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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치유자 ①
이사야 61:1~3 (신년주일)
I.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정호승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받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그렇습니다.
들판에서 자라나는 풀 한 포기에도 상처가 있고 아름답게만 보이는 꽃 한 송이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생명 있는 것들은 저마다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줄기에 입은 상처가 풀을 더 강하게 만들고 그 상흔이 꽃을 더 향기롭게 하는 겁니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도 고난이 있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 고난을 약 삼아서 성숙해 가는 겁니다.
사람은 상처를 안고만 있을 때는 상처의 피해자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상처를 치료하고 살땐 상처의 수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상처를 거울삼아 상처 입은 누군가를 치료하고 사명자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 다.
“상처 입은 치유자”
오늘 설교 제목이면서 2024년 금년 한해 진성교회에서 격주로 설교를 하는 그런 목회지만 주제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은 구체적인 주제와 본문의 말씀을 다루기 전에 서론적인 말씀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인간은 사는 것 자체가 저마다의 고통과 맞서 싸우며 사는 것입니다.
창세기3장16절에 젊은이들이 자라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분복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냐?
그러나 그 안에도 상처가 있으니 서로 치료하며 잘 살라는 말씀을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서 세상을 섬기며 일터를 가꾸며 살아가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 안에도 수고가 있고 또 가시와 엉겅퀴가 있으니 세상을 더욱 잘 섬기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이가 들어 늙어가며 또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건만
그 안에도 상처가 있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엄마 앞에 속에서 상처를 받습니다.
태어나면서 상처가 아파서 앙앙 목놓아 울며 아이는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살만큼 살았는데 아이가 태어나면서 깔깔대고 웃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빙그레 미소지으며 엄마를 바라보며 태어난 아이도 없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 한톨에도 상처가 있고 스치는 바람에도 밤에 부서지는 달빛에도
상처를 받는게 인간입니다.
그것이 범죄한 인간의 운명이기도 한 것입니다.
죄로 얼룩진 땅에 죄인으로 태어나 죄를 안고 살아가니 실수하고 넘어지고 상처받고 상처 주면서 살아갑니다.
나는 내 상처가 아픈데 그 사람은 자기가 더 억울하고 자기가 더 아프답니다.
내 상처만 보이는게 철부지요 어린아이인 것이지요.
죄인의 눈으로 살아가니 내가 받은 상처는 태산 같고 내가 준 상처는 티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공동체 안에는 상처받은 놈만 있고 상처 준 놈은 없습니다.
세상에 우뚝 솟아 큰일 하며 살아가는 저 잘난 사람은 대단하게만 보이고 상처가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높은 나뭇가지가 더 센 바람을 맞는 겁니다.
그들 내면에 우는 아이가 있고 혼자 있을 때는 그들도 가슴을 움켜쥐고 울 때가 있는 겁니다.
우선 모든 사람들은 육체적인 상처가 있습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은 건강해 보여도 어딘가엔 병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정히 없으면 비듬이라도 있습니다. 무좀이라도 있습니다.
유전적인 질병도 있고 또 오장육부 어딘가에 상처 하나라도 있는 거지요.
육체뿐만 아니라 인간은 감정적인 동물인지라 걸핏하면 감정이 잘 다칩니다.
상한 감정의 상처가 건드려질 때마다 아파서 소리를 지릅니다.
그것을 감성적인 외상, 심리적인 외상 즉 트라우마라고 하지요.
인간은 발달단계에 따라서 욕구가 따뜻하게 충족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거절될 때마다 상처 로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으면 감정이 작동되지 않고 죽어 버립니다.
별것 아닌 말 한마디에 분노를 폭발하고 한순간 짐승이 되고 자기 인생을 파탄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허다히 있습니다.
어제 상처를 받았는데 오늘 내 인격을 지배하고 내일 내가 가는 길의 문을 닫아 버리는게 상처입니다.
「2024년 한국교회 10가지 트렌드」란 책 속에서 두 번째가 외로운 크리스천입니다.
사람 관계가 따뜻하지 않은 세상입니다.
혼밥세상, 효심이네 각자도생시대입니다.
현대인들의 가장 보편적인 질병이 우울증입니다.
나이 들어가는 시니어들은 물론 마냥 인생이 즐겁고 행복해야 할 젊은이들도 우울증에 시달리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상처, 우울증, 분노가 당연하다는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만이라도 병든 세상에 갇혀 살지 말고
세상을 치유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주의 손과 발 되어 세상을 치유하며 사는 겁니다.
