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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근대문화 골목을 거닐다~~~~
언 제 ; 2013년 11월 3일 저녁
있는곳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일원
모처럼의 일요일 저녁 날씨도 맑고 춥지않아 매스콤에 나오는 대구 근대문화
골목을 찾아 이모습 저모습을 담아 보기로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몇군델 다니며
어설픈 사진 기술을 가지고도 셧다를 눌러 보았었다.
대구의 계산동 골목은
조선말기 계산동桂山洞은 약전골목이 된 대구읍성의 남쪽 성곽 옆에 옛날 대구의
신천을 끼고 형성된 동네를 말한다. 계산동의 ‘계산’은 계수나무가 있는 산을
의미하는데 계산은 현재의 동산병원이 들어선 동산을 말하는 것 같다.
동산은 동산東山과 동산銅山 두가지를 쓰고 있는데 1905년 대구지도에는
동산東山이라 표기하고 있다. 동산 바로 밑에 옛날 대구 신천이 흘렀으며 그 신천
방뚝을 따라 형성된 동네를 계산동이라 칭하고 있다.
계산동과 대구읍성 남쪽 성곽 사이에는 전정리前田里라는 지명이 길을 따라 보인다.
이 곳은 현재 약전골목 남쪽의 좁은 골목이 된 길인데 한자말을 풀어서 우리말로
발음하면 앞밭골, 앞밖걸로 불렸으며 영남대로, 경부가도京釜街道, 성밖골목으로
불리고 있다. 한마디로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길, 과거보러 가는 길을 의미한다.
또한 앞밭걸과 계산동 사이에 상전곡桑田谷이라는 지명을 볼 수 있다.
우리말로 뽕나무밭 동네라고 부르면 될 것이다.
밭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레 뽕나무골목이라 불리게 된 것이며
유래는 임진왜란에 도와주러 온 명나라 풍수지리가 두사충이 자신의 집터였던
현재의 경상감영터를 반환하고 뽕나무골목에 3천4백호를 받은 것이다. 이곳에 뽕나무를
심고 비단과 관련된 업을 한듯하다.
대구에 유명한 정소아과 주택과 골목을 담아 보고~~
계산동은 대구읍성의 서문과 남문 사이에 형성된 길로 자연부락과 시장통이
일찍부터 형성된 지역이다. 대구읍성의 북문과 동문쪽에는 논과 밭이었으니
일본이 경부선을 설치할 때 북문쪽 논과 밭을 가로질러 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약에 영남대로를 경부선이 관통하게 만들었다면 당시 유림들과 백성들의 반대에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문쪽으로 철도가 난다는 헛소문을 퍼뜨리면서
이 방면의 땅을 많이 사두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이곳은 대구부 서상면 지역으로
1914년에 명치정明治町으로 하였다가 1947년에 계산동으로 고치게 된다.
정소아과 앞집도 담아 보고~~~
민족운동가의 산실, 계산동 서성로 주변과 남성로 주변은 양반들과 부자들이 많이 살
수밖에 없는 교통과 시장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성로와 계산동은 근대 민족운동가와 예술가들이 많이 탄생한 곳이 되었다.
계산2가에는 88번지 민족운동가 서상돈, 84번지 민족시인 이상화, 108번지
민족운동가 한솔 이효상, 90번지 독립운동가 이상정, 92번지 서예가 회산 박기돈, 82번지
영남대학의 전신인 청구대학 설립자 야청 최해청, 87번지 경향지 ‘집단’의 편집인이자
평론가 남만희, 77번지에 ‘서인심’ 소유의 문인화의 대가 죽농 서동균화실,
104번지에는 친일파이자 서상돈의 장남인 서병조, 78번지의 금잔디 작곡자 김진균(1925∼1986), 110번지는 대구 가두극장 창립멤버인 이원식의 백부인 이호진이
운영하던 영천한의원이 있었고 목조 반양옥인 영천한의원이 건립되기 전 이인성과
서병기, 이여성 등 영과회 창립회원인 주정환이 살았다.
