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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1980
이 홍사
이국의 새벽에 아내의 카톡을 받았다.
안부를 묻는 말인데 갑자기 뭉클했다.
이젠 예전에 하지 않던 소리를 한다. 건강에 대해서 서로 묻는 것이다. 나이가 들었다는 얘기인가?
오늘 아침 카톡에는 절에 가더라도 울력은 하지 말라는 말을 전했다.
아내는 절에만 갔다가 오면 거실 바닥에 두 다리를 펴고 제 손으로 종아리를 주물렀다. 절에서 절을 많이 해서 그런 건 아니다.
절에 가면 울력을 하는 모양이다.
새벽밥을 먹고 가서 해가 설핏할 때까지 일하는 모양이다.
요즘 절에는 공양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절에 일할 사람이 없다. 옛날에는 재워주고 먹여주면 일을 했는데 세상이 바뀌었다. 큰 절에서는 공양주에게 사대 보험을 넣어 주고 고정 월급을 준다고 들었지만, 경제적으로 열악한 작은 암자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 공양주를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라고 했다. 요즘 암자에서는 하늘의 별을 따기를 포기하고 거의 스님이 혼자 끓여 먹는다. 비구 스님이나 비구니나 마찬가지란다.
어느 스님은 아이 젖먹이는 일 말고는 다 해야 한다고 푸념을 늘어놓는 걸 들었다. 공양주 구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어떤 절에서는 신도 중에서 신심이 깊은 여러 명이 당번제를 정해서 돌아가면서 공양주 노릇을 한다는 절도 있단다. 아내가 다니는 절은 비구니 스님이 지키는 절이니 그런 정도는 아니지만, 절에 손이 많이 딸리는 모양이다. 절에서 농사를 짓는 텃밭이 여러 개 있어서 할 일이 많은 듯 아내는 절에만 가면 불공을 제쳐두고 울력을 하는 모양이다.
아무튼, 아내는 법당에서 절을 많이 했는지, 일을 많이 했는지 다리가 아픈 모양이었다. 아내는 절에서 죽도록 밭일을 하고 와서 집에서는 부처님 앞에 절을 많이 해서 다리가 아프다고 했다. 절에 가서 일을 죽도록 했다면 내가 절에 다니는 것을 싫어하는 눈치라 먼저 초를 치는 일도 더러는 있다. 그날 내가 집에 들어왔을 때는 아내는 거실의 텔레비전 앞에 앉아 두 다리를 쭉 펴고 제 손으로 주무르고 있었다. 저녁은 먹었느냐고 묻는 아내에게 먹었다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다리는 왜?
절에서 절을 좀 심하게 했더니, 나도 늙는가 봐요.
또 절을 했다고 하는군. 일했으면, 일을 했다고 해.
그래요. 울력을 했답니다. 그런데 늙는 건 어쩔 수가 없군요.
뭐 늙는다구? 누가?
귀가 번쩍 뜨였다. 안 돼! 당신은 늙으면 안 돼. 늙는다는 아내의 얼굴에 난데없이 옛 모습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단발머리 소녀의 모습이 불현듯 눈에 훑고 지나갔다.
아내는 나보다 두 살이 적다. 워낙 어릴 때 만나서 지금까지 연애하듯이 천방지축 닥치는 대로 살아왔다. 아내를 만난 시절을 돌이켜보면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까마득하다.
아내를 만난 지가 사십 년이 훌쩍 넘었다.
세월에도 관성에 의한 가속도가 붙는다고 했으니 이젠 더 잘 가겠지.
1980.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해다. 그때만 해도 옛날이었다. 사십 년이 넘었으니 옛날이라는 건 당연한 소리. 빛바랜 기억을 떠올리면 내가 대입 재수를 하던 시절이었다.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계엄이 선포된 상황에서 우리는 만났다. 계엄은 우리의 연애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아무 상관이 없었다.
