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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98
5월17일 [부활 제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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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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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Y9hPwuJCZc8&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3&t=0s
(서울주보/부활6주일)
http://pf.kakao.com/_xhGxjBxb/51526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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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네 인간 존재라는 것 ‘밤에 우는 갓난아기’와 같습니다!>
우리 모두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늘 아래 펼쳐지는 세상만사 모든 것은 유한하며 속절없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는 내내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지만 특별할 것도 없습니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끝도 없이 지루하게 반복되며, 언젠가 맞이하게될 끝은 너무나도 허망하고 부질없습니다.
한때 목숨바칠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지던 가치나 이데올로기도, 영원불변할 것 같았던 불같은 사랑도, 매력적이고 찬란하게만 비춰지던 선망의 대상들도, 지극히 한시적입니다. 다 지나갑니다. 다 떠나갑니다. 다 우리 눈앞에서 사라집니다. 인간적인 것들, 세상적인 가치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특징인가 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고 목말라하는 영원성, 불변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요한 복음 14장 16~17절)
10년, 30년, 50년이 아닙니다. ‘영원히!’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곧 떠나가시지만 당신과 하나이신 분, 당신과 일심동체이신 분, 보호자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실 터인데, 그분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임을 선포하십니다.
우리네 인간 존재라는 것 ‘밤에 우는 갓난아기’와 같습니다. 말도 할 줄 모르고 그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우는 것뿐인 갓난아기와 같습니다.
어찌할 바 몰라 마냥 울고 있는 우리를 위해, 때로 어머니처럼 우리 곁에 앉아 계시며,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우리를 보살펴주시며, 우리를 양육해주시는 분이 바로 보호자 성령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대신해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지켜주시기 위해 파견되신 분, 곧 진리의 성령이십니다.
누차 강조하신 바지만 조만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현존 방식으로 제자들 안에 사실 것입니다. 당신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거룩한 성찬례 속에서 영원히 살아계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실 성령의 도움으로 인해 제자들은 곧 영적인 눈을 뜨게 될 것이고,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를 자신들 삶의 현장에서 생생하게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사이에 머무시는 동안에 제자들은 아무래도 스승님께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떠나신 후에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을 터득해야 마땅합니다.
제자들은 스스로 서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고, 제자들끼리 더 사랑하고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을 떠나보냄으로써 또 다른 예수님이자, 예수님의 분신과도 같은 성령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뿐만 아니라 또 다른 특별한 선물을 주실 것인데, 그것은 평화입니다. 그분이 주실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로마 제국은 군사력으로 평화를 가져왔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각자가 충만하게 살고, 서로 사랑함으로써 함께 성장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은혜로운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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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하루를 기분 좋게 끝내려면 음 이탈을 조심하라>
한 주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제가 피정을 들어가는 날인 지난 월요일에 평화방송에서 녹화를 잠시 하였습니다. ‘오다주’(오늘 다시 주님께)란 프로그램인데 두 진행자가 있고 한 생활 성가 가수, 그리고 제가 초대손님으로 출연하는 것입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 두 주 분량을 녹화하였습니다.
녹화를 잘하였을까요, 아니면 후회스러운 게 많을까요? 녹화가 만족스러웠다면 제가 이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평화방송에 출연한 지 벌써 3년이 되어가서 또 출연하고 싶었는지, 물론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저도 모르게 제가 너무 저 자신을 튀어 보이게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녹화 끝나고 피정 기간 내내 조금 후회스러웠습니다.
저는 함께 녹화하는 분들과 그것을 보실 분들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해 줄까만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도를 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지나치게 저를 드러내려다 보니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녹화된 것들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그것을 보시는 분들이 ‘사제가 너무 튀어 보이려고 한다.’라는 생각이 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들에게는 제가 한 말들이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본래 말하는 사람이 기분이 좋게 보여야 그 말도 잘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려고 했는데, 후회스러운 결과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러나 저는 분명 그 계명을 지키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계명을 내 힘으로 지키려다 보면 자기 자신이 드러나려고 하는 것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사실 사랑이 아니고 자신을 위한 행위임에도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끝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리의 영’께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역할을 하시는 것일까요? 말 그대로 ‘진리’를 계속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럴 땐 이렇게 행동하고 저럴 땐 저렇게 말하라고 끊임없이 코치하십니다. 마치 우리는 가수이고 예수님은 지휘자이시며 성령님은 악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크게는 예수님의 지휘에 따라야 하지만 대부분의 순간은 악보에 집중해야 합니다.
저는 녹화하면서 지휘자만 보고 악보는 제 맘대로 불렀던 것입니다. 악보를 보지 않고 지휘자만 보면 음을 잘못 내기 십상입니다. 보통 ‘음 이탈’이라고 합니다. 정상적인 용어는 아니지만 이런 것을 ‘삑사리’라고도 부릅니다. 노래를 잘하다가 한 번 삑사리 나면 그 노래 전체는 망치고 맙니다. 만약 내가 가수라면 그 삑사리 하나 때문에 며칠, 혹은 몇 달의 행복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하루도 우리가 이러저러하게 살기를 바라시고 각자에게 맞는 악보를 주셨습니다. 그 악보대로 예수님의 지휘에 맞추어 잘 연주하면 모든 것이 잘 끝나서 잠잘 때는 참으로 기쁘고 보람될 것입니다. 그 악보를 받는 시간은 전날 저녁 잠자기 전이나 아침 일찍 기도할 때입니다. 그때 그날 그분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악보를 잘 연주하는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악보대로 연주하지 못한다는 것을 어떻게 눈치챌 수 있을까요? 지휘자께서 신호를 주실 것입니다. 그 신호가 바로 우리 ‘기분’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밭에서 일하시다가 저에게 막걸리를 받아오라고 돈과 주전자를 건네주신 적이 있습니다. 아이 걸음으로는 1시간은 족히 걸릴 거리였습니다. 저는 빨리 뛰어가서 막걸리를 받아서 다시 아버지께로 향했습니다. 그러다 주전자 뚜껑에 막걸리를 흘려 받아 마시던 어른들 흉내를 내보겠다고 저도 좀 마셨습니다. 한 번으로는 성에 안 차서 몇 번을 그러며 걸었습니다. 그런데 주전자의 막걸리 양이 줄어감에 따라 왠지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아버지께 혼날 생각이 엄습해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덕에 적어도 반은 가져다드렸고, 물론 그래도 혼이 났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분명히 ‘사랑’입니다. 사랑은 예수님의 계명입니다. 그 계명을 지키면 그분이 우리 안에 사시고 우리도 그분 안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는 사랑뿐이 아닙니다. ‘기쁨과 평화’도 있습니다. 마음이 불안해지고 초조해지고 두려워진다면 분명 그것이 지휘자로부터 받는 지적입니다. 기쁘게 하루를 마치고 싶다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자신의 감정을 잘 살피며 삑사리 나기 전에 내 안에서 매 순간 성령께서 찍어주시는 음표를 잘 따라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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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실 것이다.
<(2)성령께서 일으키시는 전쟁>
평화방송 ‘TV 피정’ 중 양승국 신부의 강의 내용에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회개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었습니다.
