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적인, 지극히 사피엔스적인 / 임채성 / 시조시학(2019. 봄호)

[임성구]

계간평

/

사피엔스적인, 지극히 사피엔스적인

임채성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그의 명저 󰡔사피엔스󰡕에서 다른 동물에 비해 신체적 능력이 보잘것없던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몇 가지 이유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1만 년 전만 해도 지구에는 최소 여섯 종의 인간이 있었다. 그들은 아프리카 동부, 유럽, 아시아 등지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생 인류의 직계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에 살고 있었다. 그렇다면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네안데르탈인, 호모 에렉투스와 같은 다른 인간 종과의 경쟁을 이겨내고 유일한 인간 종으로 살아남았을까? 그것은 사피엔스에게 일어난 ‘인지혁명’ 때문이었다고 추론한다.

인지혁명은 사피엔스에게 ‘언어 능력’을 부여했다. 소리를 통한 간단한 의사소통은 침팬지나 네안네르탈인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복잡한 정보를 정리하고, 다른 인간 개체에 대한 뒷말을 전하고, 실재하지 않는 허구의 세계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유연함은 사피엔스만의 ‘고유한 언어’가 가진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사피엔스는 뒷담화를 이용해 개체 간 신뢰 관계를 구축하고, 가상의 개념인 ‘부족 공동체’나 ‘부족 신(神)’을 만들어냄으로써 단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상상의 질서를 창조하고 문자체계를 고안해냈기 때문에 사회와 문화라는 대규모 협력망으로 엮을 수 있었다. 비현실의 세계를 이야기할 수 있는 언어의 힘.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상상력이자 창의력이다.

온전한 언어의 힘만으로 이룩한 상상의 세계는 문학이라는 언어예술로 피어났다. 문학의 언어는 인간에게 동물적 본능을 억제하고 문화라는 정신적 가치를 일깨운다. 박이문은 󰡔문학과 철학 이야기󰡕에서 “모든 문학의 이상은 시”라고 설파한다. 시의 본질이 곧 문학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언어의 내포적 의미 기능이 최대한도로 발휘됐을 때에 생기는 언어의미의 상태를 ‘시성(詩性)’이라 하는데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서든 인간은 바로 여기에 환희를 느낀다. 아무리 철저한 논리학자도, 아무리 탐욕적인 상인도 시적인 것, 즉 ‘시성’에 완전히 무감각하지는 않다. 비록 순간적이나마 그들도 시적인 의미에 매혹된다는 것이다. 값싼 유행가 가사에서도 흥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같은 사실을 증명하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현대인의 사고방식이 극도로 물질화되고 기계화돼가는 오늘날에는 시인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난해한 시들이 빠르게 양산되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시적인 것에의 향수를 바탕으로 인간의 보편적인 정신세계 안에 천착하려는 노력들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타인에게 전달되지 않을 만큼 주관적인 시적 의미에 대한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성찰은 특히 시조에 의해 구체화된다. 객관적인 세계와 주관적인 언어 사이에서 시의 길을 찾는 것, 언어의 요설화가 아닌 정제된 말부림을 통해 공감에 이르게 하는 힘, 그것이 시조가 추구하는 ‘울림과 떨림’의 미학이 아니겠는가.

얼마나 참았던가 얼마나 기다렸던가

천지에 가득한 바람, 바람 속에 내가 와서

무단히 나만 당했어

속절없이 웃는 꽃

눈보다 하얀 생각 꽃으로 섰다마는

산에 들에 푸른 바람 아직은 먼 손님들

서둘러 내게만 먼저 찾아온 줄 알았어

피고 질 일상사쯤 몸으로 익혀 와도

가끔씩 자리 펴고 헤살 놓는 바람의 손을

꽃이여, 벗어나지 못한

가슴 야린 꽃이여

— 리강룡 ｢너도바람꽃 -미투｣ 전문(≪시조시학≫ 2018 겨울호)

