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바다, 사하라 / 강표성
오랜 꿈은 스스로 길을 만든다.
사막, 그것도 사하라라는 말에 마음은 이미 북아프리카로 날아올랐다. 모로코의 카사블랑카를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하고 차에 탔다. 하루 이틀, 갈수록 사월의 초록은 멀어지고 거친 산야가 이어졌다. 점점 사막화되어가는 풍경 속에서 구름 위의 설산들이 경이로웠다. 해발 사천 미터가 넘는 위풍당당한 하이 아틀라스 산맥을 돌고 돌아 드디어 사하라의 속살에 닿았다.
붉은 수평선에 파란 하늘이 대조적이다. 바람이 살짝만 방향을 틀어도 이랑이 출렁이고 능선도 들썩이는 모래 바다다. 셀 수 없이 아득한, 시간의 바다가 펼쳐 있다. 작은 바위 하나가 모래알로 부서지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흘렀을까. 부서지고 깨진 연륜은 더 이상 나눠지거나 떨어질 수도 없어 오롯하다. 이제 모래는 자유롭다. 작은 바람에도 여기저기 날아갈 수 있을 만큼 가벼워졌으니.
따뜻한 배경이다. 사막은 들풀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부드럽게 감싸 안아 그림자까지 받쳐준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눈물겹다는 걸 알기에 기꺼이 알몸을 내주는 것이다. 하여 풀 한 포기도 온 힘을 다해 제자리를 지켜낸다.
보이는 것마다 둥글다. 어쩌다 만난 나무는 좀상좀상하고 모래언덕은 두루뭉술하고, 낙타 등에 올라탄 사람들도 어깨를 둥글게 말고 지나간다. 사막에서는 누구도 각을 세우지 않는다. 부서지고 부서져서 둥글어지는 걸 배웠나 보다. 가까이 있되 낱낱을 지키기 위해 몸피를 좁히는 것이겠다. 더할 나위 없이 작은 모래알들이 둥근 경정으로 읽힌다.
한 알 한 알이 살아 있다. 손 안에서 스르르 미끄러지는 게 얼마나 부드럽고 따스한지 사람 마음을 금세 무장해제 시킨다. 일종의 해방구랄까. 뒹구는 이, 뛰어오르는 이, 사진 찍는 이들로 모래벌판은 활기가 넘친다. 마치 소풍 나온 유치원생들 같다. 어른도 아이가 되어 젖은 마음을 말리고 굽은 등을 펴는 시간이다.
오르고 올라도 붉은 언덕이다. 어떤 능선도 호락호락하지 않아 언덕인 듄dune에 한 발짝 올랐다 싶으면 반 발짝 뒤로 밀리고 만다. 그만 힘을 빼라는 뜻인가 보다. 힘들수록 욕심 부리지 말고 가볍게 나아가야 하는 법, 끝이라고 생각한 곳에 또 다른 시작이 기다리고 있지 않던가. 우뚝 서서 하늘과 맞닿아 보이던 사구도 모래폭풍 한 번이면 제 모습을 놓치고 만다. 바람처럼 가장 가벼운 게 언덕을 옮긴다.
신도 때로는 캔버스가 필요하다. 당신만의 그림을 그리고픈 날이면 붓을 든다. 필치가 얼마나 섬세한지 결과 결이 살아 있고 선과 선이 매끄러워 바람의 문양까지 그려낸다. 진짜 고수는 한 가지 색으로 걸작을 만들고, 가벼운 붓질로 그만의 원근법과 농담을 완성한다. 단순하면서도 섬세한 그분의 대작 앞에 서면 말이 필요 없다. 모래알 처럼 작아진다. 가까이에서 보는 것만으로 벅차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몸 둘 바를 모르게 된다.
잠깐 사이에 주위가 시끄럽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한 무리의 새떼들이 서쪽 하늘에 빗금을 긋는가 싶더니 모래바람이 덮친다. 수직으로 일어선 바람기둥이다. 고개를 숙이고 몸을 최대한 웅크릴 수밖에. 사위가 자욱하다. 거침없는 돌풍에 얼굴이 따갑고 입안이 서걱거리니 우두망찰할 따름이다. 정신도 얼얼하다. 어떤 모래폭풍은 햇빛을 가려 지열을 내려가게 하고, 열대저기압과 구름을 만들기도 한다는데, 개중에는 멕시코 인근의 카리브해까지 날아가기도 한다는데, 사막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조금이나마 맛본 셈이다.
벌써 해가 이울고 있다. 작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앉아 일몰을 바라본다. 그림자도 섭섭한지 길게 드러눕는다. 조금 전까지 아이처럼 떠들던 이들이 조용하다. 어떤 말도 필요 없다. 텅 빈 충만인가 아니면 충만한 공허인가. 자연과 사람이 오롯이 소통하는 시간, 이 깊이 있는 시간을 만나기 위해 사하라까지 왔나 보다.
지난날의 발자국을 돌아본다. 휘적휘적 걸어온 것 같은데 벌써 생의 반환점을 지났다. 내내 목이 말랐다. 삶이란 내 안의 갈증과 싸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끊임없는 목마름과 주변의 갈증을 견디노라면 인생 자체가 사막이 아닌가 싶었다. 걷고 또 걸을 때마다 길에 버려진 아이처럼 막막했다. 난데없는 모래바람이 몰아쳤고 피로감이 끊이지 않는 노정이었다. 그래선지 사하라 사막에 오면 속울음을 토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길 잃은 아이가 집에 돌아와 울듯 그렇게 마음을 게워내고 싶었다.
의외로 차분해진다. 수많은 은유로 품어주는 붉은 바다 덕이다. 오도카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차오른다. 사막의 잠언을 들은 것도 같다. 더 철저히 고독해지고, 더 심한 갈증으로 부서져서, 끝내는 한 점 모래알처럼 자유로워지리라는. 그리하여 지금 내게 주어진 것들의 따뜻한 배경이 되라는 소리 없는 말을 전해들은 것도 같다.
푸른 박명의 시간이다. 어두울수록 빛이 드러나는 법, 수천만 개의 보석들과 눈을 맞추기 위해서는 어둠을 참아야 한다. 머잖아 하늘 가득히 별들이 차오를 테고 그 하늘을 이불 삼아 사막에 누우면 또 하나의 세상이 열리겠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강표성] 수필가. 2005년《수필문학》등단.
대전수필문학회장 역임.
* 수필집 《마음싸개》
막연하게 사막을 동경하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사막여행을 선생님은 멋지게 다녀오셔서 사유 깊은 글을 남기셨네요. 높이 올라 멀리 보면 사람의 왜소함을 절감하듯, 사막이라는 망망대해를 대면하고 서선 그저 함구무언할 수밖에요.
미국 서부 네바다 사막의 키 작은 풀포기도, 눈물겹게 꽃을 피운 사막의 가시나무도 생각나요. 위대한 자연 앞에서 우리 인간은 여린 풀포기마냥 미미한 존재임을 절감합니다. 겸손해집니다. 감사가 우러나요. 벅차올라요. 사막바람이 일순 그려내는 붉은 산과 구릉, 사막바다를 보면 절대자의 존재가 느껴져요.
삶이란 내 안의 갈증과 싸우는 일이란 말씀, 금언이네요. 끊임없이 일어나는 갈증과 목마름을 견디고 이겨내다 보면 오아시스도 만나고 좋은 일도 생기겠지요.
선생님의 글, 절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