처음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종교적으로도 마니교라는 이단에 빠져 있었고 삶은 매우 문란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386년 8월 밀라노 한 정원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집어 들고 읽어라!”
눈을 떠 보니 앞에 성경책이 놓여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펼쳐서 읽은 구절은 이것이었습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 13,13-14)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 자신에게 하시는 그 말씀을 읽고는 큰 회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의 가슴은 확신의 빛으로 가득 찼고 의심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즉시 그는 암브로시오 주교를 찾아가서 세례를 받고 은둔 속에서 기도하면서 하느님을 알아가는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의 회개가 그것으로 완전히 종결이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분의 회개는 한 평생에 걸쳐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유혹을 이기는 것이 한 순간에 된다면 얼마나 쉬울까요?
그러나 우리 일생은 유혹과 싸워 승리하는 것만 배운다면 더 이상 살지 않아도 될 만큼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귀에 속삭였다고 합니다.
“친구야, 네가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네가 우리 없이 어떻게 살려고 하느냐?”
프란치스코 성인도 유혹이 들 때마다 장미 밭에서 맨살로 뒹굴러 온 몸에 피가 흐르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노력 없이 자신을 쉽게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도 그런 유혹이 올수록 더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는 땅을 바라보는 것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며, 자아와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고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이며, 세상 것을 욕망하는 것을 멈추고 주님을 욕망하는 것이고, 내가 존재하는 것을 잊고 그분이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이 커질수록 악마의 속삭임은 줄어들었고 결국엔 이런 천사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우구스티노야, 두려워말고 모든 근심 걱정을 하느님께 맡겨라.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라. 미래는 하느님 섭리의 손길에 맡겨라. 현재는 하느님의 은총 안에 기뻐하라.”
마치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탄과 싸우고 천사의 위로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죄와의 싸움은 결국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쉼 없는 전쟁입니다.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히브 12,4)
우리도 가끔은 죄에 떨어져 매번 같은 것으로 고해성사 해야 하는 자신의 나약함을 한탄하며 ‘매번 그렇게 고해성사 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같은 죄로 죽을 때까지 계속 고해성사를 하면 구원받게 됩니다. 적어도 지옥에 가게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죄와의 싸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엇이 죄인지, 누가 적인지 명확히 깨닫게 만드는 분이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에게 내린 은총의 선물을 통해 그는 무엇이 악인가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은총이 내리지 않으면 자신이 돼지 쥐엄나무 열매를 서로 빼앗아먹으려고 하는 죄의 비참한 노예생활을 하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삶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는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예 그 죄의 삶을 자신의 행복이라고 믿어버리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에겐 죄와의 싸움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누가 적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싸움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돼지의 음식을 먹어야 하는 그 아들은 그것이 비참한 삶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 자체가 이미 멀리서 아버지가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 죄 속에 파묻혀 있는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빛이 들어올 때에야 내가 온통 어둠임을 깨달을 수 있듯이, 은총이 들어오기 전에는 무엇이 적인지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탕자가 머리를 들어 아버지 계신 곳을 바라보게 된 것 자체가 커다란 은총의 작용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회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를 듭니다. 예수님께서 착한 목자로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어깨에 메고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될 것인데 그것을 ‘회개’라고 정의하십니다.
회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노력으로 흐르는 은총의 선물이 내 안에서 일어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돌아온 탕자가 스스로 돌아온 것 같지만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파견하여 그 피의 노력으로 탕자를 어깨에 메고 아버지께로 인도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령을 통하여 죄와 싸우게 만드는 것일까요? 세례 때 성령을 받으시고 광야에서 40일간 사탄과 싸우신 그리스도는 바로 그 이후에 하느님의 뜻을 완수할 소명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루카 4,1-2ㄱ)
우리 또한 세례를 받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그러면 무엇이 죄인지를 명확히 깨닫게 되어 이제 친구였던 것들이 적들이 되게 됩니다.
성령은 빛으로서 어둠에 갇혀있던 우리 안에서 자아와의 전쟁을 일으킵니다. 지금 그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사람은 적어도 그 안에서 성령께서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어도 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도 돌아가시기 직전 신자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 싸움에서 결코 물러서서는 안 된다고 마지막으로 당신 양떼를 독려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이런 어려운 시절에 만나 부디 마음을 헛되게 먹지 말고 밤낮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빌어, 마귀와 세속과 육신의 삼구(三仇)에 맞서서 박해를 참아 받으며,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그대들의 영혼을 위한 큰 일을 경험하십시오.
이런 박해 때에는 주님의 시험을 보게 됩니다. 세속과 마귀를 물리쳐서 덕행과 공로를 크게 세울 때입니다.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받들고 영혼을 구하는 일(事主救靈事)에서 뒷걸음질 치지 마십시오.”
이렇듯 삼구(세속, 육신, 마귀)가 세례 받은 신자가 싸움을 벌여야 하는 원수요 적임을 예전에는 명확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기는 무기가 복음삼덕(가난, 정결, 순명)임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리스도 신자의 원수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예비자 교리에서도 배우기가 어렵습니다. 전쟁을 하기 위해 은총으로 새로 태어날 사람을 교육하는데 적이 누구인지 가르쳐주지 않는 실정입니다.
이는 어쩌면 성령의 힘이 교회 안에서 약해지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삼구(三仇)는 뱀(자아)이 자아내는 세 가지 욕망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다면 아담은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란 마치 돼지처럼 쥐엄나무 열매나 먹으며 행복이라고 느끼는 이들에게 은총을 전달하는 중개자가 되어 그들 또한 땅에서 하늘로 시선을 올리고 아버지께로 향할 수 있는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일입니다.
즉, 복음을 전하는 일이며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이를 보다 논리적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즉, 처음에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면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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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4,15-21: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에는 성령에 관한 주제와 성령강림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친밀한 사랑에 참여함으로써 체험할 수 있는 ‘기쁨’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오늘 복음은 사랑의 주제로 시작하여 사랑의 주제로 끝나고 있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이 떠나시는 것에 대해 ‘걱정할’(14,1) 필요가 없다고 하시며, 위로를 주시고 계시다. 즉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겠다고 하셨다(21절 참조).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행동을 통하여 입증되는 참된 것이어야 한다. 즉 계명을 지킴으로써이다. 그분의 계명이 실현됨으로써 바로 그분이 현존하시며, 그분이 더욱 친밀하게 드러나고, 그분이 계신 곳에 ‘아버지’도 함께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21절). 그러므로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가까이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들을 더 ‘사랑하고’, 그분들의 뜻을 즉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들이다. 이것을 우리가 너무 소홀히 해서, 그분과 신비로운 만남을 못 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 외에 또한 성령의 ‘선물’을 약속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16절). 그러나 세상은 그 성령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17절) 요한복음에서 ‘보다(theorèin)’라는 동사의 의미가 현상을 넘어 하느님의 현존 표지를 알아보는 의미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세상은 이러한 자세를 갖고 있지 못하다.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과 같다. 빛을 보려면 먼저 눈이 치유를 받아야 하듯이, 세상이 성령을 받아들이려면 ‘세상’이기를 그쳐야 한다. 빛과 어둠의 대결에 대한 사건이 요한복음 전체를 덮고 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1,5)
여기서 성령은 ‘협조자’(Paraclito)라고 한다. 이는 요한복음 사가 고유의 용어이다.(14,16.26; 15,26; 16,7 참조) 본래는 변호사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신앙인들을 도와주는 기능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기운을 돋우어 주다’, ‘협조하다’의 의미가 생기게 된다. 그러기에 성령은 우리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될 때, 위로해주고 보증해 주시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일을 계속하는 ‘협조자’이다. 지금까지는 예수께서 친히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지켜주셨고’(17,12) 그분이 떠나가시면 성령께서 그 양떼를 보호해주실 것이다. 이제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 충실할 수 있도록 내면으로부터 그들을 도와주고 위로해 주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터득하도록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진리’를 더 잘 깨달을 수 있게 한다. 사도들 역시 성령이 임하신 다음에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 오늘의 교회도 성령의 빛을 충만히 받아들여야만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된다. 그 진리는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진리이다. 즉 성령은 그리스도를 더 잘 인식시키고 보다 강렬하게 그리스도의 더욱 친밀해진 새로운 현존을 생활화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18절)고 하신다.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19절)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신앙으로 느끼는 것은 실제적 접촉과 같이 강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히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항상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20절) 이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신적 개입이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이루어지고 있다. 믿는 이에게는 ‘매일매일’이 모두 ‘그날’일 수 있으며 또한 ‘그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부활 시기를 지내는 우리는 이제 진정, 세상에 ‘희망’을 전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매 순간 우리의 삶이 부활을 체험하는 삶이 됨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바라시는 것이다.
