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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基督者 像
信天함석헌
1976년 4월 26일 KSCM창립기념예배 기독교회관에서 하신 말씀 (씨알의소리 1976년 5월호)
프로그람 없는 사람
예수의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중에 하나가 「가나」의 잔칫집에 갔던 얘기일 것입니다. 당신이 독신으로 사신 분인데 뭐 결혼이고 뭐고 그런 것이 크게 문제가 되셨겠습니까마는, 하여간 어려운 사람, 못난 사람, 그런 사람들도 생각해주시고, 기쁨·슬픔을 같이 하실려고 하시는 분인데, 동리에 혼인 잔치가 있다고 그래서 당신의 어머님도 거기 가서 수고를 하시고 그러니까, 아마 참석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잔칫집에서 도중에 술이 떨어졌어, 손님들이 좋게 그날을 지낼려면, 맛있는 술이 있어서 마시면서 지내야 하겠는데 술이 떨어졌으니 어떻게 합니까? 주인의 입장이 그와 같이 곤란해진 것을 예수님의 어머님이 그걸 짐작해 아시고 가서 아들 보고 “이집에 술이 떨어졌대, 어떡하지?” 그랬습니다. 그러니 거기 대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 때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했습니다.
「내 때」라는 게 무슨 말씀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일까? 십자가를 지시는 것일까?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예수님이라는 이는 언제든지 일동일정을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하는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살림에는 예정표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목을 짜서, 요새 말로 프로그람을 짜서, 살아갈 수가 있지만, 예수님은 프로그람 없는 살림입니다. 왜 그런고하니 하나님의 명령이 언제 무슨 일을 어떡하라고 할런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러고 사는 분이니까, 자기 동생들이 “왜 유명해지고 싶다고 하면서 시골 있어 가지고 되겠어요?”했습니다. 빈정대는 말이지요. 자기 형님 보고 예루살렘에 축제가 되고 그런다는데 거길 왜 올라가지 않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때 뭐라고 했지요? 너희 때는 늘 있으니까(프로그람 짜고 제도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어서 올라가라, “내 때는 아직 오지 알았다” 그랬어요.
그럭하고도 조금 있다가는 또 올라가셨습니다. 아까는 안 가신다고 하더니 지금은 또 가시고, 그러면 이랬다저랬다 하시는 분이신가? 변덕을 떠는 사람인가? 주의 주장이 없는 사람인가? 그거는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봐서 그렇지 않은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면 그것은 필시 이런 것 아닐까? 갑자기, 예루살렘으로 가라는 동생들의 말을 별로 듣고 싶지도 않아 그냥 있노라니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거라!”하는 명령이 왔습니다. 뭣이 있을지는 또 가봐야 알지만 하여간 아니 갈 수 없습니다.
가나안 잔치도 그렇지 않은가? 아까는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랬는데 또 어머님은 아들을 평상시에 지내봐서 아니까 심부름꾼 보고 “여러 말 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해!” 그랬다는 거야요. 그랬더니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어떻게 된 건지, 물이 정말 변해 포도주가 됐는지, 속된 사람에 생각으로 하면 그랬다고 해야, 야 그것 참 놀라운데 하고 좋아하려 하지마는, 하나님의 기적이라는거는 꼭 반드시 그런 거는 아닙니다. 왜 그런고 하니 우리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나타나 보이는 현상이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달을 기쁜 사람이 보면 기뻐지고 슬픈 사람이 보면 슬퍼집니다. 중요한 것이 물건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습니다. 믿는 입장에서 볼 때에 왔던 사람이 “참, 당신 마지막까지 이렇게 좋은 술을 가지고 있소, 이런 잔칫집 못 봤소. 다른 사람은 처음에 좋은 술을 내고, 나중에는 나쁜 술을 내는 법이오. 그런데 당신은 나중까지 좋은 술을 냈소,” 한 그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거를 문학적으로 얘기를 하는 칼릴 지브란은 뭐라고 그랬는고하니, 뭐 꼭 물을 변하게 한 그런거 아니라, 참 술이 뭐냐? 예수의 말씀 자체가 술 아니냐? 그러니까 사람들을 놓고 얘기를 하는 가운데 술잔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그저 황홀한 지경에 이럭하고 있다가 그래 오늘은 한정이 없는 술을 마음껏 마지막까지 마시고 간다. 사람들이 그랬다. 그런 걸로 해석한 일이 있습니다만, 그거는 이제 몰라요. 나는 그런 지경엘 못 갔으니까 말할 거 없습니다만…
그저 썩어질 사람 아니다
오늘 여길 오니 마치 사정이 가나 잔칫집 같습니다. 잔칫집에 왔는데 갑자기 술이 떨어졌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남의 곤경을 그냥 볼 수 없어 이 자리에 선 것입니다. 김박사님 오늘 못 오시게 됐습니다. 이걸 어떡합니까? 그 말을 들었을 때 언뜻 생각나는게 뭔고하니 가나의 잔칫집에, 손님 청해 왔는데 술 없다는 말 아닌가? 그런 생각이나요. 그런 걸 당하면 예수님과 같이 물을 변해 맛있는 포도주가 되게 하듯 그렇게는 못되더라도, 탁백이라도 마련해 주어야지요. 무슨 얘기라도 해서 왔던 손님들이 그래도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지나 알고 갈 수 있도록 했으면, 그렇게라도 지내고 갈 수 있었으면, 그런 생각이 있어. “그래, 그럼 나가봅시다”하고 나온 겁니다.
물론 동길 박사가 오셨으면 참 좋은 말씀들을 것입니다. 나도 정말 그래서 들으러 나왔습니다. 근래는 이런 모임 나와 보지도 못했습니다. 지지난 해부터 열심으로 나와 다니느라고 그랬는데…
나는 될 수록이면 나와서 보고 만나고 싶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럴꺼야요. 나 많은 사람이 집에 가만있지 않고 뭘할라고 자꾸 저렇게 나오나? 그러다가 어디 가서 엎어지기나 하면 어떡할라고(웃음) 집에 가만이나 있지, 그럴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나는 왜 나오는고 하니 학생들이 가서, 잘했든지 잘못했든지, 잘했으면 물론 그렇고 잘 못했다고 하면, 더구나도 불쌍한 사람들이고 그러니까 짐을 같이 지는 의미에서 거기 나가 기도라도 하면 내가 못하더라도 거기 나가 기도하는 소리라도 듣는게, 인간의 옳은 도리지, 내가 재판은 못 받더라도 그 넓은 방안에 혼자 서서 재판을 받으라니, 그런 참혹한 일이 인간으로서 어찌 그럴 수 있냐? 사촌이 됐던지 팔촌이 됐던지 사돈도 못됐던지 간에 어쨌거나 이 나라의 사람이 무슨 일로 인해서 재판을 받는다면, 거기 가서 옆에 서서 동정이나 해서 봐나 줘야지. 그런 생각에 이제 따라다니느라 그랬는데, 요새는 또 그렇게도 못되게 돼서, 「아이 그럼 집에 있자」, 그래서 가만있었는데, 동길 박사가 이런다고 하니, 동길 박사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거 뭐 개인적인 일입니다마는, 나는 이날까지 잘되는 일이 없어요. 하는 일이 다 잘못됐지. 그중에 김동길 박사 본 것만은 바로 됐다 그럴 수 있을 것 입니다.
