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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동이족 부인 누조(女+累,祖)의 양잠(養蠶) 고사와 양잠시조 동이족 조상
태호복희 천제
깐쑤(감숙)의 천수시 복희묘의 태호복희.
필자는 이곳에 와서 복희 천제가 침구를 처음 시작해 침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금슬(악기)은 물론,
신농처럼 신농보다 먼저 백초를 맛보고, 양잠을 처음 시작해, 여와씨가 장려했음을 처음 알았다.
(사진은 복희묘의 본전인 무극전의 복희 소상과 태극전인 여와전의 복희소상이다.
두 개의 사진을 참고로 독자에게 모두 처음 선보인다.)
*황제헌원은 사마천에 의해 지나의 시조로 자리매김되었지만 부친은 동이족 신농과 같은 소전이며 모친은 동이족이고 부인 역시 동이족으로 동이족의 주 전공인 잠사를 장려한 여인이다.
따라서 알고 보면 황제는 지나의 시조라기보다는 동이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의 부권제 개념으로 보아도 동이족이지만, 당시는 모권제 사회였으므로 부인이 동이족이고 모친이 동이족
이었으니 당연히 동이족이다.
전욱고양은 말할 것도 없이 동이족이지만 사마천이 화하의 시조로 내세운 황제마저 산동성의 수구에서 백의
민족(백민)으로 태어났음을 밝히고 있는 바다.
수세기에 걸친 부권에서 모권사회의 대립을 통해 지나족의 시조로 일컬어지고 있는 동방족의 후예 황제헌원이
서방족의 모권사회 속에 데릴사위의 형태로 흡수되어 들어간다.
이를 증명하는 기록이 「사기 5제 본기」의 '황제는 소전의 아들(黃帝者 少典之子)이라는 대목과
동기록 '황보익이 말하되 황제는 수구에서 태어나서 희수(姬水)에서 성장하였으며 헌원에서 거주했다'라는 대목,
그리고 「제계사기」의 '황제는 백민(白民)으로 태어나서 스스로 동이에 속했다(自屬東夷)'는 대목,
황제는 백민 출신으로 동이에 속한다는(黃帝生於白民...自屬東夷:『楚史』) 초사(楚史)의 대목이다.
하필 초사(楚史)에 이 대목이 나오는 이유는 굴원이 고백했듯이 초나라는 동이족의 나라이며
황제는 동이족 혈통이기 때문이다.
사마천의 「사기」『5제본기』에 3 황 5 제시대가 5 백 년인데, 황제는 100여 년 재위했으며 황제는 유웅국(有熊國) 소전(少田)의 아들로 소전은 인명이 아니라 (환웅국의) "제후국 이름"이라 하였다.
「한서(漢書)」 <왕망전>에 왕망은 전한을 찬탈한 뒤 고구려를 폄하해서 하구려(下句驪)라 했다.
후한 광무제에게 망한 그들 일족이 평소 냉대하고 박대한 고구려로 가지 못하고 바다 건너 가야, 신라로 간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서량지는 고구려의 고(高)가 높고 낮음의 고(高)가 아니라 그 선조가 제곡고신(高辛)씨였기 때문에 이를 상징하는 성씨라 말하고 있다.
사마천 사기는 요가 고구려 혈통의 조상인 제곡의 아들이라 한다.
그런데 요의 어머니는 동이족인 염제족의 진봉(陳鋒)씨 규수 경도(慶都)다. 물론 지나족은 이를 염황부족연맹이라는 명분으로 살짝 다리걸치기를 하여 그 뿌리의 진상을 호도하고 있지만 이쯤되면 지나족의 이상세계의 주인공
으로 만든 요 마저 동이족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는 이미 지나사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듯이 부계사회로 진입해 있는 상황에서 요가 둥지를 튼 지금의 산서성 서쪽의 임분 지역은 낙후된 서부내륙에 속해 모권제를 이어나가고 있었으므로 모권제 계승으로 그 부족연맹의 정통성 아이덴티티를 봐야 하는데 보다시피 진봉씨의 경도는 지나사가도 이구동성으로 밝히고 있듯이 이미 동이족인 염제족이다.
지나사가가 말하는 바, "요의 부친 제곡은 황제의 4세손, 모친 경도는 염제의 7세손녀로 제요의 몸에는 이미 염제의 혈액이 담겨 있으며, 황제의 혈액이 담겨있으니 가히 염황자손의 첫 시조라 이를 수 있다."
또 부권제로 본다 해도 바로 고구려의 맥이 그렇듯이 요의 부친이 동이족인 전욱고양의 혈맥을 탄 제곡고신이다.
하여 엎어치나 메치나 모권제가 되었든 부권제가 되었든 요의 종족적인 혈맥의 정체성은 바로 다름아닌 동이족
이다.
그럼 이러한 요를 지나사가들은 왜 지나족의 뿌리로 삼으려 했으며 지나족이 이상세계로 둔갑시킨 요순세계의
주인공으로 화했을까.