제2독서: 1베드 3,15-18: 언제나 깨끗한 양심을 지니고 사십시오
베드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어떤 박해에도 굴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한다. 그 ‘시련’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진정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가장 참된 ‘예배’이며 진실한 찬미의 행위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18절) 이 옛 신앙고백에서 파스카의 배경이 드러나고 있다. 그 성령은 우리의 부활도 이루어 주실 것이다(로마 8,11 참조) 이 ‘육적인’ 죽음과 ‘영적인’ 삶 사이의 체험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매일매일 자신 안에서 되풀이하는 부활 체험이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 설명해 주어야 할 ‘희망’의 신비이다. 사랑은 적개심이나 중상모략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에게 그의 삶과 그 삶을 드러내는 모든 외적 표현을 통해 신앙인들이 지닌 “희망”(15절)에 대해서 답을 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생활 전체로써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죽여 죽음의 어둠 속에 영원히 매장하려 했지만, 그분은 그 죽음의 감옥을 막았던 바윗돌을 굴려내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부터 ‘희망’의 선포자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듯이 하느님과 형제들에 대한 봉사를 위해 자신을 무상으로 내어주는 사랑의 ‘힘’에 맡길 수 있다면 불의, 부정, 폭력, 고문 그리고 죽음까지 모든 것이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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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님]
사랑은 함께 머무는 일입니다. 아버지와 아드님께서 함께 머무시고 그 아드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는 사랑으로 하나가 됩니다. 이런 일치를 도와주시는 분께서 성령이십니다. ‘보호자’로 번역된 성령께서는 그 말마디의 본디 의미에 따라 ‘누군가를 돕기 위하여 불린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아 낙담하고 슬퍼하는 1세기 말엽의 신앙 공동체에,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여전히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하여 일깨웁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우리 신앙인의 삶 안에는 홀로 버려지는 이들이 없어야 합니다. 한처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 사이를 ‘알맞은 협력자’로 규정하셨고(창세 2,20 참조), 성령께서는 서로서로 도울 수 있도록 교회 안에서 함께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사도 2장 참조). 성령과 함께하는 교회는 선과 악의 대립으로, 정의와 불의의 대립으로, 진보와 보수의 대립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선을 지향하되 악을 만나 회개로 이끌고, 정의를 외치되 불의함을 함께 아파하며 고쳐 나가고, 진보의 개혁을 보수의 가치로 함께 고민하는 것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이 아닙니다. 모든 이가 회개 안에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머물게 하려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하느님과 함께 머물게 하시고 함께 살아가게 하시려고 오늘도 성령께서는 활동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가로막는 것은 하느님과 이루는 일치를 가로막는 것이고, 우리의 이분법적 사고와 단죄는 그 일치에 가장 큰 걸림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앞에는 물리쳐야 할 악마가 아니라 회개와 용서로 보듬어야 할 작은 이들이 있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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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이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과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일은 모두 하나로 일치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머릿속으로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신앙인의 ‘믿음’은 곧 ‘삶’이 되어야 하고, 그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또 만일에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인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의 사랑 실천은 좋아하는 감정에 관한 일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면서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실천은, 멍에와 족쇄에 묶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이 사랑 없는 실천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15,29-30) 여기서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라는 말은, 큰아들이 작은아들과는 다르게 대단히 성실하게 일했음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없이 ‘일만’ 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아버지를 사랑해서 일한 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일한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니 기쁨도 없습니다. 그는 종이 아니라 아들인데도, 자기 자신을 종으로 전락시켰습니다. 따라서 그의 성실함의 가치는 인정되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은 그의 ‘순종’을 나타내는데, 사랑도 없고 기쁨도 없는 상태에서의 순종은 ‘자녀의 순종’이 아니라 ‘노예의 복종’일 뿐입니다. 따라서 그의 순종도 별로 가치가 없는 일입니다.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라는 말은, 그의 성실함은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고 마음속은 친구들과 놀고 싶어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혹시라도, “놀고 싶은 마음을 참고 성실하게 일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하지 않는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기꺼이’ 참는 것과 ‘억지로’ 참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억지로 참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마음속으로는 계속 죄를 짓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 같은 태도로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할 때가 많습니다. 사랑도 없이 기쁨도 없이 겉으로만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면서, 자기 스스로 “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라고 착각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속마음을 보십니다. 겉으로만 잘하는 것은 위선이라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또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가, 아닌가? 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 또는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정말로 잘하는 사람입니다. 계명을 지키긴 하지만 사랑 없이 지키는 사람과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판단은 자기 스스로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판단은 하느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솔직하게 반성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기준은 내가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준은 이미 예수님께서 정해 놓으셨고, 신앙인은 예수님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말은 ‘사랑’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랑 실천에 대해서 내 마음대로 “이것으로 충분하다.” 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이웃 사랑’의 경우에, 사랑 실천을 얼마나, 어떻게 할 것인지는 내 쪽에서 마음대로 판단할 일이 아니라 그 이웃의 입장에서 판단할 일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경우에는 하느님(예수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을 하는 것이 사랑 실천인데,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은 무한하기 때문에 인간 쪽의 사랑 실천은 아무리 해도 부족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참 종교’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종교도 많고 종파도 많은데, 그 가운데에는 이단도 많고 사이비도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을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고, 자기들이 마음대로 정해 놓은 어떤 규정이나 전통만 잘 지키고 있다면, 그것은 이단이거나 사이비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종파는 예수님을 믿는 종파가 아닙니다. (사이비 종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일들을 하면서도 자기들은 예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공동선과 사랑을 거스르는 일들을 할 때 그런 태도를 자주 보입니다. 사랑이 없는 것은 사이비로 전락하는 지름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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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최숭근 비오 신부님]
<보호자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코로나19 때문에 어려움이 많으셨지요? 코로나19가 우리의 일상을 많이 바꾸어 놓았습니다.
