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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7 / 먼저 하면 나중에 (마6:31-34)
‘뒤뜰에서 이루어진 천국’이라는 수필집에 보면 어느 목사님이 독일에서 목회하다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으로 이사해 왔는데 뒷집과 자기 집 담장 사이에 라일락 꽃나무로 울타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 매번 뒷집 사람이 라일락 나무 밑에다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거였습니다.
하루는 보다 못한 목사님의 아들이 뒷집으로 따지러 가려는데 어머니가 불러세우시더니 가되 싸우지는 말고 대신 라일락꽃 한 묶음을 꺾어다 주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내키지 않았지만, 어머니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웃에게 라일락 꽃다발을 건네주고 왔는데 놀랍게도 그날 이후로는 라일락 나무 밑에 더는 쓰레기가 버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경험을 소개하며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해서 우리 집 뒤뜰에서부터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어떤가요? 그 목사님에겐 천국이 뒤뜰에서 이루어졌다면 저나 여러분에게서의 천국은 어디에 있으며,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을까요?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우린 먼저 천국이 어떤 곳인지부터 알아야만 합니다.
여러분 생각엔 어떻습니까?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따라서 지옥은 당연히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럼 돌아보았을 때 우리의 심령은, 우리의 가정은, 우리의 일터나 학교는,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은 어떻습니까?
만약에 사는 게 '죽겠다, 못 살겠다, 힘들다, 괴롭다'는 등등을 느끼고 산다면 그 자체로 이미 지옥 같은 삶이 아닐는지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천국이라고 한다면 우리 삶에도 하나님만 계시면 천국 같을 텐데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곳 어디서든 ‘믿습니다.’라고만 하면 그곳에 과연 하나님이 계셔서 거기가 천국일까요?
답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습니다’라고 할 때면 그게 나 혼자만의 생각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인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아닌 말로 노름하는 자리에서 ‘오늘은 내가 돈을 다 딸 줄로 믿습니다.’라고 하면 그게 과연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믿음일까요?
그게 아니라면 과연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이며, 우리가 어찌해야 우리도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는지요?
요한 일서 4:7절로 8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린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은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제가 병원 목회를 했다 보니 돌아가시는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분 앞에서 자녀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뭔 줄 아십니까?
‘사랑한다는 말도 못 했는데.’였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부모는 물론이고 가까운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잘 못하며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향이 하나님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간 우린 믿음을 유지하려고 얼마나 애써왔습니까? 그런데도 종종 믿음이 흔들리는 경험을 한 적도 많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믿는다고 믿었는데도 믿음이 흔들릴까요?
답은 ‘믿음의 기초가 부실’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잊혔지만, 예전에 삼풍백화점이 붕괴하고 성수대교가 무너졌습니다. 최근엔 분당을 잇는 다리가 내려앉았다는 뉴스도 들려옵니다.
그 모든 재난들이 어째 그리되었을까요?
다 기초가 부실해서 그리된 것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기초가 튼튼할 때면 건물은 얼마든지 높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철근이 충분했다면 다리는 몇십 년이 가도 끄떡없습니다. 그러나 기초가 부실하면 그렇질 못하게 됩니다.
‘튼튼한 기초!’ 이는 신앙생활에도 적용되는 얘깁니다. 신앙생활도 기초가 튼튼하고 뼈대가 단단해야 시험이 오든 고난이 닥치든 견뎌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알아야 할 것이, 믿음의 기초는 무엇이며, 신앙의 뼈대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간 우리는 ‘믿습니다.’라는 고백은 많이 해 봤어도 ‘하나님 사랑합니다.’라는 표현엔 매우 낯설었습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믿는다고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부족한 믿음은 자주 흔들릴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제된 믿음이어야만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견고한 믿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그런데 이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되 ‘먼저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하세요.) “먼저 사랑하자.”
우리가 살면서 뭐든 사랑할 수 있겠지만 믿음에 있어서 만큼은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먼저냐, 나중이냐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선 본능적으로 내 마음이 향하고 있는 것이 나의 신이 되기 때문입니다.
