. 또한 노비 해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병제(兵制)를 대폭 개혁하여 진법(陳法)·진도(陳圖)를 지어 장병을 훈련하고, 1397년(태조 6)에 동북면 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가 되어 지금의 경원(慶源 : 함경북도) 지방에 가서 성보(城堡)를 수치(修治)하고 주·군과 역참을 획정하였다. 정도전은 고려 말 배불론(排佛論)의 주동자로 철두철미 불교의 말살을 기도하고 유교로써 문교(文敎)를 통일하고자 하여 주자학으로 불교와 노자교(老子敎)를 압도코자 유감없이 공격을 가하였다. 불교의 자비는 친함과 안면이 있음에 따라 차별이 있고, 불교는 인류 자연의 성정에 위배하여 사회 조직을 파괴하는 것이며, 석가가 인세(人世)를 이탈하여 자립자영코자 아니하였음은 타력에 따라 기생(寄生)코자 한 것이고 특히 선종(禪宗)과 같은 것은 인심을 현혹하는 마종(魔宗)이라고까지 비판하였으나 아무도 이에 응대하는 불교인이 없었던 유학의 대가였다. 또한 그는 조선왕조의 제도와 예악(禮樂)의 기본구조를 세운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부병제(府兵制)의 폐단을 논한 〈역대부병시위지제 歷代府兵侍衛之制〉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편집] 한양 천도![]()
한성부 지도 1392년 8월부터 그는 새 도읍지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는데, 이는 고려의 구신과 세족이 도사리고 있는 개경은 신왕조의 정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1394년 8월부터 개경을 떠나 새로운 도읍 건설을 추진하여, 한양을 새 왕조의 도읍지로 정하였다. 한양을 조선의 새 수도로 결정한 것은 물론, 서울의 도시 설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경복궁 자리도 정도전이 잡은 것이라고 한다.[5] 무학대사는 지금의 인왕산을 주산으로 궁궐을 세워야 한다고 했으나 정도전은 반대하였다. 그는 무학대사가 추천한 위치는 동향이며 터가 너무 좁아 왕도로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도전의 뜻대로 경복궁이 현재의 자리에 세워지게 되었다.[5] 한성부의 각 궁궐과 전각, 문의 이름을 짓고 도로 수도의 행정분할도 결정했다. 1394년 한양 천도의 지도와 감독을 병행하면서 새 사회에 걸맞는 사상으로 유교 성리학을 정식 국교로 채택할 것을 주청하였으며, 그해에 〈심기리편 心氣理篇〉을 지어 불교·도교를 비판하고 유교가 실천 덕목을 중심으로 하는 인본주의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태조의 허락 아래 종묘와 사직, 궁궐의 터 등이 들어설 자리를 정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궁궐 및 각 전각의 이름은 모두 정도전이 손수 지었다.[9] 그는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지을 때 유교적 덕목이 나타나도록 근정(勤政), 인정(仁政) 등의 단어를 사용했다. 또한 한성의 4대문과 4소문의 첫 이름고 현판을 짓기도 했다. 그 밖에도 종묘의 제례법과 음악도 정도전이 제정한 것이었다. 특히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 〈문덕곡〉(文德曲) 등 수많은 악장을 지어 태조의 공덕을 찬양하였는데, 이 악장은 조선조 5백 년간 중국에서 연주되었다. [편집] 조선건국 이후 정권 투쟁[편집] 세자 책봉 문제신덕왕후 강씨는 자신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기를 간절히 소원 하였고, 태조 이성계 역시 방석을 총애하여서 대소신료들은 태조의 의중에 따라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태조의 전처 한씨 소생 아들 중 다섯째 인 이방원은 정치적 야심이 가장 컸던 탓에 이 일로 격분하였다.[10] 왕세자를 누구로 임명하느냐는 문제에 관해서 당초의 의론은 "시절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많은 왕자를 세워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왕과 강비(康妃)의 의도와 배극렴의 주장으로 의안대군 이방석(李芳碩)을 왕세자로 세웠다. 그러나 전처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자신들을 배제하고, 중전의 아들 막내가 왕세자가 된 것에 대해 모두 분개하였다. 이것이 훗날 제1차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태조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바로 세자이사(世子貳師)가 되어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했다. 그는 《조선경국전》, 《경제문감》(經濟文鑑),《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 등의 편찬을 주도하여 새로운 치국의 대요와 관제 등 모든 제도와 문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에 이어 개인 소유의 사병 혁파하여 공병제 실시안과 과전법의 시행을 주장 국가의 군대로 국방을 확고히하고 국가 제정의 안정을 도모하려하였다. [편집] 국방력 강화와 명나라와의 갈등1395년 1월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高麗國史)를 편찬하였다. 조선 창업에 성공한 정도전은 세자책봉에 이은 새나라 문물과 제도정비에 착수했다. 6월에는 국가의 통치규범인《조선경국전》,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제왕들의 치적을 담은 《경제문감》(經濟文鑑),《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 등의 편찬을 주도하여 새로운 치국의 대요와 관제 등 모든 제도와 문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경제문감》과 《경제문감별집》에는 정치제도·재상·대관(臺官)·간관(諫官)·부병제도·감사(監司) 등의 업무와 인사 행정 및 실무를 논하였다. 