당시에 나는 중장비를 배우다 그만두었다. 대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두고 구미에서 만만한 대구로 내려갔다. 그동안 번 돈으로 재수학원에 등록하고 다녔다. 막상 공부를 다시 해보니 대학에 들어간다는 게, 시들하게 여겨졌다. 꼭 대학에 가야만 하느냐는 문제 봉착해서 심리적 갈등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공부는 안되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기였다. 집에 계신 부모님은 재수를 생각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계셨다. 중장비 일을 열심히 배우는 줄로 부모님은 알고 계셨다. 한 달 벌어서 두 달을 학원에 다니고 용돈이 떨어지면 또 한 달 벌어서 두 달을 학원에 다니곤 했다. 당시에 나는 일 년 이상 기술을 익혀서 조수치고는 일을 꽤 잘하는 편이어 손만 들면 항상 자리가 남아돌았었다. 대구에서 직접 방을 얻어 자취하는 것도 아니고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 자취방을 전전하며 기식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재수생도 아니고 중장비 조수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정체성의 혼돈기에 소녀였던 아내를 만났다. 당시에 아내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솜털이 보송보송한 소녀였다. 아내를 만난 곳은 구미의 무슨 공장이었다. 친구의 소개로 그 공장에 용돈을 벌러 갔다가 경리업무를 보는 앳된 처녀, 아내에게 눈이 갔다. 예뻤다. 마음에 들었다.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설레고 좋았다. 만나면 더 좋았고 둘이 있으면 더욱더 짜릿했다.
그곳에서 한 달을 일해서 용돈을 벌었지만, 나는 재수학원이고 대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운명은 언제나 장난이 심하다.
그런 장난이라면 신은 어린 나에게 가혹했다. 갓 스무 살이 되는 처녀에게 임신을 시킨 것이었다.
임신?
무서웠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나라는 존재가 무서웠다. 내가 처한 현실이 두려워 재수학원에 다시 다니지 못하고 중장비 조수 자리를 찾아서 멀리 잠적했다. 그리곤 소녀인 아내와 소식을 끊었다. 물론 집에도 소식을 끊었다. 당시에 나는 스물한 살이었다. 군에 가야 한다는 일이 인생의 숙제처럼 여겨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가까운 친구들 한둘만 연락하고 일체, 소식을 끊고 중장비 기술을 착실하게 배웠다.
1980
아내여!
미안했다.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 친한 친구에게 징집 영장이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거의 일 년 만에 집에 도착하니 소녀였던 아내가 고향의 우리 집 부엌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뭐가 이래?
어떻게 된 거야?
나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머릿속으로 정리를 하는 데 한참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소녀가 아기를 낳았다. 더 이상 소녀가 아니라 아기 엄마였다. 아기는 안방 아랫목에 재우고 설거지를 하던 중이었다. 그 아기 엄마를 두고 나는 군대라는 울타리가 높은 곳으로 또 도망을 갔다.
청춘에 짓밟힌 애끓는 사랑, 동정심 없어서 나는 못 살겠네.
당시에는 복무 기간이 상당히 길었다. 거의 삼 년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군에 간다고 인사를 왔다가 돌아서서 보면 제대를 했단다. 복무 기간도 짧아졌고, 남의 일이니까, 금방으로 여겨졌지만, 나의 군대 생활은 시간이 참 오지게도 질겼다.
꽃이 피고 지고, 피고 지고. 피고 지고. 또 피고 지고.
선임들이 물으면 끊임없이 피고 져야 제대를 한다고 말했던 암울한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국방부 시계는 돌아 만기 전역을 했다. 제대하고 오니 아이가 하나 더 늘어 둘이었다.
지금 돌이키니 안타깝다.
언제 세월이 이렇게 흘렀지?
그동안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사람의 향기를 풍기며 살았는가?
제대하고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에 아버지께서 더 조급해하셨다. 남의 집 귀한 규수를 미혼모라는 명예스럽지 못한 처지로 오래 둘 수가 없다고 하셨다. 돈을 벌어서 장가를 간다는 말은 우리에게는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다. 결혼식을 올리면서 대구로 살림을 났다. 처음 구한 집이 대구의 어느 시장통에 있는 이 층의 단칸방이었다. 물론 월세였는데, 일 층은 시장통 가게였다. 그 집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화장실을 가려면 걸어서 삼 분 거리의 유료화장실을 가야만 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그런 집이 세상에 존재해서 버젓이 세를 놓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새벽마다 화장실 앞에서 줄을 서는 것도 그렇고, 자다가 화장실을 가려면 옷을 주섬주섬, 다시 입어야 하는 고약한 실정이었다. 당시에 나는 굴착기 일을 따라서 객지를 떠돌았으니 그 집에 대한 기억이 그리 많지 않았다. 객지에 가서 바쁘게 일하다가 거의 한 달 만에 짬을 내어 집에 오니 아내가 없었다. 아내만 없는 게 아니라 빈방이었다.
뭐가 이래?
이 여편네가 그사이를 못 참고 바람이 나서 야반도주를 했나?
