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돌한 꿈 / 최미숙
5월, 농장으로 들어가는 길 양옆으로 제철을 만난 들꽃과 나뭇잎이 제법 세를 불리고, 상큼한 풀냄새까지 풍긴다. 가지런하게 정돈된 밭마다 수확 시기가 가까운 양파가 마지막 힘을 발휘하는지 푸릇푸릇한 긴 이파리가 창창하다.
작년 이맘때 농장 뒷산에서 뽑은 취나물 뿌리를 잘라 시험 삼아 심었는데 죽지 않고 싹을 보여 준다. 하도 기특해 그대로 두었더니 어느새 뻣뻣하고 억세 나물로 먹기에는 늦었다. 좀 더 심어볼 요량으로 산으로 들어가니 적당하게 자란 취나물이 사방에서 손짓한다. 다행히 쇠지 않고 쓸만했다. 고요한 산속에서 혹시 멧돼지라도 만날까 무서워 주변을 살피며 나물을 뜯다 보니 어느새 바구니 한가득이다. 줄기는 두고 뿌리만 떼어 농장 한쪽 눈에 띄는 곳에 심고는 내년에는 밥상에 오르기를 바랐다. 새소리가 청아하다. 하루가 다르게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숲이 싱그럽다.
어렸을 적, 우리 집에도 땅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하고 원했다. 여덟이나 되는 대식구가 먹고 살기도 바쁜데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언감생심 땅을 꿈꾸었다. 시골에 논이 있어 쌀을 사지 않아도 되는 친구네 집이 부러워 가끔 엄마에게 그런 속내를 내비치면 “너라도 풍족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곤 했다. 엄마의 쓸쓸한 표정을 보며 어른이 되면 원하는 것을 꼭 이루어야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 시절 어른들은 주로 은행을 이용하기보다 계를 들어 목돈을 만졌다. 엄마는 대식구를 이끌어가려니 힘에 부쳤는지 고향 친구에게 돈을 빌리기도 했는데 이자 심부름은 내가 도맡았다. 바느질을 해 받은 수고비를 장판 밑에 차곡차곡 모았다가 목표액이 되면 장롱 안 엄마만의 비밀 장소에 넣어 두었다 곗돈과 우리 학비로 썼으며 빚을 갚아 나갔다. 간혹 계주(契主)가 돈을 가지고 도망가는 사고가 터지기도 했는데, 엄마가 속한 계는 괜찮았던 모양이다. 그런 상황에서 땅을 사고 재산을 불린다는 것은 사치였고, 먹을 것이 풍족한 것만도 고마운 일이었다.
결혼하면서 시아버지가 준 이층 양옥집 덕분에 집을 마련하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됐다. 큰아이를 낳고 얼마 후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품었던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약간의 여웃돈이 생기자 순천 인근에 땅을 샀다. 남편이나 나나 세상 물정을 몰랐던 탓에 지인의 말만 믿고 계약했는데, 알고 보니 진입 도로가 없는 맹지였다. 그래도 어쨌든 내 소원 풀이는 한 셈이다. 아버지가 제일 기뻐했다. 하지만 아이 키우느라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오랫동안 비워뒀더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 동네 노인이 부쳐 먹는다고 했다. 나중에는 빈 땅을 돌봤다며 돈을 요구했고, 싼값에 넘기라고도 했다. 어이가 없어 듣는 척도 하지 않았고 몇 년 후, 지인이 소개한 사람에게 팔고는 더 넓은 곳을 샀다.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고 굵직한 나무와 야생화도 심으며 꽤나 정성을 들였다.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에 몇 발만 떼면 산에서 내려오는 냇물이 흐르고, 뻐꾸기, 산비둘기, 딱따구리, 이름 모를 산새 지저귀는 소리가 귀를 홀린다. 바위 위에서 잠시 쉬다 이내 달아나는 다람쥐며 엄마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곳이 됐다.
농장에 올 때면 엄마와 날짜를 맞춰 함께 다녔다. 밭일도 하고, 우거진 나무 아래서 방금 뜯은 상추에 쌈을 싸 먹으며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기도 했다. 또 교회 친구들을 모시고 와 쑥도 캐며 하루 종일 지내기도 했는데, 그런 날은 더 행복해했다. 아마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컸으리라 짐작한다.
어릴 때부터 당돌하게 꿈꿨고, 부모님이 소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다. 우리 6남매 키우느라 청춘을 다 바치며 그것도 모자라 빚내고 갚는 일을 반복하며 힘들게 살았던 엄마 아버지가 딸이 산 땅으로라도 조금의 위안을 받았다면 자식으로서 빚을 조금이라도 갚은 걸까? 어버이날을 맞아 부모님의 수고를 다시 한번 새겨본다.
첫댓글 동네 노인 분이 남의 땅을 그냥 농작물을 심는 것도 모자라서 나중엔 돈을 요구하다니 황당하네요.
선생님 글 좋아합니다.
담백하고 깔끔해요.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다람쥐가 보이는 텃밭, 상상만 해도 기분 좋습니다.
어머니께 '우리 땅'을 마련해 제일 좋아하는 장소로 가꾸시며 자주 나들이 하신 효심 가득한 선생님의 마음이 잘 느껴집니다.
선생님, 어머니께서 뿌듯해하시고 좋아하셨을 모습이 상상됩니다. 선생님 글에서 늘 느끼지만 정말 효녀시고, 진짜 땅 사시길 잘하신 것 같습니다.
효녀시네요.
저는 어머니께 빚 갚지 못했는데요.
누가 농장을 말하면 달려가 보고 싶어져요. 동종업이라 그럴까요?
이제 시간이 많으실테니 있으니 잘 가꾸시기 바랍니다.
저는 애물단지였는데 선생님은 꿈을 이루셨습니다.
'푸릇푸릇한 긴 이파리가 창창하다'는 표현이 참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농촌에 살지만 땅 한 뙤기 없었던 저도 땅 가진 사람이 부러웠어요.
기회가 되면 이제는 산을 사 보려고요. 하하.
선생님 글에서는 늘 어머니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아름다운 농장 만들어 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