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aver.me/GUDoqsAV
중요시인 자세히 읽기-이재무
막간
양철지붕에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요란하던
매미 울음이 뚝, 그쳤다
얼마 후 불쑥 생각난 듯
매미들은 또, 울음통을
열어젖혀 한껏 소리의
폭우를 솓아 내리라
울음과 울음 사이
그, 막간을
고요의 물결이 들어와 채운다
출렁이는 고요
고요의 심해, 아득하다
저녁 예찬
하오, 풀잎의 그늘 속에서 예감하는 저녁은 곷송이처럼 밤을 연다.
농가에는 들에 나가 있던 가축들이 돌아오고, 항구에는 바다를 낚던
선박들이 돌아온다. 밤의 지붕 아래 상점들이 하나둘 불을 켜기 시작
하면 비로소 도시는 비 젖은 야생초처럼 활기를 띤다. 크고 작은 빌
딩에서 튀어나온 물방울들 물결 되어 흘러가는 인환의 거리. 저녁은
갓 캐온 식물처럼 푸르고 저 흥성스러운 골목 속으로 나는 야생이 되
어 컹컹, 짖으며 걷는다. 저녁은 생의 자궁. 나는 날마다 저녁에 태어
나 아침에 죽는다.
나무도마
아침 잠결에 아내의 도마 소리가 들려옵니다. 도마 소리의 일정한
가락이 귀의 골목으로 걸어와 몸의 각 기관 속으로 스며듭니다. 저
소리가 잦아들면 온갖 냄새의 향연이 열릴 것입니다. 먼 옛날 어머니
의 부엌에서 들려오던 도마 소리가 문득 그리워지는 아침입니다. 도
마 소리는 칼이 도마에 부딪쳐 내는 소리입니다. 도마가 우는 소리인
것이지요. 도마에는 무수한 칼의 자국들이 있고 거기에는 맵고 시고
짜고 쓴, 색색의 냄새들이 배어 있습니다. 도마는 먼먼 옛적부터 오
늘까지 어머니, 아내들의 몸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어머니 아내
들이 내는 신음 소리를 듣고 있는 셈입니다.
돌아간다는 말
나는 돌아가는 중
어제도 그제도 돌아가는데 열중했다
태어나서 내가 한 일은 돌아가는 일
왔으니 돌아가는 것
돌아가는 길목에 벗과 의인
강도와 도둑 그리고 천사를 만났지만
나그네는 길에서 쉴 수가 없다
돌아가서 나는 말하리라
괴롭고 슬픈 일이 있었지만
약 같은 위로와 뜻밖의 사랑과
기쁨으로 걷는 수고를 덜 수 있었노라
나는 돌아가는 중
시간의 가파른 계곡을 타고
푸른 별, 숨 탄 곳
돌아가 나는 마침내 나를 벗으리라
흘러넘치다
어릴 적 시골집에는
흘러넘치는 것들 천지였습니다.
뒤꼍에는 고요가 고여
흘러넘치고 앞마당엔 햇살이 쌓여
흘러넘치고 뜰팡 어머니가 벗어놓은
고무신엔 밤새 뒷산에서
울던 새소리 한가득 차서 흘러넘치고
마루에는 달빛이
윤슬처럼 반짝반짝 흐르고
부엌엔 한낮에도 졸졸졸
어둠의 물이 새고
우리마다에 가축들 울음이 질펀하고
시도 때도 없이
할머니 엄니 구시렁대는 잔소리가
귀에 따갑고
살구나무 감나무 밤나무
대추나무 밑 둘레엔
가지와 줄기와 이파리에서
흘러내린 그늘이 넘실거렸죠,
이렇듯 알뜰, 살뜰하게
흘러넘치던 시골집은
이제 내 마음에 들어앉아
떠올리고 호명할 때마다
그리운 것들을 내게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절실한 주관성
그리고 야생의 사유
-이재무론
오민석 시인, 문학평론가, 단국대학교 영미인문학과 교수
Ⅰ.
무릇 시가 권태와의 싸움이고 클리셰clich'e와의 지속적인 작별이라면,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서정시는 고대로부터 긴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고, 내부의 다양성을 인정할지라도, 유구한 세월 동안 변하지 않은 문법을 가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리라lyra라는 현악기에 맞추어 읊어졌던, '노래-시'라는 서정시lyric의 원래의 개념은 지금까지도(서정시의)음악성에 대한 강조와 함께 이어진다. 운율rhyme과 율격meter의 중요성은 지금도 이야기 시narrative poetry보다는 짧은 서정시에서 훨씬 더 강조된다.