감정적인 이 상처는 주로 가까운 사람에게서 온다고 하지요.
“치유수양회”에서 제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상처는 아프리카 대통령에게 받는 것이 아니다.
내 주변에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 소중한 사람에게서 상처가 온다”라고 가르칩니다.
배우자, 부모, 자식, 상사, 동료, 부하, 선생님, 친구 중에서도 가장 친한 짝꿍, 그들은 내 인생의 축복이요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내 인생의 위기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순기능 가정 혹은 역기능 가정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가정의 목적을 이루며 정상적인 가정 안에서 행복을 배우며 잘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가정을 순기능 가정이라고 합니다.
반면,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병든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상처를 주고 받으며 감정적 쓴뿌리를 안고 사는 가정을
역기능 가정이라고 합니다.
우리 신앙인 가정과는 관계없는 단어이지만 이 역기능 가정의 쓴뿌리가 대를 이어 내 자식들에게
또 자식의 자식에게 흘러가는 것 이것이 바로 가게 흐르는 저주라고 하는 겁니다.
도로시 로 놀테(Dorothy Law Nolte)의 시는 역기능 가정이 무엇이고, 순기능 가정이 무엇 인지를
가장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꾸지람 받으며 자란 아이 비난을 배우고 미움 받으며 자란 아이 갈등을 배우고 두려움 속에 자란 아이 염려를 배우고
놀림 받으며 자란 아이 시기심을 배우고 수치 속에 자란 아이 죄책감을 배운다.
칭찬 받으며 자란 아이 자신감을 배우고 너그러움 속에 자란 아이 인내심을 배우고 격려 받으며 자란 아이
감사를 배우고 사랑 받으며 자란 아이 배려를 배우고 관심 가운데 자란 아이 자긍심을 배우고 인정 받으며 자란 아이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
함께 나누며 자란 아이 관대함을 배우고 정직함 속에 자란 아이 진실된 삶을 배우고
공정한 대우를 받으며 자란 아이 정의를 배우고 친절함 속에 자란 아이 남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 평안함 속에 자란 아이
사람 신뢰를 배우고 다정함 속에 자란 아이 세상은 살기 좋은 곳이라 생각한다.
저희들 학창시절 필독서 가운데 「사선을 넘어서」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성자요 빈민의 아버지라 불리워지는 가가와 도요히코의 책입니다.
그는 태어나고 보니 엄마가 기생입니다. 누군가의 첩이었습니다.
어린아이가 본처의 가족으로부터 구박과 비난,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런 못난 아버지마저 그의 나이 4살 때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5살 그 이듬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지요.
설상가상 그는 자라며 폐결핵에 걸리고 안질, 간질환, 심장병... 종합병동입니다.
쌓인 거절감, 삶의 회의, 우울증을 이기지 못해 몇 번이고 자살을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양지바른 곳에 혼자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 선교사님과 전도자들이 지나 가며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외치며 지나갑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그 말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묻습니다.
“하나님은 기생의 자식도 사랑하시나요? 병들어 죽을 몸도 사랑하시나요?”
그리고 그들을 따라나서 복음을 듣고 선교사님에게 영어를 배웁니다.
21살엔 병약하여 죽는 줄 알고 임종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과 함 께 십자가에 매달리는 꿈을 꾸고 치유의 기적을 경험합니다.
상처 입은 자가 자신의 상처를 고침받고 병든 일본 사회와 상처 입은 자들을 치 유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성자로 불리웠고 또 많은 책을 쓴 기독교 저술가로, 빈민 의 아버지로 칠십이 훌쩍 넘기까지 살며
“상처 입은 치유자”로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II. 치유공동체 교회에도 상처가 있다.
역기능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이 상처를 치유 받고 구원받기 위해 교회에 옵니다.
교회에 왔다고 금방 치유가 되던가요? 속에 든 것이 상처밖에 없으니 주고 받는게 상처밖에 없는 겁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도 상처를 받고, 또 교회공동체에 상처를 남깁니다. 입만 열면 부정적인 말 뿐입니다.
비난의 언어만 난무합니다.
저런 나쁜 놈이 있나 싶어서 들여다보면 나쁜 놈이 아니라 불쌍한 놈이라는 것을 우리는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병들고 상한 영혼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어디에 가나 적응을 하지 못합니다. 결국 교회를 떠나갑니다.
떠날 때에는 말없이 가야 되는데 누군가에게 침을 뱉고 떠나갑니다. 성품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지요.