시인의 눈에 비친 사물은 개별적인 사유와 관점의 프리즘을 통해 재구성된다. 시의 관점은 대상마다 다르게 작용하지만, 시인의 감성과 이성의 회로를 거치는 동안 상식의 눈으로는 그려낼 수 없는 특별한 그림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비유나 상징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로 재창조해내는 것이 시인이기 때문이다. 리강룡 시인은 봄의 전도사라 할 수 있는 ‘너도바람꽃’을 성폭력 피해자들의 사회고발운동인 ‘미투(me-too)’의 몸짓으로 재해석하여 표현하고 있다. ‘너도바람꽃’은 이른 봄 나무나 풀 등 다른 식물들이 싹을 틔우기 전에 먼저 꽃을 피우는 미나리아재비과의 야생화다. 주로 사람의 인적이 닿지 않는 고지대 산지에서 잘 자라는 특성이 있다. ​서양에서는 ‘바람꽃’ 일족을 일러 ‘아네모네’라고 부르는데, 바람의 신 ‘제피로스’와의 슬픈 사랑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꽃이기도 하다. 그래서 꽃말도 ‘사랑의 괴로움’ 또는 ‘사랑의 비밀’이다. 그래서일까. 위 시에도 그런 사랑의 슬픔과 비밀이 깃들어 있다. 그 꽃은 “천지에 가득한 바람” 속에서 “무단히 나만 당했어”라며 “속절없이 웃는” 존재이다. 순결하기 짝이 없는 “눈보다 하얀 생각”을 “꽃으로” 피웠지만 “푸른 바람”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자리 펴고 헤살 놓는” 꽃샘바람의 손을 벗어날 때쯤이면 꽃은 지고 없을 것이다. 살아서 자신의 아픔을 증언하지만 아픔의 치유보다 생물학적 소멸이 먼저일 수도 있는 현실은 덧없고 아프다. 그래서 “속절없이” 웃을 수밖에 없으리라. 세상의 온갖 폭력 앞에 여자라는 이유로, 약자라는 이유로 당할 수밖에 없는 숱한 타자들을 대유(代喩)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그런 애잔함을 ‘나도’라는 의미의 부제에 덧입힘으로써 꽃말의 ‘너도’와 의미상의 대구와 대조를 이루게 하는 언어미감을 고양시킴과 더불어, 이것이 어느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임을 환기시킨다. 꽃말에 붙은 ‘너도’라는 수식어에는 비하와 무시의 언어폭력도 담겨있음을 생각할 때, 쉽게 바뀌지 않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빛이 처연하다.

｢너도바람꽃｣에 나타난 대유적 표현은 우은숙 시인의 ｢모서리｣에서도 볼 수 있다.

저, 도도한 앉음새에 타협은 없었다

옹골찬 모습엔 흩뜨러짐도 없었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단호함만 있었다

그러나 한걸음에 달려온 햇빛 소나기

그 눈부신 절정이 창문을 투과하자

견고한 각진 얼굴이

순해지네

느긋해지네

꼿꼿한 경계가 풀려난 그 자리

모난 것도 둥근 것을 품고 살았구나

몸 안에 잔물결 이는 그 곳

딱딱하다가

말랑한

— 우은숙 ｢모서리｣ 전문(≪시조시학≫ 2018 겨울호)

여기서 ‘모서리’는 겉으로는 단단하고 날카로워 보이지만 그 속은 한없이 순하고 부드러운 존재로 묘사된다. 나아가 ‘모서리’의 주체가 어디(혹은 무엇)인지를 특정하지 않고 있어 대유의 이미지를 더욱 심화시킨다. 시인은 자신의 시 안에 작으나마 우주 하나를 창조한다. 이 소우주는 새로운 이상세계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시인이 창조한 새로운 이상세계는 기존의 보편적인 가치관과 전통을 부정하고, 그 위에 또 다른 형태의 이미지로 축조된다. 시인의 상상이 새롭고 다르다는 것은 기존의 상상 질서를 부정한다는 의미이다. 우은숙 시인이 새롭게 창조한 상상의 세계는 그만의 언어로 구체화되는데, ｢모서리｣는 이 지점에서 새로운 상상의 질서로 재편되고 있다. “도도한 앉음새”와 “옹골찬 모습”은 모서리가 갖고 있는 보편적인 모습이다. 그래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단호함”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햇빛’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존재와의 만남은 “견고한 각진 얼굴이/ 순해지”고 “느긋해지”게 만드는 동인이 된다. 이는 “모난 것도 둥근 것을 품”을 줄 아는 것에 대한 진술적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둥근 것이 모난 것을 품는’ 기존의 고착화된 사고체계를 일시에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식적 편견을 깨트리는 것이야말로 시인이 가질 수 있는 언어적 특권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물질 자체의 물리적인 상태 변화가 아닌 내면의 기질적 변화에 주목함으로써 실체의 세계를 의미의 세계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주변 환경이나 외부 요인에 의해 눈앞의 실재세계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 주위에 산재한 수많은 ‘모서리’들을 보듬어 안으라는 사회적 역설(力說)이 잔잔한 사자후로 발현되고 있음이다.