그건 모두 공자가 만든 짓이다.
공자가 만든 것을 맹자가 재확인해 주었고 사마천이 25사로 정통성을 주었다.
사마천은 누군가?
간단히 말해 서슬퍼런 한(漢)무제 아래서 한(漢)족의 정통성을 세우려 보니, 한족의 뿌리는 대륙사에 없으니까
경학을 찾게 되었고, 사서오경, 사서삼경에 공자가 이미 만들어 놓은 요순의 이상적 치세를 가져다가 개칠을 한
것이다.
공자는 춘추를 쓰면서 한 말이 있다.
나를 아는자는 그 오직 춘추뿐이구나! 나를 벌 줄 자도 오직 춘추 뿐이로다!
이 말은 맹자가 밝힌 말(등문공하)이지만 공자는 216 건지책(乾之策) 144곤지책(坤之策) 360일 정역(正易)을
말한 성인으로 후천 세상이 올 것까지 내다본 사람이다.
그러한 그지만 한민족의 핏줄을 견지한 그를 한민족 동이 겨레의 민족사관적인 차원에서 보면 반민족적인
이단아로밖에는 보아주지 않을 수가 없다.
나를 벌 줄 자도 오직 춘추라고 한 말은 노나라를 중심으로 해서 존주 사대주의를 대륙에 뿌리박고 정작 그 주인
되는 동이족을 야만족화 했으니 그 죄악이 천지에 창일하지 않을 수 없다.
대륙의 중심민족을 주나라로 보고 영적인 중심세계는 그 뿌리되는 동이족이 아니라 바로 노나라라는 시각의 화화
사관은 이렇게 형성되었으니 한민족에게는 참으로 무서운 어둠과 질곡의 역사-공자사관의 노예로 전락한 사대주의 시대를 공자가 선물했던 것이다.
공자는 먼 훗날 후천개벽 심판때 그의 죄악이 심판되는 것까지 내다 본 것이 확실하다 하겠다.
맹자는 공자가 고백한 고뇌어린 이말을 그대로 전해 역사에 역사심판의 증거로 남겨두었다.
당시 춘추시대는 군웅할거의 무법천지세계로 세상이 아주 혼란해 군사부의 법도가 아주 엉망인 세계였다.
공자는 수 없이 명멸하는 군주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춘추를 쓸적에 그 전적의 래원(來源)이 모두 동이족에서 기원하는 문서로부터 가치관을 빌어와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황제를 가름질하고 요순을 가름질하여 동이족으로부터 분리해냈다.
사마천이 이를 받아서 다시 가름질하였으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공자도 그 근본은 어떻게 속일 수 없어 나의 죄를 춘추만은 알고있다 고백한 것이고 그 뒤 후세의 양심있는 사가들은 그나마 그와 어느정도 타협하여 사기의 주석인 색은에 그 이면을 적은 것이며 그것이 바로 염황부족연맹이며 또한 동이혈통이었다는 기록이다.
「사기오제본기」에 고신의 제위 하의 수도인 박(높을고 밑에 터럭 모:박은 殷의 수도이기도 하다)에 대해 황보밀(皇甫謐)의 말을 인용한 집해(集解)에서 지금의 하남(河南) 언사현(偃師縣)이라 말하고 있다.
「제왕세기」에 "제곡은 70년 재위하여 105세에 붕했다. 동군돈구(東郡頓丘) 광양리(廣陽里)에 장사지냈다."고
나온다.
또 「산해경(山海經)」<대황남경>을 보면 "제요, 제곡, 제순을 악산(岳山)에 장사지냈다."고 나온다.
황람(皇覽)의 말을 인용한 「역사(繹史)」에는 "제곡의 무덤이 동군(東郡) 복양(물수+ 僕陽) 돈구(頓丘) 성남(城南) 대음(臺陰)의 들판에 있다."고 했다.
돈구는 지금의 하남(河南) 준현(濬縣) 서쪽으로 고신, 전욱고양의 무덤이 서로 인접한 장지다.
(是高辛高陽葬地正相隣接) 「산해경(山海經)」
<대황북경>을 보면 "대황(大荒)의 한 가운데 황하의 사이에 부우(附 )산이 있는데 전욱 임금과 아홉 명의 후궁을 이 곳에 장사지냈다"고 했다
황제의 동이족 부인 누조(女+累,祖)의 양잠(養蠶) 고사
<필자가 2002년 8월 섬서성 황릉 현지에서 채취한 향토사료 국내 최초 공개>
타계한지 얼마 안되는 중국의 갑골문 고고학자 낙빈기는 「금문신고(金文新攷)」에서 황제의 부인 누조의 실체에 대해 황제와 치우의 싸움의 본질을 밝히면서 기존의 지나사학자의 주장과는 전혀 다르게 다음과 같이 파격적으로 말한다.
-결국 신농은 황제에게 패해 임금자리를 내놓게 되는데 이에 신농의 어머니계 군주인 치우가 지금의 탁록( 鹿)
에서 황제와 수년간 전쟁을 벌인다.