지금부터 거의 30년이 돼 옵니다마는 이북에서 터벌터벌 여길 넘어 왔는데, 뭐이 있어요, 아무 것도 없는데, 또 어떻게 돼서 학생들을 보고 더러 말도 좀 하게 되어서 그래서 혹시 연세대도 가고, 고대도 가고, 서울대에도 가고 그랬는데, 그때도 기독학생회, 오늘도 기독학생회, 기독학생회는 참 좋게 생각합니다마는, 기독학생회에서 주최를 한다고 해서 말을 한다고 그랬는데, 서울대에 갔는데, 내가 잠깐 말해보고, 그 사람 보통 아니다. 저사람 아무래도 뭣에도 그냥 썩어질 사람 아니다, 그런 학생 하나 봤고 연세대에서 또 얘길해 달라고 해서 연세대엘 갔었는데 그 많은 학생 중에서 물론 다 이렇게 고르진 못했습니다마는, 몇 번 만나는 중에, 역시 김 박사를 보고, 저 사람이 그저 썩어질 사람 아니지, 그렇게, 둘을 봤었는데 아깝게도 이자 서울대에 있었던 그 사람은 6.25 때에 공산당에게 잡혀서 그만 죽었습니다. 보지도 못했습니다. 참 아까워 이날까지 못 잊습니다마는, 법과에 있었고, 이름을 진재영이라고 했지요.
그러는고로 김동길 박사를 만나기만 하면 늘 그런 생각이 자연히 납니다. 이만큼 오래 살아가노라니까, 지금 여기서도 학생들을 봅니다만, 공자님 말씀 모양으로, 후생 가외 언지내자지부여금호아(後生 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乎아)? 어이구 뒤에 오는 사람이 두렵구나. 뒤에 오는 사람이 더 크게 될지 누가 아느냐? 나 같은 것은 문제도 안 되는 거지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내 한 것이 없는데 그것만은 내가 바로 봤지 하는 그런 생각에 마음이 흐뭇합니다. 오늘 어떻게든 그동안 적적해서 도무지 말이라곤 들어도 못보고 그래, 한번 들을까 그래 나왔더니, 엉뚱하게 또 일이 이렇게 돼. 왜 못 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지금 말씀하는 걸 봐서는 대개 조금 추측이 가는데…(웃음)
이 시간이 중요한 시간
그러면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오신 분들이 다 이렇게 돌아가면 그건 너무도 잔칫집에 갔다가 시큼한 탁주한 잔도 못 마시고 갔다면 그건 너무도 참혹한 일 아닌가?… 어떻든 섭섭하지 않게 하고 싶어 나왔습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할까? 오늘 제목이 참 좋아요. 「오늘의 기독자 상」이라, 무슨 갑자기 준비한 것도 없고, 그저 그대로 생각나는 대로 그저 한 두 마디하고 들어갈까 합니다.
그러면서 생각나는 것은 페스탈로치의 좋은 문구입니다. 여러분이 읽어보신 일이 있는지 모르지만 없으면 이제라도 권하겠어요. 아무리 시대가 달라졌다고 그래도 페스탈로치, 페스탈로치 다는 못 읽어도, 적어도 「숨은 사람의 저녁」이라고 하는 것만은 읽어보세요. 산문시로 된 것인데 많지도 않아요. 거기, 시니까 물론 그렇습니다마는, 아주 함축성 있는 좋은 말들이 많아요. 그중 한 귀절만, 맨 첫 구절이,
『임금의 옥좌에 앉았거나,
가난한 초막에 있거나,
사람인 점에서는 다름이 없는 사람
아,
너는 뭐냐? 네 본성이란 뭐냐?』
그러고하는 글귀로 시작이 되는, 명상을 기록한 것인데, 그중에 내려가다가 말씀 하나 내가 잊지 못하는 것 있어요. 자기에 대해서는 물론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얘기 하면서,
『나 같은 거는 옳은 석재(石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다 이렇게 부스러기들이지만, 그 대신에 이걸 가져다가 돌로 담을 쌓아 올라갈 때 어떻게 돼 구멍이 나거든, 거기다 대고 쇠망치로 단번에 부수어서 구멍이나 막는데 써 주시오.』
하는 의미의 말이 있습니다. 오늘 여기 김동길 박사가 오게 돼 있었는데 못 오게 됐으므로 구멍이 생겼습니다. 병이 났던지, 사고로 그랬던지, 뭘로 그랬던지, 담을 쌓는데 구멍이 난 것만은 사실입니다. 좋은 돌은 아까워서 거기는 못쓰지만, 야 이 자식아, 석재(石材)도 못되는 부스러기 너는 이런 데나 쓰자. 그러고 거기다 때려치면 그게 부스러지면서 거기 들어가 구멍을 막아서 온전한 것으로 땐다 그 말입니다.
이 자리에 서면서 나는 그러한 심정입니다. 단번에 마치로 맞아서, 신통한 말 못하더라도 구멍을 때고 상처를 메꾸는 그러는 시간이나 됐으면, 그런 생각에 섰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목을 「오늘」이라 그랬는데, 오늘은 우리가 잘 아는 겁니다마는 잘 알 수 있는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것은 오늘입니다.
오늘이 어떤 날인가 사람이 정말 오늘이 뭣인 줄 알았다면』 실수가 없을꺼야요. 그런데 오늘을 몰라. 오늘을 뭣 때문에 모르느냐 그러면「내일」 때문에 몰라요. 이따가 잘살겠다는 생각 때문에 모르잖아요?
톨스토이의 유명한 얘기 속에 세 가지 중요한 문제에 대답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금이 일생을 정치를 했는데, 잘되지 않아, 그래 세 가지 의문이 생겼어. 어느 시간이 내게 가장 중요한 시간이냐? 어떤 사람이 내게 가장 요긴한 사람이냐? 또 무슨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적당한 일이냐? 이 세 가지 문제만 누구든지 얘기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온 조정안에 있는 신하더러 물어봐도 이놈들 월급은 싫건 타먹고도 거기 대답하는 놈 하나도 없다 그 말이야.
그래 야 이 자식들아, 그것도 대답 못한단 말이냐, 화가 나서 다 죽여 버린다 그러니까, 아 조금만 참아주시오. 저기 시골서 세상이 마다하고 숨어서 나처럼 머리가 허옇게 센 할아버지가 한 분 있는데, 그 사람이 아주 지혜가 있는데 거기 가서 물어봅시다. 그래 물어보러 갔다는 것입니다. 가니 나 많은 노인이 하나 밭에서 일을 하는데 힘이 들어 숨이 헐럭 헐럭 하며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임금은 가까이 가서 찾아온 사연을 말하고 세 가지 의문을 내놓았습니다. 노인은 대답도 아니 하고 일만 하고 있었습니다. 임금은 기다리다 못해 노인 손에서 쟁기를 뺏어 자기가 땅을 파면서 노인더러는 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참 있노라니 웬사람 하나가 피를 줄줄 흘리며. 쫓겨와서 사람 살리라고 애걸했습니다. 임금은 급히 제 손수건을 꺼내서 싸매고 간호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 말이 사실 나는 당신의 원수입니다. 이제 당신의 원수 안 되고 당신의 충실한 종으로 내가 섬길 것입니다.
그것이 다 지나간 다음 임금은 그 은자(隱者)를 보고 다시 한번 대답을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내가 벌써 다 대답해 들이지 않았소” 했습니다. 임금은 “무슨 대답 말씀입니까?” 했습니다. 노인은 “이것 보셔요, 당신께 가장 중요한 시간은 이 시간 아닙니까?” “가장 필요한 사람은 지금 당신이 살려준 저 사람이구요, 가장 필요한 일은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 주는 일입니다” 그랬다는 것입니다.
오늘을 직시하라!
그러니까 오늘이라는 이 시간이 그렇게 알기가 어렵다 그 말이다.
오늘이야 언제든지 있는 오늘이지만 오늘에 옳은 일 왜 못하냐 그러면 「내일」때문에, 「내일 때문에…….