진골목을 그냥 지날 수 없어서~~~
대구 근대문화골목에 있는 근대 건축물들을 새겨서 잠시 쉬어 가는 공간.작은 의자
하나에도 문화를 입혀서 더욱 편안하고 여유로운 여행이 되도록 돕고 있습니다.
"인두화 작품 한 켠에는 이상화 시인의 고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광복 63년째인 지난 2008년 8월 12일에 개관된 이 고택은 이상화 시인이 숨을 거둔
역사적인 장소일 뿐만 아니라 마지막 시인'서러운 해조'를 쓴 곳 입니다.
우리나라 근대문화와 역사가 잘 보존된 이 곳 대구 근대골목은 지난 6월
'한국관광의 별' 로 선정된 데 이어,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관광지 99곳'에도
뽑혔습니다.이 때문에 한겨울에도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 정신이 잘 담겨있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시인의 고택 등을
돌아보면서 근대 우리민족 정신의 뿌리가 이 길위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상화 시인의 작품에 관해 스크린 터치방식으로 퀴즈를 푸는 프로그램도 관광객들의
눈길을 끕니다.대구 중구청은 대구 근대골목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해 인두화 작품 20점을
추가로 제작 설치할 계획입니다.
주소는 정확치 않지만 상화고택 뒤편에 1924년 태어난 시인 신동집의 집도 있었다.
그의 동생은 월북했다고 한다. 169번지의 명나라 장수 두사충집터, 169번지 한켠을
빌어 살은 민족예술가 빙어 현진건, 남성로 약령서문의 앞이며 지금은 도로에 편입된
남성로157번지에 음악가 박태준, 박태원, 구 서신로에 편입된 수동62번지의 이인성을
발굴해낸 서양화가 서동진, 이외에 주소지는 확인되지 않은 월북화가 이쾌대,
그의 형 월북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이여성이 살았다.
대구 진(긴)골목이란다
주소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계산1가 계산성당 건너편에 3.1운동 학생시위를 주도한
문학가 백기만, 한국영화의 토대를 닦았던 김유영과 소설가 최정희는 백기만의 과자점
앞 골목집에서 신혼을 보냈다고 한다.
계산동 앞에 달구벌대로라는 큰 도로가 나기 전에 길 건너에도 많은 예술가들이 살았다.
간판이 이색적으로 제작되어서~~~
계산동 길 건너편 알리안츠빌딩에는 이인성의 양화연구소가 있었던 남산병원이
있었으며 병원 뒤 남산동 407에는 한국최초의 성악가 김문보가 살았다.
이외에 문학평론가이자 카프파였던 이갑기가 살았다.
내 모습도 한 컷~트 넣어 보고~~~
미즈산부인과 대각선 건너편은 북랜드 근처 ‘근원수필’저자이자 미술사가였던
김용준의 고택이었다
====INDEX====
두사충과 뽕나무골목과거보러 가는 길, 영남대로골짜기에서
읍내로 온 성당, 계산성당대구최초의 성당, 십자형성당十字型 聖堂영남최초의
근대건축물, 고딕양식 성당철거된 근대건축물, 계산성당 사제관가톨릭 근대교육의
시작, 해성재이인성나무 - 감나무Four Season of Kyesan Cathederal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 서상돈고택일본인이 본 서상돈서상돈의 장남, 서병조고택상화고택 尙火古宅
석류, 감나무, 장독대가 이쁜 집, 상화고택 계산동 집에서 남긴 시 상화의 여성편력
상화고택, 시민의 품으로소설가이자 신문사 기자, 현진건고택독립운동가이자 대구
최초의 서양화가, 이상정고택이상정의 아내 권기옥계산동에 살았던 이쾌대, 이여성
대구상공회의소 초대회장이자 서예가, 박기돈고택교육자이자 정치가, 이효상고택
영남대학의 전신 청구대학 설립자, 최해청고택'금잔디’작곡사 음악가 김진균 이문열
소설 ‘금시조’ 모델, 죽농 서동균 화실24세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음악가, 박태원 생가
터 박태원의 동생이자‘오빠생각’작곡가, 박태준 구 영천한의원달구벌대로 교통의 축,
