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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부 지역 지연 작전(함양-합천 전투, 하동-진주전투)
1. 개전이래 작전 진행 개요
1950년 6월 25일 일용일 아침 38도선 전역에서 전쟁의 불꽃이 튀었다.
병력 13만 5천명, 포 600문, 저나 150대의 북한군이 병력 9만 8천명, 포 89문의 한국군을 공격한 것이다.
가. 38선전투
개전 첫날 한국군의 방어진지를 돌파하고 서울은 개전 4일째인 28일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 함락 당하고 말았다.
나. 미군의 작전개시
개전 이틀째인 26일부터 미 극동 해.공군은 지원작전을 개시하였고, 7월 1일에는 미 육군이 작전에 투입되었다.
미국의 작전목적은 남한에서 북한군을 격퇴하는 거시며, 이를 위해 최초로 증강된 1개 사단으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계속해서 증강된 1개 사단을 인천에 상륙시켜 북한군을 협공하는 것이다.
다. 미 제24사단의 지연작전
"가능한 북쪽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여 반격작전에 유리한 지역을 확보한다"는 임무를 맡은 미 제24사단은 최초의 저지선을 평택-안성선으로 선정하고, 이에 대한 전초로써 스미스부대(공수된 부대는 보병 제21연대 1대대장으로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보병 1개 대대와 경포병 1개 포대로 편성됨)를 오산에 배치한다.
1950. 7월 5일 08시 16분 오산에서 미군 포병의 첫 탄이 발사됨으로서 사상 처음으로 북한군과 미군의 전투가 개시 되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전차공격에 돌파되어 사단의 저지선인 평택-안성선을 점령하고 있던 제34연대는 스미스부대의 패전에 영향을 받아 다음날인 6일, 싸워보지도 못하고 저지선을 포기하고 말았다.
다음 저지선을 금강선으로 선정한 미 제24사단은 후속부대의 도착시간을 획득하기 위해 차령산맥에서 북한군의 전진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대대단위로 점령했던 사단의 축차진지는 북한의 침투식 공격에 후방이 차단되고 정면은 전차에 유린되어 미 제24사단은 12일까지 사용 가능한 병력 4개 대대중 3개 대대를 잃었다.
7월 12일, 미 제24사단은 제19연대를 투입하여 실병력 3개 대대로 금강선을 점령하고, 한국군은 실병력 3~4개 사단으로 소백산맥의 저지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라. 미제8군의 지연작전
7월13일, 주한미군의 지휘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금강-소백산맥선을 학보하고,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시키며, 그 사이에 공세 이전에 필요한 병력을 집결하기로 계획하고 미 제24사단으로 금강선 방어를, 미 제25사단은 소백산맥선에서 작전중인 한국군을 지원하는 한편 일본 동경에서 준비중인 제1기병사단의 출동을 서둘렀다.
북한군 제3.4사단은 주공으로 미군의 허를 찔러 다음날인 14일에 금강을기습도하 하여 먼저 공주방면의 제34연대를 돌파하고, 이어 16일에는 대평리의 미 제19연대를 격퇴시켰다.
북한군의 전술은 항상 미군지지의간격으로 침투하여 후방을 습격하고, 퇴로를차단 격멸하는 정규전과 비정규전을 배합한 전술을 구사하였다.
예상 외로 금강선을 3일만에 돌파당한 제8군은 제24사단으로 대전을 확보케하고, 7월 18일 포항으로 상륙할 에정인 제1기병사단을 대전정면에 투입할 계획이었으나 대전은 이미 7월 20일에 북한군 2개 사단의 포위공격을 받아 함락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제24사단장 딘소장이 실종되고 전투력이 50%이하로 떨어졌으나 개전이래 최초로신무기인 3.5인치로켓포로 북한군의 소련제 T-34전차를 파괴하게 된다.
유엔군은 최후의 방어선을 낙동강선으로 결정한다.
이미 7월 8일에 맥아더 원수가 유엔군 사령관이 되고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맥아더 원수에 위임하게 되었다.
제8군은 미 제1기병사단을 영동정면을, 미 제25사단을 상주 정면에, 한국군에게는 함창-안동-영덕선을 각각 방어토록 하고 미 제24사단은 김천으로 이동시켜 군 예비로 했다.
따라서 영동에서 영덕에 이르는 160km 전선은 제 8군이 전개하지만 영동에서 대한해협에 이르는 120KM의 서측면에는 전투력이 약한 한국군밖에 없었다.
반면에 북한군은 미군이 증강되기 전에 부산을 점령하지 않으면 승리의 기회를 잃고 만나는 것을 알고 3개의 예비사단을 전선에 증강시켜 제8군의 정면을 공격하고 최정예 2개 사단으로 미군이 배치되지않은 서쪽 측면을 공격토록 했다.
이에따라 7월 말경에는 김천-상주-예천-안동-영덕선으로 진출하여 낙동강 도하작전을 준비했다. 그리고 미군이 없는 서측방에는 북한군 2개 사단이 부산을 목표로 호남지방을 빠른 속도로 공격하고 있었다.
제8군은 정면의 적에 대해서는 관심을기울였으나 이 측면의 적에 대해서는 실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작전은 3백~4백만의 피난민이 사태를 이루면서 남하중에 있고, 북한군 게릴라(공비)가 사방에서 암약하고 있는 가운데 북한군은 유엔군의 간격을 이용하고 아니면 피난민 대열에 끼여 유엔군 진지내로 잠입하여 유엔군의 병참선이나 통신망을 차단 하였다.
이로인해 유엔군은 테로,방하,파괴,습격 등을 당하여 미 제24사단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유엔군의 진지는 사방에서 총탄이 날아와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는데 이는 국민속에 게릴라가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의 한 고급장교가 "한국전쟁은 종류가 다른 전쟁이다"하였는바 유럽의 1,2차 세계대전시에는 미군은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는데 한국 땅에서는 게릴라와 간첩으로 습격만 받았기 때문이다.
2. 서측방 방어(함양-합천 전투,하동-진주 전투)
대전의 전투가 한창이던 7월 20일, 제8군 정찰기는 군산부근에서 남하중인 북한군 대부대를 발견했다. 하지만 북한군 제4사단의 광범위한 작전활동으로 오판하였고, 21~22일엔 비가 내려 정찰기가 뜨지 못해서 놓쳐 버렸다.
사실은 이때 북한군 제6사단이 우리 제7사 등 잔류 병력들의 저항을 돌파하고 7월 18일에 금강을 도하하여 19일에 군산, 그리고 20일에 전주에 진입하고 있었다.
당시에 국군은 호남지역 지연전을 위해 신태영 소장을 지휘관으로 '서부지역전투사령부'를 편성하여 제7사단(사단장 민기식 대령, 약 600명, 민부대라고도 함), 오덕준부대(진주에서 주로 학병으로 편성한 700명 정도의 민병대), 이영규부대(제5사단의 일부와 청방대로 약 500명), 그리고 해병대의 김성은 부대(371명) 등을 통합지휘하고 있는데 제8군은 이러한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가 그친 23일 미 공군은 대대적인 정찰활동으로 대부대가 군산에서 전주로 남하하는 것을 발견했으나 대전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북 제4사단의 일부라 판단하고 이대로 진출한다면 25일에는 안의-진주선으로 진출하여 병참기지인 부산이 위기에 빠질 것으로 판단한 24일, 미 제24사단장인 처치소장에게 "진주-김천선을 점령하고 군의 좌측 후방을 엄호할 것"을 명하였다.
제8군은 이날 오키나와에서 부산에 상륙한 미 제29-1,3대대를 제24사단에 배속하고 대신 미 제24-제21연대를 군 직할로 돌렸다.
가.워커장군의 지도
1)미 제24사단의 배치
미 제24사단이 방어해야 할 정면은 공비의 소굴인 지리산을 눈앞에 둔 약 100km의 광정면이었다. 호남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영남으로 오는 접근로는 전주와 남원에서 안의-거창을 거쳐 낙동강선에 이르는 것과, 순천에서 하동을 거쳐 진주-마산에 이르는 2개의 축선이 있다.
따라서 미 제24사단은 25일 제19연대의 주력(제2대대)을 진주로, 제1대대(320명)로 안의를 점령케 하고, 26일에는 제34연대를 거창에 배치하고, 사단 사령부는 합천에 두었다.
이 당시(7.25)에 미 제8군과 제24사단이 알고 있는 서측방 상항은 북한군의 선두부대 약 500명이 하동의 한국 경찰대를 공격중이고, 구례에는 전차를 동반하여 800명, 남원에는 트럭과 700명, 목포에는 전차 10대와 500명이 있으나 북한 제4사단의 일부가 동진하고 있다고 보았다.
함양에는 한국군 일부가, 하동에는 민병이 일부 있으나 전력으로는 기대할 수가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즈음 대전을 점령한 북 제4사단은 금산에서 거창방면으로 진격을 개시하고, 또 북 제6사단은 남한의 각 항구를 점령한 후 순천으로 집결하여 동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8군은 7월 말까지 서측방으로 북한의 정예 2개 사단이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던 것 같다."
2)미 제29연대의 증원
26일, 미 제29연대의 2개 대대가 진주에 도착하여 미 19연대장 무어 대령의 지휘 아래 들어갔다.
그러나 이 제29-1,3대대 병력은 훈련수준이 6주도 않된 인원으로 미 본토에서 10일간의 항해로 20일 오키나와에 도착한 후, 지친 신병들이 다음날 21일 오키나와를 출발하여 부산으로 향했다.
이때까지 양 대대는 시사는 커녕 영점조정도 해보지 못하고 12.5밀리 기관총은 격납유조차 닦아 내지 못하고 있었다.(제1대대는 안의지역 방어, 제3대대는 하동 공격)
나. 함양-합천 전투
1)양측의 상황
북한군 제1군단은 제4사단으로 하여금 대구 방어에 주력하는 아군의 서남쪽 배후를 노려 주력을 장계-안의선에, 일부를 남원-함양선에 각각 전개하여 일거에 안의와 함양, 그리고 거창을 점령하여, 이를 발판으로 낙동강 서안으로 진출토록 명령하였다.
북한군 제4사단은 대전에서 미 제24ㅏ단의 방어선을 돌파한 후 거의 무방비상태로 있는 소백산맥의 서측인 금산, 무주, 방면으로 진출, 제6사단의 순천 진출과 때를 같이하여 그 좌익으로 진출하였다.
한편 미 제8군은 이 지역에서 기동하고 있는 적들이 북한군 제4사단의 예하부대라 판단하고 제6사단이 호남지역과 경남지역으로 우회 기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7월 말까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군은 북한군 제6사단의 공격에 불과 11일(7.16~26)만에 호남 전 지역을 상실하고, 또다시 영남지역 서남부마저 위기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병력이 1개 연대규모에도 미치지 못하여 적의 접근로인 남원-함양간에서 접적을 유지할 따름이었다.
즉 운봉으로 철수한 민 부대가 남원 동쪽 내촌과 장교리 일대에 전개하였다. 그러나 부대는 지휘통제가 일원하가 어렵고 병력의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미군의 오폭으로 어려움을 격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북한군 제4사단의 장계에서 육십령을 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병력은 계속하여 피난민대열에 들어가 이탈하고 부대간 통신망이 어려워 곤란을 겪고 있는 마당에 서해안지구 전투사령관 신태영 소장은, 민 부대가 남원 철수에 앞서 함양으로 이동하여 민 부대와, 진안.장수 간의 경찰 혼성부대로 덕유산-백운산-지리산의 산악지대에서 적을 지연시킨 다음, 시간을 벌어 급편 방어진지를 구축하기로 구상하였으나 현실은 그것이 아니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육군본부는 채병덕 소장을 경남지구 편성관구사령관에 임명하여 지휘토록 함으로써 7월 24일 남원에 와 함양으로 철수하려는 부대의 철수를 불허하고 고수방어를 강조하였다.
2)함양-거창 전투 및 지역 탐사 및 탐문 결과
가)운봉-함양의 전황
민 부대는 남원에서 운봉으로 철수하였다. 7월 25일 오 부대가 운봉 서북쪽 운봉고개 일대 500고지를 점령하고 있었으나 26일 함양으로 철수하여 버렸다. 오 부대는 민부대의 예속은 아니였다.
이러 말미암아 운봉에 방어공백이 발생하자, 대신 김성은 부대를 운봉고개에 투입하였다. 그러나 오 부대의 전선이탈을 목격한 부대들이 동요가 발생하여 다른 부대들도 임의로 운봉으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민부대는 함양으로 이동하여 부대를 재 수습하여 해병대에게 다시 팔령재를 방어토록 하는 등의 노력을 경주했다.
이 시기에 하동방면은 채총장의 안내로 미 제29-3대대가 원전으로 진출하고 있었고, 정래혁 중령이 인수한 이 영규 부대 30명과 지역 청방대원 등 300명이 방어준비를 하다 북한군으로붙터 기습을 당해 와해 되어 각자 분산 철수하여 정래혁 중령은 집결된 인원을 이끌고 진주로 향했다.
민 부대장은 26일 함양으로 이동하여 철수병력을 인수하며, 먼저 이곳을 선점한 경찰 및 청년방위대를 흡수하여 방어병력을 재편성하는 과정에 마침 이곳을 방문한 신태영 소장으로부터 미군이 이곳을 지원하게 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육십령고개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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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의 장교리, 팔령재에 전투준비 흔적이 없다."
나는 행운아다. 왜냐하면 이 모든 곳을 내발로 직접 가보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허무한 면도 있다. 주변의 지역민들에게 물어본 결과 그냥 지나간 것 밖에는 없고 동네에 들어와 있는 것을 다 먹고 가는 일만 있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지, 전사자료에 보면 민부대와 경찰, 그리고 청년방위대를 합치면 무려 3,000여명이 된다. 사실 어마어마한 숫자다. 그러나 동네분들은 몇명 보았다는데 어떻게 된것인지?
"운봉 조영호 대위와 비행기, 이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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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전적 기념비" 그리고 여수.순천 사건의 홍지회의 최후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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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안의 -거창의 전황
미 제24사단은 7월 22일 대구로 철퇴하여 딘 소장이 행방이 불명한가운데 , 처어치 소장이 사단장에 취임하였으며 인원과 장비는 60%수준이었다.
처어치 소장은 제8군의 명령으로 제19연대(무어대령)를 진주로 진출과 동시에 제1대대(리ㅣ중령)를 화산리(함양 동쪽 5km)로 북상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대대는 산청을 경유하여 A중대를 안의에, 대대 주력은 화산리 동쪽 390고지군 일대에 전개 시켰다.
또한 사단장은 군위,의성 일대에 분산되어 있던 제34연대를 거창으로 이동시키고 사단은 합천으로 이동했다. 제34연대는 안의-거창 가도 우측에 좌측에는 경찰과 청방대로 혼성된 대대로 방어토록 하여 민부대와 그리고 장계-안의로 축차 철수하는 경찰을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 김 부대(김병화소령지휘)는 운봉 남서쪽 60번 도로 주촌리 일대에서 산악도로를 따라 덕산리 남방 산악지대, 안의 전투시는 화산리(미 제29-1대대 좌측)로 이동 했다. 바로 김부대 좌측에 해병대, 그 좌측에 오 부대가 전개했다.
화산리는 위천과 주산천이 만나는 곳으로 바로 미 제29-1대대가 화산리-죽산리 중간 동남쪽 390고지 일대, 바로 그 좌측에 김 부대가, 위천강 아래 웅평리 일대를 해병대, 그 좌측 옥매리 일대를 오 부대가 점령한다
한편 북한군 제4사단은 도로가 파괴되어 보수하면서 안의, 거창을 목표로 진격하고 있었다. 7월 26일 그 선두부대가 육십령고개를 지향하고 있었다.
3) 안의 전투
하동 전투가 있던 7월 27일, 제19연대는 제1대대를 주력으로 화산리 부근, A중대를 안의를 점령케하여 함양을 거쳐 동진해 오는 북한군을 대비하였다. 함양에는 국군은 민부대(600여명)와 해병의 김성은 부대(350명), 오 부대가 있었다.
27일 05시에 북한군 선두가 육십령에 배치된 우리 경찰대대를 공격하여 안의로 분산 철수하였다. 경찰로부터 상황을 보고 받은 민부대는 육본에 상황을 보고 하고 오 부대와 김 부대를 안의에 배치하였다. 따라서 육십령고개-안의간 도로에서 우측 맨 앞에 미군 제19-A중대, 안의를 가운데 놓고 좌측에 오 부대, 우측에 김 부대가 점령한다.
그러나 벌써 북한군 정찰대가 새로운 진지 점령으로 부산한 김 부대를 교란하기 시작하더니 27일 17:00시경부터 오, 김부대가 점령한 지역에 화력을 집중하더니 야간에 2개 대대 규모로 공격력을 강화하였다.