그래서인지 황제는 임금자리에 앉지 못하고 아들인 소호금천(기원전2474-2468)이 제위를 잇는다. -
여기서 신농은 염제신농이 아니고 염제국의 말왕인 염제 유망인 줄은 이제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필자는 낙빈기가 말하는 이 대목이 아주 쓸모있는 대목이라 생각한다.
왜냐면 기존의 학자들은 치우가 황제에게 패했다 왜곡하고 있지만 낙빈기는 환단고기의 기록대로 치우에게 패해
역사에서는 동이족으로 더 많이 어필된 아들 소호에게 제위를 넘기고 도망간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마융과 훈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정현은 「사기」<오제본기> 황제편에서 치우가 천하를 제패했음을 말한다.(鄭玄云 蚩尤也覇天下)
치우천왕과 황제의 전쟁에 대한 진실은 환단고기에도 정확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낙빈기가 지목하는 이 대목은
황제의 딸 한발(旱魃) 과 관련한 다음의 전설에서도 그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극심한 가뭄을 일컬어 한발이라 한다.
한발의 발(魃)은 여신의 이름으로 그녀는 전설에 따르면 황제(黃帝)의 딸로서 몸은 이글거리는 용광로와 같았다
한다.
당시 황제와 대권다툼을 하던 동방의 천제 중에 치우가 있었는데 짙은 안개를 일으켜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유인
하여 죽이곤 했다.
황제는 치우가 용의 울음소리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응룡과 신룡을 불러 대비코자 했다.
그러나 응룡과 신룡이 조화를 부르기도 전에, 치우는 선수를 쳐서 풍백(風伯)과 우사(雨師)로 하여금 폭풍우를
일으켰다.
황제의 군대는 궤멸되고 말았다.
황제는 딸을 불렀다.
용광로와 같았던 여신 발(魃)이 나타나자 폭풍우는 그쳤지만 그러나 폭풍우를 잠재우느라 기진맥진한 발은 기진
맥진하여 인간 세상에 머물고 말았다.
그녀가 머무는 곳은 용광로처럼 뜨거워 산천초목이 말라죽고 식수가 고갈되었다.
그녀가 나타나는 곳마다 비 한방울을 구경할 수 없었으므로 사람들을 그녀를 한발이라 하며 미워했다.
이에 아버지는 딸에게 적수(赤水) 이북에만 살도록 엄명을 내렸다.
그러나 방랑벽이 있었던 그녀는 이곳 저곳을 기웃거렸다.
사람들은 적수쪽으로 도랑을 파놓고 기도를 올렸다.."당신 집으로 어서 가주세요." 사람들의 기도를 들은 한발은
미안하여 사라지곤 했다 한다.-
그러나 이와같이 치우천왕에게 패한 황제의 전설 일화는 무슨이유에서인지 후일 우임금때 쓰여진
「산해경(山海經)」에서 황제와 맞선 형천(刑天)과 과보의 일화를 말하면서 바꿔치기되고 만다.
*「산해경(山海經)」 해외서경(海外西經) 편에, 形天與帝至此爭神, 帝斷其首, 葬之常羊之山…형천은 황제와
이곳에 이르러 신의 자리를 두고 싸움을 했다. 황제는 그의 머리를 잘라 상양산에 묻었다
*山海經復涉 (자랑할 과誇에서 말씀언 뺀 글자 과父謂應龍(黃帝神龍)已殺蚩尤又殺誇父, (大荒北經), 應龍殺蚩尤與 誇父, (大荒東經), 誇父者, 大荒北經云, 后土生信, 信生誇 父. 而海內經謂后土爲炎帝之裔, 是誇父亦炎帝之裔也.
(과장할 과(誇)에서 말씀언을 삭제하면 자랑할 과이고 어버이 부는 보로 읽는다 글자 지원이 부족해 자랑할 과
대신 과장할 과誇로 쓴다)
-산해경 과보(誇父)편에 의하면, 응용은 황제의 신룡(神龍)인데 치우(蚩尤)를 죽였으며 또한 과보(誇父)도 죽였다고 적고 있다.
대황북경에서는 응용이 치우와 과보를 죽였다.
대황동경에서는, 과보(誇父)는 대황북경에서 이르기를, 후토가 신을 낳고, 신이 과보를 낳았다.
해내경(海內經)에 의하면, 후토는 염제(炎帝)의 후손인데, 이에 과보 역시 염제의 후손이다.
*在黃帝與蚩尤之戰中,誇父自亦當參加蚩尤戰團, 因而始相繼爲應龍所殺蚩尤與 父喪亡後, 乃又有刑天舞其干戚, 與帝爭神. 刑天者炎帝之臣, 或亦炎帝之後也.… 則刑天者, 亦猶蚩尤誇父, 奮起而爲炎帝復仇, 以與黃帝抗爭者也.
-황제와 치우의 전쟁 중에 과보는 스스로 치우의 전단에 참가했다.