오랜 '사회적 거리 두기로 육체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더욱 가까이 만나야 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교우들과 사제가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공동체가 소중함도 깨달았습니다. 정부의 투명하고 신속한 대처와 국민 모두의 참여와 봉사는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부활 시기를 지내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보호자 성령을 약속해주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요한 14,15-17)
오늘 예수님의 약속을 더 잘 알아듣기 위해서 성경 본문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까지는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어 주신 다음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유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족례는 제자들이 살아야 할 성체성사의 삶인 섬김의 자세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새 계명을 잘 지키면 보호자 성령을 선물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나시는 것은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지금은 잘 알지 못하지만, 성령을 받게 되면 온전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이끌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이별의 아픔, 시련과 고통이 찾아왔을 때 앞이 캄캄하지만 잘 견뎌내면 주님의 은총이었다고 고백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게 되고, 예수님을 따라 살면 진리를 깨닫게 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코로나19 때문에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도 온라인으로 지내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곁에 살아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곁에서 우리 손을 잡고 함께 걸어주십니다.
보호자 성령 안에서 주님 부활의 기쁨을 우리 삶으로 드러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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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주상현 안젤로 신부님]
“하느님께서 작은 사랑의 실천을 기뻐하시고 작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다.”
제가 어렸을 때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성당에서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 중 하나는 바로 사랑하라!'라는 이야기입니다.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가족에 대한 사랑, 때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자주, 많이 들었기 때문일까요? 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이 식상하게도 느껴지고, 가슴 깊이 와 닿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 좋은 말씀이고, 맞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너무 자주 들어서 그런지 엄마의 잔소리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사랑해야지'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지금은 먹고 살기 바빠서...', '저 사람은 하는 짓이 싫어서...', '요즘은 너무나도 힘들어서 누구를 사랑할 수 조차 없어.'라고 핑계를 대며, 사랑하기를 망설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곧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의 합당한 이유를 찾아야만 하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과 조건이 사랑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만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교황님께서는 이런 우리에게 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작은 사랑의 실천을 기뻐하시고 작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다.”
이 말씀은 마다가스카르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작년 9월 7일 수도 ‘안타나나리보’에 위치한 한 수녀원에 방문했을 때에 하신 말씀입니다. 물론 수도 생활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신 것이지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곧, 사랑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닌, 있는 그대로 작은 사랑부터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가장 작은 사랑을 있는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이 성체 앞에 머물고, 가족을 사랑하기 위해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더 많이 이웃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로만 이해하고 망설이는 사랑이 아닌 사랑의 실천을 통해 사랑의 진리를 우리가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다시금 우리들에게 사랑하라!'라고 이야기를 하시면서 우리를 사랑의 삶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이 초대에 의미 없는 대답이 아닌, 작은 사랑의 실천을 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조건을 따지거나 묻지도 않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 봅시다.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의 사랑이 아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사랑의 기적을 우리는 체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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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임상만 대건안드레아 신부님]
<성령은 하느님의 가장 큰 선물>
오늘 복음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13,33)라고 하시며 당신께서 떠나실 것을 거듭 말씀을 하시자 제자들은 매우 큰 근심에 휩싸였다.
물론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는 제자도 있었고, 죽어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제자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염려와 근심이 가득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3,16)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고 하느님과 당신을 믿으라고 당부하신다.
우리나라가 OECD 국가에서 자살률이 제일 높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대부분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마지막에 하는 세 마디의 말이 있는데 ‘외롭다. 두렵다. 힘들다’라고 한다.
어쩌면 이 말들에는 인생의 슬픔과 아픔 그리고 절망이 전부 녹아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세 마디가 한 번에 모이면 자기의 삶을 놓아버리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외롭다’는 말은 모든 상황이 자기를 외면하고 자기 혼자만 남았다는 생각 속에 남은 인생길을 고독하게 홀로 가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나오는 말이다.
또한 ‘두렵다’는 말 역시 어디에도 의지할 것이 없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길에 혼자 들어서는 것이 무섭다는 것이다.
‘힘들다’는 말도 세상살이가 너무 치열해서 이 어려운 인생길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지 모르기에 너무나 고달프다는 표현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우리도 살아가면서 늘 한두 번씩은 해본 말이다. 누구나 혼자 살아가는 인생이기에 똑같이 힘들고 고달프고 외롭긴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많은 이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해도 그 속성상 혼자일 수밖에 없기에 늘 외롭고 두렵고 힘든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가 외로울 때 함께 하시겠다고 위로해주시고, 두려울 때 겁내지 말고 안심하라고 우리의 손을 잡아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힘들어 낙심할 때는 언제나 당신께서 편히 쉬게 해주시겠다며 늘 함께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더불어 우리에게 최고로 좋은 선물을 약속하시며 당신을 믿으면 성령의 사람이 되고, 성령으로 살게 되면 더 이상 외롭고 두렵거나 힘들지 않게 됨을 믿으라고 하신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특권이고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살아갈 때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성령을 가슴으로 모실 때 그 속에서 우리의 생명이 새로워지고 치유의 회복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어떤 것 보다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한다. 그 후에 우리가 바라는 그 무엇이라도 되어야 그 의미나 정체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님께 어떤 힘든 일이 있거나 필요한 지혜나 능력을 청하면 언제나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도 절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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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바둑을 두는 사람은 ‘복기(復棋)’을 합니다. 복기하는 과정에서 잘 된 착점은 어디인지, 실수 했던 착점은 어디인지 확인합니다. 상대방은 어느 곳에서 잘 하였는지, 상대방은 어느 곳에서 실수 했는지를 확인합니다. 전체 판세의 흐름이 어디에서 변하였는지 확인합니다. 날씨는 수시로 변하지만 기후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저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고수는 전체 바둑의 흐름을 여러 방향에서 복기할 수 있습니다. 복기를 잘 하는 사람은 실수는 줄이고, 흐름을 탈 줄 알기에 실력이 향상 됩니다. 정치도 그렇습니다. 총선의 과정에서 상대방의 장점은 무엇인지, 나의 단점은 무엇인지 살펴보면 다음번 총선에 도움이 됩니다. 정치 평론가들은 총선의 결과를 놓고 냉철한 평가를 하였습니다.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평가에 인색한 사람은 다음번 총선에서도 승리하기 어렵습니다.
코로나19로 미사가 중단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엄격한 방역 기준을 정하고 미사를 재개하였습니다. 오늘은 부활 제6주일입니다. 주님 부활의 기쁨과 주님 부활의 기쁨이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려합니다. 부활의 삶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이 아닙니다. 부활의 삶은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도 아닙니다. 부활의 삶은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삶이 아닙니다. 부활의 삶은 언제가 있을 미래의 삶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변화되었습니다.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표징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도들은 고난과 박해를 당당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오히려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박해를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였던 식사를 재현하였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성체성사는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가진 것을 나누었고, 어려운 이웃을 기쁘게 도왔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부활 성야의 주제는 ‘빈 무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갈릴래아는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신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신 곳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복음의 기쁨이 있다면 바로 그곳이 갈릴래아입니다.