에밀 슈타이거Emil Staiger는 《시학의 근본개념》에서 '서정성'을 "내부화Erinnerung, interiorization"fk 정의한다(cka고로 국내에서 슈타이거의 이 용어는 거의 '회감 回感'혹은 '회상'이라 옮겨지는데, 이 글은 이 책의 영역자들의 번역인 '내부화'가 더 정확하다고 판단하여 그것을 따른다). 슈타이거는 위 책에서 "서정적 상호침투Ineinader, interpeneration를 위하여 주체와 대상 사이의 거리가 없는 상태를 지칭하는 용어로 내부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고 밝히고, 이어서 "시에서는 현재, 과거, 심지어 미래조차도 내부화되고 기억될 수 이싸."고 말한다. 볼프캉 카이저Wolfang Kayser같은 이론가도 서정시의 본질을 "대상성의 녀면화"로 규정하였는데, 대체로 이런 동의의 과정을 거쳐 오랜 세월 동안, 서정시는 주체가 자신의 정념으로 대상을 내면화하고, 동일시하는 시들로 정의되어왔다.
모더니즘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치면서 문학에 대한 전통적인 규정들이 수많은 도전에 직면해 왔던 것을 염두에 두면, 서정시만큼 고루하고 낡은, 그러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시의 장르도 없다. 따라서 지금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이 수천 년 된 문법을 계속 따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정시는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워낙 많이 써졌고, 그래서 어찌 보면 새로움의 가능성이 가장 적은 장르이다. 그리하여 서정시에서 미래의 고갈을 느낀 많은 시인이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의 나라로 건너갔다. 그곳은 전통적 서정시의 문법을 파괴하고 새로이 건설할 시의 잠재성이 넘치는 곳이었다. 새로움이야말로 예술적 글쓰기의 기본이라 할 때, 이런 점에서 서정시를 쓰는 시인들은 가장 새롭기 힘든 공간에서 그것을 구현하겠다는 돈키호테이거나 대단한 야심의 소유자들이다.
이 글을 서정시에 관한 긴 사설로 시작하는 이유는, 바로 이재무야말로 가장 진부하고 지루한 문법이 재바하는 곳에서 시적 생존의 운명을 걸어온 뚝심의 시인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그동안 그가 낸 열 권 이상의 시집들을 모두 읽으면서 내가 계속 던졌던 질문은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그는 이 진부한 문법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으며, 어떻게 그것을 더 유구한 문법으로 강화했을까.
독감에 걸린 아들
등짝에 달고
소아과병원 가는 길
새까맣게 잊고 지냈던
그날의 새 울음소리
크게 들렸네
울타리 산수유나무 가지마다에
새끼 잃은 원한의
피울음 널어놓다가
외려 돌팔매질에 혼났던,
돌아보면 그저 유년의
사소한 놀잇감이었을 뿐인
새 울음소리
25년 멀고 먼 거리
순간으로 달려와서는
못 갚은 죄의 가슴
콕, 콕 찍어왔네
-<때까치> 전문
내부화를 통해 주체와 대상 사이의 거리를 없애는 것이 서정시의 본질이라면, 이와 같은 동일시에는 거부할 수 없는 정서적 '논리'가 있어야 한다. 그런 논리가 부족할 때, 대상을 순전히 자기감정으로 읽는 것은 존러스킨John Ruskin이 지적한 바 '감상적 오류parchetic fallacy'dp 빠질 수 있다. 감상적 오류는 실패한 서정시의 전형적인 예이며, 주체/ 대상의 동일시에 정서적 논리가 빈약할 때 생겨난다. 주체/대상의 동일시는 주관성으로 객관성을 완전히 덮는 행위이므로 많은 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서정시는 근본적으로 이런 위험 속에서 작동된다. 서정시는, 주체에 의한 대상의 전유를 압도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어떤 '절실성'을 보여주지 않으면 실패한다. 이재무 시인이 서정시의 오래된 관성을 견뎌내고, 그 안에서 승부를 거는 한 가지 방식은 바로 이 '절실함'이다. 위 시에서 독감에 걸린 '아들 : 때까치 새끼', 그리고 '화자: 어미 때까치'는 엄밀히 말해 각기 별개의 존재이다. 양자를 동일시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그러나 시인은 논리를 무시하고 때까치 '새끼 :어미'를 자기 안으로 끌어들여(내부화)'자신 : 자신의 아들'과 동일시한다. 이 동일시는, 논리상으로는 비약이고 인식론상으로는 과도하게 주관적이지만, '정서적 논리'가 받쳐줄 때 '시적 진리'가 된다. 서정시는 이렇게 '정서적 절실함'으로 객관적 논리를 뛰어넘어 시적 진리에 도달한다.
서정과현실, 2021 하반기호/ 중요시인 자세히 읽기