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원유염(元惟琰)>대부는 시중공계 시조 대접?
시중공계 ≪계사보(癸巳譜)-2013≫ 2권 자손록 1쪽에 일세(一世) 시조 <원익겸(元益謙)>대부 바로 앞에 <원유염(元惟琰)>대부를 기록해 놓았으니 시조 <원익겸(元益謙)>대부 보다 좋은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누가 시조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원익겸(元益謙)>대부가 시조라면 오해 살만한 군더더기는 기록하지 말아야죠. 그리고 혈통관계를 기록하는 것이 족보인데 그것을 기록하지 않고 있으니 <원유염(元惟琰)>대부는 <원익겸(元益謙)>대부의 형(兄)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시조 하나 조차도 분명하게 기록하지 못한 ≪계사보(癸巳譜)-2013≫, 그래서 족보가 아니라, 『시중의 삼류 잡지와 무엇이 다르랴!』라로 된 것입니다.
<뒷이야기>③
종사연구위원회를 조직하고 처음으로 올라온 안건이 <원익겸>시조를 부정하고 <원유염>을 시중공계 시조로 바꾸기로 협의가 된 것처럼 공문으로 발송하기까지 했으니, 이에 연구자가 심한 저속한 용어까지 써가면서 유인물로 항의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원주의 모전교장선생님의 만류로 사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유염>으로 시조를 바꾸는 것은 저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원유염>에 대한 기록을 그대로 두면 두고두고 논란이 일어날 수 있으니 이번에 새로 만들 족보에는 아예 <원유염>을 삭제해 버리자고 주장했으나, ≪華閥譜≫를 무슨 큰 보물인양 신주처럼 믿고 있는 『시중공계 힘깨나 쓰시는 분』은 다음과 같이 절대로 삭제할 수 없다고 ≪癸巳譜-2013≫, 1권 p.10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었습니다.
『(먼저 元惟琰에 대한 기록을 그대로 기록해두고) 景夏公의 이러한 설명(원유염에 대한 기록)은 270여연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섯 번의 修補를 거듭하면서도 조금의 흔들림이 없이 이어져 왔으니......』라고 주장하면서 <원유염>에 대한 기록을 삭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270여년 가까이 기록해둔 <원익겸>시조를 <원유염>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어떻게 설명하나요. 이러한 것을 矛盾된 주장이라고 합니다.
<참고(參考) 자료(資料)>
※元鍾石 著, ≪華閥譜에 대한 바른 이해≫, p.13.
≪화벌보(華閥譜)≫

≪화벌보(華閥譜)≫에 <유염(濡染)>은 <익겸(益謙)>의 부(父)로 기록되어 있으니 <유염(惟琰)>이 시중공계의 시조라고 주장합니다.
≪화벌보(華閥譜)≫를 인정하면 시중공계는 <원극유(元克猷)>의 후손이 되어버립니다.
≪화벌보(華閥譜)≫에는 <원극유(元克猷)>를 원주원씨(原州元氏) 시조로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시중공계(侍中公系) 시조는 <원극유(元克猷)>가 되어야지, 어떻게 <원유염(元惟琰)>이 시중공계(侍中公系) 시조가 될 수 있는지요. <원유염(元惟琰)>을 <원익겸(元益謙)>의 부(父)로 기록 되어있으니, 그 계대관계만 기록해 두었으니, <유염(濡染)>은 <익겸(益謙)>의 부(父)로 선대(先代)로 인정할 수는 있지만 이를 가지고 시중공계(侍中公系) 시조(始祖)라고 근거로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원성백계(原城伯系)의 족보와 비교해보면 <원극유(元克猷)> 이 외의 다른 후손은 하나도 일치하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원성백계(原城伯系)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