내가 뱉어놓고 생각해도 이상한 소리여서 껄껄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 층 가게에 가서 주인아주머니를 잡고 물어보니 이사를 했단다. 장롱을 샀는데 장롱이 좁은 문에 들어가지 않아서 급하게 이사를 했다는 것이다.
장롱에 크기에 맞춰, 이사를 한다?
그것도 보통 웃기는 일이 아니었다. 당시의 통신으로는 그런 일을 객지에 있는 내가 알 수가 없었다. 어디로 이사를 했느냐고 물으니 모른단다.
가장이 제 집구석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참 비정하고 비참한 현실이었다. 할 수 없이 근방에 살고 있던 당숙 어른의 집에 들렀다. 당숙 어른 집에 가니 그 부근으로 이사를 했다면서 이사를 한, 집은 모르고, 그 집의 주인댁 전화번호를 비상 연락처로 알고 있었다. 그쪽으로 전화를 해서 작은방의 아기 엄마를 바꾸어 달라고 해서 아내를 호명했다.
아내가 금세 오긴 했는데 아이를 업은 아내의 뒤를 따라서 좁은 골목으로 빨랫거리가 든 가방을 들고 들어섰는데, 왜 그렇게 서러움이 북받치든지, 하늘을 올려다보고 아내의 뒤를 따라가는 바람에 그 좁고 고불고불한 길을 익히는 데 한참이나 걸렸다.
1980
돌이키면 아득하다.
정말 울기조차 안타까운 젊은 날의 불장난이었다.
그 집으로 가는 좁고 고불고불한 길을 제대로 익히기 전에 이사를 또 했다. 이번에는 구미였다. 군대 삼 년을 기다리게 하고 제대하고는 바로 현장을 따라서 객지를 떠도니 한 달에 겨우 한두 번, 집에 들르는 실정이었다. 아내에게 미안하기도 하도 또 객지 생활에 진저리가 나서 한 곳에서 일하는, 즉 집에서 출퇴근하는 직장을 찾다 보니 구미였다. 구미에 와서도 월세로 단칸방을 얻어 시작했다.
돌이키니, 미안하다.
당신, 1980
구미에 와서 이 집으로 들어오기까지 이사를 몇 번 했나? 월세를 전전하다가 열 평짜리 주공 아파트, 거기서 또 아포읍의 촌집, 우리가 거쳐온 궤적은 구미의 지도였다. 그러는 사이, 소녀였던 아내는 할머니가 되었다. 어느 지방의 사투리로 하자면, 참말로 징하다.
40년이 넘도록 함께 살았다.
아내가 예쁘냐, 그런 물음을 던진다면 고개를 젓는다. 그럼 금술이 썩 좋으냐? 그것도 아니다. 지금은 담배 때문에 각방을 쓰고 있다. 그럼 아내가 싹싹하냐? 그것도 아니다. 싹싹하기는커녕 오히려 뻣뻣하고 퉁명스럽다.
그럼 도대체 뭘 보고 어떻게 살았냐?
그렇게 묻는다면 말문이 막히겠지만, 아내에게 인정받고 싶어 살았다고 대답할 것이다.
아내에게 인정받기는 어렵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아내에게 인정받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내나, 식구들에게 인정받는 게 성공한 인생이라면 나는 분명 실패한 인생이다. 심오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듬뿍 받았다는 아내도 제 눈 안에 든 나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어떤 사물이든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아야 아름다움을 알 수가 있다고 했거늘, 너무 가까이, 제 눈에 들어가면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아내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워낙 없이 시작했는데, 어느 정도를 채워야 아내가 인정해줄까?
물질적인 면에서 늘 그걸 생각하고 살았다.
내가 잘하고 있잖아? 열심히 살았잖아?
가끔 그렇게 물으면 한참을 생각하다가 대답한다.
그건 그래요.
그럼 뭐가 불만이야?
불만이 없는데?
그럼 표정이 왜 그래?
그렇게 표정을 따지고 물으면 대답을 못 한다.
아내는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다.
불만이다. 늘 불만이다. 아내는 만족하지 못한다. 순 악질이다. 언젠가 내 전화기에 아내의 호칭을 순 악질 여사라고 명기해 놓았다가 아내에게 걸렸다. 아내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웃지도 않았다. 예쁘고 순한 여사로 고치라고 눈을 착 내리깔고 말했다. 그렇게 하면 사람이 이름을 따라간다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고쳤는데 예쁘고 순하기는커녕, 날마다 불만이다. 가령 내가 고기를 사 들고 들어가도 남자가 그런 쪼잔한 일을 한다고 불만이고, 빈손으로 들어가면 빈손이라고 불만이다.