계산오거리 계산동 앞을 흐르던 대구천 계산오거리의 사라진 랜드마크, 고려예식장
고려예식장 우종식, 우종묵 저택 매일신문 매일신문 테러사건한일호텔 김용덕사장 저택,
쌈지뜰식당구 일심관 요정(사가이)피난민이 개척한 냉면집, 대동면옥
복어의 자존심, 거창복어식당구 전경환 사돈댁, 대청마루 식당성밖골목의 명물,
원조할매칼국수 화교잡화점 성립행 왕수강王修網 사장대구에 정착한 화교인들의
경제활동 두사충과 뽕나무골목두사충 집터 계산2가 169뽕나무밭 계산2가 일대
약령시 서문도 담고~~~
두사충은 중국 두릉杜陵사람으로 임난이 일어나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과
우리나라를 도우기 위해 나왔다. 그가 맡은 일은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라는,
지세를 살펴 진지를 펴기 적합한 장소를 잡는 임무였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을 펴는데 조언해야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 조선군과도 긴밀한 협의를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당시 우리나라 수군을 통괄하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도
아주 친했다. 임난이 평정되자 두사충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그의 매부인 진린陳璘도독과 함께 우리나라로 나왔다. 이후 정유재란도 평정되자
두사충은 압록강까지 매부 진린을 배웅한 후 자기는 조선에 귀화했다.
대구 근대로의 역사란다~!~!~!~!
두사충이 귀화하자 조정은 두사충이 터를 잡은 현재의 대구시내 경상감영 터를
하사하고 살도록 했다. 두사충이 받은 땅에 경상감영이 옮겨오게 되자 두사충은
그 땅을 내어놓고 계산동169번지에 집을 짓고 주변에 뽕나무를 심으며 업을
이어나가게 된다.
이 거리의 풍경은~?
이때부터 계산동 일대는 두씨들의 세거지가 되었는데 두씨들은 계산동으로 옮기자마자
주위에 많은 뽕나무를 심었고 그 때문에 이 일대를 뽕나무 골목이라 부르게 됐다.
그는 고향을 두고 온 그리움으로 후에 최정산(대덕산) 밑에 고국인 명나라를 기리는
제단을 세워 매일 초하루가 되면 고국방향으로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골짜기에서 읍내로 온 성당,
계산성당 위치 계산2가71
대구 도심에서 가장 아름답고 역사적인 공간을 묻는다면 대구시민들은 단연 계산성당을
말할 것이다. 또한 계산성당 일대가 4,100m2는 도심지에서 유일하게 문화재 보존지구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한국의 전통 건축물이 아닌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이 세운
성당이 대구 도심의 중심이미지가 된 것에 대해서 안타까운 부분도 있다.
대구읍성과 4대문이 있었다면 대구는 조선시대와 근대문화를 고스란히 담지한 아름다운
곳이 되었을 것이다. 계산성당은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가 대구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미사를 집전할 수 있게 된 곳이기도 하다. 조선은 천주교의 탄압이 심했기 때문에
대부분 피난을 쉽게 갈 수 있고 읍과 멀리 떨어진 골짜기를 선택해 모여살았다.
1885년 12월 대구의 초대신부로 불란서의 김보록 바오로(Achille Paul Robert)가 부임한다
그는 읍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신나무골에서 은신 전교하다 1886년 한불조약 후에
신앙의 자유가 넓게 허용되었으므로 1888년 겨울 김보록 신부는 신나무골에서 대구읍내의
교회 진출을 위해서 대구와 가까운 죽전 새방골(서구 상리동)로 옮겨 3년간 은신
전교하면서 낮에는 바깥 출입을 삼가고 밤이면 상복으로 변장하고 각급 신도들을 찾아
전도하였다 한다.