이 세상이 내일까지 가겠다고 누가 보장해 줘요? 있다가 무슨 일이나면 어떡합니까? 야, 있다가 일은 그만두고 당장의 일을 네가 하고 있냐? 당장에 네 옆의 사람에게 마땅히 할대로 했냐? 그 사람의 진돈 물어 줬냐? 그 사람과 싸우고 화해했냐? 그 사람이 불쌍할 때 네가 돌봐줬냐? 그 사람이 곤궁할 때 네가 한 푼 줬냐? 옆의 사람에게 미천 안 먹구서도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을 다 못하고 있으면, 이따가 잘하겠다는 생각에 지금 할 것 못하고 있지 않나? 잘못은 거기 있다. 지혜가 있다면 거기 있다. 톨스토이가 80을 살면서 출가를 할려면서도 하지도 못하고 있다가, 급기야 결심하고 떠나니 얼마를 못가고 야스야나 폴리야나 정거장에서 객사해 죽었습니다.
그래 자기도 80이 나서 출가해서 마지막에 객사해 죽긴 죽었습니다마는 그래도 그 교훈을 보면 얼마나 참 좋은 교훈이에요. 오늘인데, 「오늘」이란 제목을 붙이는 사람이 어떻게 붙였는지 모르지만 오늘을 직시해 보세요! 지금 현재를 직시해, 이 모양을 직시를 하면, 나는 어리석게 괜히 알지도 못하는걸 아는 척하고 여기 상(像)을 그리러 나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조각가도 아니고 화가도 못되고 시인도 못되고, 그린댔자 호랑이 그리려다가 개나 그리고 말게, 그런 어리석은 짓은 내가 못생겼지만 그렇게 어리석진 않습니다. 그러니깐 그걸 이 시간에 여러분 앞에 하려고 하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조건은 알만할 것을 말씀해 드릴 터이니 학생 여러분이 생각이 자연히 날꺼라. 그 첫째가 오늘을 아느냐? 오늘을 드려다 봐라, 오늘을 아는 것 같지만, 오늘을 아는 것 같지만, 모르고 있어. 모르고 있어.
그런데 그것은 생각해야 돼. 드려다 봐야 돼. 나 늘 하는 말이지만, 부부끼리 일생을 산다고 그러면서도 남편의 얼굴에 어디가 기미가 박혔는지 몇 개가 박혔는지 모르는 여자 많이 있을 거예요. 아내를 사랑을 하면서도 아내의 어디가 어디에 흠집이 있고 약처가 있는지 그것도 죽을 때까지 모르는 사람도 많을 거여요. 그렇게 사람이란 겉껍데기만이지, 똑똑질 못하다 그 말이오, 내가 여기서 설문을 하면 여러분이 다 낙제할거요. 당신 몸속에 뼈다귀는 몇 마디나 가지고 있소? 들으면 대답 못할 사람 대부분일거야요. 당신의 시력은 얼마요? 묻는다든지, 체중은 얼마요? 한다든지 분명히 아는 것 같으면서도 대답 못하는 거 많이 있지 않아요.
그러니 지식이 여기 가까이 있는데 이걸 알라고 하질 않고 저기 있는 큰걸 알려고 하는데 잘못이 생겼는데, 그건 욕심 때문에 그러는 것, 욕심 없어지면 지금 여기를 직시를 하면 오늘의 모양이 어떤지를 아는 것, 예수님 다른 것 아니고 오늘에 사신 분, 그렇기 때문에 다른 말하지 않고 마가복음 첫마디의 말씀이 “때 다 됐다,” 때 다 됐다 하는 거는 이, 현재에 사는 사람의 말입니다. 이것 밖에 모르는 사람의 말입니다. 지금이다. 하늘나라 여기다! 지금이다! 때가 오지만 지금이 그때다! 그러기 때문이「내 때가 아니 왔다」고 하는 것 그거야요. 순간순간에 자기의 할 일이 명령이요.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오는 거니까 그 시간을 기다리기를 마치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모양으로…….
비유가 많이 있습니다마는,
그렇기만 하면 욕심이 없어. 나란 생각하지 말고, 여기 붙어있는 것은 다 욕심이니까 그 생각 하지 말고, 이것을 공공하게, 나를 잊어버린 눈으로 현실을 이렇게 직시해, 얼마동안을, 잠깐 본다고 알려지려니 그건 그렇게 생각마세요. 나는 기독교 믿는다는 사람의 답답한 거는 마음모아서 예배합시다. 그러하고는 30초도 지나가기 전에 이젠 찬송 부릅시다. 답답해. 그렇게 안됩니다. 마음 그렇게 모아지는 건 아닙니다. 마음 모아질려면 적어도, 눈을 감던지 안감던지, 가만히 자리를 똑바로 앉아서 15분 이상 30분 이상을 가야 마음이 가라앉으나마나 그런 겁니다. 처음에는 힘을 많이 쓰다가 그것도 수양을 쌓고쌓고 그래야 되는 겁니다. 중이 공연히 할일이 없어서 참선한다고 이러고 앉았는 줄 아십니까, 그게 마음 모운다는 것이 그렇게 어렵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잠깐 생각한다는걸 가지고, 나도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지를 말고 우리나라의 지금 현실의 이 모양을 마음을 모아 가지고 얼마동안 생각해 보세요. 밤에 주무실려고 하기 전에, 눕기 전에, 10분 동안, 한 20분 동안 생각을 해 보시든지, 아침에 일어나서 또 그래도 인간노릇을 하고 어물어물 살아가야지, 나가서 무슨 일을 하고 활동을 하기 전에 가만 앉아서 또 오늘은 어떤 날인지 어떡하지 생각을 해 보시오. 그러노라면, 조금 오늘의 모습이 뭐인지 알게 되지 않을까? 예수님, 그렇게 사신 분.
우주 간에 둘도 없는 하나
그다음에 「오늘의 그리스도 상」이라 그랬는데 그리스도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럽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요한복음에 가면 처음부터 하나님과 같이 계셨던, 곧 하나님 자신이신 말씀이 육으로 되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다. 한문으로 말할 때는 화신(化身)이라 혹은 화육이라 그래요 화신이라는 말은 인도사람들은 많이 합니다. 요새 마침 내가 인도의 「바카바드 기타」를 번역을 하기 때문에 이 말은 자연히 나오게 됩니다마는, 인도말로 아바타르라고 그러는데 그 아바타르의 사상이 참 좋아요. 크리슈나가 아리쥬나 보고 말하기를 「야, 아리쥬나야 이 세상이 언제든지 악한 것이 기승해지고 선한 것이 땅에 떨어지는 일이 있으면 그럴 때마다 선한 것을 구제하기 위해서 내가 언제든지 사람의 모양을 하고 온다. 나는 물론 초월적인 존재니까 그럴 필요가 없지만 이세상의 인간들을 건지기 위해서 내가 마치 부족이나 한 것처럼 이 인간의 모양을 쓰고 세상에 온다. 」
기독교의 이치와 비슷한데 좀 다른 것은,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건지기 위해 인간의 몸을 쓰시고 한번 오셨다고 그러는데, 인도 사람들은 오고 또 오고, 그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오신다, 그렇게 말한 데가 조금 다릇습니다. 그렇지만 그거는 근본에서 다른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기독자의 상이 뭐겠나 생각을 한다면, 예수님의 상을 내가 그려봐야 돼. 여기도 그전에는 그 그림이 있더니 오늘은 안보입니다마는 그 그림 보지 마세요. 남이 그린 그림보면 속아버려. 그건 그 사람에게는 자기 그림이지만 나는 내 그림이 또 있어야지요. 아까도 인용했던 칼릴 지브란의 좋은 말이 있지 않아요? 칼릴 지브란은 자기도 결점이 많은 사람이요. 그린데 뭐라고 그러는고하니 근래 예수 믿는 사람은 당최 뼈다귀가 없어 틀렸더라. 예수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고 그러지만, 온유 겸손만이 예수냐. 예수님 그런 분이 아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근래 예수라는 거는 이쁜 여자 얼굴에다 수염을 갖다 붙힌 것을 가지고 예수라고 그러더라, 했습니다. 예수님 그렇게 안생겼을 겁니다. 가톨릭에서 그린 예수님 보시오. 얼마나 귀족집 아들답게 요렇게 아주 잘 그렸나, 그것은 아마 화가로서의 그렇게 뵈는 점이 있을 겁니다. 그런게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아름다운 것을 표현할려니까 그렇겠지요. 그렇지만 그건 그 사람이 체험한거지만 나는 나로서의 상을……
그런 예수를 마음속에 그리고 있으면 말이야. 자기의 신앙이 온통 거짓부리가 돼버려. 거짓말이 돼버리고 만다 그 말이야.