그럼 어쩌란 말이야?
불만투성이인 여자. 그래서 전화기에 든 아내의 이름을 고쳤다. 권 불만 여사라고. 고치고 보니 적절한 호칭인 듯싶었다.
순 악질이나 권 불만이라고 고치고 보아도 그게 그거다.
아무 감흥이 없다. 나이가 들면 감흥도 줄어든다. 그건 정말 슬픈 일이다. 나도 늙고 있구나, 그걸 느끼면서도 처량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더 슬픈 일. 나도 늙고 아내도 늙고 있다. 그건 더 슬픈 일이다. 내가 늙는 건 견딜 만하지만, 아내가 늙는 건 견디기 힘들다.
요즘 들어 아내가 가련하다고 생각이 가끔 든다. 권 불만도 가련하고 순 악질도 애처롭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빈말이지만 그 말을 가끔 한다. 설거지하는 아내 옆에 다가가서 나지막한 소리로 부른다. 아내가 돌아보면, 사랑해. 한마디를 던진다.
사랑해, 라고 말하면 그 말을 하는 사람의 가슴이 포근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가슴이 따뜻해진다. 그래서 나는 내방에 앉아 아내 방에 누워있을 아내에게 가끔 카톡으로 문자를 보낸다. 하릴없이, 뜬금없이 문자를 보낸다.
사랑해.
순전히 나를 위해서, 내 가슴이 포근해지기 위해서 문자를 보낸다.
사랑해!
가끔 아내는 문자를 보고 답을 보낸다. 고맙다거나 역시 사랑한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아내는 거실에 있고 나는 방에 있지만 말을 하지 않고 문자를 보내면 아내에게서 문자가 온다.
이 양반이 뭘 잘못 먹었나?
그 문자를 보고 또 문자를 보낸다.
사랑 안 해, 이젠 됐나?
그렇게 보내면 답이 없다.
아내는 스스로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한다.
이 어리숙한 여자야! 당신은 법 없이는 못 살아. 법의 보호를 받아야 살 수가 있어.
아내는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조폭이나 깡패다. 아내는 법이 없으면 입에 들어가던 것조차도 남에게 빼앗길 위인이 틀림없다. 아내에겐 법이 있어야 한다. 당연히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아내는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다. 없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 문득문득 들 때가 있다.
일단 없으면 불편하다.
딸이 시집을 갔다. 딸아이의 방이 비었다. 그 빈방을 보아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다음에 아들 녀석이 집을 나갔다. 취업이 되어 서울로 간 것이다. 아들 녀석의 방이 비었다. 역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후련했다. 그 이후에 아내가 절에 가는 삼사 순례를 설악산으로 갔는데 봉정암까지 갔다가 오느라고 이박삼일이 걸렸다. 아내가 없는 아내의 방문이 열려있었는데 마음이 보통 심란한 게 아니었다. 모든 게 불편했다. 아내의 빈자리가 그렇게 커 보일 줄은 미처 몰랐다.
아내와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게 아닌데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아내의 부재는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었다. 자려고 누웠는데 뭔가 허전하게 잠이 오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나갈 때와는 달랐다. 어디에 갔는지 알고 문자 메시지를 몇 번이나 주고받았지만, 빈집이라는 느낌, 혼자라는 고독, 말로 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생겼다. 집에 있더라도 한 방에 같이 자는 것도 아니지만 이상했다. 잠이 들려고 애를 쓰다가 안 되어 아내의 방으로 가서 아내가 덮던 이불을 안고 와서 그 이불에 묻은 아내의 체취를 맡으며 간신히 잠이 드는 이상한 일이 생겼다. 나에게 그런 일이 있다니, 참 이상했다.
그다음부터 아내가 어디에 간다면 겁부터 났다.
그렇게 금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정하지도 않지만, 너무 이상했다. 그날로 인해 내 인식이 바뀌었다. 아내는 곁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다. 외국에 일을 벌여놓고 외국 생활을 자주 하는 나는, 이렇게 해외에 나오면 아내가 없어도 잘 잔다. 이 땅에 와서 길게는 석 달이 넘도록 머문 적도 있는데 아내가 보고 싶기는커녕, 어쩌다 걸려 오는 전화도 국제전화 요금이 많이 나온다고 타박하며 빨리 끊으라고 종용하던 나였는데 그날 기분은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지난 사십 년이 넘도록 아내에게 그렇게 의지하고 살았던 모양인데 그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다. 사십 년이 넘도록 살았지만 나는 아내를 잘 모른다. 그건 마치 길이나 역전에서 어쩌다 마주치는 캄보디아인과 라오스 사람을 눈으로 구별하는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아내는 수선할 곳이 많은 여자다.
