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잡록-강희안
◈ 본관은 진주이며 자는 경우요, 호는 인재인데, 완역재의 아들이다. 시ㆍ글씨ㆍ그림을 다 잘하였으므로 당시에 삼절이라고 일컬었는데, 시는 위응물ㆍ유종원과 같고, 그림은 유용ㆍ곽희(송나라의 화가)와 같고, 글씨는 왕희지ㆍ조맹부를 겸하였다. 세종 때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인순부윤에 이르렀으며 48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저서로 《양화록》이 세상에 전한다.
◈ 인재가 나이가 두어 살 때부터 담장과 바람벽에 손가는 대로 글씨 쓰거나 혹은 그림을 그렸는데 법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행장〉
◈ 형조 판서로 있을 때에 도둑이 멋대로 날뛰었는데 공이 엄하고 밝게 다스렸으므로 간사한 무리들이 숨어 버려 서울의 금옥이 텅 비게 되었다. 옛날 제도에 금옥이 비게 되면 임금께 아뢰게 되어 있으므로 낭관이 옥이 비었음을 아뢰자고 하였으나 공이 말리면서 말하기를,
“고요(고도 순의 신하로 법리에 통하여 형벌과 옥을 만들었음)처럼 법을 잘 처리한 이가 아니면 어찌 감히 옥이 다 비었다고 아뢸 수 있겠느냐?”
하니, 부하들이 부끄러워하고 탄복하였다. -상동
◈ 세종이 명나라에서 보내온 ‘체천목민 영창후사’의 여덟 자 옥새를 만들기로 하였으나, 그것을 전자로 쓰는 것이 힘든 일이었는데 조정에서 공을 추천하여 쓰게 하였다. -상동
◈ 하루는 말하기를,
“꿈에 관청에 여러 선비들이 가지런히 앉아 있는 사이에 빈자리가 하나 있기에 아랫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여기 앉을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갔는데 금년에 돌아옵니다.’ 하였다. 그 표말에 쓴 것을 보았더니 그것은 곧 내 이름이었으니 나는 죽을 것이다.”
하였다. 이 해에 그는 과연 세상을 떠났다. -상동
◈ 정밀하건 조잡하건 간에 모든 물리를 한 번 보면 곧 이해하였다. 다만 음률만은 몰랐는데 영인(음악을 맡아보던 관리)이 비파를 뜯는 것을 보더니,
“손가락을 천천히 놀려 보라.”
하고는, 한참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서 말하기를,
“비록 소리를 이루지 못하겠으나 대강의 요령을 알겠다.”
하고, 손수 한 가락을 타는 데 그 순서를 잃지 아니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 슬기로움에 탄복하였다. -상동
◈ 전서ㆍ예서ㆍ해서ㆍ초서와 그림의 신묘함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제일이었으나, 공은 모두 감추고 드러내지 않았다. 그에게 글씨와 그림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공은 말하기를,
“글씨와 그림은 천한 재주이므로 후세에 흘러 전하게 되면 이름을 욕되게 할 뿐이다.”
하였다. -상동
◈ 점필재가 수찬으로 있다가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하여 함양 군수가 되었을 제, 강진산이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그 시는 점필재 세고 하권에 보인다.
◈ 한가로이 지내면서 매미 소리를 듣고, 그 고결하고 무리에서 뛰어남에 느낀 바 있어 드디어 그 모양을 그리고 실상을 적어서 사언시 여섯 구를 지었다. -상동
◈ 인재가 그린 여인도ㆍ경운도와 청학동ㆍ청천강 두 족자는 참으로 천하의 기이한 보배다. 〈지서〉
◈ 인재는 젊었을 때 재예가 뛰어났으며, 만년에 양주 원루에 올라 시를 지었는데,
산 있으면 어디멘들 집으로 삼지 못하랴
푸른 산과 마주 앉아 한 번 크게 숨을 뿜어 보노라
벼슬살이 10년에 몸이 늙어 가니
고향에 돌아감을 백발되기 기다리지 말라
하였다. 영천군 정이 이 시를 보고 비평하여 쓰기를,
“이 시는 서가 아니면 이의 솜씨다.”
하였다. 당시에 서거정과 이승소가 시인으로서의 명예를 독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정이 탄복하였던 것이다. 뒤에 정이 이 원루 밑을 지나면서 전날의 비평하여 써 놓은 글을 다시 읽고 그 밑에 쓰기를,
“이 시는 강산의 아취가 있고, 한 점의 티끌 낀 데가 없으니 세습에 얽매인 세속 선비의 작품이 아니다. 또한 천지가 넓고 강산이 깊은데 어찌 인재가 없을 것이라고 하필 서와 이를 들추랴.”
하였다. 정이 보고 크게 뉘우치고 한탄하며, 자기의 비평문을 지우고 갔다. 《추강냉화》
◈ 강희안이 박팽년과 성삼문의 옥사에 연좌되어 고문을 받았으나 승복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희안이 역무에 참여하였느냐?”