부활 제2주의 주제는 ‘평화와 용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빌어 주셨습니다. 성령을 주셨습니다. 부활은 분노와 복수가 아닙니다. 부활은 평화와 용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다.” 토마사도는 주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주님의 부활은 신앙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나이다. 십자가와 부활로 저희를 구원하신 주님, 길이 영광 받으소서.”
부활 제3주의 주제는 ‘엠마오’입니다. 엠마오는 장소가 아닙니다. 엠마오는 우리의 마음이 자괴감에서 자부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에서 열정과 희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숨어있던 다락방을 열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시작됨을 아는 것입니다. 빈 무덤은 텅 빈 것이 아니라 부활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비록 넘어지셨지만 다시 일어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에 임박해서도 하느님께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며, 죽으셨지만 죽음의 어둠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그 부활의 기쁨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 마음 안에 벅찬 감동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이웃에게 드러내고 증거해야합니다. 그런 삶이 바로 엠마오입니다.
부활 제4주의 주제는 ‘착한목자’입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십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음성을 잘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잘 듣기 위해서는 먼저 함께 사는 가족들의 음성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이웃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억울한 이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 병든 이들을 치료해 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신앙의 길, 회개의 길입니다.
부활 제5주의 주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입니다. 길은 고속도로가 아닙니다. 전용도로도 아닙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함께 가주는 희생의 길입니다. 자갈과 가시밭을 정리하는 개척의 길입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이 드러나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입니다. 생명은 나만을 위한 생명이 아닙니다. 타인의 생명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벗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넘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신앙입니다.
부활 제6주의 주제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신앙은 쉽고 빠른 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때로는 가시밭길이고, 십자가의 길이고, 시련과 고통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길을 가셨고, 사도들이 그 길을 걸었고, 성인들이 걸었던 길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보다 낫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도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 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도종환 시인은 그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은 또 어디 있으랴’ 길가에 피어나는 작은 꽃들도 다 저렇게 흔들리며, 비에 젖는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우리들의 인생 또한 때로 갈등의 바람에, 유혹의 바람에, 욕심의 바람에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근심과 걱정의 비가 내리고, 좌절과 고통의 비가 내리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또한 충실하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면 행복의 꽃이 필 것입니다. 사랑의 꽃이 필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에 떠밀려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갈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제 아버지께서 보내 주실 협조자 성령께서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다시 알려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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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다만 사랑해요>
요한 14,15-21 (성령을 약속하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다만 사랑해요>
사랑을
보려하지 말아요
사랑은
보이지 않으니까요
사랑을
알려하지 말아요
사랑은
알 수 없으니까요
사랑을
얻으려하지 말아요
사랑은
얻는 것이 아니니까요
다만 사랑해요
그저 다만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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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신학생 시절 한 교수 신부님께서 특이한 성경해석을 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사도로 선택하시기 전에 밤 새워 기도하셨는데, 누구를 뽑을까 고민하신 것이 아니라 과연 이 덜떨어진 녀석들을 데리고 같이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셨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웃고 넘겼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일리가 아주 없는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뽑으신 열 두 사도들의 면모를 보면 그리 잘난 구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들은 유능한 지성인도, 좋은 직업의 소유자도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야고보와 요한은 당시 평범한 어부였고, 심지어 마태오는 지배국인 로마의 편에서 유다인들의 세금을 착취했던 세리였습니다. 반면 시몬은 국가의 독립을 위해 투신한, 세리와는 철천지 원수로 지내던 혁명당원 이었습니다.
물론 직업이나 신념으로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은 지나치게 세속적인 시선이니 넘어간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이들의 개별적 능력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안타깝게도 제자들은 이 또한 특출나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말씀과 의도를 잘 알아듣지 못하고 헤매기 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이 거듭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더 높냐고 대놓고 다투고,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어린이들을 눈치 없이 쫒아버리려 했습니다.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이루시려 하자 말도 안 된다고 손사래를 치고, 수난 예고 때에는 아예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능력이 없다면, 의리나 용기, 혹은 우직함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가장 사랑하던 제자 베드로는 궁지에 몰리자 스승을 세 번이나 배반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또 어떻습니까? 십자가 수난 때에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는 뿔뿔이 흩어져 숨어버립니다. 한 마디로 이 열 두 사도는 엘리트 그룹과는 거리가 먼, 심지어 평범한 사람들보다도 더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묵상하다보면, 사실 우리들의 모습 또한 이들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가르침을 매번 듣고 있지만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여러 가지 기적을 청하면서도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의심을 품게 되고 결과가 좋으면 주님의 도움보다는 나의 능력으로 이룬 것처럼 금새 주님의 도움을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의리와 용기, 혹은 우직함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여러 가지 유혹 앞에서 덧없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우리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생각을 하고 계실지요. 두렵기도 하고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에게 남기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약속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과 제자들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기에 우리는 이 약속을 우리에게 남기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중 첫 번째 약속은, 주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리라는 약속입니다. 비록 제자들이 더 이상 당신의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없을지라도 그들을 계속 돌보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전제가 동반됩니다.
두 번째는, 이 사랑의 유대를 유지시켜 줄 수 있는 성령 파견에 관한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해, 제자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알게 해주실 것이고, 당신의 말씀도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비록 제자들이 지금까지는 스승이 하는 일을 잘 이해하지도 못했고, 그분의 말씀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성령을 통해 이런 상태를 극복하여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세 번째 약속은 평화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떠나신 후에 제자 공동체 안에서 긴장과 대립이 있을 것을 예견하시고 평화를 선물로 주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힘의 논리에 의한 평화가 아닌 사랑의 논리에 의한 평화입니다. 이것은 곧 죄인까지도 내치지 않고 감싸 안는 지치지 않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왜 예수님은 이 부족한 제자들을 끊임없이 책임지려 하시는가?”라는 질문이 제기 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제자들이 예수님이 보시기에 충분히 사랑스럽고 대견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부족함과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예수님의 날카로운 가르침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회개하고 돌아오는 제자들의 모습이 그분의 눈에는 더 없이 사랑스럽고 대견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개인의 능력이 아닌 회개 하고 돌아오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결국 제자들이 당신과의 사랑의 유대 속에서 참된 평화를 누리도록 성령을 통해 그들을 이끌어주십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우리 역시 별로 잘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 사건 사고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속적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께 돌아온다면 그분은 이런 우리 각자와 교회 공동체를 결코 내치지 않으십니다. 우리 자신만을 바라보면 실망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기억하면, 우리의 약함과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다시금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며 부족함을 성령으로 메꿔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명심할 것은 이러한 은총과 사랑은 거저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경계해야 하며 반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언제나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고자 혼신의 힘으로 노력하며 되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할 때에 사랑에 지치지 않으시는 우리의 하느님이 우리를 대견해 하시며 다시금 품에 안아주십니다. 이러한 주님은 우리를 결코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시는, 우리를 따뜻한 손길로 이끌어 주시는 참 사랑의 아버지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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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심리학과 연구진은 호텔 청소원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두 집단으로 나누어, 한 집단에만 청소가 건강한 삶을 위해 미연방 의무감이 추천하는 일이라는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두 집단은 똑같이 청소 작업을 했지만 4주 후 자기가 하는 일이 건강에 좋다고 믿은 집단에서만 체중, 혈압, 체지방, 허리-엉덩이 비율, 체질량 지수가 모두 감소했습니다. 생각을 달리 하는 것만으로도 체중을 줄이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실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라도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임했을 때 좋은 결과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에는 신체를 지배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렇게 놀라운 힘을 하느님께서 넣어주셨습니다. 따라서 부정적인 마음으로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해 단어의 선택부터 다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노래를 진짜 못해요.”라는 말보다는, “아직 노래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요.”라는 식으로 관점을 바꿀 수 있는 말이 필요합니다. 자기 불신의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대신 긍정적이고 성장 가능한 마음이 나의 마음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인해 이제 더는 이 땅에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제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불안해 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보호자 성령을 약속하심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가라앉히십니다. 성령은 아들과 다른 방식으로 위로하십니다. 성자와 성령, 두 분의 본성은 같지만, 보호자요 위로자이신 성령은 특별히 고통받는 이들의 짐을 덜어주십니다.