아내를 모르지만 그건 안다. 수선할 곳이 많은 여자, 수선은 누가 해야 하나?
아내는 마주 앉아서 조곤조곤 얘기하는 걸 싫어한다. 특히나 돈 얘기는 더욱 그러하다. 아내는 돈이 필요하면 카톡을 보낸다. 우리 집 경제권은 형편상 내가 쥐고 있다. 얼마 전에도 자려고 누웠는데 카톡을 보내왔다.
세금과 잡비 150을 통장으로 넣어 주세요.
거절할 수 없는 전언이었다. 150을 폰뱅킹으로 보내고 카톡을 보냈다.
그데의 통장으로 150 보냈음
금세 카톡이 온다. 아내는 제 방에 있고 나는 내 방에 있었지만, 대화의 창구는 카톡이었다
고맙소
금세 답장이 왔다.
별말씀을, 이런 놈하고 살아 줘서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그 말에는 답장이 없었다.
그걸로 대화는 끝이다.
그런 날이면 나는 보던 유튜브를 보고 잔다. 각자의 방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인사조차 생략된다. 한 번도 아침 인사를 한 적이 없다. 그냥 지나치기가 서먹서먹해서 내가 먼저 잘 잤느냐고 물으며 엉덩이를 툭 치는 게 고작이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도 항상 생략된 채로 내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는 게 고작이다.
아내는 항상 나보다 늦게 일어난다. 저녁에 혼자서 늦게까지 핸드폰을 가지고 혼자서 논다. 아내 방에는 켜진 핸드폰이 네 개나 된다. 뭘 하는 작당인지 모르겠다. 충전기에 꽂힌 네 개의 핸드폰은 제각기 다를 유튜브가 돌아가고 한 대는 통화용으로 쓰는 걸 보니 아내의 핸드폰은 다섯 대다 아내의 방에 어쩌다 들여다보면 무슨 작은 방송국 같다.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방송국 차렸나요?
빈정대는 투로 물으면 아내는 그 정도의 취미생활도 못 하느냐고 반박했다.
취미? 취미치고는 참 고약하구만.
아내는 돈이 드는 일이 아니라고 빈정거렸다.
살아오면서 아내의 취미는 참으로 여러 번 변했다.
아주 예전에는 동공에를 했었다. 동판을 사다가 밑그림이 있는 것을 놓고 송곳으로 그렸다. 아무리 보아도 창의성이 담긴 예술품은 아니었다. 그만두라고 했다. 차라리 물감을 사다가 그림을 그리는 게 치매 예방에 효과가 있지. 그런 소리를 듣고 동판은 바로 접었다. 내 잔소리 때문이 아니라 아내가 신물이 났던 모양이다.
그다음은 천연염색이었다.
천연염색.
그건 하는 규모로 보아 단순한 취미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덩치가 컸다.
어디서 배웠는지 타고난 기질이 있는지, 전국에서 천연염색을 하는 여편네들이 다 모였다. 아내는 어디에 가서, 강의를 나가기도 했다. 천연염색에 대해서는 고수였던 모양이다. 천연염색을 한 천으로 개인전을 두 번이나 한 아내는 고수가 분명했다. 마당에 있는 창고에는 천연염색 재료가 가득했다. 나는 이름도 다 외우지 못하는 풀들이었다. 아내의 몸에서 꽃가루 냄새가 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아내의 몸에서 꽃가루 냄새가 났다.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종일 꽃이나 풀을 달여서 염색할 물감의 재료를 만들었다. 일 층 마당에는 아예 따로 가스통을 들여놓고 대형 솥을 세 개나 걸고 매일 무엇을 삶아서 물감을 만들어 헝겊을 담갔다. 그걸 배우려고 나주에서, 양산에서, 서울에서 여편네들이 몰려들었다. 마당에 쳐 놓은 대형 빨랫줄에는 바다가 걸리는 날도 있고 하늘이 넓게 자리를 잡는 날도 있었다.
산천에서 나는 풀은 모두가 재료가 되었다.