물으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실상 알지 못하오. 나으리가 이름있는 선비를 모조리 죽였으니, 이 사람은 살려 두고 쓰시요. 그는 실로 어진 선비오.”
하였다. 이로써 희안이 죄를 면하게 되었다. 〈육신전〉
◈ 《양화록》에,
“첫째는 노송인데 줄기와 가지가 깊숙한 절벽 위에 구불구불하고, 마른 옹이며 늙은 움이 많고 바늘 같은 잎이 가늘고 짧으며, 솔방울과 꽃이 달린 것으로 바위틈에 기생하는 것을 가품으로 친다. 둘째는 만년송인데 층진 가지와 푸른 잎이 실처럼 드리우고 줄기는 구불구불하여 마치 붉은 뱀이 수풀에 오르는 듯하며, 향기가 강렬한 것은 가품이요, 잎이 희고 가시가 있는 것은 하품이다. 금강ㆍ묘향두 산에는, 내버려 두어도 잘 사는 만년송은 2, 3월에 가지를 꺾어다가 그릇에 꽂아 응달진 곳에 놓아 두고 천천히 물을 주면 살아나서 다시 새잎이 돋아나고 더부룩한 가시가 오래되면 실처럼 된다.”
하였다.
◈ 서울지방에서 접을 붙여 재배하는 것은 모두 천엽홍백매로서 열매를 많이 맺는데 《화보》에서 이른바 원앙매라는 것이다. 먼저 작은 복숭아나무를 분에 심고 거기에 매화나무 가지를 걸어 놓고, 복숭아나무와 매화나무 양쪽 껍질을 벗겨 버리고 서로 붙여 생칡으로 단단히 동여맨다. 기운이 서로 통하고 껍질이 서로 붙어 아문 뒤에 원 매화는 잘라 버린다. 이것을 ‘의접’이라 하는데 자주 물을 주고 붙여 놓은 가지를 점차로 비스듬하게 해서 늙은 매화나무의 모양을 만든다. 접붙인 매화를 분에다 심고 겨울에는 따뜻한 방에 들여 놓고 자주 따뜻한 물을 가져와 뿌리에 뿜어 주고 냉기에 닿지 않게 하면 넉넉히 동지 전에 꽃이 피어 맑은 향기가 방안에 가득해질 것이다.
◈ 서울지방에서 꽃을 기르는 사람으로서 서향화의 운치 높은 것을 모르는 것도 또한 기르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제 기르는 기술을 터득한 뒤에 꽃잎이 우거지고, 푸른 잎에 자주빛 꽃이 피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꽃받침 하나가 겨우 터지게 되면 벌써 맑은 향기가 뜰에 가득해지고, 꽃이 지고 열매가 맺히면 마치 앵두가 푸른 잎 사이에 빨갛게 익은 것과 같아서 참으로 한가로운 가운데서 즐길 수 있는 좋은 벗이다. 서향화의 잎이 짙은 녹색에다 넓고 두꺼운 것은 곧 상성(상성)을 잃지 않은 것이다. 도은(이숭인)이 시를 지어 보냈는데,
푸른 잎 붉은 꽃 향기도 좋으니
그대에게 보내어 은자의 벗 삼으려 하노라
하였다.
◈ 비도와 분도, 이 종류는 전에 우리나라에는 없었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들어가 공주와 결혼하고 우리나라로 돌아올 때 원 나라 황제가 하사하여 가져온 것이다.
◈ 괴석으로서 송도 남쪽에서 나는 것은 꼭대기까지 물을 끌어낼 수가 있는데, 모양이 수침향과 같다. 속칭 침향석이라는 것인데 참으로 천하에 둘도 없는 보배다. 세상 사람들이 괴석의 오목한 곳에다가 암채와 잡풀을 심어 가지고 제딴에는 고상한 운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모두 속된 선비들의 하는 짓이다.
◈ 난초의 잎은 한 해 동안에는 다 자라지 못한다. 이듬해 늦여름 께 가서야 다 자라는데, 호남 바닷가의 여러 산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 사계화(월계꽃)는 4계절을 독차지한다. 오행으로써 말하면 토가 사시에 언제나 왕성한 것과 같은 것이다. 꽃가꾸기를 배운 사람은 반드시 먼저 이 꽃을 기르는데, 이것이 꽃가꾸기의 지침이다. 사계화에 세 종류가 있는데 그 중에 줄기가 푸른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 산다화(동백꽃)로서 우리나라에 있는 것은 오직 네 종류뿐인데 동백ㆍ춘백이라고 부르는 것과 서울지방에서 기르는 천엽동백과 또 천엽산다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본디 겹잎 산다[중엽산다]가 없었는데, 충숙왕이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여 돌아올 제 황제가 하사한 것을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끼어 길러서 지금까지 그 씨를 잃지 않게 된 것이다.
