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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
서해의 고깃배들로 흥청댔던 삼개나루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회장)
"찾으니 장강인데.
강 건너 은모래벌
벌 지나 뫼이온데.
뫼 넘어 구름일레.
천지의 봄바람이
불어 왕래하더라."
-이은상 노산 시조 선집 '삼개에서'
마포라고 하면 우선은 강을 떠올린다. 그 앞을 흐르는 강, 한강을 말이다. 그 강과 함께 머리 속에 그려졌던 것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수많은 돛단배들, 그리고, 배에서 뭍으로 부려지는 조기, 새우 등의 해산물들. 이처럼 마포는 포구로서의 영상으로 우리 눈 앞을 스친다.
□ 삼남 지방 향하는 수상 교통의 요충지
한강 밑을 가로지르는 지하철 5호선의 서울 서부 강변역인 마포역 일대는 6.25 전까지만 해도 '마포 종점'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일제 때부터 서대문쪽에서 오는 전차들이 애오개를 넘어 이 곳까지 와서 멈춰 손님들을 싣고 다시 시내쪽으로 들어가곤 했기 때문이다.
이 마포는 예로부터 남도를 왕래하는 수상(水上) 교통의 요지였다.
교통이 편리하여 삼남(三南)지방에서 올라오던 곡물을 저장하는 경창(京倉)이 있었고, 근처에선 조기, 새우젓을 비롯한 많은 수산물들이 거래되었다. 지금은 지하철 5호선의 줄기가 이 곳 땅 속 깊은 곳을 지난다.
마포는 삼밭이 있었던 강가라 해서 '삼개'라 불렀던 것이 '마포(麻浦)'란 한자식 이름으로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삼개'라는 이름이 나온 연유에 대해 학자들에 따라서는 다른 의견을 갖고 있기도 하다. '용산(龍山)'이라고 하는 산 밑의 동네여서 '산개'라 했던 것이 변한 이름이라고 하기도 하고, 여의도나 밤섬 같은 섬들이 보이는 곳이어서 '섬개'라 했던 이름이 변한 이름으로 보는 이도 있다. 마포는 '삼호(三湖)', '마호(麻湖)'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근처의 용호(龍湖0, 서호(西湖)와 함께 세 개의 물목이 있다 하여 '삼호(三湖)'라 했던 것이 '삼개'로 되고, 이것이 '삼마(麻)'자가 되어 '마포(麻浦)'라는 이름으로 변했다는 설도 있다.
교통 수단으로 선박이 중요하게 이용되었던 조선시대에는 한강이야말로 더없이 중요한 교통로였다. 이 때문에 한양 남쪽 지역을 흘러가는 한강은 수상 교통이 활발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배가 많이 닿던 5 곳을 '오강(五江)'이라 했는데, 뚝섬, 노량진, 용산, 마포, 양화도가 그것이다.
이 오강 중에서도 수상 교통 물량이 가장 많았던 곳이 바로 마포강이었다.
많은 해산물들이 모여들어 근처에는 이를 직거래하는 도가들이 즐비했다. 그 중에서도 새우젓가게들이 많아 이 근처만 지나면 찝질한 내음이 가시지 않아 '마포'라고 하면 대개 '새우젓 동네'로 알려져 왔다.
삼개나루에 닿은 것은 해산물만이 아니었다. 강원도나 충청도 내륙에서 강줄기를 타고 배나 뗏목에 실려 온 많은 목재, 곡식, 특산물 등이 부려지고, 이것은 '경강상(京江商)'이라고 하는 중매인을 통해 서울 소비자나 근처 시장으로 팔려 나갔다. 6 25 전까지만 해도 마포 일대에는 제재소가 많았는데, 이는 한강 줄기를 타고 마포 나루로 들어온 목재들을 납작납작하게 켜서 소비처로 보내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 위세 부렸던 삼개 삼주(三主)들
조선 말까지만 해도 이 번화한 나루터를 근거지로 삼아 위세를 부리거나 돈을 번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삼개의 주인 노릇을 했는데, 특히 객주(客主), 색주(色主), 당주(堂主) 등의 위세가 당당했다. 그래서 이들을 일컬어 '삼개 삼주(三主)'라고 불러 왔다.