오 부대는 신병이 대부분으로 전장공포증으로 대부분 분산되어 많은 피해를 입고 화산리로 철수하고, 김 부대는 우측방의 붕괴로 함양으로 철수하였다.
육군 배동걸 특공대는 27일 대구로 복귀하는 도중, 거창에 어물고 있다 전날 미 제34연대 2개 대대가 진출하자 청방대와 경찰과 합동하여 미군이 점령한 남쪽에서 경계임무를 수행하였다.
"안의 이전리 공동묘지에 남겨진 전투화 1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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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에는 국군이 전투한 모습을 목격한 인원을 만나지 못했다."
김부대가 안의, 남강 동안 석천.봉산리 일대를, 오 부대가 남강 남안 당본리와 위천강 북안 교복리 점령했다고 전사에 기록됨
4)함양 전투
함양에서 작전을 지휘중인 민기식 대령은 함양으로 복귀한 김 부대원의 보고로 안의 저지선이 돌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곧 북한군의 공격이 이곳 함양에도 있으리라 보고 작일 오 부대가 임의로 운봉에서 함양으로 철수한 뒤 해병대도 함양으로 철수를 완료한 상황에서 지시한 상황에서 남원 인월 팔령재에 남아 있는 해병대를 1개중대를 남기고 28일 08시 30분경 함양으로 집결하였다.
다시 민 부대의 지시로 안의 방향으로 4km 진출, 지곡면 평촌리 주곡일대에서 적과 교전하여 적은 23구의 시체를 남기고 후퇴하였다.
이에 민부대는 다시 팔령재의 1개 중대도 함양으로 이동시키고 여기서 연락이 두절된 오 부대를 인수하여 수동의 화산리 일대에서 미 제29연대 1대대(390고지일원)좌측으로 부터 김 부대, 해병, 오 부대(연락이 두절 되었다 여기서 인수함) 로 방어편성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투피로에 보급의 제한등 많은 문제점을, 28일 20시 40분경 미 제29-1대대장과 협의하여 산청으로 철수를 결정하고, 오 부대는 병력 200명으로 산청~진주로, 김 부대는 일부 차량을 이용하여 산청, 해병대도 축차적으로 산청으로 이동한다.
"함양 하백마을의 8인의 민병대"
서울의 김종완(유족)씨로부터 본인 아버지를 밝혀달라는 전화가 왔다. 유해를 못찾은 것이 아니라 함양지구 전투에서 청년방위대로 경찰과 함께 참여한 많은 인원이 전사하였으나 누구도 시신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까마귀가 날아 시신을 훼손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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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곡 평촌 두동마을의 20~30기 군인묘(?)와 나의 왼발 30cm 피나다", 백암산621m의 진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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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면 우명리에 아군차량 3대, 경찰, 미군 차량 1대가 '50.9월에 진격간 기습받아 소나무, 뽕나무, 논,등에 가매장 : 찾지못함 흔적은 있는데...
5)화산리 전황
27일 오후에 무어대령은 제19-1대대(리중령)를 제29-1대대(윌슨중령)로 교대시켰다.
철수하는 제19-1-A중대에게 뒤따라 올 것을 명하였으나 16시 조금 지나 안의 남방 2km지점에서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차량 6대가 파괴되자 산속으로 도주해 있다 7월 28일에 거창의 제34연대에 합류하게 된다.
"전령의 함흥차사, 215명이 사라지다."
새로 투입되는 제29-1-B중대는 안의에서, 교대하는 19-1-A중대가 적과 교전중이었으므로 교대가 늦어져 27일 16:00에 점령해 들어가지만 이미 적이 근접하여 국군의 부대 상황도 모르고 악전고투하다 24:00에 거창으로 후퇴하게 되는데 18명만이 살아오고 215명이 적 중에 갇혀 전사. 실종된 것으로 판단 되었다.
한편 새로 수동을 방어하게 된 제29-1대대는 몇번의 연락병을 보냈으나 도중에 실종 또는 전사하여 끝까지 이런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금산에서 진안을 거쳐 동진하는 북한 제4사단의 포위공격으로 7월 28일 수동에서 철수하였다.
함양의 민부대는 포위되었다가 진주로 철수하였으며 제29-1대대 윌슨중령은 우명리를 공격하는 북한군을 역습으로 일시적 격퇴하였고 포로를 잡아 안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정찰기가 북한의 대 부대가 함양에서 남진하여 산청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대대는 화산리에서 산청으로 철수하게 된다.
6)거창전황
7월 28일, 이때까지도 미 제8군은 거창의 대부대가 북한 제4사단의 일부로 판단하고 거창은 제34연대로 방어가 가능한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야전삽도 제대로 없는 부대였다. 이날 해질 무렵 북한군이 안의에서 거창으로 29일 04시에 포위 공격을 해왔다.
"목숨이 아깝거든 달아나라~"
북한군은 사전 게릴라들을 침투시켜 퇴로를 차단하고 성동격서의 작전을 감행하게 되는데 포병부대와 일부 부대에 이런 공포감을 사전 조성하여 전의를 상실케 해 버린다. 포병이 무너지자 화력지원이 없다는 이유로 서단의 방어부대가 임의 이탈이 되어 순식간에 거창방어는 무너지고 29일 산제리(합천 묘산면 : 경찰과 청방대도 이곳으로 철수) 삼거리를 점령한다. 이 거창의 상실이 미 제8군을 놀라게 했다.
"거창에 경찰이나 청방대 ㅜ전투 사실 들은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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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신원리에서 죽다 살ㅇ오다. 1구 발굴, 조양호소위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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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는 거창의 위기를 인정하고 가용한 전 예비대를 이곳에 투입키로 한다.
즉 한국 제17연대를 동부전선에서, 그리고 국군 제3사단을 지원하고 있는 미 제21연대의 주력을 영덕으로부터 차출하여 산제리로 전용시켰으며 미 제21연대장이 통합 지휘했다. 국군 제17연대는 30일 02시에 산제리에 도착하여 우측방 진지를 점령하는데 당시 28세인 김희준 대령(후에 소장)이 2천여 명을 지휘했다.
다. 권빈리-합천 전투 및 지역탐사 /탐문결과
1)양측의 상황
북한군 제4사단은 대전전투 이후 현지에서 약 2천여 명의 신병을 보충하였다. 그들의 보급은 유엔 공군의 폭격으로 원활치 못하여 현지 조달에 의존하고 있었다.
7월 23일 금산을 출발하여 26일 안의를 거쳐 29일 새벽에 거창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바로 동진하여 낙동강으로 진출을 기도하고 있었다.
한편 남쪽에서 미 제24사단을 위협한 북한군 제6사단은 26일 목포.보성.순천.여수 방면으로 각각 1개 연대를 나누어 투입하여 서남부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 후 이들은 순천에서 합류하여 27일 하동을 점령함으로써 진주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워커는 7월 29일 마산을 목표로 안동에서 대구로 이동중인 국군 제17연대를 목표를 바꾸어 고령 서쪽 덕암리로 전진시켜 미 제34연대를 지원토록 조치하였다.
2)전투경과
제17연대는 29일 대구를 출발, 고령을 거쳐 덕암리에 도착하였다. 이후 권빈로 이동하여 황강 넘오 망일산 일원을 2대대가, 제1대대는 미 제34-1대대 후미 561고지 일대에 배치하였다.
29일, 거창에서 철수한 미 제34연대는 가천과 황강이 만나는 지역에 제1대대를, 황강 건너 월현산 하단부에 제2대대를 투입시켜 국군 제17연대의 전방에서 가천~명당산선을 방어하고자 했다.
북한군 제4사단은 7월 31일 17:00시를 기하여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미 제34연대가 철수하고 국군 제17연대가 주방어를 하게 되면서 제17연대는 북한군의 정찰대를 기습하여 포로로 잡아, 그들의 암구어를 알아내고 8월 1일 부터 시작된 그들의 공격을 저지하여 무려 트럭 1대분의 무기와 적 1개 중대를 사상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의 승리로 연대장 김희준 대령은 한국군 최초로 미국정부로부터 은성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에도 북한군의 재공격을 역습으로 격퇴하고 저지선을 유지하고 있을 때에 미 제24사단장으로부터 "제17연대는 현풍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아 8월 1일 자정에 덕암리를 출발하여 고령을 거쳐 낙동강을 건너 현풍으로 철수하게 된다.
"반포리의 북한군 훈련소" 3구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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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일산의 전투흔적" /?제보목록 97페이지 '08년도 맨 마지막참조 비교 상현리늦 가천 위쪽,
나. 하동-진주 부근 전투 및 탐사/탐문 결과
1)전투 개요
하동~진주 전투는 미 제24사단 예하 제19연대가 민기식 부대 등과 합동으로 남해안 해안선을 경유하여 우회 공격하는 북한군 제6사단을 방어하여 진주가 피탈되기까지의 7일간 적을 지연시킨 전투이다. 하동은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었으며 7월 26일 야간 와해된 국군 혼성부대(신편 제5사단 제15연대의 일부병력(이 영규 중령, 100여 명)가 북한군 제6사단의 공격으로 진주로 철수함으로써 하동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2) 하동부근 전투
가)하동읍 피탈
미 제19연대장 무어 대령이 하동을 공격하게된 배경은 국군 전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의 조언에따른 것으로 채 장군은 7월 25일 아침 정래혁 중령과 일부 수행원만 대동하고 하동에 갔으나 아무도 없다.
정래혁 중령이 남아서 하동방어 준비를 하기로 하고, 남원의 전황을 시찰한 후, "동진중인 적을 저지하려면 하동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진주로 복귀한 채총장은 미 제19연대장 무어대령을 만나 하동 방어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하동 고수의 동의를 받아냈다.
하동에 남은 정중령은 이날 일몰 무렵 화개장 쪽에서 분산 철수하고 있는 이 영규 부대의 일부를 만나 상황을 듣고 이들 30여 명을 인수하고, 또 현지에서 모병한 300명을 합쳐 1개 대대를 편조한 다음 하동교 동안에 배치하였다.
이날, 22:00시경 두곡리에 적이 나타나 일제사격으로 적은 주춤거렸지만 정래혁 부대는 탄약이 없어 철수명령을 내리고 본인도 10여 명과 함께 26일 23시경 하동을 빠져나와 진주로 향했다. 채사령관은 민부대 예하 제30연대 1개 중대가 진주에서 부대를 재편성한다는 보고를 받고 즉각 연대장을 불러 출동을 명하였다. 중대는 26일 밤 안으로 섬진강 하구인 섬방까지 진출하여 야영하였으나 김용주 연대장은 이때까지 하동이 피탈된 사실을 몰랐으며 미군의 진출선에 대하여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김용주 부대는 다음날 쇠고개 마루에서 남쪽으로 400m지점인 151고지에 올라 미 제29-3-L중대와 연결했다.
무어 대령은 채총장(경남지구편성관구사령관)의 조언을 받아들여 새로 도착한 제29-3대대에게 하동을 공격하여 확보하여 진주방어의 시간적 여유를 얻으려 생각했다.
하지만 도로망 등의 문제로 진주-원전의 도로는 기동에 많은 지장이 초래되고 우회도로 또한 상태가 좋지않아 차량이 논으로 굴러떨어지는 등 기동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원전에 접근했을 때 대대는 하동에서 철수해 오는 민병(이 영규 부대로 판단됨, 화개장터에서 전투한 학도병?)들을 만나 "하동에 있던 약 400명의 민병이 지난 25일 북한군 대부대의 기습으로 분산 되었다"는 정보를 얻었다.
횡천리에서 숙영에 들어가는 대대는 24일부터 26일 밤 까지 3일간 한잠도 자지 못했다.
나)북한군의 매복기습(쇳고개 전투)
27일 08시 45분경 L중대를 첨병으로 전진을 개시, 계동에 이르렀을 때에 적 1개분대규모가 하동고개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즉시 첨병은 75밀리무반동총으로 사격한 다음 고개로 급진하여 그 양측 고지를 점령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K중대장에게 180고지를 점령하라고 명했다. 그 사이에 대대장 주변에 채병덕 소장등 일행이 몰려들어 복잡해졌다. 얼마 후에 180고지에서 떠들어 대는 소리를 대대장은 K중대가 점령하느라고 그러는 줄 잘못 판단하게 되었다.
얼마 후 500m 정도의 꼬부라진 모퉁이에서 150명 정도가 진출중인 모습이 보였다. 대부분이 북한군 복장이지만 일부는 미군 전투복을 입고 있었으며 40m까지 근접해 왔다.
그때 채장군이 "너희들은 아군이냐, 적이냐?" 라고 고함을 질렀다.(당시 채총장을 수행한 박현수 중령의 회고는 이 영규부대 일부가 아닌가 했다고 함)그들에게 소속을 묻자 당황하여 길 옆 도랑으로 뛰어들었다. 이때 미샤라대위가 사격을 명하였다.
"채총장 두부 관통상, 못트 대대장등 다수 부상!"
곧이어 적의 박격포탄이 집중되고 아군의 전술항공통제반 무전차량과 대대 지휘차량이 파괴되어 대대지휘 조차 마비 되었다. 항공기가 출격해도 연락 방법이 없어 소용이 없었다.
이미 쇠고개 좌우측에 쐐기모양으로 북한군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고 미군은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계동에 본대로 철수가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국군 제30연대 김용주 부대는 161고지를 점령하고 독전으로 방어토록 하여 몇번의 공격을 격퇴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물러나는 미군을 보며 동요가 내부에 발생하여 전열을 회복하지 못한 채 하나, 둘씩 각개로 분산된 상태에서 진주로 빠져 나갔다.
"99명의 별동대, 노량진에 이르다"
미 제29-3대대는 완전히 와해되어 삼삼오오, 알지 못하는 지역에서 철수하다 보니 많은 희생자와 실종자가 생겼다. I중대의 어프리게이트 상사는 99명의 병사를 이끌고 횡천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지금 남해대교가 시작되는 하동 금남면 노량진에 가서 어선을 타고 여수로 가서 구사일생으로 한국 초계정에 구출되어 부산으로 수송되기도 했다.
횡천강 지류에 쌓인 미군 313구 : "하동의 함정"
계동에 대기하던 병력은 살기위해 모두 흩어졌다. 지형도 모르고 훈련도 되어있지않고 대부분이 처음 기동해 오던 방향으로 뛰었으나 북한군의 기관총세례에 대부분 전사했다. 바로 횡천강 지류인 무명천의 높은 장애물을 넘지못하고 전사 2명, 부상 52명, 무려 349명의 실종자가 발생하고 말았으며 반격시 그 무명천에서 313구의 유해를 수습하였다.
북한군이 계획적으로 고개를 개방해 놓고 미군을 유인 괴멸시킨 뼈아픈 현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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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수수께끼의 하나가, 북한군이 어떻게 미군이 하동을 공격해 온다는 것을 알았으며 횡천리에서 숙영시 기습하지 않고 하동고개에서 매복하고 있었느냐?
하동에 매복을 한 부대는 북한군 제6사단이었으며 이런 상황속에서도 미 제8군은 북한군 제4사단이 동진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지금 쇳고개 정상 오르는 길 중간에 쇳고개 전투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2000년도에만 해도 없었던 곳이다. 얼마전 타계한 손희선 예비역 소장이 주관이 되어 채총장의 비석도 크게 자라 잡았다. 하지만 원래 채총장 비석은 계동 마을 대나무 숲 안에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채총장이 고개에서 계동으로 내려오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00년도에 탐문을 하고 다녔던 시절에는~.
"채총장에 엃힌 비하인드 스토리"
채총장은 몸무게가 120kg을 넘나드는 거구였다. 그는 앞에 다가서는 북한군을 보고 항복하는 북한군으로 착각하여 "이리 와라"고 바로 눈 앞까지 다가선 그들을 부르다 전사했다.
미군 짚차가 고추밭 고랑에 뒤뚱거리는 모습을 모두가 보았다. 그런데 그 대나무 숲에 있던 채총장 비석이 사라졌다. 원래는 무덤까지 있었다. 과연 총장의 육체는 온전히 손중위(손장군)의 이야기대로 부산에 운구되었을까 하는 의구심은 아직도 저버리지 못한다.
과연 누가 총장님의 비석을 넘어뜨리고 이제는 그 흔적마저 치워버렸을까? 동네분들도 모른다. 물론 굳이 알려고 할 필요는 없지만 비운의 총장인지 능력이 부족한 총장인지 온갖 추측만을 남기고 채총장은 지금 현충원 장군묘역에 잠들어 계신다.
