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가 절벽 대밭 속에 서 있는 망우정은 영산, 창녕, 의령, 현풍 아니 영남의 선비정신을 일깨우고 지킨 일국의 영웅이며 장수요 현자, 유선자의 자취요 상징물이다. 의병장으로서 남긴 크고 위대한 공훈은 역사 속에 길이 빛나지만, 광해 당대에 고난을 연속적으로 겪으며 강가의 작은 집에서 솔잎을 먹으며 은거하였던 망우당의 삶은 선비정신의 표상이었다.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1552~1617) 하면 누구나 의병장, 장군으로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비였다. 문신 집안 출신으로 남명선생 문인이자 외손서이며 진사였으며 문과에 합격했던 학자였다.(임금의 뜻을 거슬러 비록 파방 당했지만) 그는 창녕과 인연이 깊었다. 의령에서 출생했으나 그의 본향은 창녕과 맞닿은 현풍이었으며 그의 누이가 창녕현 권암 성천조捲菴成天祚(1556~1607)와 결혼하였으므로 일찍이 내왕하였으며 맏사위는 영산현 사람 신응辛應(1572~1909)이었고 둘째 사위는 창녕사람 두회암 성이도斗回菴成以道(1582~1671)였다. 그가 은거하며 타계할 때까지 살았던 낙동강가의 망우정이 영산현 원천 우강리에 있었으니 본군과 어찌 인연이 깊다 아니할 수가 있으랴. 그의 절친한 벗이자 신묘한 병략을 내어 승전을 도왔던 문암 신초와 함께 낚시로 세월을 보냈으니 이 또한 끈끈한 인연이라 하겠다. 곽재우가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기와 대장부의 기개로 4월 22일 전국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5월 첫 싸움이 바로 영산현과 접경인 도사면 기강(거룬강)전투이었으며 그 후 정암진 승전에 이어 낙동강 동안 방어전에 진력하여 경상우도를 안정시켰다. 현풍 창녕 영산 낙동강 동안의 3개 읍성 수복전, 유어 마수진 전투, 도천 우강의 성담산성 전투, 용산리 개비리 창날산(마분산)전투, 도천리전투, 고곡리 구진산성의 구전구승 등등 영산과 창녕의병군을 이끌어 승전을 거듭하여 왜적을 몰아내고 낙동강 좌우안 고을을 지켜냈다. 또 정유재란 때 방어사 신분으로 밀양 현풍 창녕 영산 네 고을의 군사와 주민들의 식량과 소, 말 등 가축까지 모두 입성토록 하는 청야전술을 펼치며 각지에서 호응한 의병들이 집결하여 큰 전투 없이 왜군을 물리쳐 화왕산성을 고수하였던 일은 임진왜란사에 길이 남을 일로 기억된다. 경상좌병사일 때 그의 올곧은 정신은 모함을 입어 1600년 전라도 영암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2년 후에 돌아오면서 본향 현풍현 가태리 구례(비슬산 기슭 각료암)에 잠시 머물렀다. 사위 신응이 장인을 위해 지은 도천 요강원 언덕의 강정이 완공되자 망우정이라 편액을 걸고 은거하며 신초와 조두암 셋이서 술잔을 기울이거나 낚시하며 금을 타며 지내기 시작하니 곧 영산현 사람이 되었다. 영암 유배지에서 전라도 광주사람 양생술의 대가이며 은일자로 알려진 국서 김영후가 찾아와 여러 날을 지내는 동안 벽곡辟穀을 하며 조식調息(호흡 조절법)을 하는 양생술을 전수받았다. 망우정으로 와서는 따신 밥(화식)을 먹지 않고 솔잎을 먹으며 본격적으로 양생술에 몰입하여 심오한 경지에 도달하였다. 벽곡도인술을 수련하자 일부 논객들이 유학자의 길을 벗어났다고 비방하였는데 영의정 이원익이 망우정을 방문하여 그런 논쟁을 잠재웠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배우기를 청하였으나 거절하여 제자를 두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망우당과 함께 왜적과 싸운 의령 함안 의병군 장령과 창녕의 성천조, 이방의 노극홍, 부곡의 이후경, 함안의 조임도, 도천의 신초와 배대유, 그 집안 자제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그중 한강 문인이었던 부곡 이도순은 망우당의 유일한 제자로 손꼽히는데 신응의 딸과 결혼하니 외손서가 되고 나중에 망우정을 물려받았다. 또 남지 용산리에 살면서 강 건너에 합강정에 글을 읽으며 지내던 간송 조임도가 이도순과 친해서 자주 망우정을 방문하며 망우당의 고절孤節을 존대했다. 그는 손자들에게 글을 가르치거나 사위들에게 출처에 대한 가르침을 주면서 벼슬하기를 꺼리도록 역설하였다. 그래서 총명했던 손자 신동망이나 사위 성이도는 생원시에 합격하기도 하였으나 과거 보기를 마다하였다. 망우당은 벼슬하기를 꺼려 광해 임금이 등극하면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제수하였는데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았다. 임금의 명을 따르지 않고 중흥삼책 같은 소를 올리기만 하였으며 임금의 부름을 거절할 수 없을 때는 잠시 부임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직하고 망우정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였다. “곽재우를 병사나 절도사 같은 무관이기보다는 현자로 보고 그에 합당한 우대를 하여야 합니다.” 하고 조정 대신들이 건의하자 호분위 부호군, 한성부 좌윤 등에 제수되었다. 그때 사위 생원 성이도를 데리고 한양으로 올라가 남산에 기거하니 그를 만나려는 사람들이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는 오리 이원익, 한음 이덕형 정승과 자주 만나 벼슬살이에 미련이 없음을 얘기하였다. 함경도관찰사 겸 함흥부윤에 제수하는 파격적인 어명이 내려오자 사직소를 사위 성이도에게 대신 올리라 하고 물러나 해인사 백련암으로 몸을 숨기기도 하였다. 은 평생에 신信이 아니면 실천하지 않았으며, 의義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았다. 망우당에게는 망우정 앞 장강 낙동강이 도道요, 구름에 잠긴 산은 법이었다. 낚시는 기다림 거문고는 어짐(賢)이며 솔잎은 비움(空) 술 한 병은 부드러움이며 탁상의 종이와 붓은 울림(鼓) 벽의 칼과 활은 의義요 빛남이었다. 1917년 4월, 망우당은 숨을 거두었다. 오리 이원익이 창출 백출이 병에 좋다고 권했으나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했다. 외손자 신동망과 사위 성이도가 세계와 연보를 정리하고 간송 조임도가 발문을 지어 <망우당집>을 간행하였다. 2년 후 현풍 가태리에 충현사를 지어 향사하였으며 숙종 때(1677년) 예연서원이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1709년에 충익공이란 시호를 내리면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또 1739년 기강 언덕에 보덕불망비가 세워졌고 1789년(정조 13)에 이광정이 찬한 <충익공 망우 곽재우 유허비>가 망우정 언덕에 건립되었다. 망우정은 6·25 때 불탔는데 후에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