그러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생겼던 분이냐? 그거 참 말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길거리에 지나가다가 그 동상들 볼 때 기가 막힙니다 누가 감히 붓을 대고 끌을 대서 단군 상이라, 이퇴계라, 뭐 누구라, 충무공이라, 4·19탑이라, 네가 누구냐? 얼마나한 영감 받았냐? 내가 그 그림 그린 사람 모릅니다. 평할려고 하는 것 아니라, 일반적으로 두고 평할 때에는 말이야, 나는 내가 못생겨서 그런지 모르지만 내가 참 예술가라면 감히 붓 못댈 것 같애. 감히 못댈 것 같애. 왜? 그 상이란 그 우주 간에 어딜 가도 둘도 없고 단 하나로 났던 그건데 내가 어떻게 어디라고 그리며, 어리석은 사람들 보이면, 저렇게 생겼댔나? 야 참 잘 생겼다, 그럴런지 모르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것일까? 웃지 마세요. 타고난 얼굴이, 하나님이 조각해 내보낸 얼굴이 그게 못마땅한 것 같애서, 콧등을 좀 더 높일라고도 하고 눈까풀을 둘로 만들라고 하지만, 그런 걱정할 필요 없어. 하나님이 왜 나는 요렇게 내줬나, 왜 입이 바로 붙지 않고 찌그러지게 했나? 키가 높지 않고 곰배로 날 내줬나? 그대로 받아가지고, 날 이렇게 하신 뜻을 생각해 보시오. 그렇지! 그렇지! 이거 아니고는 하나님이 내게 줄 수 없다. 그러면 될거야. 허지만, 날 어째 그랬나? 날 어찌 그랬나? 그럼 그게 사람노릇하고 갈 것 같습니까?
한국의 얼굴, 조선의 얼굴
아무리 못사는 사람도 저 잘난 멋에 산다고, 저 잘났다는 건 하나님이 요렇게 해주셨다, 그런 확신엘 드러가니까 저 잘난 생각인데, 그 지경에 들어가니까 제가 제 얼굴을 쓰고 다니는거요. 여러분 조용하시오. 조용이 뭐요? 얼굴대로 가만 있거라, 그 말이야요. 조용하시오! 쫓을 종(從)자, 얼굴 용(容)자, 제 모양대로 가지고 가만있어. 제 모양 말고 딴 모양 할라고 그래. 어떤 놈은 용기 있다고 하면서 말같이 뛸라고 그래, 제 모양대로는 안하고 아주 강하다고 독수리처럼 할라고 그래, 그거는 제 얼굴은 잊어버리고 딴 생각 때문에 그래. 제가 이럭하면 더 잘생겼다고 그럴 것 같애서 그럽니다마는 하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아.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내실 때 주신 얼굴이 있는데 예수님 어떻게 생겼겠나? 나는 못 그립니다. 나는 못 그리겠어.
그러니까 전하는 말에도 예수를 모델로 삼고 그렸더니, 몇 해 있다 만나서 유다 표본으로 삼고 그렸더니 그것도 한 놈이더라는 얘기 아니오? 그것도 재미있는 얘기 아닙니까. 어떤 때는 예수 표본으로 그렸는데 어떤 때는 유다 표본으로 그렸는데 항상 순한 것 같애서 그렸는데 그것도 그 사람이더라. 그러니까 사람의 얼굴이 변했냐, 아니지. 마음이 변하는 것 따라서 한 얼굴 가지고도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거. 그러니까 그 형(形)이라고 하는 거는 여기 있지 않은 것만은 알 수가 있을꺼야요.
상(像)이라 그러면 두 가지 구별해서 생각해야 돼. 예수님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혹은 아바타르, 화신(化身)으로서 이 세상이 망하게 될 때, 의가 땅에 떨어지고 불의가 잔뜩 성해서, 기승을 부릴 그때면, 세상에 있는 의인들은 모두 다 괴로움을 당해, 그러니까 그걸 건져 주기 위해서 오시는게 아바타르, 그게 그리스도 메시얀데, 그는 어떤 모양을 했을까? 그는 본래 초월적인 하나님의 그 모습대로 가지고 있는 건 물론 말할 것 없고, 우리도 그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모습을 제대로 가지고 있지를 못하고 망가쳐 먹었어. 딴 생각 때문에. 우리 조상의 잘못 때문에 상처를 낸 것도 있고 내가 잘못해서 상처를 낸 점도 있고, 그런 점에서는 인도사람의 사상을 참작하는게 좋습니다. 사람이 나는 거는 자기의 힘만이 아니라 저 억만고(億萬古)부터 오는 우리들의 선조의 그 관계도 거기 박혀있다. 잘된 것도 그들의 공덕 때문에 요렇게 생겼지, 오늘날 내가 잘해 가지고 요렇게 얼굴을 하고 나온 건 아닙니다. 적어도 저 아메바에서부터 말이야. 수십억 년을 풍우에 부대끼면서 짐승 속에 싸우면서 그 힘쓰고 힘써서 돼 나온 것이 이 얼굴이지. 네가 쓰니 네 얼굴이라고 가지고 있는 것이 네 얼굴이냐? 내 얼굴이요 네 얼굴이라는거 어디 있냐? 네 얼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님 얼굴이지 또 거기까진 못 갔어도 이것이 한국 조선의 얼굴이지 어찌 네 얼굴이냐? 이놈 제 얼굴이라고 해서 몸뚱이 제 몸뚱이라고 해서 제 맘대로 쓸라고 그러지만, 그야말로 참 민족 반역자야, 이놈아, 어찌 그럴 수 있냐? 네 얼굴 속에 나타나는 것이 조선의 얼굴이 나타나는 거고, 한국의 얼굴이 나타나는 건데, 왜 네가 네 맘대로 하는 것처럼 생각을 하냐?