교회를 옮긴다고 내가 달라지지 않았는데 세상이 달라지던가요?
누군가의 말처럼 이 불쌍한 놈은 입만 열면 딱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기 자랑이요 둘째는 다른 사람 욕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 곁에 좋은 사람이 머물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아예 신앙을 버립니다.
교회 엔티가 되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리더십을 연구한 어느 기관에서 지난 20세기 동안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등에서
영웅적 리더십을 발휘한 사람들을 연구했습니다.
그랬더니 몇 가지 공통점이 있더라는 것입 니다.
첫째, 어릴 때 자신이 겪은 불행을 디디고 일어선 사람들이었습니다.
개중에는 일찍 아버지를 여윈 사람들이 적잖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 모진 상처를 입고 살았지만 평생 상처 타령을 하지 않고 살더라는 겁니다.
상처의 수혜자가 되어서 그 상처를 디딤돌로 삼아 우뚝 서 있었습니다.
둘째,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웅변력, 말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언어는 언제나 긍정적이고 합리적이었습니다. 그들 입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부정적이 지 않았습니다.
누구 때문에 내가 이렇게 고생한다는 책임 전가나 남탓이 없었다는 것입니 다.
셋째,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깔끔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잘 생기거나 예쁘다는 것과는 다른 품격과 멋이 풍기는 외모를 가지고 언제나 단정하고 깔끔했다는 겁니다.
넷째,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비전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다윗, 입다, 홍길동, 주몽처럼 그 사람 곁에는
반드시 그를 지키고 보호해주는 충성된 사람, 충성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의 꿈과 비전을 함께 나누고 실천하는 비전 그룹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상처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고 살지 말라는 겁니다.
내 영혼을 상처 쓰레기통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만나는 그 사람에게 내 상처를 쏟아서 내 이웃을 쓰레기통 취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처 있는 사람,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 상처 타령이나 하는 사람 쓰지 않습니다.
몸은 살이 찢겨지고 뼈가 부러져도 시간이 흐르면 치료됩니다.
그러나 영혼의 상처,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치료되지 않습니다.
점점 더 커집니다. 번집니다. 더 깊어집니다. 치료하고 회복하리라.
나는 상처의 피해자가 아니라 수혜자로 살아가리라 결단하기 시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결심이 상처를 치료하는 출발점입니다.
상처받는 것은 내 잘못 아니지만 상처를 안고 상처 타령하며 살아가는 것은 오롯이 내 잘못 입니다.
III. 예수님 우리를 치유하기 위해 오셨다.
인간은 누구나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치료될 수 없는 상처는 없습니다.
우리의 상처와 질병과 죄를 치료하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 이사야 61장 1절을 보십시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여기 “나”는 누구입니까?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바로 이사야 61:1~3을 본문으로 회당에서 읽으십니다.
여기서 예수는 구약이 말씀하는 “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라고 단언합니다.
주의 성령과 함께 치료와 구원의 역사를 펼치자는 바로 나 예수 그리스리도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눅4:19~21).
보라, 이사야의 예언이 이제 이루어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공생애 시작과 함께 기름을 들이붓듯 성령이 충만히 임합니다. “기름을 부으셨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성령 충만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 영혼의 그릇이 있습니다. 여기에 기름이 부어집니다. 이 기름은 마르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부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흘러넘치는 것이죠. 가득찬 기름 항아리는 조금만 흔들거려도 흘러 넘칩니다.
이 기름 항아리가 가는 곳곳마다 기름이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이, 치료의 능력이, 병든자를 고치는 능력이, 회복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움직이는 곳곳마다 가는 곳곳마다 흘러넘치 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기름에 불이 붙으면 뜨거워집니다. 세상이 밝아집니다.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죄와 상처를 불태워 없애 버리는 능력이 여기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했습니다.
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왜 비둘기처럼 임했을까요?
독수리처럼 쏜살같이 날아 내려왔으면 멋있을 것인데 비둘기처럼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이제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선포되었다는 겁니다. 상처와의 전쟁이 끝났습니다.
지옥과의 전쟁이 끝났습니다. 미움과의 전쟁이 끝났습니다. 모든 죄와의 전쟁이 끝났습니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정복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지옥 의 문제를 닫고
우리의 모든 영혼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실 것이라는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 상처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주께서 피흘리심으로 모든 죄는 사함받았습니다.
