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한국영화는 역사적인 100년을 맞는다. 1919년 김도산의 <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가 한국영화의 기점으로 인정되었다. 아직도 <의리적 구토>와 1923년작 <월하의 맹서(月下의 盟誓)>의 한국영화 기점 논쟁이 팽배한데 한국영화인협회는 이 연쇄극의 단성사 공연일인 10월 27일을 한국영화의 날로 정해 행사를 가져오고 있다. 영화는 1895년에 프랑스에서 루미에르 형제에 의해 발명되었는데 세계 최초의 영화 상영은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 파리의 그랑카페에서 <열차의 도착> 등의 단편 영화를 상영한 것이다. 영화의 기준은 극장에서 스크린을 통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에디슨이 동영상을 볼 수 있는 키네토스코프를 1889년에 발명했지만 영화로써 세계적인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혼자서 관람하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과 일본, 중국에서의 영화 역사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 우선 영화라는 용어는 일본에서 전래된 말이다. 자동사진, 자동환등, 활동사진에서 유래되었는데 1918년에 제창된 ‘순영화극(純映畵劇)운동’ 이후 사용된다. 중국에서 쓰는 전영(電影)이라는 표현은 그림자극인 영희(影戱)와 차별화 시킨 것인데 영화의 특성과 잘 어울린다. 이들 3국은 서로 이웃하며 문화적 차이점보다는 유사성이 많고 동시기를 서로 첨예하게 갈등하며 전쟁과 침략의 역사를 함께 공유하고 있다. 그렇기에 문화와 문명의 첨단에 있던 영화의 교류와 영향 역시 불가분의 관계이다.
한국에서는 1897년에 처음 영화가 상영되었다고 한다. 정확한 기록은 1903년 동대문 한성전기회사 기계창에서 영화를 상영한다는 신문광고가 남아있다. 영화제작은 1919년 연쇄극 <의리적 구토>가 기점이 된다. 연쇄극은 연극 공연 중간에 야외 촬영 장면이 보여지는 형태이다.
그 후 1923년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제작한 윤백남 각본·감독의 <월하의 맹서>가 순수한 형태의 영화 기점이다. 감독은 윤백남이지만 제작을 비롯한 기타 스태프들은 일본인들이었다. 따라서 일본인들에 의해 영화기술이 전수되었다. 중국에서는 1896년 8월 11일 상해에서 최초의 영화상영이 있었다. 신기한 놀이로서 온 세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영화는 금방 중국으로도 수입되었다. 중국 최초의 영화 제작은 1905년에는 임경태(런칭타이/任慶泰)가 <정군산(定軍山)>을 만들었다.
일본의 경우는 처음 영화가 수입된 것이 1896년 11월이다. 그 뒤 1898년에는 고니시 사진관의 아사노 시로(浅野四郞)이 <둔갑한 지장보살>, <죽은 자의 소생> 등 단편영화를 제작하게 된다. 이렇게 3국의 영화역사가 시작되었고 이후 서로 간 영향을 미친다. 한국과 중국은 지리적으로 근접해있고 문화 교류는 지난 5천년의 역사 속에 꾸준히 이어져왔다. 대륙으로부터의 문화 전파가 이어져왔고 때로는 침략을 받아 문화 종속화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일본과는 조선시대에 통신사를 통해 문화 교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특히 일제강점기에 영화 문물이 전해지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시나리오나 제작 기법에 대한 기술 전수는 물론 조선총독부의 영화검열로 일본식으로 구조화 되었다. 이렇듯 3국의 영화 교류는 지리적인 근접성과 아울러 역사적인 영향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유사성을 지니게 된다. 중국의 경우 한국전쟁 후 1992년에 가서야 수교가 이루어지므로 긴 시간 단절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상해에서 활동했던 한국영화인들이 존재했다는 역사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 영화 중에서 <양자강>, <상해여 잘 있거라> 등의 영화가 국내에도 수입되어 개봉되었다.
대만의 경우는 1895년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며 선무공작의 일환으로 영화를 활용하였다. 일제는 1936년에 당시 만주국 신경(지금의 장춘)에 만주영화협회(약칭:만영)을 세워 국책영화를 제작에 착수한다. 홍콩은 일제의 상해 침공 후 중국영화인들이 모였고 싱가포르로 이주했던 영화인들이 재이주하며 영화의 도시로 성장한다. 대만과 더불어 홍콩은 중국문화를 알린 우방 국가였다. 영화 초창기에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지만 1992년 중국과의 수교 이전에는 홍콩과 대만과의 왕성한 교류를 통해 상호 영향을 받는다.
TV 드라마로 시작된 한류 현상은 영화와 가요로 확산되며 이들 나라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그것은 정서적인 공감이 타 지역에 비해 쉽기 때문이다. 외모는 물론 의·식·주 등의 문화가 유사하고 오랜 시간 문화 교류를 통해 대중문화와 영화를 함께 공유해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의 경우는 지정학적으로 중간에 위치해 문화의 징검다리로서 중국과 일본의 문화를 수용하며 받은 영향이 더 크다. 이들 나라의 영화 유입과 교류의 비교연구는 흥미로운 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