이어 국방력 강화와 고구려 고토수복을 위한 공병제도를 도입 군의 통수권을 국가에 귀속 시키기 위한 사병을 혁파하였다. 또 조세수급의 안정을 통하여 국가 재정의 건전성 확보하기 위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한 과전법을 단행하는 등 일소에 혁신하였다. 그러나 급진적인 정책추진에 대한 반발하는 부류들이 태동되었다. 1395년 2월 세자이사가 되고 3월에는 다시 판삼사사로 복직했다. 1395년 일부 반발 세력에 의한 국가기밀 누설로 인하여 갈길 바쁜 조선은 명나라와 외교적 분쟁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신흥국 조선의 일신을 경계하였던 명제 주원장은 조선의 정조표전(正朝表箋) 문구에 명나라를 모독하는 글귀가 있다는 걸 문제삼아 태조에게 정도전을 자신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태조는 정도전은 병에 걸렸다거나 나이가 많다거나 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명나라의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계속해서 그의 소환을 요구하였고, 이를 무마하기 위한 조처로 문하시랑찬성사를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동북면도선무찰리사로 체직 된다. 그러나 조선의 요동공벌은 건국초기부터 면밀히 계획된바 간과할 수 없기에 정도전은 1397년 2월 태조 이성계의 중임으로 복귀하여 요동 정벌을 위한 군사훈련에 박차를 가한다. 애석하게도 그의 요동공벌 출정은 조준의 반발로 주춤하는 사이 하륜의 부추김과 이숙번이 지지한 이방원의 반란에 살해됨으로 인하여 무산되고 말았다. [편집] 요동 정벌 계획
1395년부터 그는 제1차 요동 정벌(1388)과 제2차 요동 정벌(1392)에 이은 제3차 요동 정벌을 계획한다. 요동 정벌의 방안으로 그는 그때까지 각 지역의 신진사대부와 개국공신들이 사적으로 보유하던 사병을 모두 혁파하여 국가의 정규군으로 개편하자는 사병 혁파론을 제시하였다. 그러자 사병을 중심으로 정변을 세우려고 계획한 정안군 이방원 등은 다른 개국공신들을 설득하여 그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비판했다. 동시에 이방원의 수하들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획책하려 한다고 고하였다. 1396년(태조 5년) 3월 과거 고시관(科擧考試官)에 임명되어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해 5월 조유인(曹由仁)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1396년 7월 27일 봉화백에 봉작되었다. 1397년(태조 6년) 3월 상서사 판사(尙瑞司判事)로 공동 상서사판사인 조준과 함께 내관과 궁녀의 작호와 품계를 정하여 올렸다. 1397년 명나라의 사은사가 가지고 온 자문(咨文)에서 명나라는 그를 '조선의 화(禍)의 근원'이라고 지적했다. 동시에 조선조정에 정도전의 해임과 요동 정벌을 중단하라고 경고했다. 요동 정벌을 목적으로 명나라와 싸우기 위해 왕족들과 여러 호족으로부터 몰수한 사병들을 새로 신설한 의흥삼군부에 병합한 뒤 그가 지은 진도(陳圖)에 따라 대대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정도전의 개혁과 명나라와의 전쟁 준비는 같은 개국공신인 조준 등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끝내 결별하게 되고 만다. 그해 4월 설장수와 권근을 탄핵하려 했다가 실패하고 왕이 불문율로 부쳤다. 바로 정도전은 남은과 함께 6월 확보한 병력으로 한양에서 진도(陣圖) 훈련을 하면서 태조 이성계에게 출병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조준의 강력한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그해 12월 다시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주군(州郡)의 구획을 확정하고 성보(城堡)를 수리했으며, 비밀리에 사람을 파견하여 평안도, 함경도 일대의 인구 수와 군관(軍官) 수를 점검하고 되돌아왔다. 그해 10월 가례 도감(嘉禮都監) 제조에 임명되었다. 1398년초 그는 왕에게 상무정신을 함양할 것을 건의하고 병법과 진법 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정벌의 준비를 마무리한다. [편집] 죽음
정도전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이방석을 세자로 세운 일로 인해, 이방원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이방원은 그가 한씨 소생의 모든 왕자들을 궁으로 불러 들인 후에 신의왕후 죽일 계락을 세웠다고 누명을 뒤집어 씌워 살해하였다.[6] 그러나 이방석의 세자 책봉은 정도전이 아니라 태조 이성계가 한 일이고, 정도전이 왕자들을 암살하는 계략을 실제 세운 근거가 없다.[9] 음력 8월 그는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자신의 아들들을 변방으로 보낸 것을 인용하여 이방원은 전라도로, 이방번(李芳蕃)은 동북면으로 보내야 된다고 건의하여 태조의 승인을 얻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파견을 거부하고 민무구, 민무휼 등과 함께 정도전 암살을 기도한다. 1398년(태조 7) 음력 8월 26일 밤 남은의 별장에서 술을 마시다가 이방원(태종)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 정도전은 그때 송현에 있는 남은의 별장에서 남은, 심효생 등과 함께 이방원(태종)의 사병에게 무참히 살해되었다. 태종은 정도전이 세자 이방석(芳碩)에게 당부하여 먼저 난을 일으켰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켰다고 하나 실은 태종이 정권을 잡기 위하여 일으킨 변란으로 희생된 것이다.