인해 처음과 서로 연결한다면, 응용이 치우와 과부를 죽여 장사지내고 난 후에 또다시 형천이란 자가 있어 방패와 도끼를 휘두르며 제왕과 신의 자리를 두고 싸우려 했다.
형천은 염제의 신하라고도 했고, 염제의 후손이라고도 했다.…
즉 형천은 치우와 과보와 같이 염제의 원수를 갚고자 떨치고 일어나, 황제와 맞서 싸운 자이다.
낙빈기가 해석하는 혈통 계보를 보면 다음과 같다.
황제는 신농의 모일급 정비가 낳은 딸 누조( 祖)와 결혼한 신농의 큰 사위고, 소호금천은 신농의 자일급차비가
낳은 딸 소진(小辰)에게 장가든 작은 사위다.
낙빈기가 바라보는 세계는 부권제가 아닌 모권제이므로 외가의 권력이 황제를 좌우한 것으로 본다.
황제가 도망가고 아들 소호가 제위를 잇자 신농계열에서는 소위 "구려(九黎)의 난"이 일어나 7년 만에 소호는
제위를 신농의 손자이자 황제의 외손자인 전욱고양에게 넘긴다.
* 동이족은 상고시대부터 양잠을 시작해 각 시대의 조정에서 왕비들이 양잠의 책임자로 백성들의 양잠을 솔선 수범해 왔다.
특히 가장 저명한 것이 양자강 유역의 동이 9려(黎) 족(래이족)과 동이 묘족의 양잠은 아주 유명하여 그 전통이 지금의 항주 소주 인근에 아직 남아 대륙의 특산품이 되고 있다.
그럼 누가 양잠을 처음 시작했는가?
이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이에 대해 국내에서는 아직 상고사학으로 끌어올릴 사료는 없다.
다만 환단고기나 단기고사 등에 환웅시대의 잠사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우리민족이 잠사를 하는 것이 아주 당연한 듯이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태호복희가 태어난 감숙성 성기(成紀)- 곧 지금의 천수(天水)시 복희 사당에 들르면 다음과 같이 복희가
누에를 가르쳤으며 복희가 사람들에게 잠사와 실을 잣는 섬유식물 사용을 가르치고, 사람에게 잠사를 가르쳤다는 글을 만날 수 있다.
《路史汲記·(羅注引<星圖要覽>)》 云(노사급기 나주에 성도요람을 인용해 말하기를), 伏羲氏化蠶(복희가 누에를 가르쳤다) 上羅注引
<白氏帖> 云(나주를 인용해 "백씨첩"이 이르기를) "伏羲化布 敎人用蠶絲 植物纖維紡線(복희가 사람들에게 잠사와 실을 잣는 섬유식물 사용을 가르치고) *網織布 縫衣著裝 使人們抵禦寒冷的能力有了大提高(천을 짜 옷을 봉제해 꾸며입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추위를 막는 능력을 제고시켰다)
다시 말해 양잠은 바로 동이족의 조상이신 태호복희때부터 시작했으니 바로 배달국 환웅시대부터 시작했음을 확실히 하고 있는 셈이다.
동이족은 상고시대부터 양잠을 시작해 각 시대의 조정에서 왕비들이 양잠의 책임자로 백성들의 양잠을 솔선 수범해 왔다.(환단고기 참조 요)
특히 가장 저명한 것이 양자강 유역의 동이 9려(黎) 족(래이족)과 동이 묘족의 양잠은 아주 유명하여 그 전통이 지금의 항주 소주 인근에 아직 남아 대륙의 특산품이 되고 있다.
특히 치우천왕의 묘예인 동이 묘족은 지금도 화려하게 수놓은 비단을 전통적으로 입어오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지나의 양심있는 학자 임혜상은 대륙의 모든 실크는 양자강 유역의 동이 제 족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주나라때에도 이들 동이족이 궁중의 모든 비단을 공급했으며 심지어 서역으로 향하는 실크로드를 개척한 주인공도 바로 그 실은 동이족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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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1.양자강 중류 호남성 동정호 주변 4대문명보다 앞선 양자강 문명 발굴
2.벼농사와 밀접한 관련, 최초 문명의 양자강
3.양자강의 도작문화 유적지
상기 1,2,3번을 읽으면, 최초의 벼농사 지역인 동이 제 족의 상고대륙사의 유적지에 대해 한반도를 제끼고 일본
야요이 문화의 직접적인 뿌리로 이어보려는 일본상고사학계의 고심을 이해할 수 있으며 반대로 대륙고고학으로
광역화된 일본 고고학계의 거시적인 학문태도와는 달리 해방이후 지금까지 반도고고학에 머물고 있는 한국
강단사학계의 한심한 실정을 다시한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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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족은 지나족이 황별의 시조로 내세운 황제헌원의 부인과 관련된 양잠고사를 내세워 마치 양잠이 지나족에
의해 시작된 것 인양 오도하려 하고 있지만 다음의 황제헌원 부인 동이족 누조의 양잠고사는 역설적으로 동이족의 면면한 양잠의 역사를 각인해 줄 뿐이다.