당시 인교동 정규옥 승지댁에서 7년 동안 전교하면서 성당 부지를 물색하다
1897년 3월 현재의 계산동 성당 자리와 그 서편에 있는 동산 두 곳을 물색했다.
김보록 신부는 동산 전부를 150냥에 매입하려고 결정하였으나 노인층 신자들은 높지
않은 현재의 계산성당 자리가 좋다고 하여 타지역과 다르게 시내에서도 제일 저지대인
평지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성모성당(당시 이름)을 짓고 후에 천주교가 ‘천주’를 모시지 않고 ‘
성모 마리아’를 모신다는 신앙적 오해가 생겨 후에 계산성당으로 고쳤다고 한다.
계산성당은 목조1번, 벽돌1번 이렇게 2번짓고 2번 증축하게 되어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계산성당 자리에는 원래 근대적 교육기관인 해성재(海星齋, 후에
성립학교-효성초등의 전신)가 있었고 그 우편에 최초성당이 있었던 것이다.
해성재로 시작한 가톨릭 교육사업은 현재 대건, 효성, 대구가톨릭대학 등 많은
근․현대교육기관을 만들어 내게 된다.
구부러진 소나무는 산소에 있어야 하는데 이곳에는 왜~?
계산성당에는 옛날 샘이 있어서 남산동을 비롯 주변에서 물을 길으러 왔다 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박정희대통령과 육영수여사가 결혼을 한 곳이며 1994년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성당 남편에는 이인성의 화폭에 담겨진
감나무가 ‘이인성나무’로 지정받아 보호받고 있다.
우측편의 옛날 효성초등학교는 송현동으로 옮겨가 현재 계산문화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상화고택 尙火古宅위치 계산2가 84번지문의 053 421 7572(거리문화시민연대)
상화고택 일지1901년 상화탄생1939-43년 계산동2동 84번지 상화거주1943
상화 서거1948년 3월 우리나라최초의 시비 상화시비 건립1967-2004년 6월
이금주씨 직전까지 거주1983년 8월 이윤수시인이 상화시인이 살았던 집이라고
최초 증언1980년대후반 재일교포가 상화고택 매입의사있었으나 흐지부지
1995년 8월15일 상화동상제막식 - 대구두류공원1997년 8월 대구시 이상화고택
보존계획수립1999년 8월 대구시 1억9천5백만원으로 매수협의 / 실패2002년 1월
상화고택 마당에 소방도로 개설공문을 중구청이 발송2002년 2월 상화고택보존
국민운동본부 발족2003년 5월 22일 상화묘비 제막식 - 죽순문학회2003년 6월 9일
군인공제회 상화고택 기부체납 의향서제출2003년 6월 26일 군인공제회 교통영향평가
조건부(고택보존) 통과2003년 9월 대구시문화재위원회 문화재심의2003년 9월
기부채납공정서작성2003년 10월 문화예술과 문화재심의 통과2003년 11월
미소시티 건축심의 통과2004년 6월 4일 미소시티 상화고택매입2005년 4월
미소시티 상화고택주차장부지 매입2005년 8월-12월 임시개관을 위한 새단장2005년 10월
미소시티 상화고택을 대구시에 기부 2005년 9월 29일 민족시인이상화고택보존 운동본부
해체2006년 현재 주차장부지를 매입 &임시개관 상태
석류, 감나무, 장독대가 이쁜 집, 상화고택
상화시인은 말년에 가난해 1939년부터 43년 서거하기 전까지 상화의 백부 이일우선생의
며느리 이득명李命得씨의 소유의 집 1채를 얻어 살았다. 이득명은 계산동2가 84번지에
이사 오기 전 서성정1정목44번지(서성로1가44번지)에 살았으며 이곳은 상화 백부의
집이며 현재 상화의 질녀가 사는 곳이니 계산동의 이 집이 상화의 사촌형님 집이었다는
것이 유력하다.