객주들은 마포에서 나루에 들어온 물건들을 받아 보관하였다가 비쌀 때 파는 요령으로 떼돈을 벌어 왔다. 이들은 나루에 큰 창고까지 갖추고 여숙 시설도 마련해서 여관업까지 겸하여 나루의 터줏대감 노릇을 해 왔다. 금융업까지 손을 대서 일부 왕족이나 장안 세도가들의 돈을 도맡아 늘려 주는 일까지 했다. 객주들 중에서도 곡식의 저장과 판매를 맡은 미두(米豆) 객주, 물고기와 소금의 저장 판매를 맡은 어염(魚鹽) 객주의 위세가 컸다. 가끔씩 곡식이나 소금 등을 창고에 가둬 두고 풀지 않아 장안에 반찬거리 등이 동나게 만들었고, 그 틈을 노려 비싼 값으로 암거래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색주들도 객주 못지 않게 돈을 벌었다. 젊은 여자들을 몇씩 두어 돈있는 이들의 호주머니를 털기도 했다. 기창(妓娼)을 경영해서 산하의 기생들로 하여금 물건을 팔게 해서 그 이득금까지 챙겼다. '삼개 야경(夜景)'의 하나로 기생 무리가 손꼽힌 것을 보아도 이 곳의 기창이 얼마나 번성했는가를 알 수 있다. 높이 세워 올린 트레머리에 화장을 짙게 하고 치마깃을 걷어쥐고 넓적다리를 살짝살짝 노출시키며 등불을 들고 나루터의 손님을 찾아가는 기생 무리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당주는 쉽게 말해서 무당이다. 이 무당들도 삼개나루에서 그 위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이들은 뱃사람들의 안전무사(安全無事)를 비는 당고사를 지내 주고 돈을 벌었다. 그래서, 나루터 근처에선 이들의 푸닥거리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뱃사람들은 이들에게 그득그득 돈을 안겨 주었다.
지금의 마포대교 북단에 이태조(李太祖) 신당(神堂), 공민왕(恭愍王) 신당, 최영(崔瑩) 장군 부군당(府君堂), 남이(南怡) 장군 부군당 등이 모여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의 굿이나 푸닥거리 등으로 성세를 누렸던 삼개 당주의 흔적이다.
삼개 당주들은 당시에 자체 정화를 위해 풍류방(風流房)을 두기까지 했다. 삼개 무당들의 조합(組合) 제도라고 할 수 있는 이 풍류방에선 무당들이 기강과 풍기를 바로잡았고, 무당을 교육해서 그 질을 높였다. 만약 규약을 어기면 형틀에 매어서 혹독한 사형(私刑)까지 가하였다. 그래서, 삼개 무당은 규약대로 잘 움직이는 무리로 장안에 이름났고, 그 풍문으로 팔도의 배들이 모이는 이 곳의 선주(船主)들이 앞다투어 찾아들었다. 조선 말에 명성왕후(明成皇后)가 화상(畵像)을 오려 붙이고 좌시(左矢)를 쏘아 저주케 했던 무당도 삼개 당주 출신이었다고 한다.
□ 애오개와 큰고개로 짐 실어 날라
마포는 단순히 나루로서의 생활 문화가 아닌, 향락 문화, 무속(巫俗) 문화까지 지녔던 곳이다.
한강에는 예부터 많은 나루들이 있었지만, 그 나루들 중 마포가 비교적 궁성(宮城)과 장안에 가깝고도 운반이 편리해 전국에서 배에 실려 온 많은 물산들이 이 나루에서 부려졌다.
배에서 내려진 물건들은 장안으로 주로 실려 갔는데, 수레가 많이 이용되었다. 강나루 주민들 중에는 지게를 지고 와서 땔나무나 반찬거리를 사 가지고 가기도 하였다.
마포 나루의 물건들이 장안으로 실려 간 길을 지금의 길과 비교해 살펴보면 대충 세 갈래로 나타난다.
하나는 마포로에서 충정로를 거쳐 서대문을 통과해 새문안길로 이어지는 길이고, 또 하나는 마포로에서 서소문로를 통해 서소문을 통과하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만리재를 넘어서 남대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마포에서 남대문쪽으로 가려면 만리재길이 지름길이었으나, 고개가 너무 높아 애오개(애고개)로 돌아 넘는 경우가 많았다. 예부터 지금의 만리재를 '큰고개', 즉 '대현(大峴)'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작은 고개의 뜻인 '애고개'의 상대적인 땅이름이라 할 수 있다.
큰고개(만리재)와 애오개는 옛날엔 짐 실어 나르는 짐꾼들의 소리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수레 소리, 지게 작대기 소리, 거기에 힘겨워 내뱉는 짐꾼들의 거친 숨소리까지.
마포는 서울 사람들이 즐기는 장소로 많이 이용되기도 했다.
용산의 산자락이 강물에 드리워져 있고, 주변 풍경이 좋아 도성 내 사대부(士大夫)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강 위를 오가며 뱃놀이를 즐겼다. 그래서, 마포는 조선 초기 '경도십경(京都十景)', 즉 서울에서 경치 좋은 열 군데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여름에는 사람들이 한강 물 위에 돛단배를 띄우고 물길따라, 뱃길따라 여유롭게 떠다녔고, 겨울이면 강의 얼음판 위에서 팽이 치는 아이들의 모습이나 꽁꽁 언 한강 얼음 벌판을 건너다녔던 사람들의 모습은 지금의 5.60대 서울 사람들 머리에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예전부터 손꼽아 온 '마포팔경(마포팔경)'은 다음과 같다.