참고로 황제는 4인의 여자가 있는데 정실부인은 누조(女+累,祖)로 동이족 후손답게 근로 총명하고 양잠을 가르치고 직조제의했다하며 후인이 "先蠶娘娘"이라 불렀다 하며
나머지 3인은 방뢰(方雷), 동어(丹+터럭삼,魚), 모모(女+莫,母)다. 모모(女+莫,母)는 장상(長相)이고 가장 추했으나 심지가 선량하고 가장 현덕했다 한다.
자식은 모두 25인으로 14인이 새 성씨를 가졌다.
황제는 어머니는 서교(西橋)씨의 여자인 부보(附寶)로 부보는 24개월만에 황제를 낳은 것으로 사료상 되어 있으나 역시 신비화하기 위해 왜곡된 것이다.
(복희 고향 감숙성 성기-천수시 진성구 복희묘 본전인 무극전 전경. 향로에 태호궁이라 써있다.)
* 참고 : 복희씨로부터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옥저 및 춘추전국 등 고대국가 형성도
(by 성수록 2024. 11. 4. 에서 발취)
양잠의 기원은 어느때인가?
지나 대륙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누에치기 양잠, 고치를 켜 실을 뽑는 소사( 絲), 비단을 짜는 직주(織綢)를 시작한 곳으로 임혜상을 비롯한 대부분의 지나사가도 그 주인공은 바로 동이 제 족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양잠의 기원에 대한 지나 사가들의 관점은 일시에 해결하기 어려운 허다한 관점이 존재한다.
우선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잠사에 관한 기록을 모두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단군은 하염없이 맨손으로 고요히 앉아서도 세상을 평정하고 깊고 묘한 도를 익혀 여러 생령들을 두루 교화하였다. 팽우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기성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 나을에게는 호적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희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 하고, 우에게는 군대를 관장하게 하였다.
비서갑의 하백녀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누에치기를 장려케 하니 순방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환단고기 삼성기 전 상편 三聖記 全 上篇 안함로 지음)
*병진(BC,425)년, 주나라 고임금(BC,440-425)때 나라 이름을 대부여라고 바꾸고 백악으로부터 또 장당경으로
옮겼다.
이에 팔조를 법으로 하고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일과로 하며 하늘에 제사지냄을 종교로 하고 누에기르기에 힘쓰도록 하였다.(환단고기 삼성기 전 상편 三聖記 全 上篇 안함로 지음)
*경자 93년(BC 2241) 단군께서 버들궁전에 계셨는데 흙계단이 저절로 생겼고 풀숲은 없어지지 않으니 박달나무
무성한 그늘에서 곰 호랑이와 더불어 노닐며 소와 양이 크는 것을 보셨다.
도랑을 파고 밭길을 내고 누에를 치도록 권장하며 고기잡이를 가르치니 백성들은 남는 물건을 나라 살림에 보태
었다.(환단고기 단군세기)
*2세단군 부루 재위 58년 신축 원년(BC 2240) 단제께서는 어질면서 다복하셔서 재물을 저장하니 크게 풍부하였으며, 백성과 더불어 산업을 다스리시니 한사람도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는 자가 없었다.
봄 가을로 나라 안을 두루 살펴보시고는 하늘에 제를 올려 예를 다하였다. 여러 왕들의 잘잘못을 살피시고 상벌을 신중히 하였으며 도랑을 파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며 농사 짓고 뽕나무 심을 것을 권장하였다.
또 기숙사를 설치하여 학문을 일으키니 문화는 크게 진보하여 그 명성이 날로 떨쳐졌다.(환단고기 단군세기)
지나 대륙에는 동이족에 관련한 많은 기록을 인멸해 그 기록은 앞으로도 계속 찾아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지나 대륙에서 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바로 가장 널리 유행하고, 가장 크게 영향을 준 한 가지 논점은 황제의
동이족 부인 누조( 祖)가 양잠의 시조라는 설이다.
*참고:전욱고양은 말할 것도 없이 동이족이지만 사마천이 화하의 시조로 내세운 황제마저 산동성의 수구에서 백의 민족(백민)으로 태어났음을 밝히고 있는 바다.
수세기에 걸친 부권에서 모권사회의 대립을 통해 지나족의 시조로 일컬어지고 있는 동방족의 후예 황제헌원이 서방족의 모권사회 속에 데릴사위의 형태로 흡수되어 들어간다.
이를 증명하는 기록이
「사기 5제 본기」의 '황제는 소전의 아들(黃帝者 少典之子)이라는 대목과
동기록 '황보익이 말하되 황제는 수구에서 태어나서 희수(姬水)에서 성장하였으며 헌원에서 거주했다'라는 대목,
그리고 「제계사기」의 '황제는 백민(白民)으로 태어나서 스스로 동이에 속했다(自屬東夷)'는 대목,
황제는 백민 출신으로 동이에 속한다는(黃帝生於白民...自屬東夷:『楚史』) 대목이다.