고택 왼편의 83번지는 이재철씨가 살았다. 이재철은 현재 서남빌딩 주인이며
상화시인의 오촌조카이며 본채 왼쪽편의 담장에 이재철집(83번지, 후에 보국직물
정사장이 매입)과 상화고택을 통하는 문이 있었다는 것을 증언했다. 이재철 모친이
경북여고 출신인데 동기동창들이 상화고택에와서 이재철씨의 아버지가 유언으로
‘상화고택을 사라’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
이재철 모친은 사는 걸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당시(60년대로 추정)모친의 용돈이
한달에 600만원 정도 되는 거부였다 한다. 이 집의 상량문에는 을축년(1925)이라
적혀있고 지은 사람은 1970년대 경북대학교 ‘황교수’란 분이 오셔서 자신의
아버님이 지으셨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6.25요리집으로 식당으로
사용되었다. 한 미망인이 운영했으며 육군사령부의 백두진장군의 부하가 전쟁통에
사망하자 그녀의 아내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백두진장군의 보호 아래 별자리가 아니면
술 먹을 수 없었다고 하고 집 앞에 백차(당시 지프형 순찰차)가 즐비했다고 한다.
이재철 모친은 사는 걸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당시(60년대로 추정)모친의 용돈이
한달에 600만원 정도 되는 거부였다 한다. 이 집의 상량문에는 을축년(1925)이라
적혀있고 지은 사람은 1970년대 경북대학교 ‘황교수’란 분이 오셔서 자신의
아버님이 지으셨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6.25요리집으로 식당으로
사용되었다. 한 미망인이 운영했으며 육군사령부의 백두진장군의 부하가 전쟁통에
사망하자 그녀의 아내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백두진장군의 보호 아래 별자리가 아니면
술 먹을 수 없었다고 하고 집 앞에 백차(당시 지프형 순찰차)가 즐비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1967년 이금주씨가 소유하기 전까지 우동식씨가 소유했으며
정원을 이쁘게 가꾸었다고 한다. 이금주씨가 이 집이 상화고택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80년 서울KBS에서 방송차 찾아와서 이금주씨는 고택임을 확인했다.
이후 이윤수 시인이 찾아와 설명해 주었고 해서 이후부터 집을 크게 고치지 않고
그럭저럭 보존하며 살았다고 한다.
대문을 열면 바로 동네사람들이 얻어 마시는 우물이 있었고 80년대 우물을 메우면서
물안에 팔뚝만한 물고기가 있었다고 하며 90년대 말까지 최근까지 우물펌프가 있어서
물을 길어서 사용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우물펌프 배관만 남아있다. 이금주씨 이전에
살았던 우동식씨의 아내가 꽃에 관심이 많았다.
장미울타리는 멋지게 만들어 장미넝쿨을 살렸다고 한다.
백장미, 붉은장비, 분홍장미 3종류가 심겨져 있었다고 한며 석류나무가 상화와 함께
찍혀있는 나무다. 원래 본채 가운데 석류가 본 그루이며 우편의 석류는 본 그루가
죽을 것 같아 이금주씨의 동생이 우편으로 옮겨심었다. 고택 본채 뒤 담장 너머
계산문화관 뒤뜰에 있는 석류나무는 성당 사무국장에게 이금주씨가 선물해서
옮겨 심은 나무다.
이사 올 당시 감나무는 3그루가 우물뒤, 화장실옆, 뒤창고 담장쪽에 있었으며
현재 우물뒤의 나무만 살아있다. 이외에 본채 정면의 정원에 작약3그루가 있었으며
화장실쪽에는 한옥1채가 있었는데 불이나서 철거했다 한다. 중앙에 장독대가 적벽돌로
건립했는데 눈에 담아 둘 만하게 이쁘다.
계산동 집에서 남긴 시 상화의 대표적인 시로 ‘나의 침실로’와
‘빼앗길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두시가 있다. 두시 모두 대구의 지역을 매개로
한 시다. ‘나의 침실로’에서 침실은 가톨릭 성지인 남산동 성모당을 말하는 것이고,
‘뺏앗긴 들’은 그당시 ‘수성현(지금 수성구)’의 벌판을 말한다.