하동 보도연맹 피해('50. 7.10~24) : 경찰과 특무대에 의해서 수백명이 피해
당시 하동군에 활동중인 보도연맹원 수는 3천명에 달했다. 그러나 여수.순천 반란사건 관련자 색출과정에서 대부분 지리산으로 들어가 실제 많은 사람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50.7.10일 양보면과 읍등지에서 150여 명의 보도연맹원이 전남 광양 진월면 매티재, 마산형무소, 진주 형무소(사실은 육십령 고개에서)등으로 끌려가 죽었다.
하동 화산리 마을회관 간담회('11. 5.3, 13명 참가)결과
북한군이 사전에 들어와 주요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당시 채병덕 총장을 여러명이 들고 후퇴하는 것을 목격하였으며 미군 지프가 와서 싣고 나갔다. 국군은 일부 있었으나 전투도 못하고 후퇴해 갔다. 미군은 '50. 9월부터 유해를 발굴해 갔으며 지금도 잊을만하면 찾아 온다.
화산리 일대에서도 전투가 있었으며 북한군도 많이 죽었다. 당시는 복장이 이상하여 국군인지 북한군이지 같은 옷을 입고 있고, 게중에는 민복으로 입고 길가에 죽어있어 누가 누군지 몰랐다. 도로망 확장시 많은 유해 매장지역이 훼손되었고 일부는 공동묘지 초입에 매장되기도 했는데 현장을 안내해 주겠다. 당시는 북한군 치하에서 부역으로 끌려가 시신을 치웠기 때문에 혹시라도 무슨 불이익을 받을까 증언을 기피한다.
화산리 커브도는 곳에서 산쪽으로 매실밭이 있는데 미군 3~4구가 매장되어 있어 지난번에도 미군이 찾았으나 찾지를 못했다.
우리는 제보자를 동행하여 공동묘지 입구에 가서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하여 탐사를 해본 결과 몇곳에서 발신음이 탐지되어 발굴 결과 5구의 미확인 유해를 발굴 했다.
3) 진주 전투( 마산의 위기)
미 제8군은 7월 28일 아군 방어선의 서측방, 즉 거창과 진주 방면으로 2개 사단규모의 북한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음에도 계속하여 북한군 제4사단이 동진하고 있는 것으로 오판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미 제8군은 전투력이 반감된 미 제24사단을 서측방에 급파하였으며 거창이 돌파되었다는 보고에 동부전선의 국군 제17연대와 미 제21연대를 합천 방향에 배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방향 북한군 제4사단과 제6사단은 거창을 탈취후 계속 동진하고 있었고, 하동을 탈취후 원전에 이르러 진주를 목전에 두었다.
이 무렵 진주부근에 방어준비 중인 미 제19연대 지휘부는 읍내에 위치항여 제2대대 G중대로 진주가도를 차단하고 있었으며 하동에서 극심한 피해를 본 제29-3대대는 읍내에서 재편성 중이다.
한편 민 부대와 미 제29-1대대는 안의에서 적의 진출을 지연하면서 진주 서북쪽으로 철수 하고 있었고, 하동에서 분산 철수한 이영규와 김용주 부대는 거의 와해되어 재편성을 시도하였다.
따라서 진주가도를 차단하기 위해 미 제19-1대대가 구호리, 제19-2대대가 내동, 미 제29-2대대가 남강 북안의 판문남동, 민 부대가 유곡동 일대에 배치되었다.
28일 20시 30분경에는 국군 해병대가 내동 신율리에 배치되어 정비에 들어갔다.
가) 원전-유수리 상황
북한군은 7월 29일 10시 무렵 1개 대대 규모가 모터사이클 3대를 앞세우고 미 제29-2대대 진전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적은 추진 중대인 F중대의 기습사격으로 많은 피해를 받고 일시 철수하였으나 다시 재차 공격을 해 옴에 따라 중대는 철수하여 본대와 합류한다.
이때 공군기가 출현하여 접근하는 북한군을 타격하여 200여 명을 사살하고 차량 25대를 파괴하여 그들의 진출속도를 지연시키키게 된다.
7월 28일 아침, 미 제19연대는 하동가도를 방어하면서 안의에서 복귀한 제29-1대대에게 사천 서쪽 고지를 점령케 한다. 진주에는 연대본부와 하동에서 철수한 못트 대대의 잔존병력, 민부대 등이 있으나 전투력이 문제였다. 군에서는 한국전 처음으로 중형전차 퍼싱3대를 진주로 증파했다. 그러나 아주 낡은 고물 수준으로 실제는 사용도 못했다.
한편 민 부대가 축차적인 지연전을 하면서 산청에 이르렀을 때에 육본에서 제17연대도 산청으로 이동하여 29일 늦게 진주로 진출하여 남강 북안 판문동 일대를 점령했다. 이때 민부대 지휘소는 유곡에 위치하고 제3연대(박현수 중령, 채병덕 총장 수행)를 주 방어지대로 편성하고 제2대대(김병화 소령) 병력 700명을 우수리 일대에 배치하였으나 사실 이들은 소화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 무렵에 민부대 예하 제3연대장 박현수 중령이 하동에서 부상으로 마산으로 후송되고 제9연대(유해준 중령)는 선박편으로 여수에서 부산으로 향하고, 제30연대(김용주 중령)는 하동에서 전투를 치룬 후에 진주를 거쳐 마산으로 향하여 사실 민부대는 김 부대밖에 전투를 할 수 없었다.
나)내평리~평거동 상황
미 제19연대는 7월 30일 미명, 2개 연대규모의 북한군이 진주를 남.서 양면으로 포위하기 위해 접근해 옴으로써 큰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날 연대는 사단으로부터 신병 755명을 보충 받고 날이 저물기 전에 소대까지 긴급히 배치해야 했다.
그러나 신병들은 결국 전투가 한창일 때 진지배치가 이루어짐으로써 중대진지에 이르기도 전에 전사상자와 실종자가 속출하여 오히려 기존 병력들에게 공포분위기만 조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 제19연대 제2대대는 30일 연대로부터 적이 산청에서 진주에 이르는 가화리에 출현했다는 정보를 통보 받았다. 또한 내평리 남족에 나가 있는 G중대로부터 정곡리에 1개 연대규모의 적이 접근중이라는 보고를 받는다.
이때 상공에는 아군 공군기가 선회하고 있었으나 강우로 타격이 어렵고 포병도 포탄이 고갈되어 지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연대의 지시로 평거동으로 축차 철수하여 31일 02시에 이르기까지 일진일퇴의 격전을 벌이다 고립되면서 새벽에 평거동을 철수하게 된다.
다) 구호리-개양동 상황
이곳에는 제19-1대대가 방어중에 있었으며 이 부대는 금강방어전에서 경험이 있는 병사들로 1개 연대 규모, 적의 파상공격을 몇차례 격퇴하였다. 제13포병대대는 처음에는 포사격으로 적을 강타하였으나 포탄이 없어 더이상 지원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대대는 신유리 지역으로 축차 철수하여 국군 해병대가 우일선에 전개하여 연결되었다.
그러나 해병대쪽으로 우회 공격하는 적을 공격하는 것을 멈추었다. 이유는 오인사격을 피하기 위해서였고 우리 해병대가 진전으로 공격할 것으로 판단 했으나 실제 그건 무리였다.
우리 해병은 30일 13시 40분에 진주교를 건너 진주역에 이르렀으며 15시 40분경 저지진지를 점령했다. 결국 적 1개연대 규모가 미군부대를 공격하게 되면서 해병도 적 1개 대대규모와 백병전가지 전개하며 주저항선을 지켜냈다.
한편 민기식 부대장은 30일 08:00시경 미 제19연대장으로부터 수미상의 적이 가화리에 진출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고 진지 강화에 열중하면서 안의에서 산청을 거쳐 철수중에 있는 미 제29-1대대의 철수로를 개통하도록 제3연대 제2대대장 김병화 부대에 지시하였다. 31일 01:00시경 1개 중대를 단성부근까지 진출시켰으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다시 본대로 복귀하였다.
31일 06:00시경 김병화 소령은 복장이 이상한 병사들이 진지전면을 배회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너희들은 어느 부대냐?고 물었으나 재차 같은 질문에 바로 사격이 가해져 중대는 분산되고 대대장도 행방불명(전사기록에는 하동지구에서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음)되고 말았다. 중대는 함안으로 분산 철수하여 겨우 본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한편 31일 06:00시경 적 1개 대대규모가 진주 북방 사천리로 진출하고 있으나 대항할 병력이 없고, 더구나 죄일선 미 제19-2대대가 적 1개 연대로부터 공격을 받으며 주저항선이 무너지자 민 대령은 의령으로 철수를 명하게 된다.
이에 앞서 화개장 전투 이래 진주에서 재편성을 하고 있던 이영규부대(병력 100명 미만)는 31일 퇴로를 경계하다 09:00시경 의령으로 빠져나갔다.
라) 진주의 피탈
북한군 제6사단은 주력을 진주로 향하여 서측과 남쪽,북쪽에서 포위마을 형성하였다. 평거동의 미 제19-2대대는 40여 명의 전사장자를 내면서 고군분투했으나 연대규모의 적에게 밀리면서 진주로 축차 철수하게 되고 연대장은 처어치사단장에게 철수를 건의하여 31일 06:00시경 군북과 의령일대로 철수하라는 구두명령이 하달 되었다.
이 무렵 진주 읍민들이 부대의 철수계획을 알고 술렁이기 시작하여 피난민들이 도로를 가득 메워 부대 철수를 어렵게 했다.
한편 신율리에서 망진산을 방어하고 있던 국군 해병대는 적 1개 대대규모를 물리치며 고군분투했으나 강건너에 철수하는 부대를 보고 철수명령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09:30분경 임의로 군북으로 철수했다.
한국전에 처음으로 투입된 전차 3대는 진주역에 위치하여 철수하는 제19-1대대를 엄호하고 있었으며 전차를 후송할 수 없으면 파괴하라는 명령을받은 "포울러 중위"는 철수 지원후에 마산을 향하여 3번도로-2번도로를 따라 질주중 개양동(장좌동)에 이르러 다리가 파괴되어 전차를 파과하라는 명령을 하달하고 즉시 하차하여 파괴준비를 할 때에 다리에 잠복하던 북한군에의해 샤퍼상사 한명(탈출성공)만을 제외하고 모두 전사하였다.
이 결과로 7월 31일 적에게 진주를 내어주게 되었다. 미 제24사단장 처어치 장군은 새로 배속된 미 제25사단 제27연대(마이켈리스 대령)를 진동리에 배치하는 한편, 진주에서 철수하는 병력을 군북에서 수습하여 급편진지를 편성했다.
이날(31일) 미 제8군사령관 워커중장이 모든 유엔 지상군에게 "8월 1일을 기해 낙동강선으로 철수하라"고 명령을 하달함으로써 마산 서측으로 철수해 새오룬 방어선을 갖추게 돤다. 민부대는 미 제24사단 제19연대와 군북선에, 해병대는 미 제25사단 제27연대와 진동리선을 점령하고 오 부대, 이 부대, 김 부대는 후방지역 경계이무로 전환하였다.
"진주 신율리의 유해와 경상대 신축공사"
제보자유우식(63, '07), '72년 경상대 건립, 총 47개 봉분중 8구만
"제보자 유제만, 김호경(74). '50년경 대동 마을 회관뒤 야산에 묻엇다. 제27야전병원
"유수역 터널(정동터널)을 공격하는 미군 비행기, 그리고 부역자 자식이란 소리에 병들고~~"
"진주 명석면 보도연맹 피해"('50.7.29): 특무대, 기관단총) 1천5백여명, 318페이지
"진주 주약동 약골 미군 폭격" 페이지 322
"사천(삼천포) 보도연맹 피해: 324페이지
"사천 역에 남아 있는 국군 유해, 48구"
"남해 보도연맹 피해: 327페이지
"거제 일대의 학살: 331페이지
거제 동부면 구천게곡 피해: 333페이지
거제 지심도 학살 : 342페이지
"통영 보도연맹 피해" 344페이지(꼭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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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9일 진주에 북한군 진입, 그러나 우군기에 식별이 않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풀이나 나뭇가지로 위장과 지상에 엎드려 공중정찰로부터 피해갔다.
7월 30일 저녁, 우군기가 사라지자 북한군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북한군은 전차와 게릴라로 방어중인 부대들을 격퇴하는데 "미군을 추격하는 광경은 마치 서부극 같았다 한다."
7월 31일 06시경 진주시내는 3대의 전차와 3문의 자주포 사격을 받게 되고 북한군 2천여명 진입하였다. 제19연대장 무어 대령은 '리대대'로 진주고개를 확보하고 중암리로 주력을 철수토록 06시45분 철수명령을 내렸다.
나) 마산의 위기
마산은 부산서쪽 45km 마산만 안쪽에 위치한 인구 15만의 상업, 항구도시로 부산으로 관문이다.
7월 30일, 유엔군은 주력이 김천에서 영덕선에서 격전을 치르고 있을 때, 진주가 위급해 지자 마산의 방어가 하급을 요하는 상황이 되었다.
미 본토로부터 증원부대가 부산에 도착하기 직전으로 7월 31일에 하와이의 미 제5전투단, 미 제2사단 29연대, 8월 2일에는 미 제1해병여단, 3일에 미 제8072중전차대대, 5일에는 미 제23연대, 7일에는 3개 중전차대대가 부산에 도착토록 되어 있었다.
"북한군이 부산에 먼저냐, 증원군이 먼저 부산에 상륙하는가?"
워커는 이러한 긴박성을 알고 7월 30일 보은가도에서 지연작전을 끝내고 어ㅐ간에 집결한 미 제8군의 유일한 예비인 미 제27연대(미카엘리스 대령)를 마산 정면으로 투입시키고, 31일에 상륙예정인 제5연대 전투단을 마산에 증원키로 한다.
미 공간사에는 이 "시간과의 싸움"을 묘사하기를 북한 제6사단이목포, 여수를 경유하여 호남지역으로 우회하는 것은 전투부대들의 보급문제를 항궁에서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 했을 때에 "워커"는 "북한군 제6사단이 우회없이 바로 부산을 향해 진격했다면 이 적을 저지할 병력조차 투입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북한군은 이 우회로 2일간의 여유를 유엔군에게 선사하여 주었다.
8월 1일에 미 제27연대는 진동리 부근을 방어하고 제19연대는 중암리 부근을 방어토록 하였다.
제27연대장 미카엘리스 대령은 진동리 서쪽 옥녀봉-야반산을 잇는 선을 방어하기로 하고 일부 방어부대를 곡안리 서쪽의 험로에 배치했다. 하지만 이미 북한군 이 진출하여 배치 되어 있었다.
3. 부산 전면방어진지 편성
가. 결심
7월 31일 아침 진주가 함락되고 김천.산제리에 ㄷ대한 북한군의 압력이 강해지고 있을 ㄸ대,제8군은 포로심문과 무선도청으로 겨우 "북한군은 제4사단이 안의와 거창으로 제8군의 좌측방을에워사고, 제6사단이 마산을 거쳐 부산을 나어가게 하여 아군의 후바우병참선을 끊어버리려 한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7월 초순이후 전혀행방을 모르던 북한군 제6사단의 위치가 확인되고 북한군은 1개 사단이 아닌 2개 사단으로 서측방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정보는 동경과 워싱턴까지 놀라게 하여 최초의 인천상륙작전 게획인 블루하트계획이 7월 10일에 중지되고 새로운 상륙작전 계획인 크로마이트계획(미 본국에서 증파된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2사단이 9월 중순 인천이나 군산, 또는 동해안의 주문진에 상륙하는 계획)을 7월 23일에 입안중에 있었으나 유엔군 사령부는 크로마이트계획에 상륙부대를 부산방어에 사용키로 변경시킨다.
이에따라 미국은 북부 일본에 있는 미 제7사단과 유럽에 증파 예정인 미 제3사단까지 한국에 투입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미 공간사에는 "북한 제6사단의 기동은 한국 전쟁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동의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
1) 최대의 결심
워커는 북한군 제6사단(제105기갑사단 제83기계하연대 배속)이 마산정면에 진출한 사실은 "마산지역 방어의 성패가 군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음을 갖고, 8월 1일 미 제25사단을 마산정면으로 전용하는 한편 전전선을 낙동강선으로 철수시키기로 결심했다.
이 판단은 미 공간사에서 한국전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판단을 했고 또 결심을 했고, 실행을 했던 것이다"라고 평가 받고 있다.
"미 제25사단은 신속히 삼랑진으로 이동하여 적의전진을 저지 시킨 후 서측방을 향하여 역습할 준비를 하라"
2) 미 제25사단 전진
미 제 25사는8월1일 저녁때 이동 개시, 그러나 2일 미명에 제8군은 목적지를 마산으로 변경 시켰다. 이것은 지금 서측방에 미 제24사단이 중암리와 진동리를 학보할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부산에 상륙한 제5연대 전투단을 이 정면에 증원 시켰다.
