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문단속은 틀렸다(요나서2장)
1 요나서는 여호와의 일관된 의지와 인간 요나의 거부가 적혀 있습니다. 거부의 이유는 여호와께서 ‘니느웨’에 회개할 것을 외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니느웨는 우리로 따지면 ‘과거 일제’와 같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나에게 하나님의 뜻은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 그들에게 회개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하셨고, 그들이 회개하면 반드시 구원할 것이란 의지를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지가 강하게 발동될수록 요나는 더 깊이, 더 멀리 반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요나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니느웨가 아니라 반대편인 다시스로 도망가는 배를 탑니다. 완전한 거부인 것이죠.
우리도 어떤가요? 우리도 하나님의 일관된 구원을 거부한 채 요나처럼 반대로 흘러가진 않나요? 심지어 그것이 정의라고 믿으면서 말입니다. 아니 눈 가려진 아이처럼 각자의 칼날을 휘두르며 살고 있지는 않냐는 것이죠.
이처럼 요나의 선택은 우리의 선택과 닮았습니다. 이 시간 요나가 니느웨를 향해 닫았던 마음 문을 주님께서 어떻게 열게 하셨는지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저는 요나를 대하는 하나님의 자세를 관찰했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마치 어린아이가 차도로 달려갈 때. 부모가 위험을 예비하는 것처럼 우리를 그리 대하신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왜 그럴까요? 1장에서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니느웨가 아닌 반대쪽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그리고 바다에 던져지게 되었는데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삼키도록 하셨죠.
우리의 입장에서는 큰 물고기에 잡아 먹힌 일은 불행입니다. 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일은 ‘보호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또 요나의 사명을 회복시키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여러분과의 샅바 싸움에서조차 져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이기는 건 언제나 어린 자녀가 되도록 하신다는 것이죠. 하지만 동시에 이 사건으로부터 아이를 지켜낼 방법 또한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작은 일은 작은 방법으로, 구원에 관련된 일은 아들이신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완전히 준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물고기 뱃 속에 들어간 일은 분명 불순종의 결과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다른 뜻이 숨겨져 있는 것이죠. 특별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자를 대하시는 주님의 주도면밀하심이 보여집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도구로 저와 여러분을 사용하실 때,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실패와 좌절까지도 사용하시는 분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결과적으로 요나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 니느웨에 회개를 요청하였고, 그 결과로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했을 뿐 아니라. 요나도 ‘박넝쿨’이란 작은 소재를 통해서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3. 요나서 마지막 장은 결국 니느웨에 회개하라를 선포하고, 니느웨 백성들이 진짜로 회개하기 시작하자 심술이 나고 화가나서. 성읍 동편에 움막을 짓고, 그것을 지켜보는 요나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물론 그 성읍을 지켜보는 것은 그들의 행동에서 요만큼의 불의라도 발견된다면, 하나님께 따져 묻기 위한 일이었죠.
그런데 요나에게 사건 하나가 발생하고 맙니다. 전날에 자기를 시원하게 해주던 박넝쿨이 간밤에 그만 시들어 죽고 말아서, 지금은 너무 뜨거워 살 수가 없기 때문이죠.
이때 요나는 짜증이 날 대로 나서, 하나님께 더 크게 대적합니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말이죠.
그런데 이때 하나님은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작은 박넝쿨 하나 때문에 그렇게 화를 내느냐? 너는 하룻밤에 말라 죽는 이 박넝쿨도 그리 아끼면서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 좌우를 알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명이나 되는데 내가 어찌 아끼지 않겠느냐?” 라고 말이죠.
저는 이 말씀에서 제 안에 여러 가지 편견과 문단속들을 발견했습니다.
또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담장들도 말이죠.
4. 저는 지난달 정기노회가 끝나고, 혼자 좀 쉬고 싶어서 진안에 작은 영화관을 찾았습니다. 영화관에 일본 애니메이션 하나가 눈에 띄었고, 유명 작가라고 해서 한 번 보게 되었습니다.