◈ 치자에 네 가지 아름다움이 있는데, 꽃의 빛깔이 희고 윤기 있음이 첫째요, 꽃의 향기가 맑고 깨끗함이 둘째요, 겨울에도 잎을 갈지 않는 것이 셋째요, 열매는 노랑 물감을 들이는 것이 그 넷째다. 치자꽃은 성질이 건조하고 더운 것을 아주 싫어하므로, 몹시 더운 곳에 간직하여 두면 가지와 잎이 누렇게 시들어 꽃을 피우지 못한다. 또 얼어서 상하는 것도 좋지 않다.
◈ 치자는 여러 가지 꽃 중에서 간수하기가 가장 힘들다. 물을 잘 주어 말리지 말아야 하며, 더운 햇볕에 쐬지 않아야 한다. 만일 잘만 기르면 열매를 맺게 할 수 있다.
◈ 무릇 국화를 기를 때에는 옛 방법을 쓰지 말 것이며, 한 구덩이마다 한 포기씩 갈라 심고, 줄기가 약한 것은 갈대로 붙들어 주어야 한다.
◈ 첫째는 석창포를 치는데, 이른 봄에 뿌리가 얽히고 잎사귀가 가는 것을 캐어다가 그 실뿌리를 자르고 괴석 밑에 나란히 놓은 다음 부서진 돌로 눌러 놓고 돌 틈에서 나오는 샘물을 대어서 뿌리를 잠기게 하면 저절로 뿌리가 나서 돌 위에 얽힌다. 근세에 한 재상이 사신으로 일본에 가서 서방사에 들렸더니, 한 노숙(불도에 조예가 깊은 중)이 사미를 시켜 바닷소라 한 개를 가져오게 하여 보았는데, 소라 등에 무엇이 붙어 있는데 마치 용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여러 겹으로 얽히어 있는 털이 있어 가늘기가 바늘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창포뿌리였다. 재상이 매우 이상히 여겨 농담으로,
“이 기이한 보배를 내려 주시어 나의 행장을 장식하여 주시오.”
하였더니, 노숙 말하기를,
“수백 년 동안 쌓이고 쌓이어서 이루어진 것인데 아마 속세에 나가면 말라서 죽을 것이요. 이것은 신령스러운 물건이지오.”
하고, 도로 제자리에 갖다 두게 하였다.
◈ 요즘 꽃을 기르는 집에는 반류(구불구불한 석류나무)가 많이 있다. 가지를 구불구불하게 하여 두서너 층으로 만들어 놓고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는데 매우 귀엽다. 곧은 줄기가 높이 솟아 마치 우산을 편 것 같은 것을 기둥석류[주석류]라 하고, 몇 그루가 총총히 나고 가지가 뒤얽힌 것을 덩굴석류[수석류]라고 이른다.
◈ 무릇 연꽃을 심을 때에는 붉은 것과 흰 것을 한 못 안에 함께 심으면 좋지 않다. 모름지기 따로 떨어지게 심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흰 것이 성하고 붉은 것은 반드시 쇠해 버린다. 큰 독 안에 붉은 연과 흰 연을 심어 두고 부들과 마름 따위의 풀을 함께 심어 못처럼 만들어 놓으면 가장 멋이 있다.
◈ 귤나무가 서리와 눈을 만났을 제 줄기와 잎이 푸릇푸릇한데 솔솔바람이 한 번 지나가면 향기 또한 그치지를 않는다.
◈ 모란에 낙양홍이 있는데 충숙왕이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고 우리나라로 돌아올 때 원나라 황제가 하사한 것이다.
◈ 오뉴월 장마철에 갓난 대[죽]로서 잎사귀가 짧고 가지가 촘촘한 것을 골라서 분에 심고, 가로 난 뿌리를 잘라 내고 좌우 두어 마디를 각각 이어준다.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잎이 말라들어 펴지지 아니한다.
◈ 파초를 기르는 방법, 너무 건조하면 마르고 너무 습하면 썩는다. 잘 기르는 비결은 스스로 체득하는 데에 있다. 《양초부서》
◈ 셋째로는 오반죽(검은 대나무)을 치는데, 서울지방은 기후가 추워서 살 수 있는 것은 오반죽뿐인데, 이 반죽은 해가 지나면 검은 빛깔로 변한다. -본록
◈ 세종 23년 일본국에서 철쭉꽃[척촉화] 몇 분을 바치었으므로 임금이 대궐 안뜰에 심게 하였다. 꽃이 피니 꽃잎이 홑이지마는 매우 크고 빛깔은 석류와 비슷한 것이 비단 같은 꽃받침이 겹으로 달려서 오래도록 시들지 아니하므로 임금이 칭찬하고 상하 임원에 나누어 심게 하였다. 《양화록》
<재편집: 오솔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