즉, 성령을 통해 위로를 받아 불신의 마음을 종속시키고 대신 긍정적이고 성장 가능한 마음을 갖게 하면서 희망으로 나아가도록 해주십니다.
그래서 다양한 성령의 은사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하지만 이 성령의 선물이 우리 안에 드러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켜나가게 될 때 가능합니다.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일본 속담이 있지요.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 가치 있는 것을 주어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성령의 활동이 내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내 마음부터 변화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선물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로써 이 세상 안에서 희망을 간직하면서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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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존중>
우리나라 나이와 서양의 나이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2008년 12월에 태어난 아이가 있으면, 우리나라에서는 13살이라고 하지만 서양에서는 11살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적기를 바라는 어른들은 서양의 만 나이를 말하고, 나이가 많기를 바라는 어린아이나 젊은이들은 우리나라 나이를 말하곤 합니다. 사실 서양의 나이 계산이 합리적인 것 같지만, 이는 생명의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우리나라는 어머니 뱃속에 태아로 생성될 때부터로 보고 있고, 서양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어머니 배에서 나왔을 때부터로 보는 것입니다.
생명의 기준점 차이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기준점이 점점 서양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태아의 생명을 소홀히 하는 모습도 점점 많아지는 것이 아닐까요?
나이가 들었어도 그래서 나이 먹는 것이 더는 싫다고 생각해도, 우리나라 나이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만큼 생명의 소중함을 한 번 더 떠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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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좋은 깨달음의 선물>
-성령의 은총-
참 아름다운 성모성월 5월입니다.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처럼 온누리에 신록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방금 참으로 흥겹게 부른 화답송 시편도 참 아름다워 요즘 분위기에 잘 어울립니다.
“온 땅은 춤추며 하느님을 기리라, 그 이름의 영광을 노래하여라.
빛나는 찬미를 당신께 드려라, 너희는 주께 아뢰어라.
당신의 하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고”
놀라움, 새로움, 감사함중에 깨어 살아나는 신앙의 감수성입니다. 어제 저녁 성무일도시 부른 아름다운 시편도 참 좋았습니다. 우리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실감나게 고백한 시편입니다.
“주님께 아뢰오니 당신은 나의 주님, 내 좋은 것 당신밖에 없나이다
깨달음을 내게 주신 주님을 기리오니, 밤에도 이 마음이 나를 일깨우나이다
주님을 언제나 내 앞에 모시오니, 내 오른편에 계시옵기 흔들리지 않으오리다”
아름다운 시편들 역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참 좋은 선물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사랑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어제도 저는 참 좋은 선물에 감사했고 행복했습니다. 스승의 날에 맞춰 40년전 초등학교 제자들 셋이 방문한 것입니다. 방문의 선물에 저는 셋의 선물을 요구했고 셋의 시를 선물했습니다.
요구한 셋의 선물은 세 노래였습니다. 어린이날 노래, 어버이 은혜, 스승의 은혜, 세대 상관없이 모두가 부를 수 있는 불멸의 노래를 들으니 참 행복했습니다. 50대 중반인데도 노래 부를 때의 빛나는 얼굴은 그대로 동심의 소년들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셋의 시를 선물했습니다. 나눠도 나눠도 새로워 요즘 참 많이 나눈 단숨에 읽혀지는 외워지는 짧은 자작시입니다.
-“사람은 꽃이다/늘 피는 꽃이다”-
사람이야 말로 며칠 폈다지는 보통 꽃이 아니라 사랑으로 늘 피어있는 꽃입니다. 이 시가 너무 좋다며 어느 자매는 꽃 액자 사진에 이 시를 넣어 보내줬습니다.
-“아침은 늘 새롭다/나도 늘 새롭다”-
이 시에 대한 어느 자매님의 반응도 저를 많이 기쁘게 했습니다. “너무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고 힘이 됩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딸 노릇 잘 할게요!”
-“꽃이 꽃을 가져 오다니요/그냥 오세요/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산이 산에 가다니요/그냥 있으세요/당신은 산보다 더 좋은 산이예요”-
요즘 참 많이 행복하게 한 시들입니다. 이또한 참 좋은 깨달음의 선물, 성령의 은총입니다. 이번 주 가톨릭 신문과 서울 주보에서도 주목할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지난 3월3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번 5월16-24일을 ‘찬미받으소서 주간’으로 선포했습니다. 찬미받으소서 주간은 공동의 집인 지구를 돌보는 것에 관한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반포 5주년을 기념하는 글로벌 캐페인으로 교황님의 서두 생태적 회개를 호소하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저는 다시금 긴급히 호소합니다. 지구의 울부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이 계속돼서는 안됩니다. 피조물을 돌봅시다. 이는 좋으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에 화답하여, 한국 천주교 주교단도 기후 위기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그 골자 역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기후 위기, 지금 당장 나서야 합니다. 누이이며 어머니 같은 지구 생태계가 울부짖고 있습니다(찬미받으소서 2항).” 또 하나 교황님은 5월 성모성월을 맞이하여 전세계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묵주기도에 힘쓸 것을 각별히 당부하셨습니다.
“저는 5월 한달동안 모든 이가 가정에서 묵주기도를 드리는 아름다움을 재발견해 나가도록 제안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다 함께 바라보며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기도는 기쁨입니다. 사랑의 기도가 우리를 아름답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선물에 대한 너무나 당연한 응답이 기도요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계명을 자발적 기쁨으로 지킬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참으로 주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우리가 이미 받은 참 좋은 선물이, 보호자 진리의 성령입니다. 진리를 깨우쳐 알게 함으로 무지에서 해방시켜 주는 진리의 성령 보다 더 좋은 선물은 세상에 없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넘치도록 진리의 성령을 선물하십니다. 또 진리의 성령이 우리를 깨우쳐 자발적 기쁨으로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합니다. 주님의 간곡한 말씀이 되풀이 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그러니 사랑의 계명이 답입니다. 사랑은 추상 명사가 아니라 실천 동사입니다. 당장 사랑을 실천함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영성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富益富의 진리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계명을 지킬 때 아버지의 사랑을 받게 되고 주님도 함께 계시니 정말 영적 부자의 행복한 삶입니다.
