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꽃 필 즈음 (장계순)
"들판이 온통 횐 꽃 천지더라고… 그 꽃 물결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얼마 전 P.E.I
(Prince Edward Island) 에 다녀온 한 친구가 전한다. 그곳은 캐나다에서
감자가 가장 많이 나는 주(州)다. 루시 몽고메리의 ‘빨간 머리 앤’ 이란 작품의 배경이 된 그 고장은 여름철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아직 가보진 못했지만 감자 꽃이 바닷바람에 일렁이는 풍경이 얼마나 장관일지는
미루어 짐작이 간다. 나도 올해 뒷밭에 감자를 심었다.
한 번도 내 손에 호미를 쥐여주지 않았던 아버지, 그분의 어깨너머로 보았던 기억을 더듬어
감자 씨눈을 도려내어 심었는데, 열 개가량의 씨눈이 살아남아 마흔여 알의 작고 큰 알맹이를 거두었다. 어찌나 신기하고 대견스러운지 흙도 씻어내지 않은 채, 대나무 광주리에
담아놓고 부자가 된 기분으로 바라본다. 한창 감자 꽃이 필 때는 물도 많이 주어야 하고, 가늘고 약한 가지를 쳐주어야 한다는데, 바쁘다 보니 그냥 지나쳤다. 저를 자주 들여다봐 줄 이 없이도 마른 흙 속에서 올망졸망 잘 자라준 것이 기특하기만 하다. 게다가 잡초도 제때에 뽑아주질 못했다. 지난 봄 이 집으로 이사
온 후, 작은 텃밭을 일구어 보려던 참에, 마침 건너편 이태리언
이웃이 거름을 거저 주겠단다. 열 바렐(barrel)이나
되는 거름을 혼자 끙끙대며 실어 날랐건만, 그 거름 속에 강아지풀 씨앗이 실려 왔을 줄이야… 온 밭이 강아지풀 세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잔디만한 작은 키로 공손해 보이더니, 나중에는 대파만한
키로 뻣뻣하게 자랐다. 이젠 삽으로 땅을 뒤엎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보이는 대로 호미로 파내는 형편이다. 가장 가늘고 약해 보이는 부추는 아예 미처 굵어지기도
전에 스러질 것만 같다. 그럼에도 감자는 잡초를 제치고 무성한 줄기로 웃자라더니 알토란 같은 열매를
안겨주었다. 아마도 우린 어쩔 수 없는 인연인가 보다. 사람들은
나를 두고 강원도 태생이라고 감자바위라 부른다.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자랑스럽게 들린다. 비단 감자뿐만이 아니라, 바위같이 우직하고 미더운 사람이라는 뜻처럼
들려서 은근히 자부심도 생기기 때문이리라 얼마 전에는 다운타운 *세이트
로렌스 마켓에 갔다가 반 고흐의 헌 화집이 눈에 띄어 40불이나 주고 샀다. 순전히 ‘감자 먹는 사람들’ 이란 그림에 사로잡혀서다. 반 고흐 살아생전에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복사본이 고이 접혀 있다. “램프 불빛 아래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밀고
있는 손, 자신을 닮은 바로 그 손으로 땅을 팠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려고 했다. 그 손은, 손으로 하는 노동과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식사를 암시하고
있다.” 그림 속의 감자 먹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내가 자랄 때 보았던 가난한 농부 가족을 연상시킨다. 울퉁불퉁한
거친 손들이 드러난 농부들의 삶이 그대로 엿보이기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집 곳간에는 언제나 감자가 넘쳤을 뿐만 아니라, 한 번도 감자가 떨어진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긴 싸리나무로 울타리처럼
엮은 감자 우리에서 한여름 찌는 날씨에는 감자 썩는 냄새가 진동하기도 했다. 그 썩은 감자를 모은 여러
개의 큰 항아리들을 수돗가에 두고, 수십 번 물을 갈아준 후 햇볕에 말리면 녹말처럼 뽀얗게 된다.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친 감자녹말로 만든 송편의 쫀득쫀득함이란,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맛이 있어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어렸을 적에 질리게 먹었던 음식을, 어른이 되어서는 고개를 돌린다고 하는데 나는 그 반대다. 가령, 엄마가 손수 만들어주셨던 콩국수나 가자미식해, 고들빼기김치, 명태 코다리찜, 시래기 된장국 등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입맛이
당기는 음식들이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은 이렇게 담백하고 기름기 적은 것들인데, 엄마는 대부분 그런 음식을 자주 만들어주셨던 것 같다. 그 많은
식단 중에서도 단연 밥상에 빠지지 않고 매번 올라오는 음식이 감자다. 감자 부침, 감자조림, 감자 수제비, 감자채
볶음, 감자 된장찌개 등등, 감자 위주의 반찬이 많았다. 심지어 밥에도 넣었고, 그냥 찐 감자로 된장에 찍어 먹기도 했다. 이곳에서 결혼한 후에도 여고 시절에 배운 감자 크로켓을 아이들에게 자주 만들어 먹이곤 했다. 세 아이 등교시키기 바쁜 아침에도 감자를 강판에 갈아서 감자 부침 해준 적도 많았다. 그때 먹었던 감자 반찬을, 성인이 다 된 우리 아이들이 지금까지도
좋아하는 것을 보면 음식 선호도 역시 대물림인가 싶기도 하다. 얼마 안 되는 텃밭의 채소에다 매일 물을 주어야 한다고 극성을
떨 때마다, 물값이 더 나오겠다며 불평하는 남편을 뒤로하고 열심히 물을 준다. 어쩔 수없이 많은 물줄기가 잡초에게도 갈 수밖에 없다. 잡초 뿌리에
묻어난 흙이나 뿌려진 물조차 아까워 하면서, 새 감자 10파운드
짜리 3불이면 슈퍼마켓에서 살 수 있는 것을, 몇 알 안
되는 감자를 심어놓고 그 감자가 잡초를 이겨낸 후의 결실이 기뻐서 유난을 떠는 이유…. 바로 감자 사랑이다. 어쩌다 우리 집에서 감자가 떨어지면 불안해하는
내 증상을 보아도 그렇다. 누군가 날더러 돌아가신 부모님과 고향 이웃들이 더욱 그립고 보고
싶은 계절을 들라고 하면, 아무래도 난, 나와 감자를 나눈
추억을 떠올리는 ‘감자 꽃 필 즈음’이라고
꼽을 수 밖에…
*세인트
로렌스 마켓(St. Lawrence Market) 19세기 때 지은 건물로, 토론토 시내에 있는 일종의 재래(또는 전통)시장 같은 곳이다. 각종 식당과 신선한 고기와 생선, 빵, 치즈, 와인 등을
주로 파는 식료품 가게와 농부들의 농작물, 그 외에도 헌 책과 골동품을 파는 가게들이 있다. 가장 오래된 시장으로, 역사적인 유적지로도 이름이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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