영화는 2011년 일본을 강타한 쓰나미를 소재로 하고 있었습니다. 15미터가 넘는 빌딩 높이의 파도가 해안과 도시를 쓸어버린 사건이었습니다.
이때 스즈메는 가족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고민하던 이모의 결단으로 이모와 시골 해안가에서 살게 되죠. 하지만 자연재해의 고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십 년 전에는 분명히 사람들이 살던 도시였지만, 지금은 흉물처럼 아픔으로 사람들에게 잊혀지길 바라는 장소가 되버리기 때문이죠.
어쨌든 영화를 보며 저는 남모르게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일본 애니메이션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한국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세대들이 극도로 미워하는 나라이고, 저 역시 일본에 대해 결코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5. 그러나 영화를 보며 일본인들에게는 너무 많고, 우리에게는 적은 것이 뭔지 알게 되었습니다. “재난”이죠. 또 가족을 너무 황망하게 잃어 왔다는 것이죠.
그리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재난 속에서 일본인들의 내면이 어떤 불안에 시달리며 살아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언제 불행이 닥칠지 모르는 불안보다 더 지독한 ‘포기’라는 감정을 말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포기’나 ‘불안’ 대신에 어릴 때 부모를 재난으로 잃은 스즈메를 통해 ‘상처’까지도 안고 성장하는 주인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상처가 되었던지 완전한 극복은 바로 나를 아프게 했던 ‘이웃’이나 ‘사건’에 대해서 조차 평안을 빌어주는 일임을 깨닫게 해주더군요.
그래서 저는 오늘 요나서 말씀을 준비하며, 우리 사회와 제 자신이 극복해야 할 감정과 닫힌 문이 떠오른 것입니다.
6. 저와 여러분은 어쩌면 요나처럼. 마음을 굳게 닫고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잊기 힘든 과거사. 다시 또 침략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두려움과 상처로는 이 싸움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요. 또 ‘끌어 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단단한 사람은 화가 난 사람이 아니라.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7. 하나님도 저와 여러분이 상처와 과거에 머물며 미래에 소망을 두지 못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고, 대상이 되었던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십자가의 복음의 의미에는 “완전한 용서”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완전히 배신당했고, 완전히 버려졌습니다. 하나님과 동일하시나 인간으로 오셔서 자신이 지은 인간에게 배신 당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진리는 용서였습니다. 분별 있는 진보였습니다. 순종이었습니다.
8. 그래서 오늘 요나와 우리 사회가 ‘용서’를 잃고, 끝없는 과거만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예를 들어 오늘 읽은 요나서 2장에서 요나도 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되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다시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된 것이죠. 자신이 이 불행을 경험하게 된 것이 모두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집중하지 못한 결과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기 뱃 속 밖에 있으나, 그 안에 있으나 실상 하나님 없이는 세상에서 가장 어둡고 무거운 곳에서 사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고백하는 기도였죠.
9 그러나 이 위대한 고백 뒤에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선포한 회개의 복음은 여전히 니느웨를 향해 닫아 둔 마음에서 나온 빈소리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방금 전의 기도가 무용지물처럼 보여질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쉽게 변하지 않고, 미워하는 일에 더 빠른 우리를 닮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요나의 사건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요나와 니느웨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요나와의 샅바 싸움에서 자신의 한쪽 다리를 내주시고도 승리를 얻으셨습니다. 왜냐구요? 역사의 주님은 정의와 자비 두 다리로 운행하시는데, 요나는 끝까지 하나님의 정의의 다리 하나를 붙들고 씨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명 정의의 역사는 뒤로 물러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랑의 다리로 요나를 넘어트린 일은 작은 박넝쿨의 교훈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작은 넝쿨을 아끼던 요나의 마음을 들춰내셨고, 하물며 12만의 니느웨 백성들이겠느냐? 라며 그의 마음을 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나는 분명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문단속은 이번에는 틀렸던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요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의 두 다리가 운동하실 수 있도록.
우리 안의 가능성이라는 용서의 문이 활짝 열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