아득한 시공을 넘어 원시로 돌아온 나

덕지덕지 앉은 삶 때 열탕물로 씻다 보면

더러는 허구를 벗은 신생아로 태어난다

벌거벗은 너와 나는 높낮이도 없는 걸까

맨살을 맞비비는 뜨거운 숨결만큼

서로의 등을 떠밀면 물밑 세상 보일까

물안개 스멀대는 거울 속에 갇힌 허상

침묵으로 일관되는 귀머거리 거리를 돌아

외로운 세상 밖으로 낯선 내가 가고 있다

— 임석 ｢목욕탕에서｣ 전문(≪정형시학≫ 2018 겨울호)

시의 이상은 가능한 한 구체적인 상태로 경험의 대상을 표현하는 데 있다. 시인은 그 경험이나 경험의 대상을 그만의 언어로 표현한다. 언어란,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의 기호체계이다. 즉, 시인은 언어 이전의 경험을,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새로운 의미의 세계로 재편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경험이 ‘시적인 것’이 되지는 않는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남다른 경험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길어 올린 사유의 깨달음이 없다면 그것은 스쳐 지나가는 평범한 일상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따라서 시인의 경험이란 인생과 존재의 여러 물음들에 시인 스스로 답을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임석 시인의 ｢목욕탕에서｣는 이러한 경험의 재편을 잘 보여주는 시편이다. 시인은 일상의 단면을 해체하고 분석함으로써 성찰의 태도를 견지한다. 몸을 씻는 행위는 누구나 경험하는 보편적인 일상이지만 성찰적 사유를 통해 심미적 기록을 이어가는 사람은 드물다. 이 시가 특히 내세우고 있는 것은 언어의 프리즘에 비친 예민한 감각이다. 자연회귀에의 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감각은 현대인의 모순된 자아와 연결된다. 위선과 허위의 가면을 벗고 “벌거벗은 너와 나”가 되는 ‘목욕탕’은 빈부귀천의 “높낮이가 없는” 동일시의 공간이다. 그곳에는 “아득한 시공을 넘어 원시로 돌아온 나”와 “허구를 벗은 신생아로 태어난” 순수한 존재가 함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물안개 스멀대는 거울 속”으로 표상된 “허상”일 뿐이다. ‘거울’은 보통 ‘거울 속’의 자아(혹은 세계)와 ‘거울 밖’의 그것을 만나게 하는 동시에 단절시키는 모순성을 지닌 매개물이다. 이러한 자아분열적 세계는 “침묵으로 일관되는 귀머거리 거리”에 닿아 있다. “맨살을 맞비비는” 목욕탕을 나서는 순간 원래의 껍데기 속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가식적인 현대의 거리는 결국 “외로운 세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세상에 발을 딛고 있는 시인 스스로도 낯설게 보이는 현대인의 페르소나가 아프게 다가온다.

참으로 오랜만에 친구 소식 들려왔다

‘어떻게 사느냐?’

그에게 묻기도 전,

제 발로 찾아들어 온 또 하나의 부음訃音

시간은 늘 내게 몸값을 요구했다

꿈이며 사랑이며

모든 걸 다 주어도

끝내는 멱살을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 황성진 ｢의표意表｣ 전문(≪좋은시조≫ 2018 겨울호)

지구 저편에서 부음이 날아왔다

바람 불고 비 내린다, 꽃들의 봉두난발

몇 번을 읽고 또 읽는

유작의 너머, 혹은 배후

흩어졌다 모이는 이마 밝은 구름과

맑아서 서러운 작은 새의 긴 후렴

손 뻗어 닿을 수 없는

가을날의 먼 안부

시인의 서명을 오래 들여다본다

그늘이 드리워진 한 획 또 한 획

간신히 완성한 토막말…

나는 조금 울었다

— 정혜숙 ｢조금 울었다｣ 전문(≪시와표현≫ 2018. 12월)

예일대 철학교수인 셸리 케이건(Shelly Kagan)은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삶은 죽음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완성되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목적이며, 죽음의 본질을 이해하면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죽음이 없는 삶은 세상에 없으며, 삶이 없는 죽음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영원을 꿈꾸지만 누구도 영원에 이르지 못하도록 설계된 것이 삶이라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문학적 관점에서의 죽음이란, 언어 소통이 불가능한 존재와 존재 간의 영원한 단절을 의미한다. 누군가의 죽음에서 남은 자의 삶을 반추하는 것이 또한 시인일진데, 여기 그런 두 시인이 있다. 황성진 시인과 정혜숙 시인이 그들이다. 두 시인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죽음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들은 시적 사유와 시적 언어를 통해 삶과 죽음, 그 안쪽과 바깥쪽을 시간의 강물에 비춰보고 있는 것이다.