제25사단은 왜관가지 도보로 행군하고, 어ㅐ관에서 마산까지는 철로로 이동했으며, 이 기동에 문제점이 4가지가 있다.
가. 만약 북한군이 기동사실을 알고 김천을 공격한다면 전선이 붕괴될 위험이 있다.
나. 사단의 퇴로와 제1기병사단의 주보급로가 동일한 도로로 그 교통량을 어떻게 조정하느냐의 문제
다. 동해안에서 산제리로 이동중인 제21연대 등의 교통혼잡 처리문제
라. 철도 수송수단 확보문제
워커의 자랑 : "유사이래 초유의 이 기동이 부산을 구했다."
왜관에서 마지막 적재가 끝난 것은 8월 2일 07시 였다. 이리하여 사단은 2일 09시 15분부터 3일 19시 30분에 걸쳐 마산역에 도착, 킨 사단장은 3일부터 남강 남안에 주둔하고 있는 모든 부대를 통합 지휘하였다.
이 기동이 성공적으로 완수된 이면에는 유엔 공군과 한국 경찰 및 경비대대 등의 북한 게릴라로부터의 철도 보전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나. 전면적방어진지 편성과 병력
각 사단은 8월 1일 저녁에 하달된 낙동강 진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에 따라 다음날인 2일에 철수를 시작하여 3일부터 4일 아침까지 지시된 진지로 이동, 이른바 낙동강진지, 부산교두보 등으로 불리는 방어선을 형성했다.
1). 마산정면의 저지
계방산진지, 8월 1일 진주고개를 점령하고 있던 미 제19연대는 북한군과 접촉을 유지하며 중암리 서남방에 있는 계방산 능선을 점령했다. 축차적인 철수를 주장하는 참모들도 있었지만 무어 연대장은 가장 좋은 진지를 빨리 점령하여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방어준비를 할 수 있고 병력을 집중 운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8월 1일 저녁, 미 제19연대는 제1대대를 우1선, 민부대(600명)를 좌1선으로 배치하고 , 전투에 지친 제2대대와 산청에서 돌아온 미 제29-1대대, 그리고 하동에서 타격을 받은 미 제29-3대대를 중암리에 집결시켜 예비로 했다. 하지만 밤에 진지를 점령하게 되면서 다음과같은 착오가 일어나고 있으나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민부대진지의 관련된 착오"
민부대 진지는 고개의 동쪽 능선에 있었는데 이 능선은 오봉산(525m)에서 뻗어내린 지맥이었다.
그러나 민부대가 고지의 높은 곳으로 점령을 하다보니 전진지가 좌측으로 치우쳐 우측방 리대대와 2.5km의 간격이 발생하였다.
또 리대대는 그 우측방을 계방산(455m)에 두어 그 정상을 점령토록 되어있는 B중대는 가파른 정상을 올라가지 못하고 다음날 점령토록 하고 8부능선 부근의 은폐된 지점에서 숙영에 들어가 연대는 큰 구멍이 생겼다.
"위력수색"
처어치 메 제24사단장은 8월 1일 오후에 곡안리 전초진지에서 적지에 대한 지형과 적정을 살펴보며 정말 북한군 제6사단이 이 정면에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마침 중전차중대가 마산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고 위력수색을 결심하여 워커 장군에 보고 하자, 적극적인 노력이 중요하다고 격려를 받았다.
"각 연대는 2일 06시를 기해 가용한 모든 전차를 이용, 진주를 향해 공격하면서 위력 수색을 실시하라."
미 제27연대장 미카엘리스 대령은 제1대대에게 정찰을 시키기로 하고 이를 지원하러 E중대를 발산고개에 추진시켰다.
미 제19연대장 무어 대령은 별로 마음이 내키지않았으나 윌슨대대에 전차소대, 공병소대, 트럭 22대를 배속하여 정찰을 시키기로 한다. 그러나 발산고개 점령부대에는 이 사실이 전달되지 않았다.
"충 돌"
윌슨 대대는 8월 2일 06시 30분에 중암리를 출발, 07시에 리대대의 제1선을 통과하여 고개를 내려갈 때, 적 기관총 3정이 사격을 가해 왔다.
발산고개 지역 : 이미 북한군이 숨어들어와 있었다. 도랑으로 피하여 들어가면 그 속에 북한군이 있어 격투가 벌어지고 전차는 북한군의 육탄공격을 받았다 고개를 넘던 13~14대의 트럭과 장갑차가 철수하려 했으나 맨 뒤의 트럭이 불타고 있어 철수로가 막혀 전차륜이 파괴 또는 소실 되었다. 이 언덕 밑에 리대대가 잠들고 있었다. 은밀히 침투한 적의 교란과 우군기의 오폭으로 혼란에 빠진체 백병전이 전개 되었다.
계방산지역 : 밤사이에 북한군은 계방산 정상을 점령하고 부대별 간격으로 게릴라를 침투하여 계방산 정상에 오르지않은 B중대를 기습하고 도로근처까지 진출하여 도로상 아군에 대해 공격하고 민부대와 리대대 사이로도 침투하여 중박격포진지를 유린하며 국도를 차단했다. 어시재 고개 일대는 5개 대대가 혼잡을 이루고 민부대를 적으로 오인하여 협격을 당하고, 이래서 민부대는 임의 철수하여 공백이 발생하게 되기도 했다. 미군은 오인사격으로 많은 피해 발생했다.
하지만 역습이 부분 성공하여 북한군은 공격을 멈추고 우회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며 미군은 90여 명의 피해가 발생했다.
첵대대의 정찰(미 제 27-1대대) : 포병 1개 포대를 배속받아 전차 4대로 2일 04시에 진동리를 출발했다. 무촌리에 이르렀을 때 약 30명의 북한군이 길가에 잠을 자고 있었다. 대부분 사살과 포로 획득하고 09시에 무촌리에 이르렀는데 북한군 차륜종대가 진주고개를 넘어오고 있어 매복으로 기습하여 10대의 트럭 노획했다. 계속하여 진주고개 방향으로 진출중에 북한군의대전차포가 사격을 가해오는 등 적의 위협이 증가하여 진출이 어려웠다.
미카엘리스 연대장은 07시가 되어서야 무어 연대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발산고개, 진주고개 첵 대대 등 모두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15시경 "북한 제6사단의 주력이 진주고개에 있으며 곧 첵대대를 공격하리라 판단하여 복귀명령을 내렸다.
첵 부대가 철수하는 과정에 북한군이 추격하여 왔으나 좌충우돌하며 2일, 한밤중에 연대본부가 있는 진동리 국민학교에 도착하여 야영에 들어갔다. "위력수색중 피해는 약 30명 발생했으나 행불자는 없어 대대장은 공훈으로 십자훈장을 받았다."
"진동리 사건" : 미 제27연대본부와 첵 대대가 야영하는 진동리 국민학교는 255고지에서 뻗어내린 능선 바로 아래인, 해안도로와 함안도로의 교차점에 있다.
8월 3일 아침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할 때 적의 기습이 시작되고 255고지에서 적 기관총 사격이 치명적으로 집중되었다. 원래 이곳에는 첵대대의 분초가 있었지만 접근해 오는 북한군을 이웃 분초로 나가있는 한국병사로만 생각하고 있다가 기습을 당하고 말았다.
교정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고 한 병사가 발광하여 기관단총으로 주위에 있는 전우들에게 난사하기 시작하여, 장교가 병사의 팔을 쏘아 겨우 난동을 저지 시켰다.
이후 255고지를 공격하여 탈환하게 되며 20~30대의 차륜중대가 남하하여 하차하기 시작했는데 제8야전포병대대의 맹렬한 사격을받아 사체를 400명을 남기고 흩어 졌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은 재래식 전화선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도청한 미카엘리스연대는 북괴군의 의도를 파악하면서 전투를할 수가 있었다. 이 도청을 통하여 북한군의 부대가 제6사단이고 본대가 산속에ㅜ있는 광산촌인 둔덕과 오곡지역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전투는 개전 이래 무패를 자랑하던 북한 제6사단에게 일격을 가해 그 예봉을 꺽어 버린 전투였다."
"진동리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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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가 진행되고 있을 때 미 제25사단과 부산에서 직행해온 미 제5연대 전투단이 8월 3일에 마산에 집결을 완료했다. 제8군의 서측방에 대한 치대의 위기는 이렇게 하여 모면 되었다.
2). 낙동강 다리
미 제24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일부병력으로 치열한 교전을 하면서 철수하여 8월 3일부터 4일 아침에 걸쳐 낙동강 동안에 진지를 점령했는데, 이때 낙동강 다리를 처리하는 문제에서 몇가지 에피소우드가 있다.
1)왜관교 : 이 다리는 한강교와 비교될만큼 중요한 다리라 파괴시기는 미 제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에게만 주어졌다. 이때 유엔군은 게릴라와 편의복을 입은 북한군이 피난민에 섞여서 진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피난민이 낙동강 동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러다 보니 수천명의 피난민들이 도강의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8월 3일 해 질 무렵 후위의 미 제8기병연대가 다리를 건너기 시작하자 그 뒤를 피난민들이 따르기 시작했다. 사격을 하겠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필사적으로 넘는 피난민을 막을 방법이 없이 날이 저물고 드디어 북한군의 사격이 시작 되었다. 게이 장군의 생애중 가장 어려웠던 판단의 하나였다고 한다.
2)용포교 : 미 제24사단은 초계-창녕간의 다리를 모두 파괴했으나 고령-대구간의 용포교는 반파상태로 남겨 두고 그 부근에 화망을 구성하여 함정을 만들어 놓았다. 이 책임을 맡고 있던 미 제7기병연대는 8월 12일과 14일 전투에서 큰 성과를 올린다.
3)낙동강진지선의 선정 이유
부산교두보는 부산을 기점으로 남북 약 135km, 동서 약 90km로 낙동강에 의해서 엄호되고 있다. 최후의 방어선을 선정하는데 있어서 미 제8군은 다음의 데이비드선(울산 북쪽에서 경상남.북도의 경계 산맥을 따라 밀양을 거쳐 마산 동쪽 산에 이르는 정면 90km의 선을 말한다. 맥아더 원수는 8월 초에 이 선에 예비진지를 구축해 놓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제8군은 8월 11일 공병 출신인 데이비드슨 준장에게 진지를 구축하게 했다. 여기서 그의 이름을 따 데이비드슨선이라고 했다.)과 낙동강선을 비교하여 보았다.
데이비드슨선은 정면이 좁고, 험준한 고지대를 이용할 수가 있다. 또 군사기지인 부산과 가깝고 북한군의 후방을 낙동강의 도하지점에서 차단하기 쉽다는 잇점이 있는 반면 결함도 있었다.
가. 병력의 횡적 이동에 곤란하여 반격시 자유로운 병력 운용에 불리하다.
나.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산악전투는 북한군에 유리하고 유엔군에 불리했다.
다. 천애의 장애물인 낙동강을 이용하지 못하고 연일 비행장을 포기해야 하고, 대구.마산 등을 포기해야 하므로 정치적. 심리적 손실이 크다.
라. 진지가 협소하여 공격병력을 집결시킬 공간이 부족하다
워커장군은 낙동강선을 선택했다. "낙동강이라는 장애물을 이용할 수 있고 기동과 반격이 용이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4) 병력 배치
위와 같은 판단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방격을 위한 예비대의 확보였다. 그러나 실제에서는 마음대로 되지않았다. 서측방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 도착하는 증으ㅓㄴ부대를 차례로 마산정면에 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은 7월 31일 부산에 상륙한 미 제2사 사령부와 제9연대 전투단(미 육군중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부대로 1900년 북청사변에 참가하여 '만주연대'라는 별명을 가진 정예연대)을 경산에, 제5연대 전투단(하와이에 상주, 독립 전투단으로 M-26퍼싱중전차 14대로 편성된 전차중대와 제555 야정포병대대 배속. 인원구성은 일본인 2세가 많았다)은 마산정면에 투입하는 한편, 8월 2일 상륙한 미 제1해병여단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군예비로 창원에 배치시켜야 했다. 해병여단은 7월 14일 켈리포니아를 출발할 때는 미 제25사단을 대신 일본 방어에 임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토록 되었지만 7월 25일 서측방 위협에 대처하려 부산으로 직항하게 되었다.
개전 이래 처음 형성된 일련의 전선으로 이 전선으 양쪽 끝은 동해와 진해만에 이르렀다.
5) 보급과 보충
재해.재공권을 장악하고 있던 유엔군은 긴그붐 즉 3.5인치 로켓트포와 공군용 신형 5인치로켓트탄 등은 태평양동로로 수송되고 있었다.
일본에서 수송되는 보급품은 매일 요코하마에서 특급열차편으로 사세보한까지 운반되고 여기서 선박을 이용하여 부산까지 운송되는데 총 소요시간은 평균 60~70시간으로 수송량은 최대 949톤이었다. 항공편은 다치가와로부터 공수되고 1일 106톤이었다.
병력보충은 8월에 11,400명, 9월에 13,00명, 10월에 17,200명을 예정하고 있었는데 1일 평균 손실을 450~570명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다. 7월말의 북한군 현황
7월말 북한군은 부산공격 때문에 뭄이 달아 있었다. 그러나 유엔군의 제공권하에서 1개월여 작전으로 제1선부대들의 피로도가 누적되고 3.5인치로켓포와 네이팜탄 등 신무기의 등장으로 T-34전차가 위력을 상실하고 공격력은 대단히 저하 되어 있었다.
1). 병력
전후 조사에 북한군은 개전 이흐 8월 초까지 북한군의 손실은 5만 8천에 달했고, 화포와 장비 수는 1/3로 감소된바 전차는 150대나 되었던 것이 40대로 줄었다.
그들은 점령지에서 강제징집 등 수단으로 제7.9.10사단의 창설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다.
2) 군수
병참선의 신장과 해상 수송이 불가능하게 되자 수만명의 서울시민을 동원하여 한강교를 보수하고, 유엔군의제공원하에서도 최소한의 야간에 열차와 자동차를 운행하여 보급품을 운반했다.
북한군은 약 30만의 노동자를 동원하여 보급수송에 동원시켰다. 노동자들에게 기상에 관계없이 1인당 20kg를 하룻밤에 20~24km씩 운반토록 했다.
식량은 현지조달로 해결해야하는데 작전지역이 산악지역이라 쌀을 입수하기가 어려워 정량의 1/2수준 밖에는 보급이 않되어 장병의 체력저하로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었다.
한국의 공간사에 따르면 "북한군은 부상병들이 급증함에 따라 현지의 의사들을 징용했다가 그 후 입북시켰는데 그 수는 한국 의사 수의 2/3에 달했다"고 한다.
4) 북한군의 점령지 행정
북한군이 점령지에서 실시한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 하나는 점령지에서 인적.물적 동원을 강행하여 재빠르게 전력화했다는 것과, 또 하나는 ㅓㅁ령군의 군정이 가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반발하는 집단적인 행동이나 게릴라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행정조직
사전에 남한 출신 당원으로 점령지의 군정요원을 양성하여 조직해 두고 있었다. 동이나 리의 위원들은 그 대부분이 현지에 잠복하고 있던 공산당원과 용공분자들이 말단세포로써 활동하였으며미리 치안부대(약 2만 4천명으로 12개 연대, 48개 대대로 편성하고 기간요원은 북한주민으로 기타는 현지의 당원,게릴라,동조자,노조원 등으로 조직하고 장비는 소총외에 죽창, 곤봉, 검도, 창 등)를 준비하여 배치하여 군정 시행을 강화하였다.
특이한 것은 주민 감시 및 반동분자를 적발할 수 있도록 각 부락, 직장 단위별로 밀고제도를 도입하였다.
공산당의 검찰조직으로는 군 등에 다섯 종류의 기관이 있어 감찰부는 내무서에서 송치한 자를 조사하고, 중범자는 예심부에서 조사, 사상범은 검사국에서 치급하고, 정치보위부는 정치와 군사범을 취급하며, 비밀경찰은 독일의 게슈타포나 게페우같은 당 직속의 최고 검찰 기관이었다.
결국 한국민은 리.동.면의 위원들에게 짓눌리고 치안부대나 비밀경찰, 그리고 각종 검찰조직에 감시를 받아야 했고, 밀정이나 당세포, 자식에게까지 감시를 받으며 살아야했기에 꼼짝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 인원동원
사람의 동원은 징병, 노역, 부역, 각종 조직의 결성 등으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동원의 대상이었으며 징병은 7월 중순부터 시작 되었는데 16~25세까지의 정예주의를 택하게 되는데 이때가 1차모집이다.