대구지역에 거주하면서 대구를 매개로 한 시들이 많다. 당시 교남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이 집에서 시조 ‘기미년’과 수필 ‘나의 어머니’, 시 '서러운 해조‘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당시 남산동의 교남학교(대륜학교 전신)에 무보수로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으며 "피압박 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는 지론 아래
운동경기 종목에 권투를 첨가시켜 오늘날 대구<태백구락부>의 모태를 이루어 놓았다.
서상돈고택
위치 계산동88
1891년 서상돈 41세의 나이에 중구 계산동에 새로 지은 집이다.
그의 집은 무수히 많은 나그네들과 식객食客들이 묶어갈 수 있는 안시처였다.
그는 대구지역 가톨릭 근대 신앙운동의 선구자이자 큰 후원자였으며 그의 집이
계산성당과 붙어있어 성당 터도 서상돈의 땅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집은
2007년 9월 완공예정인 주상복합빌딩 ‘신성미소시티’의 공사부지로 매입되어
공사완공 후에 북편 왼쪽에 이상화고택과 함께 작은 소공원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2004년 헐린 집의 원자재들은 복원할 때 활용될 예정. 전체적인 터는 조금 옮겨진
상태로 본채와 별채, 사랑채는 복원될 예정이다.
서상돈고택 바로 앞은 옛 고려예식장 부지중 일부인 104번지는 그의 차남 서병조의
집이었다. 상화시인의 고택과는 집 한 채를 사이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대구상공회의소 소장을 지낸 이씨 일가의 집이였고 미소시티에 매입되기 직전
소유자는 이소장의 아들로 추정된다. 북성로에서 상업을 한다고 했다.
계산동에 사시는 정영숙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집의 거주자는 이승만대통령과
친척사이라고 했다. 이승만대통령이 이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골목에
지프차Jeep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쓰는 통에 주변 주민들이 긴장했었다고 한다.
2007년 국채보상운동100주년 맞이하여 고택개관과 함께 대대적인 기념사업들이 치러질
예정이다. 정영숙씨의 증언에 따르면 이 집에 살았던 할머니의 손자가 서인수(효가대)
철학교수였는데 구약성경의 최고권위자로 알려져있다고 한다. 이씨 집안이 서상돈 고택을
매입하기 전에 살았던 분이 서인수씨의 친할머니였다면 서상돈씨와 관련이 있던 분으로
추정된다. 서상돈선생의 고택으로 안채, 사랑채, 아래채, 곡간채,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남향의 안채 좌우측에 아래채와 곡간채, 그 앞쪽에 대문채와 연결된 사랑채를
배치하여 ㅁ형을 이루고 있었다. 대문과 안채, 사랑채 사이에는 붉은벽돌로 쌓은
아치형의 중문을 설치하였는데 조적법, 구성기법 등이 당시 중국인들이 건립한
종교계통의 건물과 유사하다.
안채 : 정면4칸, 측면2칸의 팔작기와 집이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부엌과
안방, 우측에는 건너방을 배치하였는데 안방과 건넌방 앞에는 대청과 연결된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툇마루의 각 칸에는 미서기문을 달았고 하부 고막이는 타일로 마감하였다.
사랑채 :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전면에는 대청과 연결된 툇마루를 설치하였는데 툇마루부의 구성은 안채와 같다.
아래채 : 시멘트 블록조 1층의 슬라브 건물로 근년에 건축된 것으로 짐작된다.곡간채 :
정면3칸, 측면1칸 규모로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배치하였다.대문간채 :
사주문으로 각 부재의 치목, 장식수법이 간결하여 근대적 변화를 살필 수 있다.
이 주택은 인물유적 뿐만 아니라 전통주택의 변화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담고 있다.
담쟁이가 신기하여 담아 보고~~
계산성당 건너편 교회와 이곳 뒷편의 교회는 어떻게 될까?
약령시를 둘러 보고~~~
약탕기가 무척 크다~~~
동쪽에 있는 약령문도~~~
~~~추억의 옛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