허구한 날 돈만 생각하고 돈만 좇는 사람이라면 그가 먼저 사랑하는 것은 돈이기에 그에게서는 돈이 신이 됩니다. 이렇듯 돈이 신이 되다 보니 돈에 대한 사랑이 그 사람의 믿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세상을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이 말씀에 담긴 예수님의 의도는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우리에게서 신이 되고 믿음이 될 것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자 한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을 먼저 사랑할 것인가를 결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주일을 시간으로 환산하면 168시간이 됩니다. 그중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1시간을 빼고 나면 우리에겐 167시간이 주어집니다. 이때 내게 주어진 이 167시간을 검토해 보면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믿고 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앞서의 논리대로면 내게 주어진 167시간 중에 내가 사랑하는 것이 나의 믿음이 될 것인데 그렇게 검토해 보면 우린 각자가 가진 ‘믿습니다.’의 농도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바라기는 이후론 ‘내가 사랑하는 것이 나의 믿음이 된다!’는 이 말을 신앙 공식처럼 외워두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천국이기에 어찌 되었든 천국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복이 내게도 있기 위해 매 순간 하나님을 향한 나의 ‘먼저 사랑’을 위해 노력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전에 보면 먼저는 말은 ‘시간적으로나 순서상으로 다른 것에 앞서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너희는 먼저’라는 말씀은 매 순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맘이 세상 그 어떤 것에 대한 사랑 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먼저라는 말이 나중 것들을 다 무시해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앞서의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떠올려 보세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다음 말씀이 뭐였지요?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런데 저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생략하신 단어가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짐작해 보세요. 33절에서 생략된 단어가 뭘까요?
‘나중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나중에를 넣어서 본문을 다시 풀어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나중에’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가 됩니다.
이래야 말씀의 전체적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예전에 라면 광고 중에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던 게 있습니다.
좋은 거라서 서로 권한 것이겠지만 만약에 형님이든 아우든 누군가가 먼저 먹는다면 남은 한 사람은 어떨까요?
아마도 그는 나중에 먹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먼저’라는 말은 항상 ‘나중에’라는 말과 짝을 이루는데, 이게 믿음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매번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라는 것이 하나님이 이기적이시라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항상 우리를 위한 나중이 예비되어 있으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한국 전래 설화 중에 ‘동자와 동삼’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효성 지극한 부부가 아들 하나를 두고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노모가 중병에 걸려 돌아가시게 됐습니다. 백약이 무효하던 차에 마침 집 앞을 지나던 도사 하나가 혼잣말처럼 ‘외아들을 삶아 먹이면 노모의 병이 나을 텐데.’라고 하곤 떠나갔습니다.
이때부터 부부의 고민이 시작됩니다. 어머니를 살리자니 아들이 죽어야겠고, 아들을 살리자니 어머니가 돌아가실 거고.
결국 효성 지극한 부부는 자식이야 나중에 또 낳으면 되지 라는 생각에 먼저 어머니를 살리는 쪽을 택했습니다.
이튿날 부부는 부엌 뒤편에 큰 가마솥을 올려 물을 끓이고는 서당에서 돌아온 아들을 번쩍 들어 가마솥에 던져 넣고는 뚜껑을 눌러 덮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삶고 고운 물을 어머니께 드렸더니 아닌 게 아니라 한 모금에 기운을 차리시더니 한 사발에 벌떡 일어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의 죽음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쾌유는 기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실 앞에서 부부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느닷없이 ‘다녀왔습니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누가 왔나? 하고 내다보니 서당에서 돌아온 아들 녀석이 생글거리며 마루 위로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얼른 뛰어나가 솥뚜껑을 열어 보니 거기엔 아들이 아니라 푹 고아진 덩치 큰 인삼 한뿌리가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먼저’ 어머니를 사랑한 부부에게 하늘이 ‘나중에’ 아들도 살려 보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설화가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얘기 같지 않습니까?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아브라함의 얘기가 떠오릅니다.
아들을 죽여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이 아무려면 하나님이 잘사는 아브라함과 이삭을 시기 질투해서 아들을 모리아 산에서 죽이라고 아비에게 명했을까요?