아내가 가끔 이름을 일러 주었지만, 그 풀이름은 다 외지 못했다. 취미라고 볼 수가 없는, 그 기간은 상당히 오래 갔다. 아직도 멀리서 여편네들이 가끔 찾아오는 걸 보니 현재진행형이다. 아내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천연염색을 할 모양이다. 이젠 천연염색을 단순한 취미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지경에 다다랐다. 아내의 얼굴에는 수시로 들판의 꽃이 바뀌어 걸리곤 했다. 그 꽃이나 풀은 주기적으로 바뀌는 게 아니어서 이렇게 외국 나와 있으면 아내의 얼굴에 어떤 꽃이나 풀의 이미지를 심고 있을까 아련히 보고 싶기도 했다.
나는 지금 미얀마의 새벽에 앉아 있다.
한국보다는 두 시간 반이나 늦으니 여기는 새벽이라지만 한국은 아침이겠다.
아내와는 이렇게 떨어져 있어야 정이 난다.
우리는 항상 떨어져 있었다. 아내는 기다림에 익숙하고 기다림을 즐길 줄 아는 여자다. 군대 삼 년이 그랬고, 젊은 날 현장을 따라다니며 그러했고 사십 대에는 몽골에서 중기 사업을 펼쳐 놓아 집을 자주 비웠고 그다음에는 미얀마로 날아와 주택에 손을 댔다. 한국의 중기업은 그대로 하고 있지만 여기 일은 규모상 아르바이트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금액 투자되었다. 몽골은 수시로 오가며 아르바이트 삼아 했지만 여기는 규모상 아르바이트라고 명명하기에는 부적합했다.
지난 삼 년간 고스란히 아내와 같이 있었다.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코로나와 미얀마의 쿠데타가 오는 길을 막았다. 재산 절반을 이 땅에 두고 삼 년간 비웠다. 몸은 한국에 있었지만, 이쪽 일이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삼 년간 애만 태우다가 길이 열려 나오니 뭐가 뭔지 복잡하게 꼬여 있었다.
아내는 이쪽 일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밤늦게 도착했는데, 다음날 새벽에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아마도 카톡을 몇 번 보내다가 읽지 않자 문자를 날린 모양이었다. 별일은 없느냐고 묻는 간단한 메시지였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때는 내가 현장을 파악하기도 전이었다. 서른 채가 넘는 집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이틀은 걸릴 것인데 이렇게 급한 걸 보면 삼 년간 아내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보다 더 속을 태웠던 게 여실히 드러났다. 나는 메시지를 읽고 잠시 고민했다. 현장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는 말보다 그대가 보고 싶은 거, 외에는 별 탈이 없다는 전언을 날렸다. 이곳의 일을 낱낱이 알면 괜히 약값만 더 드는 형편이라 안심시켰다. 아내는 미얀마에 두 번을 다녀갔지만 내가 어떤 곳에서 어떤 집을 짓고 있는지 다 모른다. 지금 내가 지어서 직접 사는 집에 와서 일주일간 머물다 간 적이 있다.
아내는 방마다 사진을 찍었다.
아내는 미얀마에 있을 나를 생각하면 이 집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아내에게서 금세 문자가 다시 왔다.
부처님의 가피를 받은 모양이라며 미얀마 쿠데타에 폭탄이 여러 번 떨어졌는데 집이 부서진 곳은 없느냐고 다시 물었다.
이 여자야, 여기서 문자 메시지 한 통 받는데 삼백 원이야, 당신 보고 싶은 거 외에는 별 탈이 없어. 신경 끊어!
좀 야박하게 아내의 입을 막았다. 집에서 얼굴을 마주하면 껄끄러운 입이지만 이렇게 떨어져 있으면 아련히 그리운 아내다. 새벽에 일어나 아내와 살아온 날을 주욱 훑었다. 아내가 늙고 있다. 돌이키니 기다리게만 해서 미안했다.
아내는 평생을 나를 기다려 온 여자다.
오늘 새벽 아내와 카톡을 주고받고 아내에 대해서 좀 깊이 생각했다.
평생 기다려온 무뚝뚝한 여자. 떨어져 있어야 정이 나는 아내!
1980 당신!
미안하다.
기다리게만 해서 미안한 이국의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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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름다워요.
졸작을 읽어주샤서 감사해요 언제 짬을 내서 커피마시러 갈게요 좀 오랫동안 비웠더니 밀린 일이 바빠서 정신이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