낙제자로 난 인류
그런 것만 아니라 하나님의 근본 모습이 있어. 근본 모습이 있는데, 그걸 망가쳐 먹었어. 우리 할아버지들이 망가쳐 먹었어, 그 망가쳐먹은 그거를 오늘 내가 이 세상에 나서 내가 자손으로 그걸 땔 필요가 있어. 고치는 의무를 내가졌습니다. 왜? 할아버지와 내가 딴 몸이 아니니까 한 몸이니까, 딴 몸이라고 그런다면 자손이라 그럴 수가 없어, 한국 사람이라 그럴진대 한국 사람의 잘못된 점도 내가 책임지고 고치겠습니다, 그래야 한국 사람이지, 좋은 점은 우리 이렇습니다. 나쁜 점은 그건 나는 모릅니다. 그건 안된 말입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나기를 본래 이렇게 났으면 역사적으로 책임지는 거니까, 우리가 부족한 역사를 받아가지고 났으면 이것을 어떻게든 고치는 것이 내 의무다, 한국의 얼굴이 고약한데가 있으면 고칠 생각해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도 있고, 나도 또 있고 그렇게 가지고 이렇게 못쓰게 만든 것인데 이걸 바로 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든지 그런 이들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을, 그 점이 안 보인다 그거야요. 불교적인 말로하면 인연(因緣)관계로 인해서, 업보로 인해서 오는 얼굴은 새겨지지 않은 얼굴이란 말이요. 이 세상에 인류로 태어나는 것은 이건 모두 낙제자요! 맨첨의 하나님의 명령대로 나기는 흙속에서 났지만, 여기서 하나님의 모습대로 완전히 이걸 이기고 일어서도록 되는 것이 인간의 사명인데 그걸 못하고 금년에 해도 또 낙제하고 내년에 해도 또 낙제하고, 이제 그 학교에서는 일생을 일학년으로 잡습니다. 70∼80도 살고 90도 삽니다마는 일생동안에 못했으면 너 또 고쳐나 봐, 그래 또 고쳐나고 또 고쳐나고 그러는데, 그럼 사람이 또 고쳐나고 고쳐나고 한다는 것은 다른 여자의 뱃속으로 들어가 가지고 또 또 나옵니까? 그건 나는 말할 수 없어요. 그렇게 좁게 생각하면 미신이 돼 버릴런지 모르지만, 어쩌나 사람의 인격이라는거 어떻게 구성이 되는 것이냐? 인간의 인간상(人間像)이라는 건 무엇이냐? 그런 생각을 할 때는 단번에 됐다는 것 보다는 이 인류의 역사가 영향이 돼서 그렇게 됐다. 그 설명 아니 할 수가 없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런 사람은 뭔고하니 자연법칙에 따라 나는 그 사람이 아니라, 그 말입니다. 우리는 다 낙제를 했기 때문에 학교에 다 보내서 공부를 시키는 겁니다. 학교가면 학교의 규칙에 복종해야 돼. 김 아무개의 아들, 이 아무개의 아들이지만 학교 간다면 학교 교장선생님을 위시해서 그 학교 규칙에 복종해야 됩니다. 집에 있으면은 그렇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된 아들은 학교에 안보내도 되지만 부족한 아들은 학교에 보내야 한다, 비유로 말하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아바타르라는 것은, 화신(化身)이라는 것은, 세상이 온통 결단 났기 때문에 보통인간 가지고는 이걸 나가서 건질 재간이 없으니까 하나님 자기 자신이 세상을 건지자는 마음에 오는데, 인간 세상에 인간을 상대를 해야 하겠으니까 이런 몸을 쓰지 않을 수 없어 그래서 이 몸을 쓰고 온다 그 말입니다. 그런거지만 근본은 역사의 원인결과의 법칙에 복종해 나오는 그런 자연적인 프라크리티로만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래 본질대로 직접하는 거다. 인도말로 브라만이라 그럽니다. 그 점은 하나 꼭 알아야 됩니다.
역사 속에 완성되는 예수상
예수님도 사람, 우리도 사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안 믿으려면 그건 말할 것 없어, 그러나 기독자라 하고 기독교적인 신앙이라는 이상, 나사렛에 났던 그와 관계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것 없습니다. 알면 또 뭘하겠어요. 어떻게 생겼거나 간에 어쨌거나 나사렛에서 났던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수천 년 동안 내려오면서 인간의 살림,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이렇게 상이 하나 자라 나오는 겁니다. 이 예수란 기성품이 아니고 지금도 자꾸자꾸 완성이 돼가는 겁니다! 날마다 날마다 닦아서 그 속에 있던 그 광채가 더욱 들어나도록 하는게 그게 인간 역사의 일입니다. 그겁니다.
기성품으로 어디 수천 년 있다가 나왔다, 석고 모양으로 대리석상 모양으로 새긴 상이 아닙니다. 그 예수라는 사람 죽어버렸어! 수천 년 전에 있던 것 지금이라도 있다면 나도 가보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그만 잘 못믿게 되지. 우리가 다, 사람으로 생긴건 다, 합동해서 조각해 내고 있는 하나의 상입니다. 전체가 다 합동해서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손질을 해서 그 영원의 상을 만듭니다. 지금까지도 훌륭한 상(像)이지만, 이담에 그 상을 이뤄놓고 보면 내가 되는 한 얼굴입니다. 다 해 놓고 보면 그것이 곧 내가 되는, 그러면서 또 그 얼굴 속에 하나님의 모습을 보아낼 수 있는 그런 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 생각할 때 꼭 하나 생각할 것은 나와 같은 이 따위 맘으로 그리는 것이 참 예수는 못 된다는 것입니다. 예술이란 이름아래 소설 써먹는 사람들 예수를 주인공으로 내놓고 써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우리 같은 잘못 되버린 싸이컬리지, 이 심리로 상상을 투입을 해가지고 그려낼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인격이라면, 어찌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런 숭배를 받고 있겠어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인격은 우리와 종류를 달리해! 같은 사람이면서도 하나님의 본래 특별한 사랑 때문에 특별작품으로, 기독교식으로 하면 이 우주중에 단 한 번 밖이 없는 거고, 인도식으로 한다면 가다 어떻게 돼서 어려운 때 부득이 해서 한 번씩 내는 상, 그것은 이 세상 인연이라고 하는 법칙에 매어 있지 않는 근본 상 그거 하나입니다. 우리가 기독자의 상을 그릴 때에 첫째 생각할 것은 나도 그이를 닮는 일입니다. 전체로서의 우주적인 그의 상 만드는 일에,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현실에 참여해 가노라면 나 개인 혼의 모습도 그를 닮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다음에 예수님에게서 다른 모습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 모습도 모습이지마는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부족한 인간 모양으로 이 법칙을 쓰고, 쓴 것 같이 하고 이 세상에 와야 하니까, 그건 이 현실 조건에 따라서 되는 상입니다. 그러나 거기 시대의 제약이 아주 분명히 있어 어떤 시대에 났더냐? 그런 점을 우리가 예수를 마음속에 늘 생각할 때에는 그렇게 해야만 그 상을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히 그 생각 어느 정도 깊이 했는지 모르지만 붓을 대 가지고 한번 이래보자. 그걸 새겨주면 돈을 번다니까 했는지 모르지만 돈 생각 같은 것, 명예 생각 같은 것 터럭 끝만큼도 있었다면 저주받을 지어다! 안될거예요. 민중 속이는거요! 그 따위나 가지고 우리더러 속으라고. 그거는 우리는 모르지만 말이야, 하나님은 알고 자신은 알거야! 감히 그런걸 내놓고. 나는 이날까지 내 마음에 드는 상(像)하나도 본 것 없어요.
西洋史觀에서 오는 잘못
그러니 그거는 왜 그러냐 그러면 마음이 있어서 그것이 형태로 이루어 나오기까지는 그렇게 어려운거라 그 말입니다. 그다음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거는, 예수님이 나셨던 때와 이 시대를 이렇게 맞춰보면 참 공통되는 점이 많이 있다. 그건 왜 그런고하니 지금 말씀대로 그런 이들이 어느 때 나시냐 그러면, 세상이 어지러워질 때 나섰다. 지금도 그렇다. 무엇을 가지고 어지럽다고 그럽니까? 그러면 그거 참 대답하기 어려운 말이요. 허지만 그런 점에 있어서는 그걸 대답을 하려고 그러질 마세요. 사람인 담엔 다 아는 것입니다.