도담삼봉에 있는 정도전 동상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최후에 이르러 정도전은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삼봉집에는 그가 이방원의 칼에 맞기 직전 자신의 삶을 조롱하는 ‘자조(自嘲)’라는 이름의 시를 남겼다고 한다.
이때 두 아들 정영과 정유(鄭游)는 아버지를 구하러 달려다가다 살해되고, 얼마 뒤 조카 정담(鄭澹)은 큰 아버지와 사촌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집에서 자살했다. 맏 아들 정진은 삭탈당하여 수군으로 충군당했다. 그에게는 종친과 공신들을 모해(謀害)하고 왕자들을 모함하여 살해하려 했다는 죄명이 쓰고 억울하게 피살 당하였다. [편집] 사후정도전의 묘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봉화정씨 을류보에 경기도 광주(廣州) 사리현(士里峴)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柳馨遠(1622-1673)의 ‘동국여지지(東國輿之地)’ 과천현조에는 현동북 18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5] 정도전과 그 일가는 1398년 음력 8월 태종(이방원)에 의해 몰살당하였으나, 맏 아들 정진만 살아 남아 수군으로 충군되었다가 뒤에 조영무, 안경온 등의 건의로 복직하여 태종 11년에 판 나주목사로 중용되어 세종 대에 형조판서를 역임하었다. 1765년정조는 정도전의 《삼봉집》을 간행하여 사고에 수장하였다. 1865년(고종 2년) 9월 조대비의 유시로 복훈되었다. 1865년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고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을 인정해 그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5] 또한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정도전을 복권하고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뒤 고종은 후손들이 사는 경기 양성현(안성군 공도면, 평택시 진위면)에 사당을 건립하였다.[11] 고종은 공의 위업을 기려 유종공종(儒宗功宗) 현판을 특필하여 하사하였다. 사당은 1986년 3월 향토유적 2호로 지정되었다.[11] [편집] 현대고종 때 불천지위(不遷之位)에 추대되었고, 1872년(고종 8년) 왕명에 의해 그의 묘소가 실전되었다 하여 사판으로 그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12] 1897년 대한제국 수립 이후 개국공신으로 공식 복권되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서는 정몽주를 충절의 상징으로 추상함으로서 다시 그에 대한 폄하가 시도되었으나 1990년대 이후 재평가 여론이 나타났다. 2003년 삼봉 정도전 기념사업회가 출범하였다. 2003년 11월, 2007년 12월 정도전 재평가와 그의 학문 연구를 위한 삼봉학 학술회의가 열렸다.[13] [편집] 가족 관계
[편집] 주요 저작[편집] 저서
[편집] 편저와 역서
[편집] 작품
[편집] 사상“재상의 나라”를 꿈꾸었던 정도전은 훌륭한 재상을 선택하여 그 재상에게 정치의 실권을 부여하여 위로는 임금을 받들어 올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신하들을 통괄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중책을 부여하자고 주장하였다. 즉, 정도전은 임금은 단지 상징적인 존재로만 머물고 나라의 모든 일은 신하들이 회의를 거쳐 결정하는 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다. 태조 때의 정치는 태조와 그의 신임을 받은 정도전 등 소수의 재상이 이루었다. 한편 조선은 각 지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중앙집권 관료국가”가 되었다. 이것은 이전까지 지방 세력을 인정하는 봉건국가와는 비교되는 정체였다. [편집] 경제론그의 경세론(經世論)은 《조선경국전》(1394)·《경제문감》(1395)·《경제문감별집》 등에 제시되어 있다. 조선왕조의 통치규범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조선경국전》은 각국과 각 시대의 법령과 규정을 참고한 것이 주목된다. 《주례 周禮》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체계와 과거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빌려오고, 한당(漢唐)의 제도에서 부병제(府兵制)·군현제(郡縣制, 守令制)·부세제(賦稅制)·서리제(胥吏制)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있다.[14] 외국의 사례로는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 大明律》을 빌려왔다. 그는 여말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토지균분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그 해결책으로서 민구수(民口數)에 따른 토지재분배와 공전제(公田制) 및 10분의 1세의 확립, 공(工)·상(商)·염(鹽)·광(鑛)·산장(山場)·수량(水梁)의 국가경영을 실현시키려고 하였다.[14] 그의 경세론은 자작농의 광범한 창출과 산업의 공영을 통해서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능력에 토대를 둔 사 위주의 관료정치를 구현하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의 개혁안은 상당부분이 법제로서 제도화되었지만 그 모두가 실현되지는 못하였다.[14] [편집] 정치론과 인재 채용