이 모두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참 좋은 주님의 선물인 진리의 영, 보호자 성령이십니다. 성령의 은총과 함께 가는 깨달음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성령이야 말로 영혼의 영혼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성령의 알맹이가 빠지면 껍데기만 남아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헛개비 같은 헛된 삶입니다.
사랑의 성령, 진리의 영이야 말로 우리 마음의 고질적 질병인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한 치유제임을 깨닫습니다. 인생 허무와 무지에 대한 답은 사랑의 성령뿐입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인한 부단한 깨달음의 선물이요 날로 자유로워지는 삶입니다. 마음의 끝없는 허기虛氣를 채울 수 있는 분도 오직 진리의 영뿐입니다. 어제 다녀간 한 제자의 감사메시지도 고무적이었습니다. 이또한 성령의 은총입니다.
“선생님, 오랜만에 건강한 모습으로 뵈니 너무 감사했습니다. 한결같이 밝은 선생님의 미소를 뵙고 오면 삶의 때를 벗는 느낌이 들어서 참 좋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변함없이 계셔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성령의 은총으로 인한 깨달음의 여정, 자유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이런 깨달음의 기쁨, 개안開眼의 기쁨을 노래한 행복기도 다음 연입니다. 늘 고백해도 늘 새로운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이 모두가 성령의 은총입니다. 성령의 은총과 함께 가는 깨달음의 선물들입니다. 무지로 인한 몰라서 원망, 절망, 실망의 삼망입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깨달아 알면 저절로 감사, 감동, 감탄의 삼감입니다. 제1독서의 부활하신 주님의 영으로 충만한 필리포스를 보십시오. 필리포스가 그리스도를 선포하자 무지의 병은 치유되어 모두 크게 기뻐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그리하여 큰 기쁨이 넘쳤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필리포스를 통해 일으킨 사랑의 치유, 구마 이적입니다. 그대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무지의 인간들입니다. 대부분 질병이나 불행들 거의가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참으로 사랑의 성령께 마음을 활짝 개방하는 것이 무지의 병의 치유에 결정적 처방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성령의 은총이 우리를 희망의 사람으로 온유하고 공손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고난을 꾿꾿이 견뎌내게 하고 버텨내게 합니다. 다음 베드로 사도의 말씀대로 할 수 있음은 그대로 성령의 은총입니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그러나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히 대답하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선한 처신을 비방하는 자들이, 여러분을 중상하는 바로 그 일로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보다 낫습니다.”
인간의 근원적 병이 무지입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입니다. 성령의 깨달음 만이 무지에 대한 결정적 답입니다. 성령의 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사랑하게 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자발적 기쁨으로 지키게 합니다. 하여 우리는 무지에서 벗어나 기쁨의 사람, 희망의 사람, 사랑의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무지의 어둠을 몰아 내시고 성령의 빛과 생명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언제나 구원과 희망의 표징으로 저희의 길을 밝혀 주소서.
당신의 보호에 저희를 맡기오니
어려울 때에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마시고
항상 모든 위험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영화롭고 복되신 동정녀시여.”-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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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그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사랑이며 십자가에 목숨을 내놓기까지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이 시간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사랑은 일방통행일까요? 쌍방 통행일까요? 예, 좋습니다. 사랑은 일방통행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입장에서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베풀고 또 베풀었는데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것이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자식에게, 배우자에게 이웃에게 온갖 정성을 다했는데 남는 것이 없어서 그런 생각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주고받는 것, 곧 쌍방통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사랑하면 상대방이 알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든 다시 채워줄 것이고,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수고와 땀의 보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일방통행’이지만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죄가 있든 없든 개의치 않으시고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분별없이 마구 퍼주고 철없는 탕아처럼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 사랑입니다. 오히려 죄가 클수록 은총도 넘치는 사랑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용서하시고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 하시며 죄인이 잃었던 권위를 회복시켜주는 사랑입니다. 우리도 베푸는 사랑에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청하여 영원히 함께하실 보호자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안다면 우리도 주님을 사랑해야합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을 바라고 그분 계명을 지킴으로써 삶 안에서 그분을 영광스럽게 해 드려야 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감정만으로 이루어지는 정서적 사랑이 아니라 아낌없이 내어주는 행위로 이루어지는 실질적 사랑입니다. 말로 충분한 사랑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그 사람에게 좋은 것을 사랑하고, 그 사람이 바라는 것을 행하고자 하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청하여 아버지께서 보내주시는 보호자를 받아들이고 그분과 하나가 되고자 합니다.
보호자는 누구이십니까? 진리의 영이십니다. 요한복음 17장 17절에서는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영을 갈망해야 합니다. 진리의 영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삶을 체험하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진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살 때 영을 알아보게 되고, 육적으로 사는 사람은 영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고, 보호자를 만나고자 한다면 우리의 육적인 삶을 영적인 삶으로, 천상을 갈망하는 삶으로 바꿔야 합니다. 아니 천상을 여기서부터 살아야 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말합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36,26) 우리는 새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서 있다는 믿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한다고 하면서도 많은 상처를 주고 또 받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사랑의 결과입니다. 사랑을 하면서도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은 내가 이만큼 베풀었으니 너는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느냐는 보상심리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방식의 사랑으로 사랑함으로써 상대방을 소유하고 지배하며 마음속에 묶어두면 사랑을 빌미로 상처를 더해갑니다. 그러나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상대의 고유성을 인정해 주고 그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보상은 사랑입니다. 사랑함으로써 주어지는 기쁨과 평화, 보람이 이미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입니다.
우리 옛말에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설사 자식에게 업신여김을 받아도 부모는 자식을 미워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랑이란 내리 사랑이므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을 능가한다.’는 의미입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경우는 많아도 아랫사람이 윗 사람을 사랑하는 경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윗사람이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랑이 전수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지 내방식의 사랑을 고집하여 상처를 키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 일서 3장 18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14,15)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14,21)라고 하셨습니다. 인격적인 사랑은 인격의 지성, 정서, 의지에 일치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대한 인격적 사랑은 그분의 비전과 열정에 동화될 뿐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실천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기쁨, 예수님의 마음으로 모두를 사랑하는 가운데 평화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의 정신과 가르침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내적 진실은 실천하는 행동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요구를 헤아리고 그 것을 채워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도 하나 해내지 못하느냐? 이해하지 못하느냐?”하며 불평불만하지 말고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음을 기뻐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인생이 기계라면, 미움은 모래이고, 사랑은 기름입니다.” 기계에는 반드시 윤활유가 필요합니다. 우리 삶에는 사랑이 필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주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납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주님께 대한 사랑을 드러내듯 우리가 서로에게 다짐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 사랑을 증거 합니다. 약속 이행은 사랑의 증거입니다. 하느님과의 약속 배우자간의 약속, 부모와의 약속 자녀와의 약속 그리고 이웃과의 약속에 충실한 만큼 사랑을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첫 마음에로 돌아가서 서로의 관계를 회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하느님과 이웃의 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14,18)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의 영을 약속해 주셨고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오셔서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영원히 지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안에 오신 성령을 무시하고 고아처럼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결코 떠나 본 적이 없다.’네가 나를 원망하는 그 순간까지.......