요새 나는 글을 써가는데 누가 그런 말을 해. 서양역사가들이, 여기 역사하시는 분이 계신진 모르겠습니다마는, 서양 역사가들이 그 역사관, 시간관을 수정을 해야지, 안된다. 그 서양식의 역사 쓰는 사람들은 연월일시가 분명하여야만, 역사적 사실로 기재될 가치가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역사적 사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내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작고 피상적인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보세요. 인간의 사실이 그걸로만 판명이 됩니까. 도리어 사실을 포착하는 것은 직감인 경우가 많습니다. 현장을 보고 잡는 도둑은 큰 도둑이 아닙니다. 증거 없지만 직감, 양심으로 잡는 것이 정말 큰 도둑 국적(國賊)이요 역사적 도둑입니다. 작은 도둑조차도 형사가 잡을 때 뭔지 모르게 직감으로 저놈이 기지, 그러고 잡지, 어디 그걸 다 조사해 가지고 그걸로 잡으려 다가는, 요새 강도도 못 잡고 있습니다마는(웃음)
그러니까 사람의 마음으로 느낀다고 하는 것 무시하지 말라 그 말입니다. 그런데 이놈의 서양사관이라는거는 그 시간적으로 요게 기다. 그러니까 중요한건 다 빼쳐버리고, 예수님 어느 날 어느 시에 났느냐? 어느 날 어느 시에 죽었느냐? 언제 유다보고 말했냐? 나다나엘 보고 언제 대화했냐? 고거 밝혀라! 그렇잖으면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 수 없다. 그 말하는데 그 예수 온통 거짓말쟁이 돼버리고 말지. 그런다면 우리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건 다 역사사실이 못되고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관념 때문에 사실은 우리가 신화요 전설이요, 우리나라 단군 신화 말살해 버리자고 하는 사람들 잘 들으시오, 서양사관 배웠기 때문에 과학사적인 사관 배웠기 때문에 그렇지만, 신화란 속에 어떻게 생명이 있으며 전설이라는 속에 어떻게 진실이 있는지 모른다 그 말이야. 그것은, 이 생명이 이 시간 속에서 압축되고 압축되고 그렇게 돼 가지고 하나의 예술품 모양으로 돼 나온 것인데 그것이 이 현실적인 시간과 장소 조그만 관 속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걸 전설이다 그래버려. 그래 거 땅 위에 있었던 것만 있었습니까, 있지 않았던 것 때문에 있는 것이 생겨났는데, 모두 역사를 이렇게 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이대로 죽을거요
이런거 말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그만 둡시다마는, 이제 우리가 예수님과 우리 두 사이에 생각하면 시대의 다른 점이 있는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그래도 세상이 어려웠던 때 났고, 우리도 세상이 어려웠진 때 났다, 왜 이세상이 살기 어렵다고 그러냐? 그럼 그 사람 잘살면 좋소, 잘 사시오. 그 사람과 욕하려고 그러지마. 난 아주 그랬어요. 넌 왜 우린 잘 사는데 못산다고 그러냐? 당신은 잘살면 좋지 않소. 나는 못사니까 그만둡시다(웃음) 나는 이제 그러잖을 거야요. 남 잘산다는데 내가 왜, 뭐 나는 잘산다는 이유를 수삼일 전에 생각을 해보니까 알겠어, 왜 그런고 하니 못산다는 건 이 마음 하나 때문에 그러는거거든. 애비를 죽이고도 좋다! 그러면 좋아지는데… 내가 죽인 애비 아닌데, 다른 사람 죽인 애비를 거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드는데, 그까짓 것 못 생긴 놈 죽어도 좋잖아? 늙어 빠진 것 없으면 젊은 사람들끼리 살기 좋잖아, 마음이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소, 얼마나 행복하겠소.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다 그 말입니다. 그럴 수 없어. 수가 아무리 적다해도 나는 그럴 수 없어. 그게 본래 우리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근본되는 아버지의 모습대로지, 뭔지 모르지만 내 속에 있는 건 이들 말이 옳다, 네 말이 옳다, 제 버릇 개 못준다고, 나는 내 버릇이 그러니까 개 줄 수 없지. 이대로 죽을거요, 죽어도 이대로 죽을거요!
언제나 나는 예수님이 옳게 보셨기 때문에 길가에 가다가도 못생긴 사람 보면 불쌍히 여기셨다 생각합니다. 어떻게 살도록 해주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 되는데 세상의 강자들은 인간의 찌꺼기를 못 본 척 하고 지나가라고 합니다. 그저 앞장서서 빨리 가서 나만 잘 사는 것, 그거 사는 거야? 이 세상이 그런 그, 니체라는 사람이 무슨 생각에 그랬는지 모르지만 말이야, 그놈의 노예도덕 그만두고 말이야 그저 강자가 돼야 한다 그랬어. 나는 그런 줄 알면서도 나도 좀 얻어 들었지 못 얻어들은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맘을 가질 수가 없어. 그리고 아무리 무사하게 생각을 해봐도, 여기 우리 아버지가 넣어준 양심이지, 내가 잘못되서 가진 양심이라고 그러고 싶진 않습니다.
그런데 그리 생각하면 세상이 어려워질 때마다 특별히 이 세상을 건지기 위해서 자연법칙에는 복종을 안하는 마음이면서도 부족이나 한 것처럼 인간 속에 와서 직접 그걸 건지려고 하는 인격이 있다. 그건 성경의 말씀으로는 「하나님의 편의 영광을 마다하시고 죄인의 몸을 쓰시고 세상에 오셔서」이랬다. 성경에 그렇게 쓰였어요. 그거는 너무 다 이렇게 아주 세련된 말로 씌었기 때문에 그 맛을 모르고 지나가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마는, 그걸 일상시에 하던 말과 바꿔서 말을 한다면 금방 말한 그런 식이지요. 그러하신 예수라.
우리가 이제 예수를 따르려면 그 상(像)이 되기를 요구해. 그런데 자못 다른거는 예수님의 나신 때와 우리의 난 때가 같은 공통인자도 있어. 세상이 어려워졌다. 불의한 것이 판을 치고 선한 것이 땅에서 학대를 받는 시대다. 그 점은 공통은 공통이지만, 그다음에 인간사회의 조직이라든지 이 문명의 형태 이런거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점에 우리가 어떻게 적응을 해가야 하겠나? 그 점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소망은 기독학생, 골목대장들
나는 마음속에 소망이 있다면, 기독학생 밖에 없습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한다면 지금 내 맘 속에 점령하고 있는 것은요, 길가에 골목대장들입니다. 이제는 죽을 날이 가까와 오니까요, 다른 거 다 소원이 없습니다. 제일로 기쁜게 있다면 내 집 뜰에 내손으로 가꾸는 꽃나무하고 그다음엔 골목에 나가면 걸어 다니는 꽃나무하고, 그 애들이 할아버지, 할아버지, 언제 사탕한 알 사주지 않았어도 서로 저희끼리 이건 우리 할아버진데 우리 할아버진데 애들이 쌈해요. 그건 뭣 때문에 그래. 다른거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지내가다가 좋아서 말이야 요렇게 조금 드려다 봐준 죄밖엔 난 없어요. 요렇게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할아버지, 할아버지, 한 놈을 요렇게 만져주면, 나도 만져줘요, 나도 만져줘요, 그중에 하나라도 빠졌단 큰일입니다. 열이라도 다 만져주고 가야지. 누구 중에 하나만 하면 그 다음에 타격이야. 나도 만져줬어, 그거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뭐시 그리 좋아 그래요?