제2차 모집은 7월 말이 되어 병력 손실이 급증하자 군중궐기대회 드을 이용하여 청년들에게 전원이 의용군에 참가할 것을 강요하고 나이도 30세로 연장시켰다.
그러나 한번 속은 사람들이 참여가 미흡하자 제3차 수단으로 부락과 직장, 학교단위로 의용군 응모자 환송회를 연다는 명목으로 회합을 갖게하여 35세가지 강제동원하게 된다.
제4차는 40세까지의 남자들을, 제5차는 이른바 "젊은이 사냥"이라하는데 가택수색을 통해 47만명을 징모하여 병사나 노역으로 사용하는데 전선으로 보내진 인원이 6~12만명이었다 한다. 따라서 청년이나 장년들이 도망쳐 인원이 부족함에 따라 부인이나 노인들로 동원되었다.
이러한 게산법으로 북한군 사단병력은 1/3이 남한에서 강제로 잡혀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의 앞잡이가 된 민청 소속의 남녀 공작대원은 인적, 물적 동원의 집행기관으로 할동하여 남한의 2천만 동포를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 넣었던 것이다.
다) 물자동원
식량은 모두가 당국의 통제하에 두었고 배급 등록부가 작성되었는데 말단까지는 한번도 배급이 없었다. 한국의 7~8월은 한국 자체가 식량이 부족하여 배급을 줄 수 없었으며 그 당시의 한 농부의 술회로 대변된다.
"이 승만은 쌀은거두어 갔지만, 잡곡까지는 가져가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당은 논두렁에 심은 콩까지 수탈해 갔다."
라)치안유지
경찰망, 밀고제, 주민조직, 생활고 등으로 꼼짝을 못했다.
4. 8월의 공방전
가. 작전환경
북한군은 8월 5일부터 부산교두보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그 당시의 작전환경은 초목이 별로 없는 지형과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혹서를 견디기 힘들었다.
그 특징으로는 첫째 북한 게릴라의 출몰이었고, 둘째는 유엔 해.공군이 절대적인 재해.재공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1)게릴라와 치안유지
북한 게릴라는 '48년 여수.순천 반란이애 지리산과 영천의 보현산을 근거지로 하여 할동하는 지방게릴라와 북한에서 교육받은 요원으로 편성된 제766게릴라연대와 제402.제100대대 등의 집단게릴라를 비롯하여 사단에서 운용하는 편의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게릴라를 유엔군은 총병력을 약 3만, 핵심요원은 약 5천명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이들의 전방에서의 주요활동은 정보수집, 통신망 절단, 병참선 및 지휘소으 습격, 요인 습격, 테러 등으로 특히 마산지역에서 활발했다.
대표적인 예로 마산지역에서 미군들로부터 '귀부인'으로 존칭되는 노 부인이 치마속에 뻰찌로 통신선을 자르고, 묘령의 부인이 두목으로 하는 겔릴라 15명이 '50.9.3일 마산 북방의 천지산(639m)무선중계소를 습격하여( 미군 6명, 국군 2명 근무) ㅣ군 사살, 1명이 기적적으로 살아나 알려졌으며 비가 내려 보초를 세우지 않았다.
또한 주요 신문기자 2명이 간첩, 마산형무소 간수가 죄인을 무장시켜 폭동을 기도하다 발각되는데 공산당원이었다.
후방기관이나 지휘소 습격은 주로 피난민으로 가장한 게릴라가 2~3명 단위로 피난민 속에 끼여서 들어와 일정 장소에 모여 분해된 장비를 조립하여 무기로 활용한다.
대표적인 통신소 파괴 사건은 제8군과 동경간의 교신에 이용되는 대구 남방 915고지(달성군 가창면의 최정산으로 판단됨)중계소 습격 사건이다. 이 중계소에는 한국 경찰 70명, 미군 7명이 근무하는데 8월 11일 05시 15분에 약 100정도의 게릴라가 기습하여 미군 4명 사상에 3명 실종, 시설은 다 불타 버렸다.
2)제2전선
마산, 대구, 부산 등의 철도, 통신, 항만 노조 등에게 반전 동맹파업 사주 등이지만 미미했다.
3)철도
철로구간에 터널과 교량을 파괴하는 것으로 개전초에서 9월까지의 현황은 철도 경비대 638명이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게릴라를 토벌하기 위해 경찰 대대가 편성되는데 치안 전담대대로써 미군장교 지휘하에 약 500명식 편성되어 경박격포와 및 소화기로 장비했다. 개전 직전에 21개 대대를 목표로 착수했으나겨우 개전시에 2개 대대만 편성되었다. 그 후 8월 상순에 대구에서 6개 대대, 9월 초에는 14개 대대가 활동하게 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8월~9월 중순에 걸쳐 부산교두보 내에서 체포 또는 사살된 게릴라 수가 약 4천명에 달했다.
4)주민조직
7월 22일 대통령령으로 경찰의 관할하에 17~50세 남녀로 부락과 직장 단위로 자위대를 조직하여 경계, 보고 들은 것 통보 의무 부여
5)피난민 통제
제8군은 한국 경찰대(200~300명)를 각 사단에 배속시켜서 피난민 이동을 통제하였다. 경찰대는 먼저 피난민을 연대 수용소에 집합시켜 신문, 신체검사, 소짚ㅁ 검사 등을 한 다음, 군에서 지정한 경로로 호위하도록하여 주간에만 이동 시켰다.
제8군은 피난민을 낙동강 동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여 수십만의 피난민이 낙동강 서안에서 우왕좌왕하고 미군 포병의 탄막 사격에 걸려 피해를 보고, 북한군으로부터 반동분자로 몰려 학대를 받는 등 그야말로 진퇴 양란이었다.
5)주민소개
제8군은 작전지역내에 게릴라 온상을 없애려 낙동강 ㅗㅇ안은 강변에서 8km 이내의 주민들이 소개 되었으며, 남강 남안에서는 진내의전주민을 소개 시켰다. 마산에서는 공공 기간원을 제외한 전시민 약 12만명을 열차, 자동차, 상륙용 함정으로 부산과 거제도로 강제 소개시킬 정도 였다.
6)피난민 구호
8월초 진지내에는 약 70~80만명의 피난민이 방황하고 있었다. 대구의 평시 인구는 약 30만명인데 이때 약 70만명이 증가했다.
정부에서는 피난민 수용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여 여유있는 주택과 여관, 요전 등에 수용토록 하고 유엔은 쌀과 의료품, 방역자재를 급송하여 정부의 구호 활동을 원조했다.
2. 해.공군의 지원상황
어커장군은 "부산교두보의 방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해.공군의 덕분이다."라고 했다.
가. 해군
북한군의 해안 병참선 차단과 그 후방에 대한 위협으로 함재기에 의한 근접지원이었다.
함포사격은 주로 구축함의 125밀리포와 순양함의 200밀리포로 대부분 동해안에서 포격을 했다.이에따라 북한군 제5사단의 진출속도가 둔화되고 영덕의 공방전과 국군 제3사단의 해상철수 보장 드을 들 수 있다.
나. 공군
7월에 실시한 근접항공지원출격기 수는 4,346대였는데 8월에는 7,028대로 증가하고 9월에는 6,219대 였다.
사단에 대한 지원출격기 수는 세기의 대작전이라고 불리는 노르망디상륙 작전에서 브래들리 집단군의 각 사단이 받은 지원 출격 수보다 많은 지원이 있었다.
7.30일 미 제5공군의 보유 전투기는 590대 였으며 F-80 제트기 626대, F-51무스탕기 246대다.
미 공군이 근접항공지원에서 가장 효과적인 공격은 대전차공격이었다. 신형 5인치로켓포로 자주 사용하고 보고에 의하면 로케트에의한 전차의 파괴한 수가 네이팜판으로 파괴시킨 전차 수의 10배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러나 전후의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네이팜탄에의해 파괴된 전차가 로케트로 파괴된 숫자의 3배였다.
네이팜탄은 11갤런들이 네이팜의 연소시간이 50초로써 45미터평방의 지역을 전부 소각해 버렸다. 네이팜은 그 화염으로 전차를 소각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그화염으로 괘도의 고무부문에 불이 붙어 적재탄약을 폭파시키거나 연료에 인화되기도 하고 엔진에 화재를 일으키어 무력화 시켰다.
특히 북한군 포로 심문결과 공중폭격에의한 보급문제로 그들은 사기저하에의한 극도의 불안정성 속에서 전투를 하게 되는데 주요 사기저하 원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식량부족이 21.4%, 공중공격의 공포 17.9%, 흔련부족 11.3%, 무기.장비 부족이 9.8% 등이고 전쟁간 미군은 전투기 93대, 폭격기 9대 등의 피해를 입었다.
2. 북한군의 공격계획
북한 공간사에는 대전과 소백산맥 남쪽 기슭의 요충지인 문경과 풍기를 점령하는 단계를 제3차작전이라 하고, 그 이후 낙동강을 향한 진격과 부산교두보에 대한 8월 20일까지의 공격단계를 제4차작전이라 한다. 이러한 북한군의 8월공세는 미리 계획된 공격이 아니고 추격의 마지막 단계에서 이루어진 공격이었다.
미 본토에서 증원군이 도착하는 것을 보고 7월말 김일성은 수안보의 전선사령부에 나타나 "해방 5주년 기념일인 8월 15일까지는 부산을 점령해야 한다. 유엔군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말고 낙동강을 도하하여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라."는 격문을 발표하였다.
이 격문을 받는 전선부대는 추격의 여세를몰아 진격을 게속, 각기 부산교두보로 육박해 갔다. 따라서 어떤 특별한 표면적 이유가 붙은 것이 아니라 일제히 공격을 가한 것처럼 보였기에 항간에서는 "8월 공세"라 부르기도 했다.
북한군 제1군단
제6사단 : 마산-삼랑진 경유, 부산 점령
제4사단 : 신속히 낙동강 도하, 영산경유, 밀영탈취, 부산-대구간 도로 차단
제3사단 : 왜관 남쪽에서 낙동강 도하, 제10사단과 협력하여 대구공격
제10사단 : 왜관북쪽에서 도하, 제3사단과 협력하여 대구 공격
북한군 제2군단
제15사단 : 선산부근에서 도하 유학산거쳐 대구 공격
제13사단 : 낙동리부근에서 도하 다부동 경유, 대구 공격
제1사단 : 신속히 군위 점령, 제13사단 좌측방 부대와 협조 대구 공격
제8사단 : 정면의 적 격멸, 영천으로 진출후에 경주 또는 대구 공격
제12사단 : 포항으로 진출, 연일 또는 경주 경유 부산 공격
제5사단 : 영덕 탈취후 포항 진출, 12사단과 협동, 부산 공격
3. 제8군의 작전지도
워커 장군의 작전개념은 "역습만이 방어의 결정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부산을 방어하는 동안 장군의 할 일은 언제 어디에나 예비대를 투입할 것인가, 또는 새로운 예비대를 어떻게 편성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부산교두보 방어에서 제8군이 가장 괴로운 것은 역습을 반복실시하기 위한 예비대를 차출해 내는 일이었다. 미 공간사에 의하면 워커 장군은 매일 아침 인사로 "랜드럼(군 참모장), 오늘은 어느 정도의 예비대를 확보해 두었나?"라고 했다고 한다.
또 그는 어느날 전쟁터에서 돌아온 모 장군에게 "싸움터에서 철수해 온 자네와는 만나고 싶지가 않아, 자네가 관 속에 들어 있다면 별 문제지만......"하고 말했다 한다.
가. 킨작전의 태동
워커 장군은, 8월 6일, 미 제 25사단장 킨 소장에게 해병여단을 배속시키고, 8월 7일 남강, 남안지역을 따라 진주를 향해서 공격한 후, 부산교두보의 남측방인 남강 남안-진주고개--사천선을 확보 하라"고 명하고 이 작전을 킨작전이라고 명명했다. 유엔군의 최초의 공격작전이었다.
8월 4일, 마산정면에는 다음과 같은 부대들이 집결되어 있었다.
미 제25사단(제29연대의 2개 대대를 편입하여 각 연대 공히 3개 대대로 편성, 제87중전차대대), 미 제5연대 전투단(미 제25사단에 배속), 임시 미 제1해병여단(군 예비)으로 인원 2만여 명, 전차 100대, 포 100문 이상이었다.(군 예비로는 제25사에서 제27연대를 지정함)
그런데 정면의 북한군은 8월 3일 진동리전투 이래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너무 손실이 많아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제8군은 이걸 탐지하지 못했고 오직 북한군이 주공을 대구로 지향하고 대구정면의 서쪽과 북쪽 지역에 6개 사단을 투입되어 있다는 것을 탐지하고, 남하중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신편의 제7.9.10사단이 어느 방면으로 증원될 것인가에 관심사가 되어 있었다.
이때 워커는 부산에 최대의 위협을 주고 있는 마산정면의 북한군을 격멸함으로써 군의 좌측방을 안전하게 하는 동시에, 대구 정면에 집중하고 있는 북한군과 서울부근에서 남하중인 후속부대를 마산정면으로 유인하여 대구에 대한 압박을 완화시키려 "킨작전"을 구상하였다.
나. 전반적인 작전개황
8월 5일 : 북한군이 부산교두보에 공격 개시
영덕의 북 제5사단이 국 제3사단을 압박하여 오십천 남안의 주요고지인 181고지 점령, 대구 북방에서는 북 제13사단이 국 제1사단의 저항을 격퇴하고 낙동리부근에서 도하 개시
8월 6일 : 영덕은 국군이 역습으로 181고지 탈환, 대구 북방은 북 제1사단이 도하에 성공하여 남하, 영산지역에서는 북 제4사단이 도하하여 공격 개시, 이에 미 제24사단은 예비대로 영산서쪽 돌출부로 침투한 북한군 역습 실패
8월 7일 : 대망의 킨작전 개시, 마산국도의 공격은 정상으로 진행, 진동리정면에서는 북 제6사단과 격돌로 주보급로 차단되는 등 혼돈
영산 서측방에서는 북 제4사단이 미 제24사의 역습을 격퇴하고 교두보 구축
대구정면에서는 국 제1사가 유학산-가산선으로 철수, 대구 북방 위기로 미 제24사에 배속된 국 제17연대가 대구로 이동
8월 8일 : 주보급로 미개통, 공격돈좌, 영산 서쪽의 낙동강 돌출부에서는 제8군은 제9연대의 주력을 미 제24사에 배속시켜 역습, 실패. 부산에 중전차 3개 대대 상륙 완료 됨.
8월 9일 : 북 제3사단이 왜관 남쪽에서 도하 개시. 미 제1기병사단이 주력도하 저지 성공, 일부인 북 제7연대가 금무봉으로 진출, 대구 포위 위기 직면. 미 제1기병사단 역습 실패
공격 3일째를 맞은 킨작전은 겨우 보급로 개통, 공격작전 개시하여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반면 낙동강 돌출부의 전투는 지지부진하여 오히려 북한군의 활동이 활발한 편이었다. 북한군 제4사단이 유엔군의 항공과 포병에 의한 저지를 피해가며 물러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방어선 남쪽의 상황이 호전되는 상황에 북쪽의 영덕의 국군 제3사단에서 상황을 잘못 판단하여 조그하게 오십천의 교량을 파괴하여 영덕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다.
이때 단대호 미상의 북한군 대부대가 기계북방에 나타났다. 국군은 신편제인 제25연대로 공격을 시켰으나 격퇴당하고 마는데 바로 북한군 제12사단이었다.
8월 10일 : 장사동으로 철수한 국군 제3사단은 퇴로가 차단당할 위기에 빠지고 포항과 연일기지에 위기가 다가와 제8군은 "브래들리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연일 비행장을 방어하고 국군 제17.26.25, 유격1대대, 포항해병 대대, 미군 포병75밀리곡사포 포대 등을 편성하여 "포항부대"를 편성하여 안강정면을 방어토록 한다.
이시간 낙동강 돌출부는 미 제24사단이 총공세를 폈으나 진전이 없는 반면 왜관의 미 제1기병사단은 금무봉으로 진출한 적에게 괴멸수준의 피해를 주어 대구 서측방의 위기를 벗어나고 있었다.
킨작전도 미 해병여단은 고성 북방으로, 미 제5연대 전투단은 봉암리로 각각 진출하고, 제35연대는 진주고개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8월 11일 : 포항정면에 위기가 왔다. 경산에서 연일로 이동하던 "브래들리특수임무부대"가 게릴라의 매복 기습을 받아 분산 되고, 기계를 향해 공격하던 포항부대는 반격을 받아 혼란상태에 빠지고 , 북한 제12사단이 포항에 진입했다. 워커는 해.공군을 긴급지원하여 적 12사를 격퇴시켰다. 브래들리부대로 형산강 이남에 대한 방어력을 보강했으나 미 제5공군은 연일에서 철수할 준비에 들어갔다.