사마천의 「사기」『5제본기』에 3 황 5 제시대가 5 백 년인데, 황제는 100여 년 재위했으며 황제는 유웅국(有熊國) 소전(少田)의 아들로 소전은 인명이 아니라 (환웅국의) "제후국 이름"이라 하였다.
누조는 전설 가운데 북방부락의 수령인 황제 헌원(기원전 2550년)의 원비(元妃)다.
황제가 북방부락의 수령이라 표현하는 것만 보아도 황제가 자신의 고향인 산동성 곡부 부근을 떠난 수령이라는
점에서 치우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물러났음은 확실하다.
「수서(隋書)」<예의지(禮儀志)>에 기재된 바에 따르면, 북주(北周:557-581)는 누조를
"선잠(先蠶)" 즉 누에치기를 시작한 신으로 모셨다.
「통감외기(通鑒外紀)」에 기재하기를, "서릉(西陵)씨의 자녀 누조( 祖)가 제(帝)의 비(妃)가 되어, 백성에게 누에를 기르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명주실을 관리해 의복 제조에 이바지했다."
「로사(路史)」에 칭하기를:"복희가 누에를 치고, 서릉(西陵) 씨가 양잠을 시작했다.
그러므로 「회남잠경(淮南蠶經)」에 이르기를, '서릉(西陵)씨가 누에농사(蠶稼)를 권장하고, 친히 누에치기를 시작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송(宋), 원(元) 이후 성행하기 시작했다.
20세기 50년대까지 쭉 지나의 양잠 기원 문제에 대한 유관 문헌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찬동할 만 해서 많이 인용,
서술되었다.
1926년, 고고학자들은 산서성 하현(夏縣) 서양촌(西陽村) 신석기 시대 유적지에서 아주 잘 정리된 반쪽의 잠충
(蠶 :누에풀,고치)을 발굴했다.
이는 세계 학술계의 지대한 흥미를 끌었다.
사람들은 이 반쪽의 잠충(蠶 )을 누조( 祖)가 잠사를 시작했다는 설과 더불어 상호 인증(印證)하고, 이로 말미암아 앙소(仰韶) 문화시기의 황하유역에 양잠업이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50년대로부터 사학계의 적지 않은 사람이 누조( 祖)가 잠사를 시작했다는 설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의 주요이유는 이 설법이 출현한 것이 비교적 늦다는 이유에서였다.
「사기(史記)」에는 비록 황제가 동이족 서릉(西陵)씨의 여식 누조( 祖)에게 장가들어 처를 삼았다고 나오고
있으나, 누조가 잠사를 시작했다는 설명은 없으니, 가히 한초(漢初)에는 아직 이러한 설법이 출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로사(路史)」가운데 사용한 「회남(왕)잠경(淮南(王)蠶經)」은 일반인이 위서(僞書)로 여기고 있다.
비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주(北周)는 누조( 祖)를 잠사의 시조로 존경했는데, 단 이 이전의 북제(北齊:550-577)도 일찍이 황제(黃帝)를 잠사를 시작한 신으로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동시에, 산서성 하현(夏縣) 서양촌(西陽村)의 반쪽의 잠충(蠶 )이 던지는 의문점에 대해 약간의 고고학자들은 이의 발굴이 당대의 것이 아님에 기대어, 대개 이는 하나라 가마솥인 "하내(夏 )"의 예와 같이 후세에 혼입해 들어간 물건으로 보고있어, "화북 황토지대 신석기 시대 유적지의 문화층 가운데서 나온 잠사(蠶絲)의 재질은 그와 같이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기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신석기 시대에 무슨 예리한 칼끝 같은 도구가 있어서 그같이 예리하게 분할해 자를 수 있겠으며, 아울러 극히 정교하고 가지런한 가장자리를 만들 수 있었겠는가?(「아국고대잠상사주적역사(我國古代蠶桑絲綢的歷史)」)
「문물(文物)」 1972년 2호를 보면, 이러한 이의와 질의가 비록 아주 많은 지지자를 얻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륙 내 유관 연구자의 찬동은 없다.
사람들은 누조가 잠사를 시작했다는 "누조시잠설( 祖始蠶說)"이, 비록 후세인이 추측해 만들어 넣은 것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기는 하나, 일찍이 황제시대에 양잠업이 이미 있었다는 사실은 가히 믿을 만 한 것이라 여기고 있다.
자못 권위를 갖춘 「중국방직과학기술사(고대부분)」(진유직(陳維稷) 주편(主編) 과학출판사 1984)는 이러한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하나라 가마솥인 "하내(夏 )"의 의견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반박하는 글을 발표했다.
일인(日人)학자 포목순랑(布目順郞)이 인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강우량이 극히 적은 황토고원에 있어 잠충(蠶 )은 4,5천 년 이상 완전한 보존이 가능한데, 그는 당시 사람이 사용하던 생산공구를 본뜬 모의 공구-엷은 석편과 골편을 이용해 시험을 진행한 결과, 절개된 잠충(蠶 )의 절개부위가 확실히 곧고 정교하게 절개됨을 확인했다.