그것이 뭐겠어요 그것이 뭐겠어요? 그게 단군 할아버지 기다리는 마음이지 다른 마음 없거든. 그게 아담 기다리는 마음이지, 우리 조상이 와서, 아이 우리 할아버지가 내가 이름이 뭔지 알기나 해요, 있다가 죽어 없어질 거. 그렇지만 애들의 마음속엔 할아버지라면 좋아, 그래 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러고 싶은 마음, 조상을 찾는 거, 종교가 다른 것 아니고 할아버지 찾는 것,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정말 할아버지니까 하나님이지 별거 될게 있어요? 유교나 기독교나 근본은 마찬가지, 그것 찾아가자는 건데 애들은 그러는 건데, 어른은 이것들은 뭔고하니 애들을 본체만체 지내가, 애들이 길가에서 노는데 시간도 안걸려 1초나 2초나 요렇게 하면 되는데, 그걸 하나 애끼고 분주히 가, 가만 있거라 가만 있거라, 이제 돈 관계가 크게 관계된거니까, 가야된다, (웃음)
이해관계 때문에 그걸 내버리고 가는데 말이야, 그 애한테 그걸 하나 봐준 것이 얼마나, 이제, 그 애 그거 하나 때문에 이담에 대통령 될런지 누가 알아요. 그거 안해줬기 때문에 도둑놈 될런지 누가 알아요? 그럴 수 있어요. 나는 아주 무섭습니다. 나는 지내 봤기 때문에 알아요. 세살도 전인데 어느 때 밤중에 자다 깨니까 말이야 짜증이 나서 죽겠는데 말이야, 나는 평생에 우리 아버지 어머니에게서 매도 맞아본 일 없습니다. 그런 분 아닙니다. 그런데 짜증이 나서 못 견디겠어. 그러는데 왜 짜증을 내고 그러는 가고 하는데 내 맘에 언짢아. 나는 뭔지 알 수 없는 짜증이 자꾸 나는데 이걸 좀 풀어주면 좋겠는데, 그러던 생각이 지금도 있어. 우리 아버지 어머니를 나무라고 싶은 생각은 아니지만, 그럴 때 뭔지 고걸 좀 풀어줬더라면 내가 조금 더 크게 됐을런지도 모르는걸. 핑계를 하느라고 그러는게 아니라, 사실로 그런 느낌이 있어. 그 얘기는 그만하고, 그 애들 좀 드려다 보라 그 말이야요.
그러기 때문에 지금 소망이 그것 밖에 없어요! 내 집 자식이냐, 그게 없습니다. 지내가다 보면 참 이뻐서, 내가 이제 얼마 안 있다가 죽을 거다. 죽는 순간에 무슨 생각이 날까? 별별짓 다 해 봤어요. 나도 장가도 가 봤고 자녀도 낳봤고 그것만 아니라 괜히 안해도 되는 연애도 해 봤고, 별별 것 다해봤지만 이제 그것 다 없어져 죽는 순간에 생각이 난다면 고애들 얼굴은 생각이 날거다. 그건 아주 이해관계 없이 보고 싶어요. 이제 죽는대도 볼 수만 있다면 한번 다시 보다 죽고 싶어요.
그게 나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넣어준 마음인줄 알아요 사람인 다음에는 그런거야요. 어째 그러냐 생각을 해 보면, 너는 그래도 악독이 없지 않어. 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어. 이 나라에 소망이 있다면 너에게 있지 않어. 그러니까 내가 마지막에 할 말이 있다면 저것들 다 못쓰게 된 것들에게는 안할런지 몰라도, 그 애한테 말로 못하면 눈으로라도 한번 보고라도 가고 싶은 생각이 있다 그 말입니다.
최후까지 믿고 싶어
그런 생각하면 말이야 그걸 누가 빼앗아가겠어. 강금을 하겠으면 하고 연금을 하겠으면 하고 맘대로 하라고 그래 그거 어디가요. 그래 나는 예수님 따라가자 그 말이요. 달라면 주라우, 겉옷 달라면 속옷까지 주라우, 오리 가자면 십리 갑시다. 나가드리죠. 그거를 나쁜 마음으로 하면 못써. 진심으로 진심으로 정말 정말, 당신도 이 역사를 하는 사람 아니요. 나는 이 역사를 이렇게 끌고 가자는데 당신 저편으로 끄는 건 잘못이지만 조금 있다가는 누가 옳은지 알거니까 그런 생각으로 하면 너도 이 역사를 메고 나도 이 역사를 멨으니까 어떻게든지 이 역사를 멨으니까 아옹다옹 싸움을 하다가 시간만 다가고 이 역사 놓쳐버리지 말고, 될수록이면 어떻게 마음이 하나가 돼서 이제 바로 되게 해가도록 해 봅시다!……
그런데 나는 지금도 그들을 믿고 싶어요. 최후까지 믿으라는게 예수님의 말씀이니까 나는 그거는 그대로 할랍니다. 나는 미워 안할겁니다. 이제 누가 와서 끌어다가 내가 억울하게 무슨 징역을 진다든지 가령 십자가엘 달리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이 시간의 생각으로는 미워안하기로 했어요. 과연 그 시간에 하나님이 나를 은혜를 줘서 그렇게 하도록 해주시겠는지 그건 나는 모릅니다. 게까지는 장담 못합니다. 다만 정신이 내정신이라고 있는데 때까지는 약속하셔야 해. 그럭할랍니다.
나는 그럭하면 길이 있다고 그럽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길이 그 길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예수님은 고사하고 맹자도 뭐라고 했는고하니 거지한테 발끝으로 엣다 먹어라 그러면 거지도 안 먹는 다는 거야. 왜 그것도 사람의 자존심이 있는데 하물며 나라한다 하고 시퍼렇게 지위에 앉았는데, 당신들 뭐 나라도 못하고 그러니까 노염 안나갔어요. 노염이 나니까 또 정도가 지나쳐 잘못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잘못한 책임도 있어 이거 어떡하겠어요. 문제는 이 나라가 살아나는 것만이 문젠데 땅에 떨어져 짓밟혀서 고생을 하는 이 의(義)를 어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도리가 땅에 떨어졌어. 인정이 땅에 떨어졌어 도덕이 땅에 떨어졌어. 그까짓껏 아옹다옹 토론하지 말아요. 안한다. 그래 좋습니다. 안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고맙습니다. 그러시오! 왜 이렇습니까. 변론해야 소용없어. 변론으로 세상의 진리가 밝아질 리가 없어. 그래 고맙습니다. 그렇겠지. 어련할꺼요. 그럭하고 나는 나대로 죽어도 그걸 내 맘이 아닌 걸 내 마음까지 속이진 말라 그 말이야. 그러진 마시요. 그 사람이 그러면 그 사람 인정하세요, 아옹다옹 싸울 필요 없어요. 겉옷 달라는데 속옷까지 주어 보냄 돼요. 오리가 부족해서 하면 십리까지라도 가고 그럭해서 예수님 가신 그 길이 그게 정말 악을 이기는 길이라.……
악의 뿌리는 너희는 못 뽑는다.
예수님이 그런 생각하시는 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꺼는, 젊은이들에게 말하고 싶은 거는, 예수님 뭐라고 했는고하니 죄악의 뿌리는 너는 못 뽑는다 그랬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못된 사람들이 죄악의 뿌리 뽑겠다고 그러지 옳게 된 사람은 죄악의 뿌리 뽑겠다는 소리 못합니다. 왜 죄의 뿌리가 어디 있어?
예수님 말씀에 어디서 그랬습니까? 가라지 비유할 때 주인이 좋은 씨를 뿌렸는데 어딘지 가라지가 났다. 제자들이 선생님에게 묻기를 선생님, 이 가라지 뽑으랍니까? 그러지마, 너 못 뽑는다. 그거 뽑다가 곡식도 상할까봐 나는 걱정스럽다. 마지막까지 두면 어느 날 가서 하나님이 자기 천사를 보내서 이걸 다 곡식과 가라지를 갈라서 해결할 날이 온다. 천사가 어디 있습니까? 천사라는 거는 그 시대를 따라서 형상이 이렇게 변할 뿐이지 천사는 있습니다. 옛날과 지금이 같지 않습니다. 이전 사람은 천사를 날개가 이렇게 돋고 하얀 비단 같은 걸입고 공중에 슬슬 날아다니는 그런 거로 생각했지만 요컨대 인간의 마음이 직접 하나님에 접하는게 아니라 그 중간에 있어. 무슨 힘으로 이 거래를 맡아서 심부름을 해가는 그런 무슨 힘이 있다. 그런 이젠트가 있다. 그런 메디엄이 있다. 그것만은 사실이야요.