① 용호제월(龍湖霽月)
비 개인 날 저녁 용산강에 뜬달 모습
② 마포귀범(麻浦歸帆)
삼개나루로 돌아오는 돛단배들의 풍경
③ 방학어화(放鶴漁火)
방학교 부근 샛강에서의 밤낚시 등불 풍경
④ 율도명사(栗島明沙)
밤섬 주변에 쌓인 고운 백사장
⑤ 농암모연(籠岩暮煙)
농바위 부근의 인가에서 저녁 짓는 연기 오르는 모습
⑥ 우산목적(牛山牧笛)
와우산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목동들의 피리소리
⑦ 양진낙조(楊津落照)
양화진 강 하늘에 붉게 물든 낙조와 노을
⑧ 관악청람(冠岳晴嵐)
맑게 개인 날 관악산에 어른거리며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 마포 근처의 비탈 동네 도화동
마포 나루터에 가장 가까이 있는 동네가 '도화동(桃花洞)'이다.
도화동은 옛날에 '복사골'이라고 했던 곳이다. 물론, 이 이름은 이 곳에 복숭아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붙은 것으로, 이 곳의 복숭아밭은 용산 산등성이로 이어져 그 너머 산비탈 동네에도 '도원동(桃園洞)'이란 이름을 낳게 만들었다.
도원동은 마포구가 아닌 용산구인데, 이 곳 과수원 아래쪽으로는 일제 때에 일본 기생들의 주거지가 있어서 그 옆의 고갯길인 '새창고개'를 '사창고개'로 이름이 바뀌게도 만들었다. 지금의 백범로 옆에 있는 '새창고개'는 원래 '새창고고개'란 이름이 줄어서 그 이름으로 된 것으로, 원래 근처에 새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땅이름이다. 그 옆에 지금도 '새 창고 동네'란 뜻의 '신창동(新倉洞)'이 있다.
도화동 산비탈에는 '박우물거리'라는 곳이 있었다.
이 곳에는 돌 틈에서 졸졸 흘러나오는 물을 쪽박으로 떠담던 우물이 있었다. 사람들이 물을 뜨러 많이 다니던 그 앞의 길을 '박우물거리'라고 했고, 박우물 근처의 마을은 따로 '박우물께'라고 불렀다. '박우물거리'는 지금의 위치로는 불교방송 뒤쪽 마포 우성아파트 바로 옆으로, 지금은 그 곳에 2차선 정도의 길이 나 있으며, 지금도 그 우물터가 잘 보존되어 있다.
복사골의 바로 위쪽이 서울 우백호의 끝부분인 용산(龍山)의 머리 부분이다. 지금 용산성당이 있는 곳쯤이다.
지금은 도화동이 마포구에 속해 있지만, 도성 밖 대부분이 경기도에 속했던 일제 때는 경기도 고양군의 용산면(龍山面)이었다. 지금의 용산구 일대뿐 아니라 마포구 일부도 옛날에는 용산면에 속했었다. 그래서, 지금의 마포구 도화동 일대는 물론이고, 그 북쪽의 염리동(鹽里洞)까지 용산면이었다. 염리동은 마포에 들어온 생선을 절이는 데 필요한 소금을 공급해 주는 소금장수들이 많이 살았었다. 이 곳의 일제 때 행정구역상의 이름은 경기도 고양군 용산면 염리(鹽里)였다.
염리동 (네이버 자료)
일제 말기에 마포구가 생기면서 용산구 일부였던 이 곳은 서대문구 애오개 서쪽의 마포 지역을 따로 묶어 마포구로 하면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
□ 두 용산이 계속 기를 뿜어 이룬 새 명당
마포의 도화동과 공덕동 근처에는 두 개의 산이 있었는데, 하나는 단룡산(單龍山)이고, 다른 하나는 쌍룡산(雙龍山)이다.
단룡산은 지금의 홀리데이인서울(구 가든호텔) 뒷산, 즉 지금의 용산성당이 위치한 곳의 산이다. 이 산을 줄여서는 '용산(龍山)'이라고 불러 왔는데, 지금은 그 곳에 지금 우성아파트, 삼성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다.
쌍룡산은 지금의 동도고교 뒤쪽의 산으로, 지금 이 곳엔 한국인력공단을 비롯한 큰 건물들과 많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옛 사람들의 애환이 깊게 밴 마포, 새우젓 내음과 장사꾼들의 텁텁한 목소리가 뒤범벅이 되어 엉켰던 삼개나루는 지금은 큰 다리와 높은 빌딩들이 우뚝 우뚝 들어서서 옛날의 정취를 전혀 느낄 수가 없다. 그나마, 한강가로 강변로가 지나고 있고, 램프 시설 등이 휘휘 돌아들고 있어 마포에 찾아와도 이제는 강 구경조차 할 수가 없다.
다만, 토정동 용강아파트 앞에 '삼개나루터'임을 알리는 표시하는 표석(標石) 하나만이 이 곳이 강가 포구였음을 알게 해 줄 뿐이다.
그러나, 마포는 지금 삼(麻)처럼 빌딩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다.
삼은 웬만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그래서, 마포 일대에 건물들이 이처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두 용산(단룡산과 쌍룡산)이 기(氣)를 계속 안겨 주고 있는 마포는 앞으로도 더욱 새롭고 멋지 얼굴로 치장되어 갈 것이다. /// (글 ; 배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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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마포와 용산 |작성자 배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