별도로 50년대 이래로 장강(長江:양자강) 하류지구에서, 일 계열의 신석기 시대 유적지 발굴은 양잠기원의 논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1958년, 절강(浙江) 오흥(吳興) 전산양(錢山 ) 유적지에서 실로 짠 제품이 발굴되었는데 감정결과 그 절대 연대가 지금으로부터 4,5천 년 전 것으로 밝혀졌고, 1963년, 강소(江蘇) 오강(吳江) 매언(梅堰)
유적지에서 누에무늬(蠶紋)의 장식이 그려진 흑도기가 발굴되었고, 1977년, 절강(浙江) 여요(余姚) 하모도(河姆渡) 유적지에서 방직공구 세트들과 잠문(蠶紋)과 편직문(編織紋) 장식의 작은 어금니 조각 그릇(牙彫小 )이 출토되었다.(지금으로부터 6000년 전)
많은 학자들은 잠문(蠶紋) 장식 도자기와 이러한 아조(牙雕)의 출현이, 당시 인류가 잠사의 인식정도에 대해 인류와 잠사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표명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데, 잠문(蠶紋)과 편직문(編織紋)에서 방직공구의 출토는 방직에 있어 잠사의 응용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발굴을 종합해 보면, 대륙의 동남지구(양자강 하류) 역시 양잠업의 일개 발상지라 할 수 있으며, 이곳에서 양잠을 개시한 시대는 심지어 아주 오래 전 전설중의 황제헌원과 누조가 대표하는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듯이 절강성 지구(춘추시대의 월나라)의 고대문화는 중원보다 낙후되어 전산양
(錢山 ) 유적지 하층은 여러 시대의 유물을 포괄할 가능성이 있는데, 심지어 부분적으로 섞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처럼 보는 것은, 당시 전산양(錢山 ) 고고학 발굴에 참가한 학자들은, 발굴과정에 진행된 사실에 대해 언급하기를, 기본적으로 뒤섞였을 가능성을 아예 처음부터 배제했다고 회고해 인정한다.
그러나 이를 회고한 시간과 발굴시간과의 차이가 비교적 긴 것으로 말미암아, 어느 세부적인 마디 구분을 확정적으로 판정하기에는 곤란함이 있다.
또 사람들이 인정하듯이, 전산양(錢山 ) 지구에서 출토된 사직물(絲織物)에 사용된 섬유는 항상 집에서 양잠한 섬유가 아니고, 떡갈나무(상수리나무) 잠사 등 등 야생잠사도 있다고 인정한다.
방직계에 관련된 인원이 석포(石脯) 절편과 현미경으로 투영해 보는 방법을 사용해 전산양(錢山 )에서 출토된 견직물 조각을 거듭 새로 감정하니 그들이 확실히 집에서 인공 양육된 잠사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그들은 출토된 견직물 조각이 아주 적은 이유로 인해서 탄화과정이 아주 심해 분석작업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인정했다.
이외에, 하모도 유적지 등지에서 출토된 기물상의 무늬장식 연구는 필경 누에가 아니면 기타 곤충의 형상이라는
한결같지 않은 의견이 존재하고 있다.
임혜상이 양자강의 비옥한 동이 9족의 나라에서 실크를 처음 재배했음을 전하고 있듯이 고구려의 10월 동맹(東盟) 제천행사에서는 모든 사람의 의복이 비단에 수놓은 옷을 입고 금, 은으로 장식한다 했다.(「삼국지」<고구려전>)
또 당(唐)의 영호덕분(令狐德 ) 등이 찬(撰)한 「주서(周書)」 <고려전>에는 장성한 남자의 관(冠)은 골소(骨蘇)라 부르는데, 대부분 자색의 얇은 비단으로 만들며 금은을 섞어 만든다(多以紫羅爲之 雜以金銀爲飾) 하고 세금부과는 명주와 베 곡식으로 한다(賦稅則絹布及粟) 하였다.
"래이(萊夷:동이 9夷의 하나)는 목축을 했으며, 공물 광주리에는 산뽕나무 실이로다.(闕 絲)"(우공) "래이는 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래산(萊山)의 이(夷)다.
제나라에 래후(萊侯)란 관직이 있으니 래인은 곧 지금의 래주의 땅(산동, 강소) 출신이다.
목축을 한다는 것은 가히 방목함을 말하는 것이니, 이(夷) 인은 목축업을 생업으로 삼았다.
산뽕나무는 뽕나무이니 산뽕나무의 실은 질겨서 거문고, 가야금의 현으로 사용된다.
소(蘇) 씨가 말하기를 생각건대 동쪽의 래(萊)에 이 실이 있어서 그림 있는 비단이 되며 그 견고하고 질김이 이상
하여 래인은 이를 일러 '산누에고치'라 부른다."(채주)
우공(禹貢)에 "기주(冀州)......조이피복(鳥夷皮服)"이라 하였고, 「채주(蔡註)」에 "해곡(海曲)을 섬(島)이라 하고, 해도(海島)에는 이(夷)가 사니, 가죽옷으로 공물을 바친다."했다.
