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비(白碑) 민간인학살지 순례 여수 형제묘,만성리 해변 학살추모행사
주최: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사회적공론회미디어 투쟁단
후원단체:광주전남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광주여성회.(사)우리민족).통일WHO.(사)사단법인우리민족.광주시민단체협의회.전국농민회총연맹 순천시농민회.전국농민회보성군농민회.광주전남추모연대.21C광주전남대학생연합.광주교육희망네트워크.광주진보연대.전남진보연대.국민주권개헌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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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리해변 학살지 원혼표식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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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김선희집행위원장.선용규전남지부장.주철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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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터널안에서 수백명이 학살되었다
독립운동가도 아니고, 애국열사도 아니지만 일제강점기 때 이름 없이 스러져간 한 많은 민중들. 그들의 흔적들은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여수 마래터널은 그야말로 민중들의 피와 땀, 한과 눈물로 깎아 만들어낸 암반 터널이다. 이 터널은 일본이 군수물자 등을 나르기 위해 만든 것으로서 힘없는 우리 민중들이 강제 동원되어 노역한 현장이다. 마래터널을 빠져나오면 한국전쟁 당시 여순사건으로 죄 없는 마을 주민들이 학살당한 여순사건의 현장을 만나게 된다.
마래 터널
마래터널. 1926년 일제시대 자연암반을 깎아서 군사용도로로 사용했다. 현재에도 차량이 다닌다.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된 민간인들은 이 터널을 지나서 만성리에서 집단학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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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리 학살지
진압이 완료되면서 서정지역 주민들은 26일 새벽부터 서국민학교에, 동정지역은 공설운동장과 동국민학교 등에 모여 심사를 받게 된다.
지까다비를 신고 있는 사람, 총을 멘 흔적이 있는 사람, 군용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처형이 되었고, 또한 우익가족이나 경찰 및 가족들의 손가락질에 의해 좌익이거나 적극적인 가담자라고 판명된 자는 즉결 처형이 이루어졌고, 계속된 심사를 거쳐 가담한 자로 판명이 되면 종산국민학교(현 중앙국민학교)에서 재심사를 받게 된다.
종산국민학교에는 여수에서 1차 심사를 통해 끌려온 사람들과 각 지방에서 끌려온 좌익이나 가담자들이 갇혀 있었으며, 이곳에서도 즉결 처형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후 이곳에서 색출된 125명에 대한 처형이 만성리 굴 너머, 현재 군부대가 위치한 근처에서 헌병들에 의한 총살 및 화장이 이루어지는데, 정기순씨의 오빠인 정기만이 여기에서 총살당한 관계로 49년 1월 13일이라고 밝혀졌다.
여수 경찰서 사찰계 형사였던 최명균씨의 증언이나 인근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당시 희생된 사람의 숫자가 125명이며, 그 과정이 낱낱이 드러나게 되었다. 또한 증언을 통해 확보된 희생자 15명의 인적사항이 그 사실을 증명해 준다.
당시 125명을 끌고와 경찰에게 총살을 명령했으나 최명균씨 등이 경험이 없다고 미루었고, 이후 헌병이 총살을 하고 경찰은 주위 경계를 했다고 한다. 5명씩 묶어서 총살을 한 후, 지게꾼들이 시내에서 가지고 온 장작을 이용해서 장작과 사람 5명을 겹겹이 쌓아 5층으로 다섯 묶음을 만든 후 화장을 시켰다고 한다. 이때 3일간 불이 탔으며, 그 냄새로 인해 사람들이 지나다니기가 곤란했다고까지 한다.
만흥동의 신용식씨 증언에는 당시에도 한명이 생존해 지게꾼들이 바지개로 가려서 살렸다는 말이 있었는데, 최명균씨를 통해 비탈쪽으로 한명이 굴려졌는데 목에 줄이 걸려 죽었음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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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리 형제묘
만성리 학살지와 함께 널리 알려진 이 곳 형제묘는 학살 후 시신을 찾을 길이 없던 유족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고 형제묘라 이름 붙여진 곳이다.처형은 헌병들이 주도하였으며 장작더미에 기름을 부어 태웠고 처형된 가족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보초를 세우고 태워진 시신 위로 큰 바위를 굴려서 덮었다. 시신은 3일간이나 불에 탔으며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는 한달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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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간이기를 거부했던 이승만의 만행은 던군후예로서 역사애서 가장부끄러운 만행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것입니다.와세에 편승하여 찬일분자들의 매국행위는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입니다.찬일의잔재들을뿌리채 뽑아내야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