낙동강 돌출부는 전세역전되어 오히려 북한군이 미 제24사단을 영산 남쪽으로부터 육박해 옴으로써 창원에 대기하고 있던 군 예비인 제27연대에서 1개 대대를 증원하여 적을 공격케 했다.
이날의 킨작전은 해병대는 고성을 점령했고, 제35연대는 진주고개를 점령했다. 하지만 중앙의 제5연대전투단은 봉암리 협곡에서 병력 미상의 북한군과 교전하게 된다. 그러자 제8군은 예비명령으로 영산지역으로의 투입을 예고하기에 이른다.
8월 11~12일 : 대구 서남방에서 북한군의 도하가 시작된다. 신예 제10사단이 현풍 남쪽 돌출부와 용포교에서 기습적인 도하가 이루어졌다. 용포교일대는 미 제7기병연대의 역습으로 격퇴되었지만 현풍 서쪽 돌출부는북한군이 암런 방해없이 교두보를 학보하고 대구와 영산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8월 12일 : 낙동강 돌출부에서 북한 제4사단의 2개 대대가 영산 동쪽으로 진출, 영산-밀양간 도로 차단, 즉시 창원의 미 제27연대 북상토록 명령했으나 현풍의 북한군이 언제 어디를 공격할지 위기에 몰렸다.
킨작전도 난관에 부딪쳤다. 해병대는 사천 남쪽에서 매복에 걸렸고 제5연대 포병이 봉암리 협곡에서 포위 되었다.
동해안의 국군 제3사단은 3면에서 포위망이 좁혀지고, 대구 북쪽의 국군 제1사단은 북한군 3개 사단의 압박에 위기를 맞고 있다. "바로 8월 12일, 8월 공방전의 최대 위기였다."
워커는 이러한 문제가 킨작전 부대가 정면의 적을 격파하지 못한데서 비롯 되었다고 판단하여 12일 저녁 킨작전의 중지명령을 하달했다.
8월 13일 : 동부전선의 위기였다. 북한 제12사단, 제5사단의 일부가 포항쪽에 출몰하여 제8군은 다시 함포와 폭격으로, 국군 제17연대를 출동시켜 적을 소탕시켰다. 워커는 국군 제3사단의 장사에서 구룡포로 해상철수를 결심하게 된다.
이날 영산은 증원되는 군 에비인 밀양의 제23-1대대와 남지교에서 북상중인 제27연대가 협공하여밀양-영산간 도로 개통 및 영산 남쪽의 적을 소탕하였다.
이 무렵, 대구 북방의 국군 제1사단도 유학산일원에서 북한군의 제1.13.15사단을 상대로 선전하고 있었다.
8월 14일 : 왜간 북쪽에서 도하한 북한군 제3사단이 왜관의 303고지, 작오산 압박, 북 제10사단은 주력으로 용포에 대한 기습도하 감행했으나 미 제1기병사단의 역습으로 격퇴하였다.
반면 국군 제1사단이 있는 대구 북쪽 정면은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제8군은 영산돌출부 작전을 끝낸 제27연대를 대구로 이동 시켰다.
한편 킨작전이 중지된 상황에서 미 제25사는 지시된 전선으로 복귀하고 해병여단은 밀양으로 이동했는데 다행히도 북한군 제6사단이 추격해 오지 않았다.
이 사이 동부전선은 위기가 한층 고조되어 의성에서 선전하고 있던 국군 수도사단이 경주로 이동하여 15일 아침부터 포항부대와 북한군 제12사단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8월 15일 : 대구정면의 왜관 303고지가 적에게 포위되고, 영산서쪽의 돌출부는 아직도 미 제24사단이 수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워커는 해병여단을 영산에 투입키로 결심한다.
8월 16일 : 동부전선에서 수도사단과 포항부대가 안강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여 남쪽에서 견제하는 사이 국군 제3사단이 독석리 일대에서 해상철수 단행해 성공한다.
그러나 대구 정면에서는 303고지가 피탈되고 북한군의 대구 공격이 눈앞에 다가와 제8군은 98대의 B-29폭격기로 왜관 서북방에 융단폭격을 실시했다.
8월 17일 : 동부전선에서 수도사단과 포항부대가 안강을 포위하여 북한군 제766부대를 격파하고 제12사단도 격퇴시켰다.
대구전선에서는 미 제1기병사단이 303고지를 탈환했으나, 대구-상주간 도로로 남하한 북한군 제13사단이 다부동정면에 압력이 가해지고 있다.
이날 영산돌출부는 해병대의 역습이 성공할 기미가 보이고 마산정면의 북한군 제6사단은 국지적인 공방전을 전개했다.
8월 18일 : 동부전선의 위기는 사라졌다. 북한군 제12사단과 제766부대는 잔류병력 약 2천명을 데리고 비학산으로 퇴각하고 수도사단은 기계를 향해 추격개시, 구룡포로 상륙한 제3사단은 포항남쪽으로 진출하여 포항 탈환작전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대구 북쪽은 다부동을 중심으로 국군 제1사단이 북한군 3개 사단의 공격으로 지탱할 수 없게 되자 워커는 군 예비인 제27연대를 다부동에 투입시켰다.
이날 밤부터 전후 7회의 북한군 야간공격이 시작되고 이날 처음으로 대구시내에 북한군 포탄이 떨어졌다. 정부는 부산으로 옮겼고 피난민은 역으로 몰려들어 위기일발 이었다.
그런데 이때 북한군 제15사단이 의성-신령-영천간의 돌를 따라 공격하던 북한군 제8사단이 국군 제6사단의 반격을 받고 공격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부대를 교대시키기 위해 영천정면으로 전용되어 국군 제1사단이 살아났다.
낙동강 돌출부에서는 미 해병여단이 북한군 제4사단을 낙동강 서안으로 퇴각시키고 재기불능상태로 만들었다.
8월 19일 : 동부전선은 국군 제3사단이 포항을, 수도사단이 기계를 탈환했다. 그러나 다부동에서는 아직 잔날밤의 야간전투의 냄새가 남아 있고 워커는 밀양에 대기하던 제23연대의 주력까지 다보동으로 투입시켰다.
마산 정면은 국지저긴 전초전만 계속 되었다.
8월 20일 : 동부전선이 정리되어 브래들리 특수임무부대와 포항부대 해체, 민부대는 대구로 이동시켰다. 미 해병여단은 다시 군 예비로 창원에, 미 제2사단 마지막 부대인 제38연대가 전투단이 밀양에 도착하여 제8군은 미 제24사단과 교대를 명했다.
8월 21~23일 : 미 제27연대에 대한 북한군의 6번째 야간공격 격퇴
8월 24일 : 전전선이 소강상태로 들어감
" 킨 작전 대 해부 "
1. 공격계획
킨작전의 목적은 마산정면의 북한군을 격파하여 부산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고 대구정면으로 집결하고 있는 북한군을 유인하여 대구정면의 압력을 완화함며 부산교두보 남측 방어선을 진주고개-사천선으로 추진하는데 있었다.
가.공격은 8월 7일 06시 30분에 세 갈래의 도로를 다라서 진주를 향해 병진 공격하는 것이다.
1) 제35연대(우일선) : 중암리에서 무촌리로
2) 제5연대 전투단(중앙) : 진동리-장성점-봉암리-무촌리
3) 해병여단(좌일선) : 장성점-고성-사천가도(진주의 동남쪽)
또한 함안 서북산(738m)과 마산의 주산(763m) 속에 잠복하고 있는 게릴라를 미 제24연대(민부대 배속)로 하여금 서북산 일대를 소탕시키는 것이다.
나.공격 전야
8월 6일 각 공격부대들이 공격선으로 진출하고서 서북산의 정찰을 맡고 있는 제24연대의 L중대는 함안 북쪽에서 게릴라의 매복기습으로 순식간에 12명의 전사자와 다수의 부상자를 내어 괴멸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서북산 정상과 필봉, 중암리를 감제할 수 있는 오봉산에 북한군이 이따금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날 밤, 북한군은 서북산에서 뻗어내린 여우고지(야반산)를 돌파한 후에 지산리 고지로 올라섰다. 그러나 야간이라 아무도 이러한 사실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2. 충 돌
킨특수임무 부대는 에정대로 8월 7일 아침 공격을 개시하였고 동시에 북한군 제6사단도 공격을 개시하여 충돌하였다.
이러다 보니 우익의 제35연대는 계획대로 공격이 진행되데 좌익의 진동리는 누가 누구를 공격하는지 혼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우익부대
7일 아침 미명과 함께 제35연대는 계방산으로부터 사격을 받고 역습으로 탈환토록 했으나 약 500명의 북한군과 충동하여 5시간이나 백병전을 방불케하는 격전을 벌여 강력한 항공지원으로 적을격퇴한 후에 저녁때에 무촌리 북쪽 삼거리로 진출할 수 있었으며 적 사살 350명, 전차 2대를 파괴하였다.
진동리의 혼전
8월 7일 아침은 짙은 안개로 항공지원이 중지되었다. 공격부대들은 아무런 의심없이 질서정연하게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고 안개가 걷히자 진동리 동북쪽의 255고지 일대에서 북한군이 출현하여 마산도로를 차단했고 해병 3대대와 제24연대 2대대가 항공과 포병으로 하루종일 255고지를 공격했지만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북한군을 돌파하지 못했다. 무려 7~8일에 1,600발의 포탄을 퍼부었으나 해병대가 돌격하면 수류탄과 기총소사로 버텼다.
한편 야반산(여우고지)일대는 "누가 누구를 공격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는 해병대 한 장교의 표현에서 제5연대 2대대와 교대하러 해벼우2대대가 지산리에 이르자 인근 고지에서 북한군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이날은 섭씨 44도나 되어 더위와 싸우는 격이였고, 이때 여우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제5연대 2대대는 날이 밝을 무렵 북한군의 포위 공격을 받아 해병대를 지원해줄 여력이 없었다.
"첫번째는 적에게, 두번째는 중간에, 세번째는 아군에"
보급은 공중투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협소한 관계로 제대로 투하도 못하였다. 진동리는 하루종일 박격포가 날아다니고 군의 예비였던 제27연까지 이 혼전 속에 말려들어 포병은 동서남북으로 사격방뱡을 돌려 지원해야 했다. 이것은 북한군이 이미 킨부대의 위치를 알고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날인 8일, 여우고지의 포위망을 돌파하라는 명령을 받은 해병 제2대대는 정오경 정상의 우군과 연결이 가능해졌다. 공격의 주역을 받았던 D중대의 피해는 전사 8명, 부상 28명이었으며 북한군은 150~400명으로 추정 되었다.
"한국전 최초의 야간공격 : 제5-2대대의 서북산 공격"
여우고지에서 내려온 제5연대-2대대는 서북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는데 벌써 1주일째 전투로 피로도가 증가하여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킨 장군과 제5연대장이 현장에 나와 지켜보는 가운데 제5-2대대장은 야간공격을 결심하고 2개중대를 병진으로 돌격하여 성공을거두웠다.
그러나 255고지는 이날도 탈환하지 못하고 항공 및 포병사격 지원을 2개 대대 공격으로 고지를 확보해 나갔다. 공격 3일째인 8월 9일 255고지를 공격한 제24연대 2.3대대와 해병 3대대는 항공지원을 받으며 정오가 지나서 탈취하게 되는데 주역을 맡았던 해병 H중대는 전사 16명, 부상 36명의 피해가 발생한 반면 고지 정상에는 북한군 시체가 120구나 있었으며 북한군의 피해는 약 600명으로 추정되었다.
한편 제35연대는 이날 목표인 무촌리로 진출, 주변에 정찰대를 운용하였다.
"야반산의 유해 50여구는 북한군?,아군?"
전사와, 정효명 학도병의 현장증언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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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도 없는 255고지 전투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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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산, 여항산의 유해발굴"
혈곡리 5인의 무덤
광산사 7인의 유해
인황산의 겨울 : 한여름에 추위
분진 협격
8월 9일 오후, 좌일선의 해병대는 3개 대대로 고성을 향해 공격을 개시히여 해군의 함재기의 호위를 받으며 무난하게 진출중 무명천의 다리가 전차의 중량으로 파괴되어 진출이 중단되었다,
중앙의 제5연대는 처음적의 저항이 미약하다 점점 강화되어 2개 대대로 좌우를 제압하면서 병진공격으로 속도가 떨어졌다
8월 10일, 미 해병대는 순조롭게 진출, 그러나 중앙의 제5연대는 수 미상의 북한군의 저항으로 시달리고 우군기는 봉암리 북방과 북한군의 보급기지로 판단되는 둔덕 부근을 맹폭하였지만 어느정도의 적이 있는지 모두가 제각각으로 대대에서 사단 주력까지 판단하였다. 정오경에 봉암리에 진출하여 3대대를 초월시켜 무촌리로 진출시키는데 저항없이 발산고개를 통과했다.
연대주력이 통과하려는데 봉암리 북쪽지역에 북한군 대부대가 나타나 연대는 기동을 중지하고 봉암리 협곡에 부대를 집결시키고 다음날 공격 준비를 했다.
이날 밤, 북한군이 야영주인 연대를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하여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11일 새벽에 공군의 공격으로 북한군은 산으로 도주했다.
피로 물든 협곡 "그리고 증원부대는 오지도 않았다"
8월 11일 아침, 제5연대 3대대는 무촌리로 진출하여 제35연대와 병진으로 진주고개를 공격하고, 해병대는 정오경에 고성 근교에서 북한근 제105사단 83기계화 연대의 차량종대 200대를 급습하여 200명사살, 트럭 31대, 소형차륜 24대를 파괴하였다.
이 무렵, 낙동강 돌출부는 북한 제4사단이 영산동쪽으로 몰려왔고, 대구 서북방에서는 북한 제3사단이 금무봉으로 도하하고, 동해안은 국군 제3사단이 장사동에 포위를 당하는 등, 예비대가 절실한 시점이었다. 그리하여 킨작전은 곧 종료될 것으로 판단하여 킨부대에 예비명령까지 내렸다.
그러나 봉암리에 제5연대는 지난 밤에 있었던 적의 기습으로 혼란해진 부대를 오전중에 수습하여 오후부터 전진하려 했으나 불가능 했다. 북한군이 4면에서 사격을 가해오고 발산고개 북쪽에 대부대가 잠복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상급부대는 대부대가 있다는 것을 믿지않고 바로 전진토록 요구했으나 연대장의 설득으로 제24연대 3대대를 증원하여 고개의 적을 퇴치하고 일몰 후 21시경 출발하는데 주력이 계곡에 남아 내일 새벽까지 대기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증원부대는 오지도 않았다.
"사방에서 들리는 총성, 완전히 포위 되었다."
사실 증원부대는 이동중 서북산 남쪽에서 북한군에 저지를 당하고 있었고 고개 위 산에는 보병이 계곡에는 포병이 산재해 있었다. 연대장은 이대로 있다가 날이 새면포병부대들이 큰 변을 당할 텐데라고 생각하고 출발을건의했으나 상부지시는 "그대로 있으라"였다.
그러나 연대장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8월 12일 04시에 전진을 명했다. 그러나 구급차가 길 도랑에 빠지는 등의 문제로 진퇴양란이 되었다. 그러다 어떻게 구급차가 빠져 나오고 본대가 전진을 하여 발산고개를 넘었다.
얼마 후, 뒤떨어진 제555야전포병대대가 전진을 위해 차량을 정열 시키는 순간 북한군의 포위부대(제13연대)들이 화력을 집중하여 "포병의 무덤(묘지)"을 만들어 버렸다.
제555포병대대(105밀리곡사포) : 2개 포대 8문, 전사 100명, 부상 80명, 전차량
제90포병대대(155밀리곡사포) : 포6문, 전사 100명, 부상 60명, 실종 30명, 차량 26대
북한군은 이 전과를 "155밀리 9문, 105밀리 12문, 전차 13대, 차량 157대를 획득 또는 파괴했다고 방송했다.
구출을 위한 눈물겨운 작전은 계속되어 해병은 남쪽에서 제3대대가 봉암리로 진격하려 했으나 사방의 고지마다 북한군의 사격이 있고, 미 제25사단 포병사령관 공병을 지휘하여 진출하다 곡안리 남쪽에서 저지되었다.