《경제문감》은 재상·감사·대간·수령·무관의 직책을 차례로 논하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14]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하였으며, 실제로 혁명이론에 입각하여 왕조교체를 수행하였다.[14] 그는 성리학적 왕도 정치와 패도 정치의 사례를 제시한 후, 패도 정치를 하는 군주는 역성혁명이나 기타 수단에 의해 폐위될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또한 군자와 소인의 존재를 역설하여 군왕은 군자들을 등용하여 올바른 정치를 수행해나가야 된다고 봤다.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제도는 재상을 최고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지배체제이며, 그 통치권이 백성을 위하여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사상을 강조하였다.[14] 이는 일종의 내각에 의한 정국운영론으로, 그의 재상 중심, 신권 중심의 정치이론은 후일 이방원 집권 후 폐지되었다가, 다시 세종과 문종의 연이은 죽음 이후 김종서, 황보인 등에 의해 부활된다. 이를 의정부 서사제라 한다. 그는 사농공상의 직업분화를 긍정하고, 사를 지배층으로 생각하였으나, 사의 직업은 도덕가·철학자·기술학자·교육자·무인 등의 역할을 겸비해야 하고 사에서 능력위주로 관리가 충원되어야 한다고 믿었다.[14] [편집] 평등 사상그의 사상 중에는 적서(嫡庶)나 양천(良賤)과 같이 혈통에 의한 신분차별을 주장하지 않은 것이 주목된다. 그가 노비 출신이라는 정적들의 왜곡과는 달리 그는 유배생활을 전전하며 목격한 노비와 하층민의 참상에 분노했고 이것이 곧 역성혁명의 계기가 되었다.[14] 그러나 사농공상에 따른 신분 차별을 당연하게 여겼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한계를 갖고 있다. [편집] 평가[편집] 당대의 부정적 평가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그의 성격을 "그러나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또한 겁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고자 하여, 매양 임금에게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기를 권고하였으나, 임금은 모두 듣지 않았다.[15]"고 하였다. 이는 그를 폄하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그는 스승인 이색 외에 자신을 공격한 정몽주, 우현보 일족 등을 몰살시키기도 했다. 신숙주는 그가 죽은 것은 운수소관이지만 건국공로에 있어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다고 평하였다. 그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었고, 한성부의 각 전각과 궁궐의 이름을 지은 인물이다. 그러나 사림에 의해 비판을 받았는데, 이는 그대로 수용되었다. 그에 대한 비판이나 부정적 견해가 일반화된 데에는 그가 죽은 후 정적들의 대거 복귀로 이색, 정몽주의 정치적 승계자인 고려 유신그룹과 사림파와 정몽주를 충신의 표본으로 현창함으로서 정도전을 격하하려는 이방원의 의도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이방원, 조영규 등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러나 정도전, 남은 은 이성계를 도와 실질적으로 조선을 건국했다. 반대로 정몽주에 대한 현창화 작업은 그를 제거한 이방원이 정도전을 격하할 의도와, 그의 충신 이미지를 부각시켜 왕조에 저항하는 세력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등 정치적 효과를 노려 충절의 표상된 것이다. [편집] 후대의 긍정적 평가후일 조선 정조가 그의 문집을 간행한 이래 1863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복권되고 사당에는 유종공종이라는 현판이 내려졌다. 그뒤 고종 때 문헌의 시호가 내려지고 복훈되었다. [편집] 방송[편집] 정도전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다큐
[편집] 같이 보기[편집] 관련 서적
[편집]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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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古七現三 원문보기 글쓴이: momo2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