이게 다 아브라함의 ‘먼저 사랑’을 보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좀 극단적이기는 했지만 결국 아들보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아브라함이었기에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을 보며 무어라 말씀하셨나요?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러면 당시 상황이 그렇게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사랑을 확인하신 걸로만 끝난 건가요?
잊지 마세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겐 반드시 ‘하나님의 나중에’가 있다는 것을.
창세기 22장을 계속 보면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귀, 명예, 건강, 성공, 행복 등의 세상 것들은 우리가 아무리 먼저 구하고 아무리 열심히 구해도 쉽게 내 것이 되어주지 않습니다. 내 것이 되긴커녕 오히려 내게서 떠나고 멀어질 때가 더 자주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나중에 있을 줄로 믿고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한다면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믿고 기도한다면요?
‘여호와 이레!’ 나중에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와 우리가 믿은 대로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실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게다가 보면 볼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은혜로운 장면이 창세기 22장을 보면 모리아 산에 먼저 와 있던 분은 누구였습니까?
아브라함이 도착한 후에 하나님이 오셔서 숫양을 묶어두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아브라함이 둘러보니 숫양이 수풀에 걸려 있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리아 산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보다 하나님의 복 주심이 ‘먼저’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내게 필요한 것들을 먼저 있게 하신 후에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따라서 기록상으로는 우리가 '믿은 후에, 나중에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 같지만, 순서상으로는 우린 '하나님의 복을 먼저 받고, 그리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믿음은 먼저 복 받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 보면 ‘먼저 믿음으로 시작해서 복 받는 것’인 것입니다.
적용의 예를 들자면 달력에는 한 주간이 주일로 시작해서 토요일로 끝납니다. 따라서 주일성수도 ‘하나님 먼저 사랑’의 믿음으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해야 주일 이후의 6일간에 하나님의 ‘나중의 복’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도 그렇습니다. 주일에 ‘하나님 먼저 사랑’으로 ‘일’을 드리면 하나님은 ‘나중의 복’으로 우리에게 ‘아홉’을 주시는 것입니다. 절대 내 것 10개 중에 하나를 하나님께 인심 쓰는 것인 양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소중한 아들 이삭을 먼저 드림으로 여호와 이레의 복을 받은 것처럼 우리에게는 일주일 중에 주일이 하나님께 먼저 드릴 나의 이삭이어야 하며, 소득 중 십일조가 하나님께 먼저 올리는 나의 이삭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주시는 ‘나중의 복’이 있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본문이 주는 하나의 교훈을 더 덧붙이자면 하나님께 먼저 드릴 사랑이 세상적이거나 물질적인 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3:34절에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린 서로를 향해서도 ‘먼저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역시나 이렇게 생각하세요. 인연이든 악연이든 나와 연을 맺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의 ‘먼저 사랑’을 보시기 위해 나에게 있게 하신 ‘사랑 실습 대상자’들이라고.
물론 그들 중엔 미운 사람과 원수까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원수도 우리에겐 먼저 사랑의 실습 대상이기 때문에.
그런데 아시겠지만, 원수를 사랑하는 게 잘 되나요? 안 되지요. 못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 보여드릴 나의 ‘먼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우린 생각을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이 나의 먼저 사랑을 보시려고 하나님이 나에게 있게 한 먼저 사랑의 실습 대상이구나.’라고.
이런 식으로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린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성공해야 합니다. 때문에 이제부털랑은 살면서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가끔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에 속한 것을 먼저 사랑할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너무도 자주 짝사랑으로 끝나왔음을 예전 경험을 통해 우린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각자의 나중이 창대하기를 소망한다면 우린 지금 ‘먼저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런 저와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켜 주십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원하든, 어떤 걸 구하든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 이상으로 우리에게 더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도 ‘나중에의 복’을 주실 줄로 믿으신다면, 주시기를 소망하신다면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을 향한 ‘먼저 사랑’을 준행함으로써 기필코 하나님이 주시는 ‘나중의 복’을 받아 누리며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