황성진 시인은 ‘죽음’을 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삶’을 이야기한다. 제목으로 사용한 ‘의표(意表)’는 ‘생각 밖이나 예상 밖’을 뜻하는 말이다. ‘뜻하지 않은’ 부음을 듣고 삶의 행간에 숨겨져 있던 ‘생각지 못했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예기치 않은 당혹감으로 받아들여짐을 ‘뜻밖’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그것은 “오랜만에 친구소식”을 듣고 “어떻게 사느냐?”라고 삶을 물어보려는 순간에 맞닥뜨린 대척점의 당혹감이다. 또 다른 한 존재의 죽음에서 시인은 깊은 사유의 깨달음을 자아올린다. 삶이란 결국 죽음에 이르는 여정임을 “늘 내게 몸값을 요구하는” 시간을 들어 이야기한다. 시간에 ‘멱살 잡힌’ 우리네 인생사는 아무리 아등바등해도 먼저와 나중의 시차만 있을 뿐 궁극적으로는 비극적 결말에 이른다는 것을 달관자의 어조로 풀어놓고 있는 것이다.

한편, 정혜숙 시인은 한 시인의 ‘부음’을 듣고 남겨진 자의 슬픔을 ｢조금 울었다｣로 토로한다. 같은 언어와 시라는 공통분모로 연결된 다른 시인의 죽음은 동류의식의 공감대를 타고 더욱 깊은 상실감을 낳게 한다. “지구 저편에서” 날아온 부음은 아마도 지난해 10월 독일에서 임종을 맞은 허수경 시인의 것이리라. ‘사는 힘도 힘이지만 죽음으로 가는 힘도 힘’이라던 시인의 유작 시집 앞에서 정혜숙 시인도 눈물을 떨구고 만다. “바람 불고 비 내리”며 ‘꽃들’도 머리를 풀어헤치듯 세상도 함께 오열하지만, 죽은 시인의 시집에는 “이마 밝은 구름”과 “작은 새의 긴 후렴”처럼 여전히 밝은 세상이 펼쳐져 있다. 다시는 “가을날의 먼 안부”를 전할 길 없는 죽은 시인에게 살아있는 시인은 “조금”만 우는 것으로 애도를 표시한다. 키르케고어(Kierkegaard)가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영원을 사모하는 인간에게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라며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병은 정신의 질병, 즉 절망”이라고 했듯 시인도 남은 날들을 위해 깊은 절망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관계는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

근린을 꿈꾸었던 기업과 노동들은

한순간 대책도 없이 바리케이트 쳐버렸다

난생卵生들이 품고 있던 아찔한 높이와

텃새를 갈망하던 철새 같던 당신들은

또 다른 멸종을 위해 골목길을 떠돈다

날개를 잃어버리고 부리로만 살아가며

부러진 발목으로 중심을 세워보지만

와해된 생태의 등뼈, 공존은 묘연하다

— 표문순 ｢멸종위기동물 통고서｣ 전문(≪나래시조≫ 2018 겨울호)

시인에게 늘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소재를 다루느냐가 아니라 그 소재를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이다. 모든 시인과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어떤 식으로든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시대와 동떨어진 초월적인 삶의 경험을 다룬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그 나름대로 시인의 시대를 담고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생각은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동시대의 생각과 풍경을 동시대 언어로 표현하는 시조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흔히 ‘시어’라는 말로써 그 언어의 적확성을 이야기하곤 한다. ‘시어’도 ‘소재’의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시어를 선택할 것인지가 아니라 그 시어를 ‘어떻게’ 엮고 배열할 것인가로 귀결된다. 단순히 추상성과 관념성을 탈피한 구체적 이미지로서의 시어가 아니라 작품 안에서 얼마나 유기적으로 기능하고 주제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표문순 시인의 ｢멸종위기동물 통고서｣는 이런 관점에서 꽤나 신선하게 다가온다. 환경단체나 생물학계의 공문서를 닮은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시어로써 등한시되어 왔던 개념적 용어들을 과감하게 차용함으로써 오히려 현장감을 높이고 있다. 시인은 우리 사회의 여러 ‘관계’에 주목한다. “기업과 노동(자)” “철새와 텃새”로 갈라선 이질적인 부류들은 “대책도 없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산다. ‘나’와 ‘남’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을 신봉하는 그들은 오늘도 “멸종을 위해 골목길을 떠도”는 존재들이다. “부리로만” 외쳐대는 공허한 말들과 “부러진 발목”의 부실한 토대에 얹힌 불완전한 중심잡기의 한계는 뻔하다. 결국 시인은 이 사회의 모든 관계가 깨지는 순간 ‘공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준엄한 경고장을 ‘통고서’라는 이름으로 던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만이 옳다 주장하는 우리 사회 곳곳의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이기심을 소통불가의 단절된 미래로 그려낸 메타포의 확장은, 이루어질 수 없는 모순된 꿈을 꾸는 시인의 이상을 대변한다고 하겠다.