미 제5해병연대장은 헬리콥터로 내리려고 했으나 이것마저 불가능했다. 산 위에서 우군의 시체를 내려다 보는 미 해병대원들의 눈에는 북한군들이 쥐새끼처럼 시체를 뒤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사천의 함정
12일 아침, 미 해병대는 사천을 향해 급진하고 있었다. 제3대대는 봉암리로 투입하였으며 해병대 주력이 13시경 사천 동남쪽 6km 지점의 U자형으로 되어있는 장천의 협로 입구에 으르렀을 ㅜ때에 병풍처럼 가파른 산위에 북한군의 움직임이 보였는데 이것은 북한구누제15연대 2대대와 제83기계화 연대등이 미 해병대를 매복기습하기 위한 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해병 제1대대는 함재기의 지원을 받으며 좌우 고지를 탈취하여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제8군은 예비대를 전부 사용해 버렸기 때문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없었다. 8월공방전의 고비는바로 이날 이었다. 제8군은 12일 저녁, 킨작전의 중지를 결의하고 킨특수임무부대를 서북산으로 이동시켜, 방어태세로 전환한 다음, 여유병력(해병여단)을 예비로 차축키로 한다.
13일 0시, 각 부대에 철수를 명령했다.
보급품의 유지
작전기간중 미 제24연대는 북한군의 집결지로 예상했던 서북산을 공격했으나 산정상을 탈환하지 못했다. 아니 산속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북한군은 서북산을 전진거점으로 하ㅕ 킨부대의 후방을 반복적으로 공격했다. 이 일대의 주요도로는 그들의 공격목표로써 지뢰가 매설되고, 교량은 항상 적의 통제하에 있었다. 따라서 보급차량은 보병을 동반한 전차로 전후를 호위시켜야만 했다. 따라서 킨부대의 전차는 100대가 넘었지만 제1선에 투입된 전차는 그일부에 불과했다.
작전에 대한 평가
미 공간사에는 특수임무부대는 7일간에 걸친 공세작전으로 목표인 진주고개는 탈환했으나, 작전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정면의 적을 돌파하지 못했고 서북산의 적도 격퇴하지 못했다.
방어선 진주고개-사천선으로 추진도 못했고 오히려 후방을 습격당해 의외의 피해만 보았다. 작전의 주 목적인 대구정면으로 증원되는 적을 유인하지도 못했다. 북한군은 대구정면에서 한명도 이곳으로 전용하지 않았다.
북한군 제6사단의 7,500명에 비해 제공권하에서 24,000명이 지형과 북한군의 전법의 특이성 때문에 소기의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하여 마산을 안전하게 유지하고 장병들에게 공격전투의 경험을 체득케 하는 한편, 부산교두보으 남쪽이었던 남강-서북산-진동리선을 쉽게 점령할 수 있게 한 것이 작전의 성과였다. 이 작전에서 북한군도 4,000~4,500명의 손실이 있었다.
방어로의 전환과 산악전의 개시
8월 14일, 킨부대의 주력은북으로 부터 미 제35.24.5연대 순으로 남강의 남안으로부터 십이당산(271m)-전투산(665m: 네이팜산 또는 피의 산))-필봉(743m)-서북산(738m)-여우고지(342m)-옥녀봉(181m)선을 점령했다.
그러나 700m나 되는 산 정상에 보급지원을 해야하는유일한 방법은 인력이기에 사단은 400~500명의 한국인 노무자를 고용하고 있었는데 이들 중에는게릴라와 불순분자들이 끼여 재앙을 불러일으켜켰다. 킨부대는 16일에 편성이 해체되고 이후로는 미 제25사단이라 불렀다.
한편, 북한군 제6사단은 제14연대가 서북산을 점령하여 미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킨작전에 많은 손실이 있어 8월 12일에 보충된 약 2천명의 신병을 합쳐도 실병력은 5천~6천명에 불과 했다. 더구나 보충병은 1주 내지 10일 정도의 훈련을 받았을 뿐이고 반수 이상은 무기도 휴대하지 못했다.
북한 제6사단장 방호산은 8월 18일 밤 갑자기 십이당산에 대한 야간공격을 대대적으로 전개 했다. 진주-마산 가도를 확보하고 전투 부대를 동진하려면 이 고지를 탈환하는 것이 선결 조건이었다. 이로부터 야간 공격은 9월 20일 까지 계속된 산악전의 서곡이었으며 진해만으로 돌출된 해발 600~700m고지 일대에서 북한군 제13.14연대장이 돌격하다 죽을 정도로 "시산혈해"의 쟁탈전이 계속 되었다.
낙동강 돌출부 방어
1. 미 제24사단의 방어준비
판 단
북한군의 주공방향은 창녕정면이 될 것이다. 창녕정면이 도섭이 가능한 지점이 많고 지형도 공격하기에는 유리하나 방어하는부대는 도로가 부족하기 때문에 기갑부대에 의한 반격이나 증원이 제한된다. 따라서 창녕정면으로 공격할 것이라 생각했다. 즉 "적은 8월 상순 말 이후에나 주공을 창녕방면으로 지향하여 공격해 올 것이다라고 판단했다.
배 치
이미 제24사단의 전투력은 40% 수준으로 주공방향으로 판단되는 창녕 정면에 미 제21연대를, 현풍 정면에 국군 제17연대, 영산 정면(낙동강 돌출부)에 미 제34연대를 배치하고 기동예비로 제19연대와 수색중대를 창녕에 집결 보유했다.
진지는 8월 2일~3일부터 구축한 것으로, 개인호는 완성이 되어 있었지만 자재 부족으로 철조망과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곳은 창녕정면의 일부에 불과 했다.
주민소개
사단은, 오산전투이후, 주민과 피난민들 때문에 곤욕을 치른 일이 있었기 대문에 이번에는 진지 점령에 앞서 강안으로부터 8km이내에 거주하는 전주민을 소개시켰다.
이때 사단은 전단이나 출력이 강한 확성기로 "지시된 지역에서 퇴거하지 않는 주민은 적으로 간주하여 사살한다"는 내용을 포고했으며 창녕이나 영산부근으로 집결시킨 약 30만명을 부산으로 호송했다. 또 낙동강 서안에서 동안으로 들어오는 피난민 수는 약 10만으로 이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게릴라를 받아들이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피난민 대열 앞에 탄막을 설치해 피난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한다.
2. 북한 제4사단의 침입
서울, 영등포, 대전공략에 수훈을 세우고 소위 영웅 칭호를 받은 북한군 제4사단은 8월 4일까지 전사단을 합천에 집결시키고 낙동강 도하준비를 하고 있었다. 후일 조사에 의하면 이때의 병력은 7천명 수준으로 평시 편제의 70% 수준이었으며 포도 12문밖에는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왜관 북쪽에서 제15사단의 도하와 제6사단의 마산공격에 호응하여 5~6일 밤에는 도하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8월 6일 0시, 낙동강에 적색과 황색 신호탄이 올랐다. 북한군 제4사단은 오항과 부곡리일대 도선장에서 은밀 도하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부곡리로 오른 병력은 강변에 살치된 지뢰지대에 봉착하고 포사격과 12.5밀리 중기관총의 사격으로 격퇴되고 말았다.
하지만 오항으로 도하한 부대는 아무런 제한을 받지않고 내륙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곳에 배치된 제34연대 I중대는 전원을 표고 130m의 고지 정상에 병력을 배치하고 오항 도선장에는 감시병 한명도 배치하지 않았다.
"I중대의 웃기는 행동"
중대는 일 아침, 북한군이 전면의 오항 북쪽 고지에 나타나자 포위된 것으로 착각, 우측의 제21연대 방어지역으로 철수. 그러자 부연대장이 급히 달려가 진지로 돌려 보낸다. 이 사건은 후에 처어치 장군이 미 제34연대를 해체하게 된 주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도하를 끝낸 북한군 부대는 북 제4-6-3대대 600명이었다. 그들은 총과 옷은 머리에 이고 장비와 경하기는 뗏목에 싣고 어깨까지 빠지는 물속을 건넜다.
8월 6일 01시경, 4.2인치 박격포중대가 기습을 받았고 고곡리에 있던 3대대 본부가 습격을 받아 분산 되었다.
3. 연대의 반격
미 제34연대장 뷰쳄프 대령은 02시경 대대장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강안중대에 상황을 파악했으나 북한군 침투 흔적이 없다고 한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 어떻게 확인할 방법도 없다.
그런데 이때 돌출부의 첨단(박진나루쪽)에 배치된 L중대로부터 중대 좌측방이 적의 공격을 받아 격퇴했다는 보고를 받아 적이 박진나루로 도하하는것으로 판단했다.
따라서 사단장의 승인을 받아 연대 예비인 제1대대장 '아이레스중령'에게 "영산-박진가도를연한 지역을 역습하여 강안진지를 회복시키라"고 명령을 하달 했다.
아이레스 대대장은 트럭에 승차한 C중대를 직접 지휘하여 고곡리 북쪽의 북한군을 공격했으나 실패가 반복되면서 10시경에는 중대 병력이 겨우 35명만 남았다.
"두곡산의 총소리"
이때 갑자기 10시30분경 두곡부근에서 총성이 울리더니 잠잠해졌다. 이는 나중에 확인해보니 이곳에 배치된 제13야전포병대대 B포대가 포 4문, 차량 9대를 유기하고 철수하면서 벌어진 총성이었다.
"너무 더웠던 그날의 여름, 섭씨 40도를 넘나들다"
이 무렵, 부대대장이 대대주력을 인솔하여 진출중 동정리에서 북한군의 정찰대를 격퇴시키고 너무나도 더운 한여름날 낮에 더딘 진출을 하고 있었다. 도로 북쪽 165고지(일명 클로버고지 : 주변의 모습이 같은 모양으로 3개의 고지가 있다하여 미군이 명명함)를 공격하던 B중대가 동쪽 고지를 점령했다.
한편, 도로 남쪽으오 전진하는 A중대는 부분적 피해를 받으며 진출, 포병짅를 지나 C중대가 괴멸당한 고곡리 동쪽을 진출하여 제분공장에 남아 있던 잔류병력을 구출하였다. 이 잔류병력은 공장의 방어벽을 보강하기 위해 '전사자의 시체를 방탄용 마대 대신으로 사용'했다. A중대는 계속 진출하여 20시경 강변에 도착하고 철수중인 L중대 일부병력과 칠현리의 강안고지를 점령했다.
4. 사단의 반격
사단은 아이레스대대의 반격을 주시하고 있다 09시경 사단장은 "북한군 도하지점은 박진부근이며, 약 800명이라고 판단, 예비인 미 제19연대에게 "영산가도를 연해서 역습을 하되, 우선 강리로 전진하라"고 명하였다.
사단은 당시에 엘중대와 고곡리에 있던 제3대대가 습격을 당했다는 것, 아이레스 대대가 고곡리에서 고전을 하고 있다는 것, 두곡의 포병진지가 유린당했다는 것,북한군이 박진나루와 영산가도에 연해 할동하고 있다는 정도 였다.
그러나 도중에 보고를 종합하여 도하지점이 오항의 도선장이라는 것을 알고 제19연대에게 목표를 오항으로 변경, 먼저 후속 도하를 저지키로 한다. 먼저 오항에 대한 협공으로 청단부락에서 북한군 300명을 격멸한 후 오항 북쪽과 청단 남쪽 고지를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사단에서는 제9연대 1대대를 미 제24사단에 증원시켰다.
정오경, 사단장은 부곡리 동쪽에 남아 있는 북한군을 수색중대와 I중대에게 소탕토록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북한군 후속부대들이 박진과 오항, 그리고 부곡리로 도하시도 했으나 사단 전화포로 탄막사격을 실시하여 도하를 저지 시켰다.
8월 7일 새벽, 북한군 일부가 현풍정면의 국군 제17연대정면으로 도하 공격했으나 저지 되었다.
이날 제8군은, 국군을 재편성 하기 위해 제17연대를 대구로 이동시켰다. 따라서 제24사단은 급히 "하이져특수임무부대(제3공병대대, 미 제78전차대대(전차 결), 미 제24수색중대)"를 편성하여 국군 제17연대지역을 점령 시켰다.
사단의 공격은 무더운 날씨와 식량 식수문제, 제한된 전투력, 여기에 공군의 오폭 등 여러 요인으로 진척이 둔했다. 이 시기를 이용하여 북한군은 공세로 이전하여 B중대(역습부대)를 격퇴하고 클로버고지(165고지군)를 점령한다음, 지대내에 미 제A,I중대를 남겨둔채로 다시 남하하여 대붕리 능선까지 진출하여 교두보를 편성했다.
5. 군의 반격
제8군은 돌출부에 대한 북한군의 진출은 옆구리를 비수에 찔린 것과 같았다. 또한 사단의 역습도 실패하고 북한군은 교두보를 확보했다.
마산정면에서 진행중인 킨작전도 성공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더군다나 왜관 북쪽에서의 북한군 제15사단의 도하는 대구에 대한 큰 위협이었다.
따라서 우선 서측방의 위협을 격퇴시킬 필요성을 인식하여 경산에 의치한 제9연대를 영산으로 증원시켰다.
그런데 같은시기인 7일 밤, 북한군도 2개 대대를 추가 증원하고 있었다. 계속하여 도선장에서 나루배에 10~12명식 태우고 안개속에서 도하하였다.
8일 08시30분, 미 제9연대장 힐대령이 밀양의 제24사단 지휘소에 나타나자 "곧 공격하라"
힐대령은 지형도 모르고 전투경험도 없는 부대라고 했으나 결국 공격개시는 16시로 결정되었다.
제1차 반격, 그리고 실패
제9연대는 영산-박진가도 양측으로 전개하여 공격을 시작했다. 클로버고지군과 대붕리 고지군에 대한 포병사격으로 시작하여 주간에는 일시적 전진하였으나 밤에는 일거에 철수하고 말았다.
북한군의 대공격이 임박한 것으로 판단하여 강변의 A,L중대의 철수가 이루어지고 이에따라 북한군은 수중교(수면에서 30센티미터 정도의 깊이에다 주로 암석과 목재 등으로 낮은 다리를 만들어 도섭장으로 사용, 중화기를 운반)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3차례공격도 무위로 끝나고 오히려 그나마 일부 점령했던 165고지(클로버고지군)에서도 격퇴되는 등 장교의 손실이 너무 커서 제2대대는 중대의 장교는 1~2명으로 줄었다.
한편, 우측방의 제19연대 2대대는 피해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감행하여 오항 북쪽 고지를 탈환했으나 소총수가 약 100명(중대별 30~40)에 불과 했다.
"힐특수임무부대 편성", 그리고 영산 위기~!"
지금까지의 실패에도 굴하지앟고 처어치 장군은 10일 밤에 제19연대, 제34연대, 제21연대 1대대,사단포병(105밀리 29문, 155밀리 12문), 공병 1개 중대로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11일에 일거(5분안에)에 돌출부를 쓸어버릴 계힉아었다.
반면에 북한군도 이날 밤 수중교를 안성시켜 허ㅏ포 14문, 수미상의 전차를 비롯한 중장비오 예비인 18연대를 도하시켜 11일 아침에 공격을 준비 시켰다.
"공산군 제4사단의 공격준비파괴사격~?"
힐부대는 이러한 북한군의 증강된 상황을 알지 못하고 11일 아침 공격을 개시하려 했으나, 도리어 적의 맹사격을 받아 공격개시선에 그대로 묶여 버렸다.
적들의 포병은 6문,ㅍ 4문, 4문씩 세 곳에 포진지를 점령하여 전쟁이후 처음으로 탄막사격을 실시했다. 또한 영산 시가지까지 포격하여 힐부대의 후방을 교란하였다.
그리고 일부의 북한군과 게릴라가 영산-밀양가도에 출현하고, 다시 사단과 미 제25사단의 유일한 연락 수단인 남지교를 공격하여 K중대 1개분대를 격퇴시켰다.
기선을 제압한 북한군은 힐부대의 정면에 압력을 가하고 측방으로 우회하여 후방을 공격하는 전형적인 전법을 사용하였다.
처어치 장군은 군예비인 제14공병대대로 영산부근을 방어토록 했으나 전세의 회복은 어려웠다.
제8군은 사단의 위급에 따라 마산에 있는 군 예비인 제27연대 2대대를 사단에 배속하고 남지교 탈환과 영산 남쪽지역 소탕작전 임무를 부여 했다.
"소달구지에 실려온 북한군 소총 12정~!"
그러나 칠원-남지도로는 피난민(미 제25사에서 전선에서 철수시킨 인원으로 120,335명)으로 메워져 진출이 어려웠다. 피난민의 소달구지가 전복되면서 소총 12정과 탄약통이 쏟아져 나와 일대소동이 벌어졌는데 북한군 12명이 피난민으로 가장하여 진입하려 했던 것이다.
또한 남지교 남쪽 2km지점의 이룡리에 200명의 게릴라가 잠복하여 부대이동 등에 많은 제한적 요소가 되자 소탕작전을 명받은 2대대가 결국 남지교 근처의 북한군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은 8월 11~12일 밤에 영산 동쪽 고지를 점령하고 보급로를 차단했다. 이곳에 침투한 병력은 도하를 전부 완료한 북한군 제4사단은 모든 연대가 클로버고지 일대에 배치 되고 제18연대(-1: 두곡리 배치)가 영산에 진출했다.