문명이 아무리 진보된 데도 그건 여러분 천사를 통해서 이담에 그건 처분이 되는 날이 있다, 그건 무슨 소린고하니 너 할꺼는 이 세상에 있을 때 선이 뭔지 악이 뭔지는 내가 알게해 줬으니까, 선은 지키고 악은 하지 말라! 그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악의 뿌리를 뽑겠다는 건 건방진 소리 네가 그걸 뽑을라다가 옳은 뿌리까지 뽑아 버린다. 밑에 들어가면 한데로 얽혔으니까, 그리 학질이 떨어지도록 약을 먹이면 애가 죽어버린다 그말이야(웃음) 지금은 약이 좋아서 그렇지는 않습니다마는, 옛날은 애는 죽었어도 학질이 떨어졌으니까 시원하다 그랬어요.(웃음) 그건 너무 너무 거기 고생하던 맘에 그렇지만, 그래 학질 떨어져 애가 죽어도 잘됐다 그럴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까 의사는 뭔고 하니 10년 고생을 하면서도 사람을 죽이지는 않으면서 병만을 어떻게 내쫓는 일이 인간의 일이지.
우리에게 맡겨진 그리스도 상(像)을 그리는데 하나 알꺼는 죄악의 뿌리는 우리는 못 뽑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당신의 명령으로 선이 뭔지 악이 뭔지 뵈여주시니까, 죽을 때 까지는 선을 지키고 악은 아니하는 이것만은 충실히 하겠습니다. 그리니까 우리 보기에 채 못한 것이 있고 억울한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이따가 역사 자체가 해결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비의 문제기 때문에 당장 풀지는 못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최후 심판이 뭐 이담에 천년만년 후에만 오는 줄 아시오? 내일도 올 수 있어요. 다음 순간에도 올 수 있어. 언제든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참 해결의 길입니다. 마음속에 내가 못해도 하나님이 해 주셨군, 그런걸 이제 알고 그런 실증이 있으니까 믿어가는 겁니다.
아, 불쌍하도다 예수여!
기독교도 제각기 어느게 정말 기독교인지 모르겠어. 5․16광장에 모였던게 기독교인지, 여기 모였던게 기독교인지 또 다른데 모였던 것인지, 어떻게 된 놈의 기독교야, 예수가 오면 칠렬 팔릴 몇 가달을 찢어져야 할런지 알 수가 없다 그 말이야. 아, 불쌍하도다 예수여!
살리자, 살리자, 살리자!
거의 잊어 버릴뻔 했는데 이제 마지막에 생각납니다마는, 그리스도의 상(像)을 그리다가 잊어서는 안되는 건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부활의 사람입니다. 살아난다는 건 이 따위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줄 알았는데 거 안 죽었던데, 그를 죽였던 대적도 그렇게 인정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인격이 돼버렸다 그 말이야. 그러면 이제 정말 그리스도 닮기를 바랜다면 그 신앙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시오. 당신 모양으로 어떻게든 우리도 죽어도 죽지 않게, 예수가 마술을 부려서 그런게 아니라 예수가 내 안에 있는게 예수요 그리스도니까, 저기 있는 예수 믿지 마시오. 나는 여러분에게 아주 밝히 증거하겠습니다. 하늘 밖에 있는거 아닙니다. 없습니다. 자연 속에서 전혀 그 모습을 모를건 아니지만, 아주 간단하게 아시우, 거 토론, 신학토론 거 하지 마! 깊게 말해 여기 이 안에 있지. 이거 내 소리도 아니오 예수님이 하지 않았어요? 이 안에 예수를 찾아보면 틀림없이 있는 거요! 누구든지 다 그 가슴 속에서 예수의 모습을 찾아낼 가능성이 있어요. 나는 그걸 믿습니다. 하나님의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모습 중에 아주 중요한 요소가 하나가 뭔고 하니, 날 때에 이 세상의 원인결과의 그 법칙이 아니고도 이 세상에 속한 것처럼 났지만, 그 대신 갈 때 또 이것이 죽어서도 살아나는 길이 분명 있습니다. 죽어서도 죽음에 매이지 않았다. 그게 뭐냐? 그게 뭐인지 몰라. 대체로 볼 때 인간이란 뭔고 하니 죽음과 싸우는 건데, 그걸 조금 해보다가 그만 속이 급한 생각에 내버렸습니다. 현대 문명인은 죽어도 좋다고 아주 항복해 버렸습니다. 죽어도 좋다는게 인간의 본성이 아닙니다. 죽어도 좋다고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인간의 이런 꼴이 됐습니다.
죽어도 좋아? 하나님이 들었거든. 이 자식들아 죽어봐라! 그렇게해서 세계에 있는 그 악한 사람들을 통해서 죽어 봐라, 죽어봐라, 자꾸 죽이는 거예요. 이제 그 담에 아이구 잘못했습니다. 살게 해 주십시오. 그런 기도가 올라가면 그거 없어질꺼요.
생명 아까운 줄 알아야 돼. 네 생명이고 내 생명이고 생명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없이 여기면 망하는 것 밖에 없을꺼예요. 민족이 그 민족으로서 생명을 아까워할 줄 모르면 망할 꺼야요.
인류 전체가 생명을 아껴할 줄 모르면 이 인류 망할꺼예요. 나는 분명히 그건 믿습니다. 이 인류 망한다 해도 하나님 걱정없이 또 다른 것만 들어내면 그만이야요. 세포 하나 여기 있으면 그까짓 건 문제없어 한 번에 정자가 몇 개 씩 들어가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인간을 만들어 낼라면 얼마든지 만들어내는데 그런 걱정하세요.
그러니까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미워서 그러는거냐, 제가 죽을 길로 들어가겠다는 걸 어떻게 해요. 이 세상 법칙으로 하면 제 업보에 따라서 자승자박으로 제 죄 때문에 들어가는 건데, 종교적으로 말로하면 하나님이 지옥에다 넣으셨다, 하나님이 왜 지옥에다 넣겠소? 우리 귀에 알아듣기 쉽게 하느라니까 그랬지. 마치 이 세상에서 잘못하면 임금이 거기 들어가라, 알아듣기 쉽게 하느라고 그랬지. 저희가 저의 죄, 제가 지고 저의 결과로 저기 들어가는 거지. 죽기가 소원이 돼서 죽자죽자 날마다 죽을 사(死)자 밖에 생각이 없는 민족이라면 마지막엔 죽고 말거야요. 날마다 살리자, 살리자, 살리자, 살리자 하는 생각만 해보시오. 그 민족 반드시 살아날 겁니다. 틀림없이 살껍니다.
부활하기를… 옳은 일을 하다가 죽더라도 옳은 일을 지키기만 하면 틀림없이 살꺼다, 아침에도 기도하고, 낮에도 기도하고, 저녁에도 기도하고, 새벽에도 기도하면 반드시 살아날껍니다.
김 박사님의 이름을 빌어 미안합니다. 오셔서 말씀 잘하실꺼를 내가 돌뿌스러기 그만하면 이제 된겁니다.
이글은 1976년 4월 26일 기독교회관 강당에서 KSCM (한국기독학생운동) 창립기념 예배에서 강연하신 것이다. 본래는 김동길 박사가 말씀하기로 내정된 것인데 사정상 못 나오시는 관계로, 갑자기 부탁을 받고 김 박사가 말씀할 제목(오늘의 기독자 상) 그대로를 놓고 1시간동안 말씀한 것을, 편집실에서 정리하고 선생님이 수정하신 것이다. (씨알의 소리 1976년 5월호)
씨알의 소리 1976. 5 53호
저작집; 14- 97
전집; 14- 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