그가 우리를 용서했으니 우리도 세상을 용서하고 치유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상처는 사라졌습니다. 불에 타 소각되어졌습니다.
우리는 주의 승리를 우리 것으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IV. 용서만이 살길이다.
우리 민족이 함께 해결하고 가야 할 민족공동체의 상처가 있습니다.
일제 강점으로 인한 일본으로부터 받은 우리 민족이 입은 상처입니다.
저희들 학창시절 근대사는 주로 반일 교육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내 안에도 일본에 대한 상처와 나쁜 감정이 살만큼 살았는데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아프기만 한데 일본은 이미 사과도 했고 보상도 했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최근 국제사회의 이념 양극화에 따라서 북중러 공산진영과 한미일 거기다
유럽까지 합친 신냉전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미국이 주도한 일이지만 한일관계가 급속히 가까워지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건 정치, 외교적인 이야기이고 우리 국민들은 조금은 당황스럽습니다.
물론 언제까지 우리가 일본을 미워하고 반일 반일 할 수는 없습니다.
야드바셈 홀로코스트처럼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 용서하자. 잊지는 말자.
극일, 승일, 일본을 넘어서야지요.
조선업을 그들에게서 배웠지만 우리가 세계를 정복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본 문화가 아니라 아이돌 케이팝(K-POP)이 세계를 정복하고 있습니다.
반도체가 그들이 앞서 있었지만 지금은 우리나라가 세계를 정복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극일, 승일 정신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런 정부의 정치적 결단에 앞서 국민을 설득하고 국민적 상처를 어루만지고
국민적 동의를 얻은 다음에 가도 늦지 않았을 터인데 왜 그렇게 성급했을까? 하는 아쉬움 이 있는 겁니다.
국민들은 아직 일본을 용서하지 않았는데 버젓이 내 가슴에 깊은 상처가 남아 있는데
한미일 협의체가 공고해졌다고 하니 한편 다행스럽기도 하고 한편 당황스럽기도 한 것입니다.
이게 상처라고 하는 겁니다.
오래전 전도연 주연 “밀양”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주인공 신애는 남편 상처를 뒤로 하고 아들 준과 함께 밀양으로 이사를 옵니다.
신애는 조그마한 피아노 교 습소를 차려서 근근히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 준이 유괴를 당합니다. 불안, 공포, 우울, 분노에 휩싸여 하 루하루 버겁게 살아갑니다.
없는 재산을 다 팔아서 유괴범에게 건네주지만 다음 날 아들 준의 시체가 마을 연못에 떠오릅니다.
범인은 준이가 다니는 웅변학원 원장이었습니다. 몇 백번이고 용사하자를 선언하는데 잘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찾아가 신 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이만하면 은혜를 받았다 싶었습니다.
용서할 자신도 있었습니다. 용기를 내 유괴범이 갇힌 감옥에 면회를 갑니다.
감옥에 갇힌 유괴범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감옥에서 예수를 믿고 용서 받았다는 겁니다.
그 말에 신애는 충격을 받습니다. 내적 혼란이 분노로 바뀝니다. 예배당을 찾아옵니다.
손바닥이 찢어질만큼 장의자를 두들기면서 몸부림을 합니다.
왜왜왜? 하나님! 당신이 뭔데 내가 아직 용서하지 않은 사람을 용서합니까?
내가 용서하노라 말하고 싶었는데, 범인이 먼저 용서를 받았다니 이게 뭡니까?
하나님께 부를짖다가 신애는 기절을 합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충격을 이길 수 없 어 정신병동에 입원을 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신애가 뒤뜰에서 자기 머리카락을 자릅니다.
바람에 한올한올 날려 보냅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음침한 뒤뜰 쓰레기통 옆 그곳에 따스하게 햇볕이 내려 쪼입니다.
이 도시가 밀양이요. 이 따스한 햇빛이 밀양입니다.
결국은 내 머리에 한올 한올 쌓인 상처, 인생 살아가다가 쌓았던 미움, 해결되지 않은 분노,
우울을 하나하나 날려 보내는 그 길만이 내가 사는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내 인생, 음침한 내 인생, 냄새나는 내 인생, 밀양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용서만이 내가 사는 길이라는 겁니다. 내 안에 있는 상처에게 자유를 주라는 겁니다.
날려 보내라는 겁니다. 그 길만이 나를 치료하고 자유케하는 길입니다.
상처의 피해자로 살지 말고 상처의 수혜자로 살라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상처 입은 치유자, 상처가 사명이 되어 이 땅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다음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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