여기에 이날 밤, 북한군 제10사단의 일부가 현풍 돌출부에 도하했다. 여기서 남진을 하면 창녕으로, 동진을 하면 청도, 북진을 하면 대구로 가는 위치다.
"12일, 영산 남쪽과 동쪽 지역은 전선도 없었고 전투정면도 없었다."
12일 아침, 힐부대장은 전선에서 즉시 F중대를 차출하여 영산 동쪽 고지를 공격시키고 적이 밀양으로 돌진 하는 것을 막기위해 처어치 사단장은 전차 2대와 사령부의 행정병, 취사병, 헌병 등의 인원 150명을 임시 편성한 "하페멘툭수임무부대"로 영산-밀양간 도로를 3차례에 걸쳐 방어시켰다.
남지교에 내려갔던 머어치대대(2대대)는 공군의 지원하에 남지교-영산도로를 따라 공격하여 북한군 100명을 사살하고 기관총 12정을 노획하였다. 피아 부대가 혼합되어 식별조차 할 수 없었다.
따라서 마산정면의 킨특수임무부대가 중간에 종료된 상황에서 군 예비인 미 제27연대(미카엘리스 대령) 주력으로 영산 남쪽 지역을 공격토록 명령했다.
8월 12일, 킨작전이 북한군의 반격을 받아 밀리고(봉암리 포병의 묘지, 서북산, 진동리 255고지 등), 대구 서남측의 용포에서는 북한 제10사단이 도하하였고 (국군제17연대 빠지고 제3공병 대대를 주력으로 하이저특수임무부대 투입), 동해안의 국군 제3사단도 장사동에서 포위위협에 직면하고 있는 등 모든 방면에 상황이 극히 불리하였다. 제8군은 돌출부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제27연대와 머어치 대대를 영산탈환에 전용하였다.
그러나 워커는 이곳에 투입된 적의 규모가 2개 연대규모인데 반격이 지지부진하자 밀양으로 힐연대장을 불러 "귀관은 영산 동쪽의 적을 격퇴할 수 있겠는가?"묻자 힐 "할 수 있습니다."였다. 보고를 받은 워커는 상황이 처어치 사단장 판단(북한 제4사단 전부가 도하)이 옳다고 보고 제23연대 1대대를 미 제24사단에 증원시켰다.
8월 13일 아침, 머어치 대대와 미카엘리스 연대 주력은 영산을 향해 공격, 기습작전으로 15시경 영산 동쪽 고지 탈환하고, 증원된 제23연대 1대대와 미 제14공병대대가 주변의 적을 완전히 소탕했다. 따라서 제27연대는 대구로, 제23-1대대는 현풍으로 하이저부대를 증원했다.
지역 탐사 및 탐문 결과
나는 영산-밀양간 도로의 한 위치에 올라갔다. 사단 직할병으로 구성된 "하페멘특수임무부대"가 이 고개를 지키어 냈다는 곳이다. 지역 주민의 제보로 이곳에 많은 유해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판단컨데 북한군이고 아마도 징집된 학도의용군이 많이 죽었을 것이다.
현장에 가니 부족국가 시절의 왕묘가 한두군데 있고 고개 좌우측은 헝하게 아무 것도 없다. 이미 도로가 2배로 확장되어 아무 것도 남은게 없다. 우리는 인근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듯이 남자분 한명이 앞으로 다가서 꾸벅 인사를 하며 반갑다고 한다. "여기서 만나뵙게 되어 고맙습니다. 제가 TV에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차를 몰아 창녕 대합 태백산으로 갔다.
"창녕 태백산의 소년병"
창녕 대합면 합리에 있는 산은 284m 높이로써 5번도로 바로 옆에 있었다. 제보자 이야기는 본인이 어렸을 때에 이곳에 소먹이 풀을 하러 갔는데 해골이 굴러다녔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로 올라서니 정상부근에 큰 바위군이 있고 깊게 굴토된 곳이 있다. 탐지결과 요란한 소리에 놀랐다. 2002년도의 일이다. 이곳은 원래 발굴지역은 아니였는데 동네분의 열열한 제보에 발굴을 하기로 한다. 그런데 9명의 유해가 나왔는데 모두 15세 정도의 어린 유해라 한다. 다른 개인호도 아니고 한 방공호에 모두가 들어가 있었다.
동네 분들은 당시에 어린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산에 오르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럼 국군이 이곳에 오넉이 있느냐의 질문에는 경찰은 왔다 갔지만 국군은 본 기억이 없다고 한다.
다른 동네분들은 본초리에 가면 야산에 뼈가 널려 있어 긴뼈를 들고 칼사움도 하고 그 당시에 형들이 일부는 불에 태워 몸에 바르는 모습도 보았다고 한다. 이 어린 시신들은 공산군한테 도망치다 붙잡혀 죽은 학도병인지 아니면 극렬분자가 되어 마자믹까지 수류탄을 던지고 포탄이 낙하되어 죽은 북한군 의용군인지~~~
"우포늪의 영혼들"
이곳 일대는 경찰과 국군의 전투 사실이 미흡하다. 제17연대가 머물다 간 곳도 현풍이다. 하지만 우리는 실태조사를 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북한군은 8월에 들어서 보급거리 신장에 따른 문제점과 유엔군의 계속되는 항공폭격으로 후방에서의 병력지원이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징집병을 보내거나 포로가 된 군인이나 경찰을 사상교육을 시켜 전쟁터로 보내게 된다.
이방면 세진리로 들어가, 마침 우포늪에 배를 띄워 그물을 걷고 있는 얼굴이 정말 까만 분을 만나 혹시 이 일대에 국군이나 경찰 또는 미군이 죽어서 묻혀 있는 곳은 없는지 물었다.
"그걸 지금와서 찾아서 뭐한데요?"
"유가족을 찾고 현충원에 안장하여~"
"아니 미국놈들은 전쟁때부터 지금까지 찾고 다니는데, 얼마전에도 왔다 갔어요."
"죄송합니다. 우리는 아직 그렇게 정신문화가 높지는 못합니다;"
"그게 아니고 할 일은 않하고 않할 일에 쓸데없이 싸움질 하니까 그래요. 이곳 늪지대에 정말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군인만이 아니고 민간인도 많이 죽었어요."
"민간인은 왜 여기서 죽었습니까?"
'남지읍 시남리(474p)
하동 비피리 (476p)
진주 판문동(479p)
장수 명덕리(338)
본초리(470),
구진산 릴리 에드먼드 소위와 북한 장군
박진나루 시체더미(포크레인)
수곡천의 미군차량과 한국인
골안골의 아주머니와 어린아이
창녕 국민방위군
제2차 반격 : "클로버고지, 대붕리 고지의 악몽"
처어치 장군은 힐부대가 영산주변의 적을 완전히 소탕을 끝냄으로써 다음 14일 2차 총공격명령을 내렸다. 전투기 100대로 폭격을 하고 실시케 하였으나 기상관계로 지원이 않되고 포병이 105밀리 33문, 15밀리 12문으로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에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겨우 클로버 고지 일부분만을 점령하는 것에 불과 했다. 클로버 고지를 공격한 제9연대 E중대 경우 장교와 하사관이 사상을 당하여 조르단 하사가 다섯번이나 중대를 지휘했다는 사실에서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알 수 있다.
15일, 비가 계속내려 힐부대의 공격은 공군의 지원이 어려웠다. 하지만 공격정신만큼은 대단했다. 아이레스 대대의 A중대 2소대는 콜린스 중사가 지희하는 병사는 35명뿐이었지만 이 소대는 대붕리고지 중앙으로 돌입하여 수류탄으로 백병전까지 감행하여 10명 밖에는 남지 않았다. 결국 적을 격퇴하는 대는 실패하게 된다. 예비대가 없었다.
"살려주세요, 저는 어린 학도의용군이에요~!"
하지만 북한군도 사기가 저하되고 있었다. 15일 클로버고지에서는 어느 미군하사는 호에서 뛰어나는 북한군에게 죽은 걸로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주여 어린 양을~~"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북한병사가 손을 들고 항복을 하지않은가, "GIVE UP~!"
힐부대도 전투력이 소진되고 있지만 북한군도 소진되고 있는 것이다.
2차반격의 실패를 보고 받은 워커는 처어치 장군에게 다음과 같이 비밀명령을 내렸다.
"귀관에게 해병여단을 배속시킬 것을 생각하고 있자. 나는 이 돌출부에서 전투를 빨리 마무리짓고 싶다. 빨리 말야~~~~~" 그러나 그 말에는 약간 노기가 있었다.
대구로 돌아온 워커는 "킨작전"을 끝내고 밀양으로 이동중인 미 해병여단을 처어치 장군에게 배속하여 17일 아침부터 반격을 개시토록 지시했다.
"한편 북한군 제4사단도 비참한 상태에 있었다."
즉 도하지점에 대한 미 공군의 공격과 포병의 사격으로 사단 후방이 차단되어 소화기 탄약의 보급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영산으로 진출한 제18연대는 14일 이후 한 발의 탄약도 보급을 받지 못했다. 부상병 치료도 안되고 식량도 절반으로 줄어들고 사단에 보충된 징집명은 무기도 없고 훈련도 못받았다.
그래서 이들은 호구축 작업, 물자 운반, 식량 징발 등의 노역에 사용됐지만 탈영병이 급증하여 그 수는 보충 수의 40%에 달했다.
미 제24사단이 기진맥진한 상태에 놓여 있을 때, 상대방인 적도 마찬가지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같은 15일, 현풍의 서쪽 돌출부에 숨어서 움직이지 않는 부대가 북한군 제10사단 제29연대란 것을 알아냈는데 도대체 이 부대는 움직이질 않아 기분이 나쁠 정도였다고 한다.
6. 교도보 돌파
공격계획
미 해병여단을 배속받은 처어치 장군은 17일 아침에 공격을 실시할 예정으로 가용한 모든 화력으로 공격준비사격을 시리한 후에 미 해병대와 제19연대를 주공으로 양측방에서 돌파하여 협격하려 했다.
이 계획은 북한군의 주진지가 오항-클로버고지-대붕리고지를 연하는 선으로 특히 클로버고지와 대붕리고지간에 상호 지원할 수 있는 위치라 동시에 공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해병대 머레이 연대장은 북한군의 주진지를 대붕리 정상에서 남쪽의 206고지로 보고 먼저 그들의 전초기지가 있는 대붕리 고지를 해병대 단독으로 탈취한 후에 사단 주력의 공격이 개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사단장은 그의 의견을 존중하여 주었다.
미 해병대의 공격작전
가. 1차 진격전
17일 07시 35분, 공격준비사격이 개시되었다. 해병대를 직접지원하는 코르세아 전폭기 18대가 대붕리 능선을 폭격하고 총 49문의 포는 머레이 연대장이 주진지로 생각하고 있는 206고지를 강타했다.
그리고 주력이 공격을 개시하자 클로보고지 남단의 두곡부락에서 기관총 사격과 대붕리의 부락으로부터 배후사격을 받아 가며 정상에 돌격을 감행해 갔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정상에 오른 부대는 싱어소대 12명이었으며 이들도 북한군의 수류탄 백병전에 5명이 부상하여 이 부상자를 옷에 싸서 질질끌고 정상을 내려와야 했다.
나. 2차 진격전
이번에는 전차로 두곡과 대붕리 부락으로부터 오는 측방이나 후방사격을 받지 않도록 사격을 가하게 해놓고 다시 공격해 갔으나 이번에도 제2대대 싱어소대의 9명만이 정상에 올랐다. 대대는 전사 23명에 119명의 부상으로 제1대대와 교대시켰다.
후일 조사에 의하면 북한군은 대붕리 능선에 제18.16연대에서 1개 대대를, 클로버고지에 제16연대의 주력을 배치하여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이를 확보할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다. 당일 16시에 3차공격이 진행되었다.
오판을 인정한 해병대 연대장 머레이는 사단장 처어치의 의견에 따라 전전선에서 동시전투를 받아들였다. 이번에는 대붕리와 클로버에 포평사격을 집중하되 엄체호등을 고려 VT신관을 사용하였다. "대붕리 고지군이 허공에 뜬 것처럼 보였다"는 증언에서 그 효과는 대단했고 제9연대는 클로버고지를 탈환하여 후방으로 북한군을 협격함으로써 대붕리고지에 해병이 올라섰다. 해병 제대대는 순차적으로 대붕리 능선의 고지들을 점령해 나가고 일부는 야간에 적의 저항으로 철수도 했다. 우측방의 제19연대와 제34연대는 오항 북쪽의 고지를 점령했으나 배후로 부터 사격을 받아 공격은 돈좌된상태였다.
"생지옥같은 클로버, 그리고 대붕리 고지군~?"
너무 많이 죽었다. 북한군은 결사적으로 물러나지 못했다. 무기도 별로 없는 주로 방망이 수류탄이 전부였다. 불을 뿜는 기관총은 그들의 정예간부들이 운용하고 말단 병사들은 남한에서 강제 징집된 인원으로 채워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발목을 묶어 놓는 등, 무자비한 희생을 강요했다. VT신관이 엄체호를 파고들어 터지면서 마치 그 포연이 능선이 허공에 뜬 것처럼 보였다.
당시에 동네에는 사람이 없었다. 강제로 모두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죽기를 각오하고 나가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 나이드신 분들의 이야기는 미군 해병대 대단하지만 죽어도 물러나지 않던 북한군이 불쌍하다 한다.
라. 대전차전
저녁무렵 적의 역습에 대비하는 대붕리 능선 북단의 해병 1대대 B중대가, T-34전차 4대와 수백명의 북한군이 접근해 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즉시 M-26퍼싱중전차 3대와 75밀리 무반동총, 3.5인치로켓트포 2문이 준비되고 항공지원도 준비된다. 고개를 넘는 전차에 먼저 항공공격이 있었지만 효과는 없다. 이어서 로켓트포가 90m거리에서 캐터필러에 명중시키고 75밀리무반동총도 명중되어 주저앉아 있으면서 사격은 계속한다.
이번에는 퍼싱전차가 100m 거리에서 불을 뿜자 사격을 멈추었다. 2번째 전차는 3.5인치로켓포 단 합 발로 끝났다.세번째는 퍼싱전차가 , 네번째는 무스탕기가 파괴하여 끝났다. 보병도 괴멸 되었다. 102고지 정상의 미 해병들은 이 통쾌한 승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25명전사, 180명 부상이다.
마. 대붕리의 야간전투
17일 밤, 해병대는 역습에 대비했다. 병력의 1/4이 배치되고 나머지는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해병대의 무선전화에 북한군의 전파가 잡혔다.
"대장님, 실탄이 없습니다. 철수를 승인해 주십시요?"
"야, 너 죽울래. 다 죽을 때까지 역습해. 빼앗긴 곳 찾아라. 만약 못찾으면 너가 책임져라?"
"너무 합니다?"
"북한군의 무자비한 제파식 공격"
북한군은 빼앗은 미군 무전기로 통화하고 있었고 운좋게 이것이 걸려들었다. 즉시 해병은 바로 병력을 비상배치하고 때를 기다렸다.
02시 30분, 청색 신호탄이 오르고 적의 야간공격이 시작되었다. 때를 맞추어 해병대의 조명탄이 오르고 북한군의 움직이는 모습이 대낮처럼 보였다.
몇개의 제파로 나누어, 제1제파는 수류탄을 들고 10~20m를 뛰고 엎드리고, 그 뒤로 제2제파, 제3제파가 계속적으로 따르고 마치 파도가 치듯 밀려들었다.
이 제파식 공격을 이겨내니 좁은 고지에 시체가 183구가 되었다. 해병대의 손실도 180명에 달했다. 하지만 한명의 행방불명도 없었다. 이것이 미군 해병대의 전통이다.
18일의 날이 밝은 후, 아직 확보하지 못한 117고지에 500파운드의 폭탄이 투하되고 끝이 났다. 북한군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10~100명식 무리지어 그들이 건넜던 그 길로 강을 건넜다.
미 해병대는 구진산에 대한 공격도 감행하여 탈츼하고 우측의 제19연대, 제34연대도 강안의 고지들을 제압하였다.
19일 아침, 미 제24사단은 돌출부에 대한 소탕을 끝냈다. 해병대가 노획한 무기는 122밀리 포를 포함한 포 34문, 중기관총 18정, 경기관총 25정, 가관단총 63정, 매장시체 약 1,200구 였다.
이후에는 북한군 제4사단은 낙동강 전투에 다시는 참여하지 못했다. 제기불능이 된 것이다. 이후에 중공군이 개입한 후에 재편성을 거쳐 등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