“아버지의 품 안에는 아홉 자식이 있을 곳이 있지만 아홉 자식의 어느 집에도 아버지가 있을 곳은 없다.”는 말이 크게다가옵니다. 부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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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성삼위 하느님을 보여 주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16)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당신의 사명을 마치고 떠나시면, 세상에 남은 이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하실 분을 아버지께 청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호자"를 보내 주실 터인데, 그분이 곧 진리의 영, 성령이십니다.
제1독서에 그 약속이 실현되는 과정이 잘 나타납니다.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사도 8,17)
필리포스를 통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표징을 일으킵니다. 그들은 귀를 기울였고 큰 기쁨에 넘쳐 새로운 길을 받아들이지요.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에서 내려와 안수한 사도들을 통해 성령이 내리시고 그들은 온전한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납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 14,17)
성령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 자신에 대한 말씀과 흡사합니다. 아니, 일치하지요. 인간의 육을 취해 세상에 오셨던 성자 예수님과 성령이 같은 분이시니까요. 비록 우리가 다 알아들을 수 없지만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그분의 영은 하나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본 이들은 아버지를 본 것이고, 예수님을 아는 이들은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실 분, 성령께서는 예수님에 대한 앎을 강화시켜 주시고 기억을 환기시켜 주시면서 유한한 인간이 하느님과 관계를 이어가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
다시 오실 분은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다"(1베드 3,18)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인간의 육신을 입지 않으시지만, 성령으로 현존하시며 우리와 함께하실 겁니다.
율법은 사회적 약자층인 "고아"를 보호하도록 가르칩니다만, 사실 시기가 다를 뿐 언젠가는 자신을 낳아서 보살펴 준 보호자를 잃고 고아가 되는 것이 우리 모든 인간의 운명이지요. 그래서인지 예수님은 새로 오실 성령을 "보호자"라고 부르십니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20)
하느님 안에 예수님이, 예수님 안에 우리가, 또 우리 안에 예수님이... 이렇게 성삼위 하느님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의 사랑으로 엮어 주시는 사랑의 기운이시지요.
저는 오늘의 말씀에 머무르면서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느님의 관심사가 온통 "우리"라는 걸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성부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도, 성자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도, 그리고 성령께서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이유도 결국 "우리"입니다. 우리에게만 하느님이 존재 이유이고 목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도 우리가 그러한 것 같았습니다. 그만큼 사랑이신 성삼위 하느님의 오매불망 관심사는 "우리"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 부활 시기를 지내며 성령강림을 향해 나아가는 오늘,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과의 더 깊은 사랑의 일치로 초대합니다. 성 삼위 하느님 안에서 위로와 기쁨을 누리며 사랑 안에 푹 잠기시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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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부활 6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부활을 보증해주는 ‘성령’의 기쁜 삶을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 사마리아로 파견된 베드로와 요한은 안수하여 성령이 충만하게 하고, 당신 사랑을 사도들에게 체험시켜줍니다. <제2독서>에서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는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1베드 3,18)라고 선포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에 행하신 <고별담화>의 일부로, 사랑하는 제자들을 떠나면서 세 가지로 위로하시는 장면입니다.
<첫 번째> 위로는 먼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청하면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곧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주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요한 14,16-1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바로 다음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모순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성령을 아버지께서 보내주실 것이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성령이 이미 제자들 안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있기 때문이다.”(요한 14,17)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진리의 영이신 그분이 이미 우리 안에 머무르고 있기에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토록,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부활의 삶을 보증해줍니다.
<두 번째> 위로는 당신께서 아버지께 돌아가시지만,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도 역시 이어서 모순된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 돌아가셨다가 다시 오시겠다고 하시면서, 동시에 언제나 제자들 안에 현존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곧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4,1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가시면서도 현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곧 부활생명은 항상 우리 안에 살아있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어긋나는 진술은 우리에게는 모순처럼 들리지만 예수님께는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두 시간, 두 공간 속에 동시에 있을 수 없는 우리에게는 모순이지만, 부활 예수님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가 따로 없는 언제나 ‘지금’이며, 그분의 장소는 여기와 저기가 따로 없는 ‘모든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가셨지만 지금 이곳에 우리와 함께 계시고, 예수님께서는 세례 때 당신의 영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날마다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순적인 진술 속에 담긴 진리입니다. 바로 이것이 당신께서 아버지께 가시면서 사도들에게 남겨주신 선물이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당신의 선물입니다.
<세 번째> 위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그렇습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사랑의 표시”가 됩니다. 곧 말씀을 받아 믿고 간직하고 지키고 준수하는 것이 그분을 사랑한다는 표시가 됩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면,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혹 자기 자신을 지키고 있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자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따라 살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면 돈을 따라 살게 되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분명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을 따라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내 삶이 바로 지금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구를 따라 살고 있는지요? 혹 자기 자신을 따라 살고 있는지요?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혹 세상의 물질이나 명에나 권력이나 힘을 따라 살고 있다면, 그것들을 사랑하고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진정, 내가 지금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있다면, 진정 그분을 사랑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다른 그 무엇을 사랑하는 데는 자신이 스스로 사랑할 수 있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데는 반드시 ‘성령’의 도움으로만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다른 보호자”(요한 14,16)인 “진리의 영”(요한 14,17)을 보내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우리와 함께 사시고, 우리 안에 계시게.’(요한 14,17 참조) 하시어, 제자들이 당신 사랑을 지키게 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령’께서 함께 머무르시지 않으면, 결코 우리 스스로는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성령의 도움’으로 사랑하는 일은 가능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 구원의 거대한 밑그림을 그리실 때, “사랑”이란 물감으로 그 구원의 초상화를 그리셨습니다. 이 “사랑의 초상화”는 결코 입술로 하는 사랑의 고백이나, 그 어떤 감상이나 감정이나 지성으로는 그릴 수도 그려지지도 않는, 오로지 사랑을 몸소 행함으로만 그려지는 초상화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계명을 지키고 순명함으로써만 색칠되는 그림이요, 직접 사랑의 삶으로 온갖 색체를 짜내어야만 그려지는 그림입니다. 곧 ‘사랑’은 순명의 실천으로 그려지는 삶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빈 도화지 위해 우리의 사랑의 삶으로 초상화를 그려갑니다. 우리 삶의 빈 도화지 위에 꽉 찬 예수님의 초상화를 베껴 그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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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주님!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저 자신보다 당신을 앞세우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도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을 믿고 신뢰하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지키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받아 지키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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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wG1GkxzFP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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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요한 14, 17)
우리 삶의
내적, 외적
변화가 절실히
필요한 신앙의
시간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새로워지지
않고서는 결코
하느님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시는
성령의 힘이십니다.
신앙의 시간은
우리를 향한
변화의 진리를
거스를 수 없습니다.
숨은 것도
드러나게 하시며
우리의 어둠을
정화시키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우리를 올바로
보게 하십니다.
우리를 진리로
이끄십니다.
생명을 부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하느님께 속한
사람답게 살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진리의 영이시여!
이기심과 거짓으로
얼룩진 우리들을
새롭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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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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