이 극劇에 대하여는 평점을 사양느니,

제1막의 주인공은 망망대해 바위섬, 침묵의 대사를 절도 있게 연기하며 삭신이 해지도록 혼신을 쏟고 있다 제2막의 주연은 눈길을 끄는 주목나무, 그늘 몇 번 흔들자 천년이 훌쩍 간다 그 아래 끄덕이는 단역전문 풀꽃들 - 관객 하나 안 든 날도 잎 하나 거르지 않는, 기실 이들이야말로 이 무대의 일등공신 - 일월과 성신이 조명으로 껐다 켜지면 한 천년 또 흐르고 그때마다 투덜대며 지나가는 사람1, 2……

대본은 아직 집필 중

결말은 알 수 없다

— 류미야 ｢전지적 지구 시점｣ 전문(≪한국동서문학≫ 2018 겨울호)

마지막으로 필자의 눈에 들어온 시는 류미야 시인의 ｢전지적 지구 시점｣이다. 이 시조는 사설시조로 완결돼 있다. 그동안 사설시조 양식과 정체성에 대한 논란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조단 내부에서 이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거나 그런 작업을 위한 담론의 제기 또한 거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시조를 모르는 자유시인이나 평론가들이 사설시조를 보고 시조가 아니라고 단언하거나 심지어 자유시를 추종한다는 비판을 듣고도 이를 반박할 이론적 토대가 확고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마땅히 반성하고 개선해야 옳은 일이지만 그런 노력들이 보이지 않아 안타깝다. 사설시조를 발표하고 있는 시인들조차 자신이 쓰는 시조가 진정한 사설시조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어 보인다. 중장 부분을 길게 늘여만 놓으면 그것이 사설시조라고 생각하는 시인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지금의 시점에서 󰡔청구영언󰡕의 ‘만횡청류(蔓橫淸類)’를 끌어와 그것으로 기준을 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에는 오늘의 시점에 맞는 사설시조로 양식화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사설시조가 자유시와 변별력을 가지려면 종장 첫 구의 변치 않는 음수율 이상의 통일된 기준이 필요하다. 시조의 기본 율격인 4(2+2)음보를 가사(歌辭)처럼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든지 하는 형식적 통일성은 반드시 선결되어야 할 과제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풍자와 위트를 접목시킨 거침없는 입담의 미학 같은 것도 덧붙여지면 좋을 것이다. 시조문단 내에서조차 시조가 아니라고 배척 받는 사설시조가 그 미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담론의 제기와 밀도 있는 토론을 통한 양식적 합의가 필요함은 분명해 보인다.

이 점에서 ｢전지적 지구 시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2음보 연첩(구와 구의 반복)이라는 시조 고유의 율격 위에 빚어놓은 거침없고 자연스러운 말부림은 현대 사설시조가 지향해야 할 목표점을 모범답안처럼 제시해주는 것 같다. 그 내용에 있어서도 지구환경을 걱정하는 마음이 활달한 우주적 생태관으로 표출되고 있어 미더움은 커진다. “바위섬”과 “주목나무”, “풀꽃들”이 천년에 “또” 천년이 흘러가도록 제 역할을 거르지 않는다는 것은 자연의 위대함에 대한 찬사이다. 그러나 “투덜대며 지나가는 사람1, 2”에 담긴 시심은 그들과 섞일 수 없는 자연 파괴자를 바라보는 비판의 눈빛이다. 자연을 자연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제 멋대로 바꾸려 하는 인간 스스로에 대한 자아비판인 셈이다. 그 때문에 “대본은 아직 집필 중/ 결말은 알 수 없다”고 조심스런 태도를 취한다.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닌 ‘전지적 지구 시점’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것이 시인의 주관적인 감상이 아니라 범지구적 공통관심사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리라. 첨예한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른 지구환경의 미래를 사설이라는 율격 구조에 맞춰 풀어낸 시인의 언어는 분명 ‘호모 사피엔스’적이다.

수박겉핥기 식으로나마 대략적으로 살펴본 몇몇 시편들을 볼 때, 호모 사피엔스가 생물학적 진화를 넘어 문화를 창조한 원동력이 된 그 언어의 힘을 더욱 고양시키고 있는 시인들의 역할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임채성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세렝게티를 꿈구며󰡕 󰡔왼바라기󰡕, 시선집 󰡔지 에이 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