「상서」<금고문 주소(注疏)>에 "사가 사마천이 도(島)를 조(鳥:새 조, 땅이름 작, 섬 도=해곡(海曲)이라는 뜻이
있다.)로 바꾸었으니,
마융(馬融)이 가로대 조이(鳥夷)국 정(鄭:정강성으로 불리는 정현이 스스로 동이족의 하나인 조이족이라 고백)씨가 말하기를 조이(鳥夷)는 타고날 때부터 새와 짐승을 먹는 동북의 백성이라 했다."
「우공(禹貢)」에 "양주(揚州).....도이(島夷)는 풀로 짠 옷을 입으니, 공물바구니인 대나무 광주리에는 무늬비단
(織貝), 공물 보따리에는 귤, 유자, 가는 삼베"라 했고,
「채주(蔡註)」에 "도이(島夷)는 동 남해의 섬에 훼초(卉草)로 사는 이(夷)이다....치패(織貝:무늬비단), 금(錦:비단)이 뛰어난데, 무늬비단이 돈(貝文)이 되었으니 시(詩)에 이른 패금(貝錦)이 이것이다.
지금도 남이(南夷)의 목면(木棉:면화)은 만듦새가 정밀하고 좋으니 또한 이를 일러 길패(吉貝)라 한다.
해도(海島)의 이(夷)는 초목을 입고 조공을 바치니, 만듦새가 정밀한 무늬비단(織貝)을 광주리에 넣어온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복희가 누에를 가르쳤으며 복희가 사람들에게 잠사와 실을 잣는 섬유식물 사용을
가르치고, 사람에게 잠사를 가르쳤다는 다음의 기록을 가장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다.
-《路史汲記·(羅注引<星圖要覽>)》 云(노사급기 나주에 성도요람을 인용해 말하기를),
伏羲氏化蠶(복희가 누에를 가르쳤다)
上羅注引 <白氏帖> 云(나주를 인용해 "백씨첩"이 이르기를)
"伏羲化布 敎人用蠶絲 植物纖維紡線(복희가 사람들에게 잠사와 실을 잣는 섬유식물 사용을 가르치고)
*網織布 縫衣著裝 使人們抵禦寒冷的能力有了大提高(천을 짜 옷을 봉제해 꾸며입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추위를
막는 능력을 제고시켰다)
다시 말해 양잠은 바로 동이족의 조상이신 태호복희때부터 시작했으니 바로 배달국 환웅시대부터 시작했음을
확실히 하고 있는 셈이다.
양잠으로 옷감을 만들어 옷입는 것을 개선하다
(출처 ; 작성자 엄택곡부 블로그 . 안원전 글을 일부 편집하였습니다.)
신라는 비단 생산국이다.
유양잡조전집(酉陽雜俎前集) 속집(續集) 권1 본문 113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新羅國有第一貴族金哥其遠祖名旁㐌. 有第一人甚有家財其兄旁㐌. 因分居乞衣食國人有與其隙地一묘
乃求蠶穀種於弟弟蒸而與之㐌不知也. 至蠶時有一蠶生焉. 目長寸餘居旬大如牛食數樹葉不足其弟知之.
伺間殺其蠶經曰四方百里內蠶飛集其家國人謂之巨蠶意其蠶之王也…』
신라의 제일 귀족에 김가(金哥)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먼 조상은 방이(芳㐌)이다. 그는 집의 재산에 대한 악착같기가 제일이라고 할만했다.
그 형은 방이로 인해 집에서 나가 걸식을 했다.
나라사람들이 남아도는 땅 1두를 주었다.
이에 동생에게서 누에와 곡식의 종자를 구했다.
동생은 쪄서 그에게 주었는데 방이는 이를 알지 못했다.
누에 칠 때가 되어 누에 한 마리가 살아났다.
눈 길이가 1촌쯤 되고 열흘쯤 되자 소처럼 커져 나뭇잎을 수없이 먹어치워도 부족했다.
그 동생이 이를 알고 그 누에를 죽일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날이 지날수록 사방 백리 안에 있는 누에들이 그 집으로 날아들었다.
나라사람들은 그를 거잠(巨蠶)이라 일컬었다. 누에의 왕이라는 뜻이다.
◇ 유양잡조전집(酉陽雜俎前集)은 당태종(唐太宗) 때 태상(太常)으로 있던 하성식(叚成式)이 지은 책으로
총 44권으로 되어있다.
이 글은 제1권 지낙고상(支諾皐上)편에 실려 있는데, 신라가 비단국이 된 비사(秘史)라고 할 수 있다.
신라는 비단을 짜서 서역과의 교역을 주도한 나라이다.
실크로드를 열었던 나라가 바로 신라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오직 비단국(Serica) 신라(Sina)만이 중원 대륙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