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2호 교회로 1905년 1월에 설립된 남문교회에 대한 랭킨선교사의 기록
우리는 첫 번째 것이나, 일등은 기억하지만 이등이나 두 번째 것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1892년 말에 조선에 도착한 미국남장로회 선교사들이 동학농민투쟁과 청일전쟁이 끝난 후에 전주에 비로소 내려왔다. 전주 최초의 교회는 은송리에 세워진 교회이지만 전주 이 씨 집안의 집요한 반대로 선교사들은 그 땅을 내주고 오늘의 예수병원과 신흥학교가 있는 화산으로 터를 옮겨 잡았다. 선교 스테이션 이주 후 선교사들이 최초로 세운 교회가 오늘날 서문교회로 당시는 이름이 서문밖교회이다. 두 번째 교회는 남문교회이다. 남문 부근에 거주하는 교우들이 남문 인근에 기도처를 만들었으며 기도처를 중심으로 거리 전도를 열심히 하였다. 남문과 남부시장은 그 유명한 이거두리가 날마다 전도했던 곳이기도 하다. 여러 조사들과 마로덕과 전킨과 테이트 선교사를 비롯한 많은 분들의 전도로 그 기도처가 남문교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오늘날 남문교회는 싸전다리에 가까운 한옥마을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나 사람들의 눈길을 별로 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남장로회의 전주교회 선교사와 기장과 예장 분리의 역사적인 사건에 깊은 관련이 있으며 박정희 정권을 최초로 독재정권으로 규정하고 이에 맞서 투쟁한 교회가 남문교회라는 사실을 알면 사람들의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다.
이런 남문교회와 창립자인 최국현 장로님에 대한 랭킨 선교사의 기록이 있다.
기전여학교 교장이었던 랭킨 선교사는 자신의1907년 3월 30일 편지에 후에 남문교회 장로가 되는 최장로님의 기름집을 방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1911년 1월 10일 편지에서는 교회 이름과 남문교회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
다음은 ⌜기전여학교 교장 랭킨 선교사 편지⌟ 43쪽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남고산성에서) 오는 길에 우리는 기름집을 방문했습니다. 기름은 우리가 (?)라고 부르는 것에서 만들어집니다. 씨앗을 갈아서 자루에 넣어둡니다. 그리고 아주 큰 추가 경사면을 타고 자루 위로 내려옵니다. 기름 색은 우리나라의 면화 원유기름과 거의 같은 색이며 기름의 원료인 식물은 고향에 있는 SC 곡물 중 하나와 비교할 수 있겠네요.” 43쪽
다음은 1911년 1월 10일에 동생 윌에게 써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흥미 있을 사진을 몇 장 보낸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목화씨로 기름을 만들지 않고 ‘BUNNY’(?) 씨를 이용해서 기름을 만든다. 우리 장로들 중의 한 명이 아주 부유한 기름장수인데 여기는 그의 공장이란다. 들보 주위를 미끄러져 내려오는 여러 개의 무거운 추에 의해서 압력이 전달된다. 이 방앗간의 주인은 작년에 있었던 여자성경학교를 후원했었다. 그는 올해 작년과 같은 수준의 혹은 더 많이 후원을 하는데 작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다. 그 사람은 새로 세운 남문교회의 대들보라서 그 교회를 재정적인 면에서 받쳐줘야 한다. 그의 이름은 최(CHAY)다.” 243쪽
랭킨은 1907년 조선에 도착하여 1911년 8월에 소천 하였다. 그는 교육 전문인 선교사로 전주에 왔으며 기전학교의 일대 교장으로 건축과 행정의 기초를 닦았다.
우리는 그의 편지로 당시의 남문교회 설립연대와 최국현 장로의 사업과 복음전파를 위한 그의 진지한 노력과 헌신 그리고 선교사들과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편지를 남겨주신 랭킨 선교사님과 그의 가족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남문교회가 한옥마을 끝자락에서 묵묵히 있지 않고 역사적인 교회로서 새롭게 자리 매김이 되기를 남문교회와 전주시와 전주 시민에게 기대해 본다.
2024년 11월 5일 자시
우담초라하니
참고문헌
랭킨 저, 송상훈 번역, ⌜기전여학교 교장 랭킨 선교사 편지⌟ , 보고사,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